염소의 축제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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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시간에 걸쳐 길들여진 인간은 길이 열려도 머뭇거린다. 동물은 오래도록 자신을 돌봐준 인간을 제 아비처럼 따른다. 특히나 집단에서는, 자신의 곁에있던 동종(同種)이 그 아비라는 것에게 통해 어떤 참극을 당하더라도 그 화가 자신의 피부에 닿지 않는다면, 그 참극을 인정하기 쉽지 않다. 거기다 자신에게는 안락함이 보장되어있다고 '착각' 한다면 그것은 더 심할것이고, 설령 참극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항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지금에 머무르는 것보다 위험을 수반한다고 판단한다면 대부분은 그 현재상태에 머무르는 것을 택한다. 인류는 자신에게 어느정도의 해가 있다 하더라도, 그 해를 박멸하기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위험을 무릎써야만 하는 두려움때문에 역사상 지금껏 많은 독재와 불합리한 통치를 허용해왔다. 그것은 어쩌면, 서로의 진심을 발견하기위해 어디까지 까봐야할지 모르고, 설령 모든것을 발랑 까버린다 해도 그 속을 확단할 수 없는 불투명한 인간의 특성이 만들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정치적 독재'가 결국 개인의 어느 바닥에서 발현되는지부터, 인류의 어디까지 침몰시킬 수 있는지 <염소의 축제>는 매우 다양한 접근방식과 다층적이고, 다중적인 소설기법으로 펼쳐낸다.   

 

세개이면서 하나인 이야기의 시작 - 세 출발점에서 한 트랙으로 향하기

상처를 봉인한 붕대를 풀어내기위한 단 하루 - 소설의 시작은 우라니아가 모국 도미니카로 잠시 돌아오는 대목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그녀에게 매우 상징적이고, 중요한 일인것임을 독자는 어느정도 지각 할 수 있지만, 대체 무슨영문으로 수십년에 걸친 가족의 연락들을 무시하고 아버지를 그토록 증오할 수 있는지는 이제 막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14세에 고국을 떠났던 한 소녀가 평생을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상처는 대체 무엇인것인가. 죽어가다 시피하는 아버지를 찾아와서 그에게, 잔인한 과거를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일을 우라니아는 왜 할 수 밖에 없는지 우라니아의 고백에서, 우라니아를 바라보는 또 다른 우라니아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한다.

부지런한 바보가 가장 두려운 존재 - 바보란, 바보천치가 아니다. 악을 악인지 모르고(혹은 간과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트루히요이다. 우라니아가 떠난 도미니카. 우라니아의 현재에서 수십년을 거슬러 올라간 시간, 독재자 트루히요는 잠에서 깨어,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움직임으로 자신의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그의 움직임은 딱 필요한만큼 움직이고, 절제되어있다. 부하를 판단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가졌으며, 대중앞의 독재자들이 그렇듯 외향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의 견고해 보이는 독재체제가 서서히 무너질 조짐을 보이는 것과 동시에 그의 육신또한 그가 사랑해마다않는 근본부터 무너져 내려가고 있으며, 그는 그 두가지 모두를 애써 부정하려고 한다.

목줄을 끊어버린 신념이 발산하는 거사 - 트루히요를 중심으로 한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시간. 그날 밤. 독재자를 처단하고 기꺼이 자신들은 죽음을 무릎쓸 준비가 돼있는 세명의 도미니카인과 한명의 터키인은 시보레 비스케인 안에서 자신들의 무장을 재정비하며, 과거를 상기하며, 그 백년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풀어내는 과거는, 독재자가 회상하는 과거와 극명하게 대립되는 어둠속에 뭍혀야만 했던 일들을 드러낸다.

몇 읽어본 라틴아메리카의 소설은 읽기가 쉽지않았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한심하겠지만, 솔직히 고백할 수 밖에 없는것은.. 1권의 초중반까지 나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가지고 그 인물들의 행적을 그리느라, 머리가 과도하게 분주했기 때문이다.(어찌보면 이후에도 더러 헷갈려했을지 모른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독자가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얼마나 사시나무 떨듯 떨 수 밖에 없는지는 조금 이해해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결코 <염소의 축제>가 <백년동안의 고독>만큼 복잡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름의 복잡성으로 따지자면 새발의 피가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동일인물에 대하여 애칭을 부르거나, 줄여부르거나, 조롱섞인 별명을 뒤섞어 부를때가 종종 있기때문에 (이는 후에 다시 언급하겠다) 긴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결점을 지닌 독자라면 한번쯤, 독재자 트루히요 를 중심으로 그 계보도를 그려보는 것을 추천하겠다. 누군가는 이것을 다소 귀찮아할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충분히 그렇게라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아니, 그렇게라도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당신이 이땅에서 독재를 경험했건, 교과서로 배웠건. 그 과거들은 아직도 현재에 걸처져 있으니깐.   

-대략적 주요 인물들 구성도. 대충 그려봤던것을 정리해 봤는데, 책을 한번 완독했다면 쓸모없을 듯 하다-

이름을 따라가느라 책장을 앞으로 다시 넘겨야 했던 초중반부의 시간을 벗어나더니 서서히 책장이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지는것이 느껴졌다. 과거의 회상을 통해 군데군데서 드러났던 독재의 어두운 배경은, 그들이 트루히요의 차량을 발견하면서부터 모든것은 다시 현재로 돌아오고, 그 개조된 시보레 비스케인을 따라서 책페이지도 빠르게 달리게된다. 작가가 보여주는 모든것을 따라가는 것은 큰 기쁨이었고 희열이었다. 그 지난한 독재의 끝을 향해 달리는 시보레 비스케인 속에 나또한 탑승해 있던 것이다. 가자, 가자, 축제를 열기 위해! 

 

'독재에 관한' 이 이야기들이 갖는 입체성 - 퍼즐로 구성된 트루히요 독재의 역사

해설에서도 자세히 설명돼듯이, 후반부에 가서는 그 순서가 조금 바뀌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염소의 축제>는 세개의 시간축에서 각각 다른 인물들이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다. 우라니아가 이끄는 장은 독재가 한참전에 끝난 시점에서, 트루히요가 이끄는 장은 그의 견고한 독재가 언제까지고 계속 될 것 처럼 보이는 시점에서, (딱히 누구라고 말할 수 없지만 살아남은 자로 내세우자면) 안토니오 임베르트가 그 영광의 거사를 열게되는 그날부터의 시점. 그 거리는 존재하되 모든 시간축은 각각의 회상을 필연적으로 등장시키며, 세개의 시간축에서 현재진행형으로 가는 길의 부족한 설명들을 채워준다.    

문득문득, 상대적으로 묘사의 비중이 적은 인물들도 적잖이 등장하지만 '바르가스 요사'는 우라니아와 그의 아버지, 트루히요와 그의 첩보부대장을 비롯한 중심인물들, 안토니오 임베르트를 비롯해서 같은 자동차안에서 매복해있던 세명의 인물들에 집중한다. 물론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주인공이 있어야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런 구조는 아마도, '독재'와 '독재자' 그리고 그 독재에 '저항하는 자들'의 특성을 낱낱히 묘사하려는 그의 시도였을 것이고, 크고 다양한 사건들에 집착하는 것 보다는 중심인물들의 심리를 바닥부터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이, 수십년이 지난 도미니카 염소의 축제를 드러내는 가장 적절하고 흥미로운 방법이라 판단했을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만약 인물의 행동과 심리묘사가 긴것에 대하여 부담을 갖는 독자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는것이, 각 인물들이 묘사하는 현재는 적절한 시기에 과거의 사건들을 차용해서 연결되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거나, 이야기의 주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이런 서사적인 특성에서 한가지 더 주목할점은, 이런 인물들이 이야기를 진행해나갈때, 마치 거울에 비친 또 하나의 실체없는 존재가 말을 걸듯, 내면의 존재하는 이중적인 자아의 모습을 인칭을 바꿔가며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점이다. 이는 등장인물의 심리를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바라보며 그 이중성을 해석해주는 것보다 인물안에서의 더 큰 충돌을 부각시키며, 그들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강조했다. 한 인물을 줄여부르거나, 우스꽝스러운 별명만으로 부름으로써 그 인물의 특성과 다중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것들은, 독재자를 증오하면서도 찬양하는, 시민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상징이라도 하듯.   

 

하루를 통해 드러나는 축제의 모든 것 - 수십대의 카메라가 담아내는 축제의 준비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은 한 여성의 삶을 단 하루로 표현하는 것이 그 기원이었고,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델러웨이 부인>을 기가막히게 사용했다. 결국 추구하는 방향과, 어긋남은 분명 존재하지만, <염소의 축제>와 앞서 언급한 소설들은 비슷한 점을 갖기도 한다. '오래도록 세월의 먼지에 뒤덮힌 인간을 표현하기위해 얼마나 많은 나날의 묘사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이들은 결국, 인간의 모습은 겹겹히 쌓여지고 흩날리는 시간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단 '하루'를 통해, 낯설면서도 파급력있게 보여질 수 있다고 말하는 듯 싶다. 수많은 과거의 회상은, 지금까지의 인물을 파악하고, 하루를 통해서는 누수될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을 채워주며, '바르가스 요사'는 각 인물들에게 가장 중요한 하루에 초점을 두고 30년이 넘는 시간을 간결한 글에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그 압축을 사용자가 손실없이 풀기 위해선 어느정도의 역사적 지식이 덧붙여지면 좋을 것이다.) 독자는 그 압축된 독재의 세월을,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풀어가며 분노하기도 하고 동정하기도 한다.

35년만에 고향땅을 밟는 우라니아의 시간도, 끝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트루히요의 시간도, 영원같은 순간을 기다려야만 했던 축제의 주최자들도, 모두 하루라는 시간에 압축되어 표현된다. 물론 그들 각자의 현재의 시간속에서 수많은 과거가 드러나고 상기되며, 그 과거속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얽혀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과거의 회상은 그들의 거기에 있어야만 하는,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드러내는것과 동시에 그들각자가 나아갈 길의 지도를 독자가 그려볼 수 있게해준다. 축제가 열리기 전까지 그들이 갖는, 표면적으로 흐르는 시간은 단 하루이다. 이것들, 즉 과거와 어우러진 현재의 하루는 그들 한명 한명을 밀도있게 그려내는데 아주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인간은 천리안을 갖지 못했고, 고개를 돌리지 못하면 뒤를 보지 못한다. 세개의 시간축과 그로인해 생겨나는 다양한 각도에서의 앵글은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난다. 그들이 갖는 현재성의 하루는 결국 축제를 향하기 위해 내달리는 고속도로이고, (회상으로써든, 이어지는 시간이든) 교차점이 되어야만 했다. 다양한 인물에서 바라보는 축제는 곧, 독자에게 다층적인 이 소설의 의미를 생각하기에 충분한 형식을 갖추게 되고, 보다 균형잡힌 시각에서 냉소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개인을 벗어난 완벽함에 대한 열망이 만드는 비극 - 완벽한 독재자의 이중성과 한계 

트루히요는 자신의 해병대 시절, 교관에게서 '분명 성공할 것' 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었다. 교관의 말대로 그는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성공아닌 성공을 거머쥐었다. 자신이 갖고있는 완벽히 숙달된 철저함과 예리함, 냉정함은 그의 그런 한계적인 성공을 완성하는데 지대한 밑받침이 되었다. 한장, 한장 이어지는 그의 기계와 같은 하루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극명히 보여주는데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다.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갖는 특성은, 그 자신에게 병적으로 완벽함과 철저함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부터 그 휘하의 부하들까지 모두 군인다운 체격과 복장을 갖추길 원한다. 그리고 길가의 오물에 대하여 히스테리적인 반응까지 보인다. 이것은 곧, 누군가를 통제하려하는 자들이 외모에서부터 압박하기를 강요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선망하는 개인의 모습을 타자에게 강요하는 꼴이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속에 감쳐둔(그 자신조차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오물섞인 뜨거운 피를 뒤집어보이는데 필요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그 각잡힌 군복안에 감쳐둔 그의 본능은 어떠한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아, 경제적 재건과 일자리를 보장하고, 아이티의 약탈을 막는 것을 구실로 그는 그에 대항하거나 그런 낌새라도 있는 인물들을 잡아 처형하고, 무수한 죄없는 여성들을 범한다. 이는 바로, 그 스스로 그가 시민들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더러운 욕망을 가진 의붓아버지임을 제 스스로 상징하는 꼴이다. 태앙이 비추는 곳에서의 그는 그의 추종세력들과 눈가려진채 목줄에 걸린 시민들에게 한치의 오차도 없는 명민한 모습이지만, 그 태양이 모습을 감추고 어둠이 짙게깔리면 그의 억눌렀던 본성은 어딘가로 무분별하게 배출할 곳을 찾는다. 하수도에서 넘쳐나온 오물에 그가 그렇게도 신경이 곤두섰던 것은, 안으로 흘러야만 하는 더러움이 바깥으로 넘쳐흐르는 하수도의 모습이 제 모습과 하등 다를게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죽음을 제외하곤 모든 게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2권 20p)

세월은 그의 견고한 '독재'라는 강철벽의 틈에서 이끼가 자라는 것을 막지 못하고, 그의 육신의 내부(전립선에서 비롯되는)에서 바래지는 그의 쇄락을 막지 못한다.  또 그가 아무리 샤워를 하고 군복을 갈아입는다해도, 그는 결국 군데군데 망가진 옷걸이에 비할 바 없는 것이다. 그 어떤것에도 영원이란 없을진데, 그는 타자를 영원히 구속시키고 자신의 발 아래 두기를 원하며, 제 육신또한 영원히 제 본능적인 욕구대로 움직여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삶을 따스하게 하고, 인류를 번영시키는 시간들 또한 바람같이 지나갈 수 밖에 없을지인데 하물며 도리에 어긋나는 상징의 육신또한 영원하길 바라는 것은, 차라리 그가 악마와의 계약을 했다고 믿고있었던것은 아닐지 의심될 정도이다.  

"한 사람이 이루었고 이루고 있으며 이룰 그 어떤 것도 이루었던 상태나 이루고 있는 상태 혹은 이룰 상태로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2권 47p,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 인용)

그 자신을 감싸는 육신의 쇄락이, 그 육신이 통제하는 많은것들의 이탈과 맞닿아 있는것을 알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그 도미니카라는 국가에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결국 자신의 고장난 육신을 부정하기 위해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그런 독재를 고속으로 순식간에 끝내버렸으니 말이다.   

염소는 하느님이 그들에게 부여한 성스러운 속성, 즉 자유의지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1권 251p)   

 

 

비뚤어진 '아버지 상' 으로 바라본 트루히요 - '새로운 조국의 아버지', '자선가', '최고 지도자'

아직 부모로서의 입장은 되어보지 못했을지라도, 종종 비뚤어진 (안타까운) 부모의 상을 쉽지않게 발견한다. 어디까지가 자신들이 세상에 내놓은 한 인간에 대한 보호와 걱정이고, 어디까지가 자신들이 이루지못한 삶에 대한 대리만족인가. 그래서 어디까지 그들의 인생을 보완하고, 어디까지 그들의 통제에 따르기를 바라는가. 자식을 사랑하는 세상의 부모들은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 다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내면의 목적을 띄고, 어떻게 발현되는가에 따라 모든 부모를 존경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나이를 먹은 어른들을 모두 존경할 수 없는것에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우라니아의 아버지 아구스틴 카브랄은 딸을 사랑하는 마음과 양심의 가책, 트루히요의 자식 람피스에게서 지키려던 옛 모습을 잊고(상황이 바뀌었으니) 결국, 그것이 딸과 가족의 안녕을 지키는 일이라 스스로를 애써 포장하며 우라니아의 처녀성을 독재자에게 바친다. 이것은 한 부모가 개인으로써 갖는 '소유된 자식' 이라는 인식을 통한 비극의 극치이다. 그것은 결국 한 인간의 성장을 영원히 멈추게 했으며, 영원한 상처를 짊어질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로.  

트루히요가 생각한 '국가의 아버지 상'은 한 개인에 국한되었어야만 했던 '아버지 상'의 비뚤어짐의 최극단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파멸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에 대항하는 많은 무고한 이들과, 한 나라 국민들의 절망을 만들어냈다. 아마도 인류는 집단으로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자신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줄 지도자를 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 지도자에게 자신들을 통제할 권한을 쥐어준다. 언제부턴가, (아마도 그 처음부터) 힘을 가진 자들은, 그가 한 집단을 대표하는 것을, 한 집단을 소유하고 마음껏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모든 독재정권 아래에 있는 비극은,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은 소수의 '능력자'들을 그들의 대표자로 방관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독재정권이 만들어지는 '폭력성'과는 많은 거리가 있다. 하지만 독재자들은 그런 착각을 범하고, 실행한다. 트루히요는 그 많은 이들중에 하나일 뿐이다.  

트루히요의 가장 큰 오류와 잘못은, 자신이 모든 아버지의 아버지임을 자신한 것이다. 그것은 곧 비뚤어진 아버지 상이고, 모든것을 소유하려 든다. 그 철저하고 날카로운 하루를 만들 수 있는 독재자또한 덜어내지 못하는 성적욕망까지도 말이다. 트루히요 휘하의 많은 인물들은 트루히요를 마치 아버지처럼 받든다. 가부장적인 체제에서 도저히 도전할 수 없는 아버지에게 그들은 자신의 모든것이 담긴것들을 내어주고, 감히 거기에 대항하지 못한다. 언젠가 그 벅찬 통제가 극에 다랐을 때, 누군가는 거기에 반기를 들지만, 누군가는 그 반기를 조용히 내린다. 아구스틴 카브랄은 그런 불쌍한 영혼의 한 일면이고, 그의 딸은 개인이 짊어질 수 있는 최대의 상처를 입어야만 했다. 로만 장군은 불쌍하고 가련한 그 영혼들 중에서 가장 크게 잠식당한 인물이며, 가장 큰 해를 만든 장본인이다.   

 

처음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어보이는 것들이 있었겠지만, 읽고 듣고 조사하고 생각한 후에 너는 정부의 선전과 정보 부족으로 짓밟혔고, 교리와 고립으로 짐승처럼 되었으며, 공포와 비굴과 아부가 습관이 되어 자유의지나 심지어 호기심마저 상실한 나머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트루히요를 우상화했다는 걸 알게되었지. 그건 그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사랑 때문이었어. 아이가 권위적인 부모를 사랑하면서 채찍질과 구타가 결국은 그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거라고 믿는 것처럼 말이야. (1권 99p)   

 

 

 

타인의 통제에 길들여진 인간이 만들어 낸 안타까운 사태 

이 부분은 이 소설의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군인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대중들이 독재를 바꿀 수 없고, 불합리한 시대를 쉽게 뒤엎을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 무기가 주어지지 않아서뿐만이 아니라, 그 감히 개인이 맞설 수 없는 독재에 길들여지기 때문이기도 함을 배제할 수 없다. 많은 시민들은 다양성을 존중받지 못하고, 트루히요라는 강압적인 사공이 이끄는 방향으로 무조건 노를 저어야 했다. 자신에게 어느정도의 안정이 보장되는 시점에서 많은 시민들은 큰 불평없이 노를 젓는다. 옆집의 누군가가 알지도 못하는 죄목으로 끌려가 시체조차 찾을 수 없을지라도 나와 내 가족이 안전하다면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특별히 직접적인 손해가 자신에게 오지않고(설령 오는자는 이미 그 어떤 조치를 취할수 없을테니 무의미하겠다), 일자리를 얻을 수 있으며, 침묵하기만 한다면 어느정도의 안전은 보장된다. 그 안전만 보장된다면 독재든 아니든 세상은 살만하게 보이고, 한 권력자의 독재는 당연히 체제와 정책을 안정시켜준다. 그리고 정부의 홍보처로 전락한 언론은 곧, 그들에게 사실을 사실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굴절된 안경을 이식해주기에 이른다.  

트루히요의 죽음을 확인하고서도 로만 장군이 정권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때문만이 아니라, 어쩌면 이미 오랜시간에 걸쳐 세포하나하나까지 트루히요의 지배하에 들어가있던 로만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마치 길들여진 개가 목줄이 끊어졌음에도 도망가지 않고 있는 모습과 똑 닮아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기회가 지나갈 때 까지도 그를 지배했던 한 인물의 아우라를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아래서 터지는 폭발물을 맞듯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고 만다. 곧 그것은 트루히요를 처단함에 있어 직/간접적 관련된 인물들과 또 그들과 관계된 인물들을 헤어나올 수 없는 비극으로 몰아넣고, 도미니카라는 국가 전체의 민주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주목할점은, 결국 트루히요의 죽음을 예찬할 시민들조차 바로 뛰쳐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필연적인 이유들 가진다. 먼저 트루히요가 없음에도 군부세력을 그의 아들 람피스가 거머쥐고 있는 점, 또한 트루히요의 갑작스런 죽음에 어안이벙벙해져서 어떤 특별한 행동을 취할 수 없는 것이 그 이유다. 전자는 물론 수긍이 가거니와, 후자는 실제적으로 보자면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에서도 엿볼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어느책에서 언급하기를, 일본이 2차대전서 항복을 하고 한국을 떠남에도, 국민들은, 그 예고없던 독립과, 아직 확실하다고 판단되지 않는 불확실성 때문에 익히 알고있듯이, 독립직후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일들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 하지만 결국 이것들은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이지만, 비극은 다른곳에 있다. 아마 시민들은 로만 장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목에 채워져있던 목줄에 지독하게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그 자신이 내다을 수 있는 최대의 거리, 최대의 행동, 딱 거기까지, 시민들은 몸에 깊숙이 베어있었을 것이란 점. 결과적으론, 트루히요가 어차피 암살된 후에 이들의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은 특별히 당장 큰 문제를 야기하거나 하진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골수 트루히요 추종자들을 제외한) 시민들의 적극적이지 못한 행동들은 결국 영웅들과 그 관계자들을 더 빨리, 혹은 영원히 지켜낼 수 없는 복잡미묘한 이유들을 구성하진 않았을까?  

무엇보다 문제는, 이런 '독재정권체제'가 주는 최소한의 경제적 보장,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들이 그린 테두리 안에 자신들의 힘을 한정하며, 정부의 홍보처로 전락한 방송을 받아들이며 결국, 독재에 저항하기를 머뭇거리고, 포기했을 모습들은 그들 자신과, 가족, 친척, 친구들의 비극을 방관한 셈이며, 도미니카의 독재체제를 연장시켰다고 말하면 무리가 있을까? 굳이 독재가 아니더라도, 이런식으로 정치에 넌덜머리를 내며 지레 저항을 포기하는 일은 부패한 수많은(이제는 그 경중으로 판단하는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정치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민의 모습이라고 한다. 현시대에서 국가는 분명 존재하며 국민을 보호해야 하고, 그런 국가를 운영하는데 있어 모두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없기에 누군가를 대표로 뽑을 수 밖에 없는 그 자리를, '목소리의 대표'가 아니라 그것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지당한 사실이 되어버린 이 어처구니 없는 세태에서, 시민들은 결코 불의에 길들여저서는 안된다. 저항하지 않는 것과 길들여지는것은 아주 중대한 차이를 지닌다. 매번 뒤통수를 맞는 투표자들은, 지난한 싸움에서 결코 길들여져서는 안된다.    

그는 일종의 최면 상태에 빠져, 비록 총통이 몸은 죽었을지라도 그의 영혼이나 정신 같은 것이 계속해서 그를 지배하고 있다고 느꼈다. (2권 226p) 

 

어디에 길들여져야 하는가 

앞서 말한것과 거의 흡사하면서 약간 다른 이 질문또한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동침을 하기도했지만, 가톨릭교는 결국 트루히요의 발목을 잡는다. 시보레 비스케인에 타고있던 네명의 인물중 하나인 살바도르는 가톨릭의 충실한 신자이다. 살육을 저지르는 자를 살해해도 되는지 그는 종교로써 수많은 고민을 거듭하고, 결국은 해답을 찾아, 신념을 갖고 종교를 등에 업은채로 전진하는데, 트루히요는 소위 나신교가 갖는 부정적인 결과의 끝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이것을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어느 종교가 됐든 잘못된 극단의 길로 간다면 어떤것이든 재고되어야 한다.) 또한 트루히요라는 신의 모습을 띈 잘못된 인간을 떠받들던 이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된다.(그들중 누군가는 트루히요가 제거된 후에도 호위호식하며 살지언정) 진정 대의를 위한것인지, 자신을 위해서지만 대의라고 포장한 것인지에 따라 결과는 동일(죽음)할지라도, 그 가치가 정반대를 향하는 것이다.  

결국은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길들여져야 하는것은,(나 자신이든 종교든, 전혀 길들여지지 않든) 개인이 판단할 몫이지만, 그것은 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결과를 낳기도 함을 알고는 있어야 한다.    

 

깊이 새겨진 상처는 흉터가 된다. - 파괴된 모든 시민의 처녀성 

트루히요 휘하에 있던 나약한 인물들은, 보편적인 체격/체력조건으로 보았을때 남성보다 열세에 있는 여성이라는 존재와 다를 바 없다. 침대에서 여성을 넘어뜨리는것이,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체제의 굳건함의 상징이며, 그로인해 통제된 모든것을 소유물로 생각하지만, 결국 제 전립선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트루히요는 그가 추잡하게 실현했던 인간본성의 욕구를 해소하기위해가는 길목에서 처단되는 것은 우습고도 통렬한 묘사이다. 우라니아가 언제까지 간직할 지 모르는, 유년시절의 끔찍한 기억이 그 개인에 국한된다고만은 할 수 없다. 트루히요의 추종자들은 결국 그의 휘하에서 그의 아우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쓸때부터, 인류가 그 본성을 지배하기 위해 지금껏 발전시켜오고 감춰뒀던 악의 한 귀퉁이에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상징적인 처녀막이 상실되는 순간, 많은 군인들과 추종자들은 그들이 갖고있던, '타인의 힘을 억눌러서 자신의 힘을 찾고, 그 억눌러진 것까지 자신이 가져가버리는 것이 아닌, 타인의 힘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힘을 존중받는' 그 이치를 깨뜨리고 마는 것이다. 그들이 추앙했던 '위대한 독재자'도 결국 침대에서 한 여성을 쓰러뜨릴 수 없음에 절규해야만 하는 영혼이라는 것을 로만이 알았다면, 많은 이들의 운명은 조금, 아니 굉장히 달라졌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 자신의 자유를 자신이 통제해야 하는 단순하고 확고한 이치를 상실했던 시민들은 독재자의 가장 큰 피해자이자, 방관자였을 것이다. 

 

호들갑 떨지않기에 더욱 진한 비극 - 우라니아의 입을 빌린 작가의 고발 

2권의 해설에서도 분명 서술돼있듯이 '바르가스 요사' 는 이런 도미니카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나아가 세계어딘가에서 벌어지는 독재에 대하여 단연 부정적인 입장이다. 그럼에도 내가 느끼기에는, (대개의 위대한 소설들이 그럴테지만) 바르가스 요사의 그런 입장이 소설의 전면에서 드러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어디에서도 강요하지 않고, 소설가로써 차분히 써내려가고 있었다. 마치 우라니아가 지었을 법한 표정이 글에서 느껴졌다. 그는 전반에 걸쳐 트루히요의 악행을 좀더 드러내고, 신랄하게 파헤쳐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트루히요의 내면으로 침투한 세포처럼, 독재자부터 낱낱히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모순덩어리의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보다, 얼마나 모순적인지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더 쉬운 이치일까? 물론 그의 여성을 향한 다방면의 성적횡포나,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등을 돌린 인물들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모습, 모든 언론을 통제하는 모습은 이미 완벽한 독재자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그 묘사엔 딱히 어떤 비난적인 감정이 실려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모습에 대해 어디까지 비난의 마음을 갖을것인지, 독자에게 넘긴걸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부지런히 잘못가고 있는 최고권력자'의 모습을 독자가 조롱하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트루히요는, 개인적인 인간으로 보기엔 그 자기관리에서만큼은 완벽한 모습을 보일때도 있지만, 그 개인적인 우수함은 결국 국가를 더욱 파탄으로 몰아넣는 원동력이었고, 그런 개인의 통제력을, 한 거대한 집단에까지 통용하려 든 것이 그의 가장 큰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우라니아가 무표정으로 고백한 옛 진실이 그 사촌들을 무너뜨렷듯, 바르가스 요가의 (예상보다) 중립적이이고 과정되지 않은, 끊임없이 제시되는 근거와 묘사에서 독재의 지독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길들여졌을지 모를 자신 돌아보기 - 소설의 역할

독재자가 정적을 제거하고, 그의 가족들이 독재자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호위호식하며, 아무 노력없이 여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게 준비하는 것을 나는 너무 당연하게 읽어내려갔다. 물론 트루히요가 제거됐을 때, 그와 관련된 인물들이 자행하는 입에담지못할 고문들과 그의 주변인들이 (특히 자식들) 아무렇지 않게 여성을 강간하고 무너뜨리는 것 또한 충분히 치를떨만큼 비극적인 것임을 안다. 헌데, 마치 중립적인 입장인듯 보여지는 소설의 모습때문일까 (아니 이것은 결국 독자의 판단에 따라 나뉘겠다) 2권에 걸쳐 끊임없이 읽어야만 하고, 독재자란 인물에 대해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모습이기 때문일까. 내 예상보다 독재자에 대한 큰 분노의 감흥이 없었다. 나는 문득 스스로에게 놀라며, 허탈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많은 비극에 어느새 길들여져 있었다. 이 모든 통제를 나는 당연했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것은 얼마나 큰 비극이며, 폐단인가. 그럼에도 내가 믿는 한가지는, 이것이야 말로 독재의 본질을 더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일 것이란 것. 그것을 위해서 '요사'는 크게 강요하지 않고 그저 소설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이것들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게다가 작가는 우라니아에 대해, 독재로 상처받은 모든 영혼들에게 한줄기 빛을 남겨둔다. 비록 30여년도 더 흘렀지만, 우라니아가 제 가슴속에 꼭꼭 감춰둬야만 했던 뼈아픈 과거를 사촌들에게 낱낱이 고백하고, 대답없는 그의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녀는 이제 사촌들의 편지에 답장을 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상실의 땅에서 소생을 희망한다. 그녀는 결국 상처의 시작점에서,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독재는 진화한다. 세련되게

이 나라에는 짧은 시간동안 남부럽지 않은 독재자들을 배출했다. 애써 저 이북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사실 그쪽얘기를 하자면 너무 할말이 많을테니깐) 특히나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경제적 부흥기였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그의 업적과 폐해 중에서 어떤것을 우선으로 쳐야할지 판단할 깜냥을 아직 갖고있지 않다. 다만 '독재자'의 측면에서 본다면 많은 것들이 비판거리가 됨은 확실하다. 우선 그 시대에는 누가 대통령이 됐던 그런 경제정책을 취해야만 했을 것이며, 정상적인 연임이라는 것과 종이한장 차이일지도 모를 독재로 인해서, 그런 일관된 경제부흥정책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지금의 생활이 윤택하기때문에 그의 독재를 비판한다고 한다. 틀린말은 아니라 본다. 하지만 역으로 보면, 그런 어려운 시기에 처했던 세대들이었기에, 그의 독재도 그렇게 미화될 수 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대기업위주로 키워낸 정책들은, 지금에서야 보면 한국경제에 이바지하는것으로 보이지만, 그 대기업이 크기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혹독한 조건에서 일을하고, 얼마나 많은 중소기업들이 지금도 휘청거리고 있는가. 전 세대들은 그 시대를 이렇게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을, '배은망덕'이라 표현할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어딘가에서 그런 전 세대들보다 더 혹독한 여건에서, 오로지 경제부흥을 위해 희생되어야만 했던 개인을 제쳐두고 있지는 않은가.  

차이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트루히요와 박정희가 무엇이 닮았는지 가늠할 기준을 갖춰야 한다. 트루히요를 진심으로 찬양했던 수많은 도미니카 시민들 또한 그의 경제정책만을 바라보고, 30년이 지났음에도 그때가 살기는 더 좋았다 라고 말하지 않는가? 트루히요의, 박정희의 독재가 아니었더라도 우수한 지도자가 경제를 이끌었을수도 있었음을 무슨 근거로 부정할 수 있는가? 

위의 주장들은 분명 오류가 존재할 것이다. 사실 나는 아직 저것들을 판단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대기업위주의 경제정책을 박정희 이후에도 많은 대통령들이 크게 바꿔놓지 못했고,(아니 오히려 굳건하고), 그들이 경제부흥의 적임자가 아니었었음을 주장할 어느 근거도 갖고있진 않다. 그럼에도 이렇게 주장할 수 밖에 없는것은, 어떤 경제부흥이든 뭐가됐든 그것은 독재를 바탕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우리는 먹고살만하면 모든것이 충족되는 것인가? 인간은 그런 존재인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지금 이 <염소의 축제>를 읽고 독재자와 독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야만 하는가. 밥을 굶기지 않되, 선택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는 부모를 둔 자식들은 행복한가? 경제적 부흥을 찬양한다면, 거기까지만 해야한다. 그것이 독재를 아주 조금이라도 포함해서는 안된다. 그렇게되면, 언제라도 또 다른 독재자가 어디에서 탄생해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과거의 일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해'라고 우라니아는 생각한다. '여기에는 그 당시의 것들이 아직도 공중에 떠다니고 있어.' (2권 366p)

그 경제, 경제, 경제 만을 강조해서, 지금 우리가 어느 세상속에 살고있는지 뼈저리게 실감하고있지않는가?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터넷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독재가 아니라고. 개인에게 총기가 허락되며, 그 위에서 더 많은 무기로 무장한 군인들의 말과 행동이 곧 법이되는 나라에서처럼 통제받아야 그것이 독재라고 느낄것인가? 자유를 쫓는 시민들의 모습이 웹을 통해서 진화했 듯, 권력자들의 독재도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한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으며, 그것을 체감하고 있지않은가? 언론의 방송이 사전심의를 받기도 하고, 정책이 정책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닌, 혈세로 만들어진 광고로 시민들을 설득하고, 웹공간에서조차 그 누군가를 비난할때 그 표현의 수위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야 하는것이 과연 독재체제 아래있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덮어놓고 앞뒤없는 비난은 예외로 하자) 어떻게 더 그럴듯한 연극을 연출할지 고민하는 트루히요의 모습을 우리는 먼곳에서 찾지 않아도 된다.  

화염병과 최류탄으로 점철된 시대에 서지는 못했더라도, 나는 이 시대의 저항방식을 통해 잠시나마 세상을 바꾸려는 물결에 참여했었다. 그리고 좌절했다. 그 많은 이들이 한목소리를 내도, 누구 한사람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올려놓은 돌덩어리를 흔드는것은 결국 제 머리위로 숱한 돌조각을 받아내는 것임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그 물결에 동의할지라도 결국 그자리에 설 수 없었던, 밥 벌어먹고 살기위해 바빴던 많은 이들처럼 나또한 내 밥그릇찾아 자연스레 뒤돌아 가는 것을 보며, 나는 나에게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개인을 벗어난 집단생활이 지속되는 언제까지고, 유형/무형의 독재자는 인류사에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어떤 책임과 동시에 권리를 쥐어주는 것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들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지켜봐야한다. 그것이, 과거에도 미래에도 존재했고 존재할 염소들에게 해야만 하는 우리의 숙제인지도 모른다. 

"기다리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지...(중략)" (1권 142p)

자신의 목에 걸린, 아름다운 무늬로 세련되게 치장된 독재의 목줄을 그저 바라보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직무유기다.    

 



조선 건국 이래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 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 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고 패가망신했습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지고 있어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저질러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던 우리 600년의역사.

저희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저희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눈치 보며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 감옥 간 우리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그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

이제 비로소 우리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2002년 故 노무현 대통령 대선 출정식 연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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