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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0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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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했던 헐리우드판 <렛미인>. 영화는 분명 아름다웠다. 개인이 가진 최후의 공간에 서로를 엮어놓는 오스카르와 엘라의 모습은 시리도록 아릅답고, 때로는 잔혹하기도 했다. 영화내내 많이 등장하는 하얀 눈은 공간, 계절적 배경이 되는것과 동시에 여주인공 엘리의 모습과도 대비됐다. 그리고 어쩌면, 내내 떠날 수 없는 피의 붉음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색이기도 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그리고 중심적으로 엘리와 오스카르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마 그럴수 밖에 없었을 것. 엘리와 오스카르에 초점을 맞춘다 해도 2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은 시간이었을테니깐.) 원작을 읽지 않았더라도, 눈치빠른 관객이라면 알수도 있을테지만 렛미인의 주변인들은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조연으로서가 아니라 또 하나의 주인공들로 볼 수도 있을만큼. 영화속에서 호칸의 모습을 보며, 감독이 택해야만 했던 이야기, 그 바깥에 있는 이야기들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것이 바로, 영화를 보고나서도 소설을 펼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 부득이하게 스포일러성 이야기들을 다량 포함하고 있습니다. - 
 
렛미인은 80년대 스웨덴 스톡홀름의 교외지역 블라케베리에 사는 이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마치 일상적인 소설로 보여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뱀파이어가 등장한다. 수많은 시간을 외롭게 견뎌내온, 피에.. 아니 그 흐르는 생명의 따스함에 굶주렸던 한 뱀파이어가.
 
오스카르. 이혼으로 인해 편모 아래서 살고있는 그는 몇몇 급우들에게 심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아이들은 그런 그를 도와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외면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우둔하지 않다. 필요에 따라 도둑질까지 할 정도의 대범함이 있으며,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허공에, 나무에 힘껏 칼을 휘두를 만큼의 증오심은 가지고 있다. 다만 그는 아직까지 껍질속에 자신을 밀어넣고 있는 달팽이기에, 그들에게 당할 수 밖에 없다.
 
호칸. '비뚤어졌다' 라고밖에 할 수 없는 성적취향을 가진 그는 엘리에게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는 이로 인정받기 위해 살아있는 이에게서 피를 훔쳐온다. 시작점부터 다르지만, 갈수록 극명하게 그 노선이 갈리는 이 두 남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자별로 진행되는 서사는, 후반부에서는 그 시간대로 나눠지기도 하며 독자에게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들을 중심축으로 이야기바퀴는 돌아간다. 하지만 아이들로 인해서 다소 치우칠 수 있는 이야기를, 작가는 그들을 둘러싼, 혹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인물들을 통해서 함께 보여준다. 맞물린 톱니는 더 멀리까지 큰 힘을 내어주게 되는 것. 방법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했고 실제로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경력도 있음에도 실상 그 마음이 뿌리까지 차갑다고는 할 수 없었던 호칸으로 부터, 부랑자이지만 사랑하는 이를 포기할 수 없었던 라케, 그리고 많은 인물들이 이 '렛미인' 이라는 한마디를 통해서 돌아가는 하나의 톱니들이다.
 
영화에서 보여졌던 만큼, 그런 사랑의 감성만을 따라가는 (뱀파이어를 차용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초반에 확인할 수 있었다. 렛미인은 굉장한 스릴러적 요소를 가지면서 고차원적인 사랑의 이야기와 상대적 선과 악에 대한 고민을 뱀파이어를 끌어다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절대 간과해서는 안될것이 라케와 비르기니아 다. 이들은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내는 사람들이다. 거의 수입은 없다시피하며 선술집에서 만나 다른 친구들과 왁자지껄하게 술과 농을 즐기는게 유일한 낛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 
   

 
- 인간의 고통과 어쩔 수 없음, 실망으로 이어져온 수천 년 세월이 잠깐이나마 라케의 노구에서 출구를 찾아 계속 쏟아져 나오는데, (2권 266p) -
 
다만 너무 늦게, 혹은 (역설적이게도) 엘리를 통해 알게된, 사랑에 대한 깊은 가르침으로 인해 비극아닌 비극을 맞게되는 이들이다. 
 
 
- 구름기둥이 날 도울 거야. 그런 새끼한테는 눈물이 쏙 빠지게 귀싸대기를 날리는게 약이야. (2권 105p) -
 
물론, 톰미. 톰미 또한 아버지가 안계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오스카르와 같이 편모아래서 자라고 있고, 오스카르보다는 더 실제적으로 어긋난 생활을 하고있다. 톰미는 오스카르와 엘리, 라케와 비르기니아와는 다르게 좀 더 그 사회적인 배경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 어린아이들을 결국 그런 상황으로내몬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그들의 위엄과 기득권을 강요하고, 또 가르치려 한다. 그들은 어느정도는 아이들에게 존경받을 수 없는 요소요소들을 갖추었음에도, 그것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훈계하려 든다. (실제로 여기서 어머니의 모습들은 그래도 대게 온화하고 따스하게 그려진다. 아버지의 위치에 놓여있는 그들의 행동들은 작가의 의도를 잘 담았는지 대부분 한심하고 허섭스럽게 그려진다) 이렇게 렛미인은 인간의 안과 밖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를 적당한 거리를 갖고선 함께 끌어나가고, 종국엔 그것들을 한데 묶어버려버린다. 그 경계선을 구분할 수 없을만큼 교묘히.
 

어쩌면 그런데로 평범한 아이였을지 모를 오스카르는 불안전한 가정사와, 괴롭히는 급우들로 인해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요소들로 인해 꾹꾹 눌러담아진 분노와 증오. 적절히 나갈곳을 찾지 못하고 압축되어오기만 했던 그것들이 오스카르의 손에 칼자루를 쥐어준다. 바로 여기, 이곳에서 독자들은 그런 오스카르의 감춰진 모습을 바라보는것이 아니라, 스스로 칼자루를 쥐고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렇게 치밀하고 교묘하게 오스카르를 그려넣는다. 더불어서 불가피하게 살아움직이는 피를 강제적으로 뺏어올 수 밖에 없는 호칸의 모습과 교차적으로 이어진다. 치밀하게 짜여진 이 둘의 교차점들과 작가의 트릭을 보면서, 어쩌면 이 둘의 공통점을 이렇게 시사하는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다만 살짝 틀어진 각도와 더 깊은 곳에서 드러나지 못했던 차이들이 이들의 결과를 완전히 대립시키지만 말이다. 
 




무언가를 빈틈없이 채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일인지 상징이나 하는 듯한 큐브를 갖고 오스카르와 엘리는 만나게 된다. 그 만남으로 인해 오스카르는, 자신들을 괴롭히는 급우들에게 날을 세울 줄 아는 용기를 갖게되고, 엘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신에게 피를 대어주는 혹은 그것을 조달해주는 수단 이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초반에서부터 오스카르의 혼란스러운 자아에 들어갔고, 상식적인 서사를 살짝씩 벗어나는 진행에 영화에서의 차가운것 이상으로 따뜻한 눈의 모습을 잊게 된다. 이즈음 알게된 듯 싶다. 그렇게 감성적으로 흘러가기만 하는 소설이 아니란것을.
 
함께 할 친구가 있다면 천국같은 따스한 곳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지옥같은 외로움이 존재하기도 하는 곳. 놀이터에서 에스카르와 엘리는 서로를 처음만나게 된다. 에스카르는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고, 때마침 열심히 칼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엘리는 씻지않은 것 같은 냄세를 풍기고, 머리는 몇일 감지않은 것처럼 기름져있다. (엘리의 경우가 에스카르와 같다고 할 순 없지만) 그들은 서로가 가진 단점, 혹은 이상한 점들에 갖고 서로를 비난하거나 멀리하지 않는다. 냄세가 나는 것을 좋은 향기라고 생각하는것 까진 할 수 없지만, 거기서 으레 사람들이 갖는 오만가지 편견과 멸시 등이 없었다. 서로에 대한 어떠한 색안경도 끼지 않고, 상대의 단점이든 이상한점이든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마음. 그로인해 그들은 친구가 되게되고, 그것들이 오스카르와 엘리를 놀이터에게 계속해서 만나게 하고,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모스부호를 사용해 의사소통 할만큼 창의적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하지만 결국, 방법과 욕심이 비뚤어졌다해도 자신의 쾌락앞에서 동정심과 이성을 끄집어 낼 수 있었던 그 내면까지 악하다고 할 순 없었던 호칸은 엘리를 위해, 사랑받기 위해 할 수 밖에 없었던 살인을 그만두고 싶어하고, 결국 엘리는 지나가던 취객을 제 먹이로 삼게된다. 그리고 그 희생자와 아주 절친한 친구였던 라케의 비극또한 시작된다. 호칸이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마지막이 될 것이고 아마 돌아오기 쉽지 않을거라고 예상했던 그의 마지막 계획은 결국 제 얼굴에 염산을 뿌려가며 끝날 것처럼 보여지지만, 그것은 잔혹하고 거대한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했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영화에서의 호칸의 설정은 다르지만, 어쨌든 엘리를 위해서 피를 구하는것은 같은데.. 그의 배경이 설명되지 않은 채, 경찰에게 잡히기 전 자신때문에 엘리의 신변에 위협이 가해질까봐 제 얼굴에 염산을 부을정도의 맘을 가진 그를, 엘리는 너무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점. 그것때문에 사실 나는 엘리와 오스카르의 이야기에 남들만큼의 큰 감흥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원작에서는 완벽히 설명된다고 할 순 없었지만, 왜 엘리가 호칸을 그렇게 대할 수 밖에 없었는지 잘 묘사되어 있다.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사실 어느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엘리는 옷을 사고 다시 집을 얻을 수 있는 돈을 주었다.  

그는 엘리가 '악'인지 '선'인지, 혹은 다른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했다. 

 엘리는 아름다웠고, 엘리는 그에게 자존감을 되찾아 주었다. 그리고 극히 드물게나마......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1권 331p) -
 
호칸은 가정이 있었다. 그의 성적 성향은 왜곡되어있었지만, 어쨌든 그도 남들만큼의 삶을 살아가고 있던중에 그것을 잃고, 그 상실의 부분에 엘리가 먼저 손을 내민다. 아마 엘리도 호칸의 그런 성향을 알았다면 다른 이를 끌어들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누구나 자기 생각만 한다. 나의 행복, 나의 미래란 말만 할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삶을 다른사람의 발 밑에 내려놓는 것이지만,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인간들은 불능이다. (1권 p39) -
 
이것을 최소한으로 지킬 수 있었던 호칸은 결국 선을 넘기고 마는 비극을 만들어 낸다. 뱀파이어의 피가 섞이고, 죽음을 뛰어넘고 이성을 상실하기전까진 그래도 그에겐 절제가 있었고, 선택받지 못하는 비극에 대해 무릎을 꿇을지언정 무단침입하지는 않을 만큼의 이성과 배려가 있었다. 하지만 언데드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된 후 그 이성은 그 육체속 깊은 곳으로 빨려들어가 절대 빠져나올 수 없게 되어버린다. (어쨌든 인정받기 쉽진 않겠지만) 엘리에 대한 사랑과 오스카르에 대한 질투, 그로인한 집착으로 인해 왜곡된 그의 마음은 종국엔 그를 괴물로 만들어 버리고 엘리를 강제로 범하려 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잔혹한 씁쓸함과 쓸쓸함을 갖게 한다.
 
- 사람들은 개나 소나 다 친구라면서, 그 말을 아무 데나 갖다붙였다, 그에겐 한명만이,
단 한 명의 친구가 있었지만, 그마저 어이없게도 피도 눈물도 없는 강도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다. (1권 276p) -
 
죽마고우였던 요케를 잃은 라케는 비르기니아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된다. 가진것이라고는 물려받은 고가의 우표인 라케는 자신을 사랑하는 비르기니아에게 심한말을 하게된 후 정말로 자신이 그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녀와 함께 행복한 삶을 꾸려가려 하지만, 비르기니아는 이미 예전의 그녀가 아니게 된다. 마침내 비르기니아를 자신이 가진 개인적 최후의 공간에 들여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그는 한 생을 구원하려고 돌진하고 있었다. 바로 그의 생을 (1권 338p) - 
하지만 결국 그녀를 잃게 된 라케는 그녀를 그렇게 만든 엘리에게 복수를 하기위해 달려든다..
 
호칸과 라케는 오스카르와 대조되고, 비르기니아는 엘리와 대조된다. 어쩌면 호칸과 비르기니아는 우리가 선망하는 오스카르와 엘리의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는 동시에, 그렇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대표하기도 한듯 보여졌다. 
   

호칸은 앞서 말했듯이 그래도 진정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최소한의 사랑과 집착의 경계를 정할 줄 알고있었다. 아니 어쩌면 시간이 그 부족한 사랑을 채워주길 바랬다. 하지만 오스카르의 등장으로 인해 그 희망은 무너져갔고, 결국 그녀를 위해 최후까지 헌신했지만 그의 심장은 육신과 따로 떨어지게 되고,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욕망과 집착은 엘리를 막다른 벽으로 몰아넣는다.
  
- 호칸이 문간에 우두커니 서 있다는 사실이 한가지는 암시해주는 듯 했다. 그가 초대를 받아야 들어올 수 있다는 것 (2권 221p) -
 
하지만 그것은 엘리의 착각이었다. 이미 이성따윈 상실한 호칸은 결국 그녀에게 '들어가도 될까' 라고 물어보지 않은 채 엘리의 공간을 침범한다. 하지만 오스카르는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순수함을 갖고선 엘리의 공간에 들어가고, 엘리를 선택하고, 엘리에게 선택받는다. 오스카르와 호칸의 마음에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쨌든 호칸은 엘리에게 선택받지 못한 존재였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호칸이 선택받지 못한 이유는 사랑의 크기가 아닌, 그가 갖지 못했던 오스카르 같은 순수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성인이 된 호칸에게는 찾을 수 없는 순수한 욕망.
 
 
- 라케는 목이 메도록 케이크를 먹으면서 인간의 상대적 선과 상대적 악에 대해 생각했다. (2권 200p) -
 
너무 늦게 비르기니아에게 '들어와' 라고 말했던 라케의 비극은, 사실 엘리로 인한 것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아무리 엘리와 오스카르의 사랑을 순수로 포장한다고 해도 불변하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엘리와 오스카르의 순수함과 동시에 라케와 같이 '상대적 선과 상대적 악' 을 생각하게끔 만든다. 어쨌든, 다만 비르기니아는 엘리가 뱀파이어가 됐을때와는 다르게 성인이었고, 그가 선택한 라케에게도 선택받았다. 그 사랑은 그녀가 라케와 함께 살아가고싶은 욕심과 더불어, 역으로, 라케를 위해서라도 그렇게는 절대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결심을 심어주며 자신을 태울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런 결심을 하는 부분, 자살아닌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부분에서 정말로 울컥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어떤 오스카르와 엘리의 사랑보다 더 심장을 쥐어짜듯 아파왔다. 살아가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강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들과 동일하게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을 갑작스레 짊어지게 되고, 그렇게 라케와 사는것은 결국 라케를 파멸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므로써, 스스로의 삶을 끊게끔 만든다. 그녀는 엘리가 살아야만 했던 이유, 그저 자신에게 펼쳐질 '無'에 대한 두려움 보다 더 큰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는 행복' 을 갖게 됨으로써 마침내 고통스럽고, 미치도록 싫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아주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삶을 끊을 수 있던 것이다.   
- "비르기니아! 비르기니아! 자기야, 사랑하는......" (1권 342p) - 
그녀는 결국 라케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었고, 라케를 자신의 마음속에 들일 수 있었기에...
 
 
-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계속그 생각이 맴돌았다. 난 존재하지 않아. 난 존재하지 않아 (2권 p95) -
 
- 그 몇 초 동안 오스카르는 엘리의 눈을 통해 보았다. 그가 본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근사하고, 더 잘생겼고, 더 힘이 센, 그리고, 사랑을 하고있는. (2권 302p) -  
 
물론 주인공은 오스카르와 엘리이다. 분노를 쌓아놀 수 밖에 없었던 오스카르는 아빌라 선생의 말처럼 달팽이 껍질에 숨어있다가, 엘리를 만남으로 인해 용기를 내서 자신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서 좀 더 눈을 치켜뜨고 바라볼 수 있게된다.
 
 
- "나 들어가도 되니?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줘." /
이젠 엘리가 무서웠고 보고싶지도 않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1권 347) -
 
 엘리는 오스카르에게 들어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야만 온전하게 그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 1권에서도 언급됐듯이, 남을 마음에 들이는 것은 아픔이 따른다. 아마 몇백년을 살았던 엘리는 그것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었거나, 그동안 갖지 못했던 그것을 동경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작 몇십년, 십몇년을 산 이들은 그것들을 잘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혹은 많이, 아주 많이 아프고 나면 이해한다. 남의 마음에 들어가기 전에 상대에게 동의를 구하고 그것이 설령 자신의 행복과는 어긋나는 결과일지라도 인정해야 하는 것.  

 
- 나는 떠나야만 살 수 있고, 머무르면 죽으리. 너의 엘리가 (1권 291p) -
 
보통때와 비교하면 보기드물게, 난 이들의 뒷 이야기에 대해서 상상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아마 엘리는 숨을 끊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누군가의 진심속에 들어갈 수 있었고, 진심으로 누군가를 들일 수 있게 된 엘리는 이제 그 지난한 자신의 생을 마감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마치 비르기니아 처럼 말이다. 

 



이 소설은 그것들을 위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어진다. 타인과의 거리. 자신의 사랑과 타인의 사랑. 그것이 만나는 지점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일. 내가 향하는 마음을 허락 받는 일, 그것이 설령 no 라도 인정하게되는 일. 그리고 그 누군가를 들이는 사람은 아플지도, 정말 아픈 일 일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것은 아픔과 동시에 최고의 행복이 되니깐.
 
그러니깐.. 나는 렛미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따름이다. 순수함과 성숙함을 동시에 지닌 아이들도, 어른들도 관통하는 이야기. 누군가의 마음속에 들어가고, 누군가의 마음을 들이는 것은.. 그래. 쉬운게 아니다. 자칫했다간 피같은 눈물을 쏟을 수 있다. 엘리처럼. 그래도 인류의 역사를 따라서 끊임없이 행해지는 것. 행해질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단순한 이 한마디. 'Let me in' 으로 아주 심플하게 표현되고 있는게 아닐까.  

  


 
사람을 가슴에 품으면 상처를 입게 되는 법.
비르기니아가 관계를 길게 이어가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을 가슴에 품지 마. 그들이 들어오면 상처받을 일도 많아져.
너 자신외에 너를 위로해줄 사람은 없어. 너 자신만의 문제라면 고통스러워도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거야.
희망을 품지 않는 한 괜찮을 거야.그러나 라케와 함께하면서 그녀는 희망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들 사이에 무언가가 서서히 싹틀 거라고, 그래서 마침내는. 언젠가는. 무엇이? (1권 338p) 
   
그럼에도 우리는 언젠가 말할 것이다. '들어와' 라고. 그것이 개인이 가진 불완전한 행복을 채워주는 유일한 길 일테니깐.
이것은, 사랑을 넘어 우정까지 관통하는, 관계와 소통에 관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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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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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생각이 났다. 부실하고 무관심한 기억이 마치 작년이었는지, 재작년 이었는지, 정확히 언제인지도 이미 아득한 옛 이야기처럼 까마득하게 여겨지게끔 해준다. 다시한번 그때를 생각해보며 시간을 되짚어보니 그때는 2008년 여름이었다. 집에도 아무얘기도 하지 않았고, 같이갔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도 모르게 행해졌던 일. 2008년 여름, 시청광장을 비롯한 광화문 거리는 2002년 월드컵을 연상시킬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정부의 쇠고기협상과 대운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위해 몰려들었다. 외신기자도 놀랄정도로 그 물결은 거대하게 타올랐다. 사실 나는 절대 그런곳에 참여할 성격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에 (고작)두어번 참여한적이 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용기와 의지가 나를 행동하게 했다. 하지만 사실상 나는 그때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힘을보태는 것과는 약간 미묘하게 다른 이유로 나섰던 것 같다. 분명 그때의 쇠고기협상과 대운하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반하는 의사를 갖고 있었지만, 나를 정말로 움직이게 했던것은, 내가 분명 옳다고 생각하는 혁명이 가져올 변화된 세상에 대하여 무임승차 하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그때에 나는 그 촛불집회가 분명한 승리를 거두리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허나 별 시덥잖은 일상을 핑계삼았는지 나의 참여또한 오래가지 못했고, 집회또한 가능성은 보여줬지만 실질적으로 원하는 성과를 이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에겐 고작 이정도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신체적 상처를 가져다준 이 사건이 나를 비롯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가고 있을까. [빵과 장미]는 실제로 내가 그때 느꼈던 감정들과 그때에 내가 느꼈을, 행복에 대한 방법적인 고민또한 다시한번 되짚어 보게 했다. 

20세기초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의 거대 방직공장들에서 일어났던 실화를 다루는 [빵과 장미]는 실제로 그 파업을 일으킨 주체인 어른들이 아니라 그 테두리안에서 어쩌면 그 어른들보다 더 깊은 현실적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 -로사와 제이크-를 통한 시선으로 보여진다. 활활 타오르는 행복이라는 불꽃을 거뭐지기 위해서 뜨거운 열기속에 기꺼이 뛰어들 준비가 되있던 어른들의 입장이 아니라, 그 어른들에게 드리워질지 모르는 죽음과 그로인해 자신들이 실제 피부로 느껴야했던 배고픔과 추위를 걱정해야 했던 순수한 아이들의 시선을 통한 이야기 인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마치, 고리끼의 ‘어머니’ 같은 역동적이고 치열한 혁명의 모습보다는 좀 더 차분한 시각을 보여준다.  

선생님에게서 파업은 결국 법을 어기는 폭동이라고 배우는 로사는 자신의 엄마를 비롯한 수많은 어른들의 열성적인 행동을 보며 인간답게 살 권리를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것인가 라기보단,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서 어떤행동이 더 옳은가로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자식을 학대하는 아버지를 피해서 쓰레기 더미에서 잠을 자기도하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제 꾀를 십분 발휘하기도 하고 때로는 소소한 범죄를 저지르기도하는 제이크 또한 파업의 열정적인 현장에 고무되기도 하지만, 결국 제 자신이 눈앞에 맞닥뜨린 추위와 배고픔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분명 성장의 시기에서의 이런 고민은 어른보다 좀더 혼란스럽겠지만, 실제 우리사회의 현실에서는 이것들이 비단 아이들만이 갖는 고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현실문제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어떻게 해결하는 것을 옳다고 믿는지에 따라 혁명과 집회의 주체자인 어른들또한 이 책에서의 아이들과 어른들의 모습처럼 나눠진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갖는 신념과 믿음의 혼란은 훌쩍 자란 어른들에게도 풀리지 않는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가치관의 차이들이, (실제로 어떤 문제에 대한 찬반으로 인해 참여여부가 갈리는 것이 아닌) 파업이나 집회에 참여여부를 갈라놓는 것 아닐까. 그러니깐 연대의 성공여부는 실제적으로 반대의사를 가진 사람들을 설득하는일 뿐만아니라, 의견에 공감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눈앞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설득하는일에 달려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방법적 가치의 혼란은, 마치 미국 토박이와, 이탈리아계, 기타 등등 국가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뒤죽박죽이 되기도 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촛불집회에 장기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눈앞에 맞닥뜨린 내 자신의 현실의 문제들 때문이었는지, 옅어져 가는 희망때문이었는지, 무참히 짓밟히는 시민들을 보고 느낀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그저 게을렀던 것인지 예나 지금이나 확신이 없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참여했던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친구들 둘과 시청앞에서 촛불을 켜고 거리를 행진했다. 소심한 성격에도 친구들과 함께 사람들이 열창하는 노래와 구호들을 크게 외쳤다. 누가 시작한지도 모르게 들려오면, 큰소리로 따라했다. 행진은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아주 천천히 천천히 진행되었고, 우리들이 그 페이스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군중들이 갖고있는 제각각의 두려움들이 그들의 걸음을 붙들었는진 모르겠지만, 경찰의 저지선에 다다랐을때 나와 친구들은 거의 맨 앞줄에서 그것들을 맞닥뜨렸다. 모두가 연대해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지만 적잖은 두려움은 내내 나를 두드려댔다. 그러다 물대포를 연상케하는 무언가가 그 저지선 높은곳에서 우리를 향했고, 나는 더이상 앞에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나 혼자 뒤로 빠질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친구들을 잡아다가 함께 뒤로 가려했다. 물대포를 뒤집어쓸 각오로 무장한 사람들은 그것을 피할 것들을 머리위로 이고서 앞으로 향했다. 허나 그것은 맥빠지는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일이었겠다. 그것은 후에 검거를 용이하게 하고, 국가의 녹을 받을 사람에게는 족쇄가 될지도 모를 채증용 카메라였다. 그후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진 모르겠지만, 집에는 가야할 것 아니냐는 친구의 의견에 의해 우리는 어느틈엔가 군중속에서 살짝씩 벗어나고 있었다. 겉으로는 마치 몇날 몇일을 세울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그런 이야기를 해주길 바랬었을 것이다. 분명히. 나는 그만큼의 의지도 열정도, 용기도 없었을테니깐.

파업과 집회, 즉 작던 크던간에 혁명을 위한 참여에 대하여 어른에게는 그것들이 책임이 따르는 선택일지 모를지언정, 이 순진한(그럼에도 현실적일수 밖에 없는) 아이들에게는 행복을 위해 결사항전 하는 것이 진정 어떤 의미이고, 어떤것이 옳은지 판단하는 것이 쉽지않은 성장의 과정이다. 그렇게 이책은 사회현상에 대해서 어떤 가치를 갖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그에따라 어떻게 행동할것인가의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삶을,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일들을 고민하는 것은 어쩌면 어른이 되기위한 과정중에 굉장히 중요한 점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환기시켜 주고있다. (물론 어른이 되기전 확고한 신념을 세웠다 하더라도 후에 끊임없이 그것을 흔드는 바람이 불어올테지만 말이다.) 

허나, [빵과 장미]는 행복을 위한 가치추구에 대해서 아이들이 보는 시선과 혼란, 순수성, 성장과정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들을 통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요소에 대하여 먹는 것을 넘어선 질문을 던진다. 그 부분은 아이들이 버몬트로 향하게 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그리고 그동안 대비되었던 로사와 제이크의 삶에 대한 차이를, 둘을 한집에 붙여놓음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나마 돌아갈 따뜻한 가족이 있는 로사가 던지는 질문들과, 그렇지 못한 제이크가 던지는 질문들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자신은 배불리 먹으면서도, 가족들을 생각하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로사와, 아버지가 죽은게 제 탓으로 여겨질까봐, 뉴욕으로 도망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제이크의 상황또한 분명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확실한 공통점은, 결국 모든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공간은 가정이라는 곳이라는 것. 이로써 타인이 가진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면은, 조금 덜 가진자든, 조금 더 가진자든 저마다 비슷한 깊은 고민이 있다는 것 또한 보여진다. 

그리고 마지막 메세지는, 버몬트를 떠나면 정말 어디에도 제 자신이 마음놓고 쉴 수 없는 상황의 제이크를 통해 이뤄진다.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돌을 살려내려고 작정한 듯 거기에 꽃을 새기며 살아가는 제르바티와 이제는 자신의 모든 가족이 사라지고, 어린나이에도 너무나 치열한 문제와 싸워야만 했던 제이크가 진심으로 서로를 채워주는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결국 연대는, 결국 공장주들에 대항하여 승리한다. 오로지 빵만을 위해, 그저 동물적 생존본능에 의해서만 이뤄진 파업이 아니라, 더 나은 인간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파업이 결국 승리한 것이다. 

이것이 승리한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사람이다. 사람때문이다. 파업에 현장에서 로사의 엄마와 연대했던 이들을, 그들이 파업을 계속할 수 있게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을, 제르바티의 상처입은 가슴에, 제이크의 얼어붙은 가슴에 장미꽃을 새겨준 이를 가리켜, 우리가 그것을‘사람’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을 거뭐지기위해 하나가 아닌 둘 이상(연대)이 필요하다면, 이 [빵과 장미]에서의 제르바티와 제이크가 불신의 벽을 허무는 모습은 연대의 기초가 믿음과 진정성을 바탕으로 시작해야 함을 말하고, 로사를 통해 보여지는 그 행복을 이루기 위한 방법적 고민과 혼란을 통한 내적성장은 연대를 이루는 개인구성원이 거쳐야할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와 고민들을 통해 차근차근 쌓아올려진 구성원간의 빈틈없는 연대가 행복을 향해 앞으로 전진할때야말로, 돌같은 희망위에 장미를 새겨넣을 수 있다는 것을 로렌스 지방의 모든 이들이 온몸으로 증명했다.

[빵과 장미]가 보여주는 이 강한 연대와 그로인해 이들이 얻을 수 있었던 행복이야말로, 2008년 여름 서울의 한복판에서, 촛불을 들었던 이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것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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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에 안녕을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7
우타노 쇼고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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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문학만을 가끔 보던 人, 장르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보통의 일반 순수문학(사실 이것을 규정하는 일도 나에겐 쉽지 않은데, 대략적으로.. 장르적 특성에 치중하지 않고, 이야기의 재미보다는 상대적으로 문체성을 살리고 사람에 대한 심도있는 관심을 갖는 소설이라고 정의하자) 을 읽노라면, 거의 빠지지 않는것이 바로 '문체' 이야기 이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어떻게든 재미가 있어야 읽혀지게 마련인데, 문체를 따지다보면 설령 이야기 자체가 대중적인 흡입력을 갖지 않는다고 해도, 그 언어적 우월성으로 인해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사실 '문체'를 걸고 넘어지기엔 좀 무리가 있다. 중요한건 문체가 우월해야 재밌거나, 재미없거나 하는 것이 아닌 글을 읽을 때 그 언어의 구조를 하나하나 헤쳐나가면서 볼것인지, 이야기 그 자체의 감흥과 메시지에 집중하며 볼것인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체'란것을 따지려면 실은, 그 '문체'를 분석하고, 판단/비교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할테고, 그 작가의 책을 거의 대부분 섭렵 한다던가, 상충되는 '문체'를 지닌 작가들을 비교할 줄 알아야 할텐데.. 그게 분명 아는척 끄적이는 것만큼 쉬운일은 아닐것이다. 나만해도 이렇게 '문체'를 이야기 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잘은 모른다.

문체에 대한 사전 검색결과이다.

"필자의 사상이나 개성이 글의 어구 등에 표현된 전체적인 특색 또는 글의 체제. "

왜 나도 잘 파악하지 못하는 '문체'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 했냐면, 지금까지는 접했던 소설들이 대부분 이런 '문체'에서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이런것들이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판단을 하는 것으로 안다. 그다지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의 독서를 해온것만은 아니지만, 본의아니게 나의 독서는 그런 사고방식도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참, 오래간만에 박하샴푸로 머리를 감은 듯 싸한 느낌을 주는 책 한권을 만났다. 그게 바로 '해피엔드에 안녕을' 이다.
 
요전에 장르소설을 몇개 읽은적이 있다. 배틀로얄, 나는 전설이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호러단편을 엮은 책..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이것들도 아마 다 소싯적에 봤던 책들이 대부분이다. 지금도 뭐 딱히 다르다고 하긴 그렇지만,
아무생각없이 책을 읽던 시절이었다.(물론 그만큼 많이 읽었단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것들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꿔놨다
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몇권 안되는 장르소설이라서 그런지 그 느낌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제는 그나마 그때보다는 조금 더 나은 독서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어차피 오십보 백보겠지만)
그래서 나는 이번기회에 '장르문학'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가며 읽게 됐다.
 
 
'해피엔드에 안녕을' 주제적 접근방식
지금까지 읽은 일반적인 책들을 보면, 보통은 사람의 생에 대해서, 내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해준 책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때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다. '진실' 이란 것과 '소통' 그리고 '사람의 본성' 크게는 이 세가지 일 것이다.
 
진실? 소통?
아무리 왈가왈부 한다고 해도 역시 이 책의 묘미는 허를 찌르는 반전이 제일이긴 하다. 뒤통수 맞는 기분의 반전부터,
등골 서늘하게 하는 반전, 미스테리한 반전까지 각양 각색의 색을 지닌 반전의 향연이다. 하지만 모든 단편들에 이것을 주제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을지라도, 대부분은 '진실'이라는 모토를 기본적으로 내포하고 있어보였다.
 
우리는 보통 남들에게 주워듣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면 뉴스등을 통해서 사회의 사건사고 들을 접한다. 하지만 거기에 얼마만큼의 진실이 담겨있을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괜히 뒷얘기 상상하면 '음모론자' 취급받기 딱좋다') '해피엔드에 안녕을' 우리가 보는 것들중에 과연 얼마만큼의 진실들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해주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3인칭 시점의 이야기들이 다소 많은것을 본다면, 실제로 우리가 보는 그런 '제약적인 시각'이 진실을 가로막는 가장 큰 벽이 아닌가 싶다. 또한 진실은 힘을 가진자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할 뿐 아닌가?
 
반전자체가 또 하나의 진실이기떄문에 어쩌면 이런 반전을 지닌 소설은 필연적으로 '진실'의 이야기 밖에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꾸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피엔드에 안녕을' 은 적지않은 이야기들이 사회적인 현상과 맞물린다. 얘기를 자꾸 산으로 돌리니 결론만 말하자면, 사회적인 이야기에는 그것들을 '자신의 시각'만으로 바라봄으로 인해 생기는 진실의 왜곡과 오해, 개인적인 이야기에는 소통의 부재가 낳는 오해와 그로인해 드러나는 인간내면의 어두운 일면을 트릭과 이야기의 재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책, 그렇게 딱딱하지 않다. 개인사와 사회현상을 교모하게 넘어들기 때문에 어떤 부담도 갖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저그런 반전,트릭,추리소설로 보기에는, 이 '해피엔드에 안녕을'에 실린 단편들은 한편한편 확고한 주제의식을 갖고 있다.
 
 
언니 - 첫 작품이니, 이 반전이라는 뿅망치가 얼마나 단단한지 알게해주는 작품이다. 사소한 오해와, 불신이 얼마만큼의 위력을 지니는지, 그것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해서 걷잡을 수 없게 되면....

벚꽃 지다. - 그렇게 살면서 강조하는 열정, 열정.. 현실은 모두가  이상을 쫓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결과에 대한 것은 솔직히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봤던 듯한 이야기 였는데, 그것을 포장하고, 풀어나가는 솜씨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은 결국 파편의 조잡한 덩어리 라는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천국의 형에게 - 짧지만 강렬하다. 미묘한 말 하나로도 우리는 많은 진실을 숨기기도, 드러낼 수도 있었다.
 
지워진 15번 - 감정의 파급효과는 어디까지일까 .그리고 15번은 대체 어디에...
 
죽은 자의 얼굴 - 고전적인, 하지만 더욱 교묘한 이야기. 가장 등골이 오싹했다.
 
방역 - 이웃나라도 비슷한 사정인걸까.. 자식을 소유물로, 자신의 분신으로 보는 위험한 시각.. 이또한 등골이 오싹했다.
 
강 위를 흐르는 것 - 이또한 사회현상과 닿아있다. 오싹함보다는, 현상에 대한 생각과, 치밀함을 돌이켜보게 했다.
 
살인휴가 - 어쩌면.. 이란 예측이 다소 비슷하게 맞아떨어진 이야기. 물론 거의 모든 트릭이 밝혀진 결말 바로 근처에서.
 
영원한 약속 - 어디까지가 어디까지인걸까 라는 모호한 질문을 던지게 됐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약간 갸우뚱 거리는 부분이 다소 있기도 했다.
 
In the lap of the mother - 교육열이든 그 반대든.. 극을 달리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부모의 자질이란 대체 이렇게나 힘든걸까.
 
존엄과 죽음 - 제목과 아주 적절히 맞아 떨어진다. 반전또한 일품이다.
 
 

'해피엔드에 안녕을' 방법적 접근방식 : 반전을 맞추려고, 복선을 찾아 헤매지 말 것
장르문학을 많이 접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여기서 제안하는 방법적인 접근 방식이 좀 주제넘을 수도 있겠지만, 나름의 내가 분석해본 것으론 이렇게 읽는편이 더 좋을 것 같다. 트릭이나 추리소설, 반전등에 익숙하여 그것들을 (불가피하게라도) 능수능란하게 찾아낼 줄 아는 이들이 아니라면, 굳이 애써 트릭을 찾아서 그것을 풀려하지 않는게 더 좋다고 본다. 나같은 경우에는 전반부의 몇편을 보면서 뒤통수를 몇대 얻어맞다 보니, 후반부에는 반전을 맞춰보고 거기에 만족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복선이 되는 부분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결과는 90%는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맞추기 위한 소설이 아닐것이다. 그 반전에 대한 '뒷통수'를 제대로 맞아주기 위한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들을 통해서 얼마만큼 뒷통수를 세게 맞았느냐에 따라서 그 이야기의 주제에 대해서 더 심도있는 관찰과 고민을 하게됐다. 반전을 통해, 사실주의적으로 드러나는 현실보다 몇배 더 강한 충격을 더해주는 것이다. 누군가가 얼마나 착한지, 나쁜지, 혹은 이상한지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대책없이 드러나야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방법을 제안하는 것이다.
'어설프게 반전을 맞추려고 머리를 싸매지말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놀래라. 이것은 그러기 위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주제에 대한 비판적이고 현실적인 접근방식이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치밀한 방법들이 우수하기때문에, '문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제쳐두고서도 '스릴있고 즐거우면서도 좋은 책 읽었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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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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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는 말되, 조금 느긋하게 다가가보자.
 판매량과 시간이 알려주듯 1Q84는 독자에게 가속도를 내게끔 하는 흡입력을 가진 소설이다. 뒤늦게 접하게 되었지만, 다소 두꺼운 페이지가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물론 곳곳에 커브가 있기에 속도가 줄 때도 있었지만, 그 분량에 비한다면 분명 고속도로를 달렸다는 것은 확실하다. 허나 지금까지 직선도로를 달려왔다면 이제는 종점에 다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운동이 사고없이 멈추기 위해서는 속력을 줄여야 한다. 그것을 위해 3권에는 방지턱이 존재한다. 다만 그 방지턱은 그대로 통과한다고 하여도 사고가 날 일은 없다. 3권은 독자가 쏜살같이 직선으로 끝으로 가는것을 살짝 주춤하게끔 상징적인 속도제한표지판같은 방지턱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끝만보고 달려가기에 1Q84의 세계에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1,2권을 통해서 독자는 나름 1Q84에 대해서 인식했다. 그럼에도, 시간은 객관적이지만 개인에게 주관적인 것임을 상징이나 하듯, 1Q84에 대한 본격적인 인식은 아오마메와 덴고가 그 때를 달리하며, 만남을 위한 부산한 움직임또한 그 각각의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은 전편들보다 표면적으로 다소 둔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분명 좀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움직이며, 그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성찰이 깊이를 더해간다.


현실을 인지한다.
 덴고와 아오마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고 있었다. 다만 제각기 공백같은 결핍을 안고있기 때문인지 생에 총체적인 열정이 느껴지지 않았다(그것은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의도치 않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서, 달이 두개 떠있는 현실에 대해서 인지하게 된다. (혹은 몽롱하게 알고 있던것이, 표면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에게 존재했던 공백을 발견하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앞으로 향한다. 물론 우시카와 또한 세계가 현실적이지 않음을 인지한다. 하지만 그것에는 덴고&아오마메와는 다소 차이를 갖는다. 이 이상한 현실을 넘은곳에 더 나은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곳으로 넘어갈만한 필연적인 의지가 있는지 하는 것이다. 언뜻 잊은 듯 보이면서도 덴고와 아오마메는 서로를 기억하며(혹은 1984에서는 잠시 잊고 있던), 20년전의 따뜻한 온기를 다시 느끼고 싶어하지만 우시카와는 애석하게도 그럴만한 기억이 채 없다.


‘어떻게’ 현실을 인지하는가?
덴고와 아오마메는 각자의 방식과 명칭으로 1984년을 받아들인다. 거절도 환영도 아니다. 인정하지만, 더 나은곳으로 가기위해서 그들은 각자의 손을 서로에게 뻗는다. 즉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들이 맞닥뜨린 1Q84라는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다. 하지만 우시카와는 다르다. 그는 일단 현실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서 행동한다. 그에겐 더 나은곳에 대한 기대도, 노력도 없다. 현실을 인정하는것과 동시에 그 자체에 만족함으로써 더 나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 멈춰지는 것이다. 우시카와는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다면, 감히 더 맛있는 맛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라고나 할까.
더불어서, 하루키는 리시버와 퍼시버의 개념을 대입한다. ‘선구’내에서 목소리를 듣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증인회’라는 종교에 속한 사람들, 그 외에 언급되지 않는 종교, 혹은 아무도 믿지 않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또한 목소리의 존재를 인정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듣는지 마는지에 따라서 삶의 무대와 행동이 결정된다. 이것은, 모티브가 됐다는 일본의 옴진리교 사건과 더불어 현실에 대한 개개인의 ‘받아들이는’ 방식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비록 덴고와 아오마메는 그들 각자 나름의 무미건조한 삶을 살았어도, 돌아가고 싶은 ‘그때’가 있었고 앞으로 그것을 다시 재현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그런 의지는 아오마메에게 리더라는 이가, 덴고에게는 후카에리라는 인물들이 그들을 스쳐지나가고, 이들을 통해 그들은 목소리를 자신의 방식으로 듣고, 해석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그 리더와 후카에리라는 존재는 마치 신과 같은 예언을 늘어놓는다) 그렇듯 우리 모두는 각자의 도터 - 즉 퍼시버(누구에게는 사람, 누구에게는 문학,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돈, 그리고 그 어떤 무엇이든 간에)를 통해서 리시버가 된다. 교단 ‘선구’의 비극은 어쩌면 그 도터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부터 일그러졌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목소리가 들리느냐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는 뗄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종교적인것, 종교적이지 않은것에 대해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현실을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마루가 언급했던 카를 융의 말을 빌리자면 ‘차가워도, 차갑지 않아도 신은 그곳에 있다’ 라는 말처럼 신의 존재는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한결같이 어디서도 볼 수 없지만, 어디에도 존재한다. 다만 인간이 그것에 대해 무언가의 형태를 띄게끔 만들었기 때문에 그 신은 우리가 상상하는 어느 형태를 띄어 버리고 어딘가 특정한곳에 한정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그 본래의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리틀피플은 선인지 악인지(혹은 신인지) 구분할 수 없지만 확실히 그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냄에 대해 좋지 않은 분노의 방법을 표출한다. 그리고 교단 ‘선구’가 도터와 리더를 통해 그 목소리를 듣는 방법또한 우리가 상식적으로 ‘선’이라고 생각하는 범주에서 벗어난다. 이것들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목적과 방법이 ‘선’을 거스른다면, 그 신이라는 실체또한 충분히 일그러진 모습을 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목소리냐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떤 의도로, 제대로된 방식으로 받아들이느냐도 간과할 수 없거나 혹은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후카에리의 아버지가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는지 정확한 설명은 나와있지 않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일반적으로 ‘도덕’이라고 하는 선을 넘었고, 환영받지 못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1Q84의 본론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것은 곧 이야기를 여는 질문이 된다.

삶에는 많은 현상이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감각기관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뇌로(혹은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선구에서 보여지는 이 목소리, 그리고 리시버와 퍼시버의 관계는 한 인간이라는 우주에서 펼쳐지는 감각, 현실반응과 다름이 없다고 나는 확신을 굳혔다. 신을 그리고 사람(자신과 타인을 모두 포괄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하느냐에 따라 삶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오마메 자신또한 신을 향해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올리며 자신의 왕국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은 다름아닌 듣는 자신 목소리의 형태을 띄고 우리에게 들려올지 모른다. 그리고 곧 그것은 그 자기자신 스스로가 신이, 또는 목소리가 되기도 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현실에서 달이 한 개라고 본다면, 분명 달이 두 개인 1Q84의 세계는 분명 불가능한 세계이다. 하지만 불가능의 세계에서 덴고와 아오마메의 만남은 가능했다. 그리고 그외에도 여러 가지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했다. 1Q84에서는, 1984라는 세계에서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그 불가능의 세계는 간절한 자들이 만든 세계일지도 모른다. 마치 덴고와 아오마메가 직선처럼 보이는 시간의 틈에 곡선인지 굴곡인지 모를 1Q84라는 시간을 끼워넣어 그들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현실에 대응한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앞으로 뻗어가기 위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 내부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서로를 갈구한다. 물론 우시카와 또한 제 나름의 질문을 던진다. 단지 자신에게. 하지만 그 질문이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질문인지, 이 현실의 문제를 타계하고, 그 문제만을 위한 질문을 던지는지의 차이로 인해 이들의 운명이 엇갈리게 된다고 본다. 아오마메는 리더를 제거하기에 앞서 1Q84의 중요한 단서들을 리더에게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덴고를 위해 20년동안 만날수도 없었던 덴고를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려는 상황까지 이르게 하지만, 결국은 아오마메는 스스로 판단한다. 물론 거기에는 당연 덴고의 목소리가 닿았기 때문이다. 덴고 또한 아오마메와 함께할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을 공기 번데기에 쌓인 열살의 아오마메를 향해 상징적으로 확인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시카와는 설령 자신이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더 나은세계로 나갈만한 동력이 되지 못했을 터이다. 우시카와는 분명 다마루의 말대로 심부름꾼으로 쓰기에 아까운 존재이지만,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의 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서 저마다의 해답을 찾은 이들이다.

물론 행동력으로 따진다면 어쩌면 덴고는 우시카와보다 뒤쳐질지도 모른다. 특히나 덴고는 아오마메와 비교하자면 스스로가 그렇게 느낄만큼 그녀에게 빚졌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마치 그녀의 팔은 그를 향해 손을 쭉 뻗었지만, 그는 팔꿈치를 접고서 손을 내민것 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그저 ‘인간은 자신의 재량에 맞는 몫을 하면된다. 게으름피지 않으면서’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저 그것뿐일까? 덴고는 ‘수학’에 능통했다. 허나 인생에는 ‘수학’이라는 학문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수학 그 자체는 아니다. 답이 하나로 떨어지질 않는다. 각자의 답을 떠안고 살아가는 세계다. 더욱이 달이 두 개 떠있는 세상이라니, 답이 나올 리가 없다. 아오마메의 말처럼, 논리적이지 않은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긴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즉, 세계는 논리적이지 않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논리적인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긴밀하게 섞이고 연관되어 있다. 직접적인 성관계가 없음에도 수태라고 부를만한것을 할 수 있는 1Q84에만 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도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않는가. 이것이 덴고와 아오마메가 어떻게 1Q84를 나올 수 있었는지 설명된다. 그들은 끊임없이 존재에 대해, 세계에 대해 Q(Question)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의 해답을 내리고, 거기에 따라 행동했다. 다만 ‘수학’적이지 않은 현상으로 인해 덴고가 조금 천천히 걸었을 뿐이다. 상관없다. 아무리 불편한 사다리라도 아오마메의 의지가 그를 이끌었으니. 그리고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필연적으로, 아오마메와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그는 더이상 수학강의를 하지 못하고 결국은 자신 존재에 대한 흔적과 집필중인 소설만을 가지고 떠나게 되니깐 말이다.


하지만 모든것에는 저마다의 대가또한 필요하다.
덴고의 집에도, 아오마메와 우시카와가 잠시 머무는 집에도 NHK 수금원이 문을 두드린다. 그렇다. 어느 삶에도 대가가 필요하다. 다만, 공정한몫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 비록 평균적인 몫이 계산될지라도, 그렇지 않을때가 만연하다. 나는, 덴고가 없는 덴고의 집에, 전에 살던 집주인의 명패를 걸어놓은 아오마메와 우시카와의 집에 수금원이 문을 두드리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 그동안 얼마나 불행한 인생을 살아왔는지, 어떤형태를 띄는지는 중요치 않다. 1Q84에도 실체로서의 시간은 동등하게 흐르지만, 그것이 얼마만큼을 의미하는지는 제각각이다. 덴고와 아오마메처럼 누군가와, 혹은 혼자서 충만한 시간을 보낸자와 그렇지 않은자가 느끼는 시간성에 대한 대가는 분명 실체적으로는 동등한 시간임에도 다르게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개개인의 시간에 대한 개념에 차이가 생기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열심히 살아가는가 아닌가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그것이 선을 향해 가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열심의 결과와 대가는 하늘과 땅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우시카와 자체가 그것을 증명한다. 물론 그 누구도 그 문을 열길 원치 않으며, 그 대가의 출처또한 불분명하다. 어쩌면 그 대가를 말하는 수금원에 덴고와 아오마메가 침식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둘이 그들 서로의 대가를 짊어질정도로 강한 힘을 형성하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대가란 것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시간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해를 넘기지 않아야한다는 시간성이 그들을 재촉했던 것일까? 그들이 알던 모르던 말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 수금원에게 문을 열지는 않았어도 아오마메와 덴고는 스스로 그 문을 열고 나갔지만 우시카와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때를 기다렸지만, 때는 그가 살아 숨쉬는 순간에 오지 않았다. 결국 ‘선구’에 의해서 그는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시카와를 배제할 수 없다.
으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속에서 악은 배제되어야 할 존재이다. 다만, 우시카와를 악으로만 치부하기엔 다소 망설여진다.(물론 그가 나름의 목표를 달성했다면 이야기는 다소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왜냐하면 그도 확실히 달이 두 개인 세상속에서 살고 있던 존재이자, 고독의 심연속에서 낑낑대며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군상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환경은 우월했으나, 다만 거기까지였다. 그 환경은 그의 기이한 모습을 더욱 웅크러지게 만들었다. 그런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는 스스로(그 자신이 가능한 곳까지) 자신을 숨기고, 외로움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그의 모습은 더 서글퍼 보였다. 그는 오로지 자신만을 믿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이었다. 어쩌면 우시카와는 단지 마치 자신이 잘 할수 있는 일을, 어떤 대가라는 것을 받아내기위해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던 덴고의 아버지, 즉 NHK 수금원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보여진다. 다만 그렇다고 그 잘하는 것이 반드시 환영받는 것은 아닐뿐더러, 또한 거기에는 고민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 선인지 악인지보다, 문제를 어떤식으로 해결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오로지 자신의 인내와 감을 믿고서 말이다. 희망이 없는 삶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다른세계로 건너갈 수도 없다. 혹은 나아간다해도 온전하지 못하다. 어쩌면 우시카와의 기이한 외형은 그것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곧 살아있음에도 죽은자와 다름없이 타인과의 이타적인 ‘사랑’에 대해서 무감각해 있던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자신의 뒤를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느꼈다시피 결정적인 것을 놓치고, 자신의 뒤에서 숨죽여오는 다마루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덴고와 아오마메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리고 우시카와의 올가미가 결국 그들을 한데 묶어 버렸으니 우시카와라는 존재는 어쩌면 그들에게 장애물이 아닌 점프대였을지도 모르는 법이고 말이다. 하여간 그에게 유일하게 차별하지 않았을, 자신이 키우던 개를 죽음 앞의 주마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한번 우시카와를 보며 서글퍼진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우시카와와 같은 이들이 존재할 테니깐..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답을 만들고 그것이 간절한 바램을 거쳐 ‘현실’을 만들어간다.
 누군가 믿을만한 이가 답을 내어준다. 그것은 세계의 정답일 수 있다. 그들은 정말로 그런 것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다. 작가(하루키)는 후카에리도, 리더도 될 수 있다. 아니, 개인적으로 보자면 난 ‘리더’쪽에 가깝다고 본다. 리더는 세계에 대해서, 진실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것은 논리적이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대체로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엔 비논리적이겠다.) 강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리더의 모습을 띈 하루키라고 설명하자면, 그는 도터(문학)라는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목소리’를 전해준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리더는 아오마메는 살아남을 수 없고, 대신 덴고는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정확히는 3권의 결과적으로) 그들은 둘다 살아남았다. 내가 내리는 답은 나의 대답이다. 왜냐하면 내가 던진 질문의 답이 당신의 답이 될리 만무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용’ 이다. 그러니 우리가 누군가의 답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과도한 게으름과 안일함이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그 질문을 통해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갈 것을 상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시카와처럼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그 현실에서 끝이 나고 만다. 부인과 딸과 함께살지 못하고, 죽음앞에서 자신이 키우던 멍청한 개를 떠올려야만 하는 지독히 쓴 현실말이다.

덴고와 아오마메가 건너온 1984는 어쩌면 또 하나의 1Q84는 아닐까. 질문은 어느세계에서나 계속 되어야 한다. 물론 달은 한 개다. 덴고와 아오마메도 상징적인 하나이다. 하지만 태양이 두 개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름의 1984이지만, 곧 그것은 또하나의 1Q84라고 부르는것도 가능하리란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도, 또 그 이후에도. 그 내용과 농도는 다를지언정 질문이 멈춰서는 안될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들이 1Q84에 대해서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1984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질문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현실도피와는 다르다. 내가 딛고 있는곳이 땅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왜’ 땅인지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간에 Q(Question)를 넣어야만 한다. 그리고 아오마메처럼, 덴고처럼, 혹은 우시카와처럼 각자의 해답(다마루의 말처럼, '그것이 존재한다면')을 통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삶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답장(혹 그것이 존재한다면) 으로 페이지를 휙 넘기려는 태도가 아니라, 질문하는 것이다. 질문해서 얻은 자신의 해답이야 말로 세계를 향해 더욱 뻗어나가게 해주는 것이다. 사실상 질문하는 것 자체가 1Q84처럼, 세계에서 이탈된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의심과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지금에 머물러야 하는지, 출구를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내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1Q84에서 나갈 수 있는자와, 영영 머물러여 하는 자가 나눠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한번 정해진 마음에는 그게 너무 길다고 할 일은 없다.’ 3권 701p
이러니 단순히 러브스토리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많은 문학작품이 주제적인것 외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많다) 하지만 결국은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의 서사라는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을 통해 이야기되는것의 존재감이 꽤나 클 뿐이다. 20년이란 시간은 누구에게나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하지만 시간은 지극히 상대적이면서도, 지극히 주관적이다. 현실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와중에도 우리가 그것을 멈추어야 할 대상 愛人과 함께, 우리는 삶 여기저기서 다양한 형태의 도터를 만나고, 서로에게 도터이자 듣는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바램이라는 형태를 띄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간다.
물론 아오마메의 뱃속에 있는 작은 무언가에 대해서 ‘도터’라 명명했긴 하지만, 그것은 아오마메 에게 간절한 ‘희망’의 역할을 하였고, 어쩌면 그 희망을 통해 덴고를 찾아냈으니, 떨어져있는 두 마음이 서로를 향해 불가능해 보였던 ‘희망’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서로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그 ‘희망’이 실체가 되고 ‘진짜’로 이루어지는게 아닐까.

‘진짜’ 세계에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 하는 곳에 진짜 세계가 열리는 것 아닐까.


4권이 나온다해도, 질문은 계속된다.
개인적으로 3권의 결말이 좋다. 하지만 3권의 끝이 하루키 이야기의 끝은 아닐것이다. 1Q84 3권의 마지막장을 장식하는 ‘BOOK3 끝’, 그리고 하루키의 인터뷰, 남아있는 너무도 많은 궁금증들. 덴고와 아오마메에게 미안하지만 그것들은 하루키의 해답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물론 속편이 등장한다면 많은 사람들의 많은 해석들이 조금 더 명확해지거나, 지금까지의 추측을 모두 뒤엎을 만큼 가공할만한 진실이 등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들 완벽해질 수 있을까? 나로 말하자면 3권이든 4권이든 만족한다. 어쨌든 3권이든 4권이든 우리는 언젠가 책장을 덮을 것이고, 하루키가 우리에게 던져준 그 자신의 답과 또다른 질문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분명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것(혹은 이것, 저것, 그 무엇이라도)이 ‘진짜’인가.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그것이 ‘진짜’인가?  만약 그것에 조금이라도 의문이 든다면 우리는 그것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서 간절히 바라고, 행동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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