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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에 안녕을 블랙펜 클럽 17
우타노 쇼고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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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문학만을 가끔 보던 人, 장르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보통의 일반 순수문학(사실 이것을 규정하는 일도 나에겐 쉽지 않은데, 대략적으로.. 장르적 특성에 치중하지 않고, 이야기의 재미보다는 상대적으로 문체성을 살리고 사람에 대한 심도있는 관심을 갖는 소설이라고 정의하자) 을 읽노라면, 거의 빠지지 않는것이 바로 '문체' 이야기 이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어떻게든 재미가 있어야 읽혀지게 마련인데, 문체를 따지다보면 설령 이야기 자체가 대중적인 흡입력을 갖지 않는다고 해도, 그 언어적 우월성으로 인해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사실 '문체'를 걸고 넘어지기엔 좀 무리가 있다. 중요한건 문체가 우월해야 재밌거나, 재미없거나 하는 것이 아닌 글을 읽을 때 그 언어의 구조를 하나하나 헤쳐나가면서 볼것인지, 이야기 그 자체의 감흥과 메시지에 집중하며 볼것인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체'란것을 따지려면 실은, 그 '문체'를 분석하고, 판단/비교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할테고, 그 작가의 책을 거의 대부분 섭렵 한다던가, 상충되는 '문체'를 지닌 작가들을 비교할 줄 알아야 할텐데.. 그게 분명 아는척 끄적이는 것만큼 쉬운일은 아닐것이다. 나만해도 이렇게 '문체'를 이야기 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잘은 모른다.

문체에 대한 사전 검색결과이다.

"필자의 사상이나 개성이 글의 어구 등에 표현된 전체적인 특색 또는 글의 체제. "

왜 나도 잘 파악하지 못하는 '문체'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 했냐면, 지금까지는 접했던 소설들이 대부분 이런 '문체'에서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이런것들이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판단을 하는 것으로 안다. 그다지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의 독서를 해온것만은 아니지만, 본의아니게 나의 독서는 그런 사고방식도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참, 오래간만에 박하샴푸로 머리를 감은 듯 싸한 느낌을 주는 책 한권을 만났다. 그게 바로 '해피엔드에 안녕을' 이다.
 
요전에 장르소설을 몇개 읽은적이 있다. 배틀로얄, 나는 전설이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호러단편을 엮은 책..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이것들도 아마 다 소싯적에 봤던 책들이 대부분이다. 지금도 뭐 딱히 다르다고 하긴 그렇지만,
아무생각없이 책을 읽던 시절이었다.(물론 그만큼 많이 읽었단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것들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꿔놨다
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몇권 안되는 장르소설이라서 그런지 그 느낌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제는 그나마 그때보다는 조금 더 나은 독서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어차피 오십보 백보겠지만)
그래서 나는 이번기회에 '장르문학'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가며 읽게 됐다.
 
 
'해피엔드에 안녕을' 주제적 접근방식
지금까지 읽은 일반적인 책들을 보면, 보통은 사람의 생에 대해서, 내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해준 책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때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다. '진실' 이란 것과 '소통' 그리고 '사람의 본성' 크게는 이 세가지 일 것이다.
 
진실? 소통?
아무리 왈가왈부 한다고 해도 역시 이 책의 묘미는 허를 찌르는 반전이 제일이긴 하다. 뒤통수 맞는 기분의 반전부터,
등골 서늘하게 하는 반전, 미스테리한 반전까지 각양 각색의 색을 지닌 반전의 향연이다. 하지만 모든 단편들에 이것을 주제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을지라도, 대부분은 '진실'이라는 모토를 기본적으로 내포하고 있어보였다.
 
우리는 보통 남들에게 주워듣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면 뉴스등을 통해서 사회의 사건사고 들을 접한다. 하지만 거기에 얼마만큼의 진실이 담겨있을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괜히 뒷얘기 상상하면 '음모론자' 취급받기 딱좋다') '해피엔드에 안녕을' 우리가 보는 것들중에 과연 얼마만큼의 진실들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해주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3인칭 시점의 이야기들이 다소 많은것을 본다면, 실제로 우리가 보는 그런 '제약적인 시각'이 진실을 가로막는 가장 큰 벽이 아닌가 싶다. 또한 진실은 힘을 가진자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할 뿐 아닌가?
 
반전자체가 또 하나의 진실이기떄문에 어쩌면 이런 반전을 지닌 소설은 필연적으로 '진실'의 이야기 밖에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꾸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피엔드에 안녕을' 은 적지않은 이야기들이 사회적인 현상과 맞물린다. 얘기를 자꾸 산으로 돌리니 결론만 말하자면, 사회적인 이야기에는 그것들을 '자신의 시각'만으로 바라봄으로 인해 생기는 진실의 왜곡과 오해, 개인적인 이야기에는 소통의 부재가 낳는 오해와 그로인해 드러나는 인간내면의 어두운 일면을 트릭과 이야기의 재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책, 그렇게 딱딱하지 않다. 개인사와 사회현상을 교모하게 넘어들기 때문에 어떤 부담도 갖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저그런 반전,트릭,추리소설로 보기에는, 이 '해피엔드에 안녕을'에 실린 단편들은 한편한편 확고한 주제의식을 갖고 있다.
 
 
언니 - 첫 작품이니, 이 반전이라는 뿅망치가 얼마나 단단한지 알게해주는 작품이다. 사소한 오해와, 불신이 얼마만큼의 위력을 지니는지, 그것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해서 걷잡을 수 없게 되면....

벚꽃 지다. - 그렇게 살면서 강조하는 열정, 열정.. 현실은 모두가  이상을 쫓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결과에 대한 것은 솔직히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봤던 듯한 이야기 였는데, 그것을 포장하고, 풀어나가는 솜씨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은 결국 파편의 조잡한 덩어리 라는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천국의 형에게 - 짧지만 강렬하다. 미묘한 말 하나로도 우리는 많은 진실을 숨기기도, 드러낼 수도 있었다.
 
지워진 15번 - 감정의 파급효과는 어디까지일까 .그리고 15번은 대체 어디에...
 
죽은 자의 얼굴 - 고전적인, 하지만 더욱 교묘한 이야기. 가장 등골이 오싹했다.
 
방역 - 이웃나라도 비슷한 사정인걸까.. 자식을 소유물로, 자신의 분신으로 보는 위험한 시각.. 이또한 등골이 오싹했다.
 
강 위를 흐르는 것 - 이또한 사회현상과 닿아있다. 오싹함보다는, 현상에 대한 생각과, 치밀함을 돌이켜보게 했다.
 
살인휴가 - 어쩌면.. 이란 예측이 다소 비슷하게 맞아떨어진 이야기. 물론 거의 모든 트릭이 밝혀진 결말 바로 근처에서.
 
영원한 약속 - 어디까지가 어디까지인걸까 라는 모호한 질문을 던지게 됐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약간 갸우뚱 거리는 부분이 다소 있기도 했다.
 
In the lap of the mother - 교육열이든 그 반대든.. 극을 달리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부모의 자질이란 대체 이렇게나 힘든걸까.
 
존엄과 죽음 - 제목과 아주 적절히 맞아 떨어진다. 반전또한 일품이다.
 
 

'해피엔드에 안녕을' 방법적 접근방식 : 반전을 맞추려고, 복선을 찾아 헤매지 말 것
장르문학을 많이 접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여기서 제안하는 방법적인 접근 방식이 좀 주제넘을 수도 있겠지만, 나름의 내가 분석해본 것으론 이렇게 읽는편이 더 좋을 것 같다. 트릭이나 추리소설, 반전등에 익숙하여 그것들을 (불가피하게라도) 능수능란하게 찾아낼 줄 아는 이들이 아니라면, 굳이 애써 트릭을 찾아서 그것을 풀려하지 않는게 더 좋다고 본다. 나같은 경우에는 전반부의 몇편을 보면서 뒤통수를 몇대 얻어맞다 보니, 후반부에는 반전을 맞춰보고 거기에 만족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복선이 되는 부분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결과는 90%는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맞추기 위한 소설이 아닐것이다. 그 반전에 대한 '뒷통수'를 제대로 맞아주기 위한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들을 통해서 얼마만큼 뒷통수를 세게 맞았느냐에 따라서 그 이야기의 주제에 대해서 더 심도있는 관찰과 고민을 하게됐다. 반전을 통해, 사실주의적으로 드러나는 현실보다 몇배 더 강한 충격을 더해주는 것이다. 누군가가 얼마나 착한지, 나쁜지, 혹은 이상한지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대책없이 드러나야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방법을 제안하는 것이다.
'어설프게 반전을 맞추려고 머리를 싸매지말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놀래라. 이것은 그러기 위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주제에 대한 비판적이고 현실적인 접근방식이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치밀한 방법들이 우수하기때문에, '문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제쳐두고서도 '스릴있고 즐거우면서도 좋은 책 읽었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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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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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는 말되, 조금 느긋하게 다가가보자.
 판매량과 시간이 알려주듯 1Q84는 독자에게 가속도를 내게끔 하는 흡입력을 가진 소설이다. 뒤늦게 접하게 되었지만, 다소 두꺼운 페이지가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물론 곳곳에 커브가 있기에 속도가 줄 때도 있었지만, 그 분량에 비한다면 분명 고속도로를 달렸다는 것은 확실하다. 허나 지금까지 직선도로를 달려왔다면 이제는 종점에 다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운동이 사고없이 멈추기 위해서는 속력을 줄여야 한다. 그것을 위해 3권에는 방지턱이 존재한다. 다만 그 방지턱은 그대로 통과한다고 하여도 사고가 날 일은 없다. 3권은 독자가 쏜살같이 직선으로 끝으로 가는것을 살짝 주춤하게끔 상징적인 속도제한표지판같은 방지턱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끝만보고 달려가기에 1Q84의 세계에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1,2권을 통해서 독자는 나름 1Q84에 대해서 인식했다. 그럼에도, 시간은 객관적이지만 개인에게 주관적인 것임을 상징이나 하듯, 1Q84에 대한 본격적인 인식은 아오마메와 덴고가 그 때를 달리하며, 만남을 위한 부산한 움직임또한 그 각각의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은 전편들보다 표면적으로 다소 둔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분명 좀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움직이며, 그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성찰이 깊이를 더해간다.


현실을 인지한다.
 덴고와 아오마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고 있었다. 다만 제각기 공백같은 결핍을 안고있기 때문인지 생에 총체적인 열정이 느껴지지 않았다(그것은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의도치 않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서, 달이 두개 떠있는 현실에 대해서 인지하게 된다. (혹은 몽롱하게 알고 있던것이, 표면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에게 존재했던 공백을 발견하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앞으로 향한다. 물론 우시카와 또한 세계가 현실적이지 않음을 인지한다. 하지만 그것에는 덴고&아오마메와는 다소 차이를 갖는다. 이 이상한 현실을 넘은곳에 더 나은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곳으로 넘어갈만한 필연적인 의지가 있는지 하는 것이다. 언뜻 잊은 듯 보이면서도 덴고와 아오마메는 서로를 기억하며(혹은 1984에서는 잠시 잊고 있던), 20년전의 따뜻한 온기를 다시 느끼고 싶어하지만 우시카와는 애석하게도 그럴만한 기억이 채 없다.


‘어떻게’ 현실을 인지하는가?
덴고와 아오마메는 각자의 방식과 명칭으로 1984년을 받아들인다. 거절도 환영도 아니다. 인정하지만, 더 나은곳으로 가기위해서 그들은 각자의 손을 서로에게 뻗는다. 즉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들이 맞닥뜨린 1Q84라는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다. 하지만 우시카와는 다르다. 그는 일단 현실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서 행동한다. 그에겐 더 나은곳에 대한 기대도, 노력도 없다. 현실을 인정하는것과 동시에 그 자체에 만족함으로써 더 나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 멈춰지는 것이다. 우시카와는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다면, 감히 더 맛있는 맛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라고나 할까.
더불어서, 하루키는 리시버와 퍼시버의 개념을 대입한다. ‘선구’내에서 목소리를 듣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증인회’라는 종교에 속한 사람들, 그 외에 언급되지 않는 종교, 혹은 아무도 믿지 않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또한 목소리의 존재를 인정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듣는지 마는지에 따라서 삶의 무대와 행동이 결정된다. 이것은, 모티브가 됐다는 일본의 옴진리교 사건과 더불어 현실에 대한 개개인의 ‘받아들이는’ 방식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비록 덴고와 아오마메는 그들 각자 나름의 무미건조한 삶을 살았어도, 돌아가고 싶은 ‘그때’가 있었고 앞으로 그것을 다시 재현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그런 의지는 아오마메에게 리더라는 이가, 덴고에게는 후카에리라는 인물들이 그들을 스쳐지나가고, 이들을 통해 그들은 목소리를 자신의 방식으로 듣고, 해석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그 리더와 후카에리라는 존재는 마치 신과 같은 예언을 늘어놓는다) 그렇듯 우리 모두는 각자의 도터 - 즉 퍼시버(누구에게는 사람, 누구에게는 문학,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돈, 그리고 그 어떤 무엇이든 간에)를 통해서 리시버가 된다. 교단 ‘선구’의 비극은 어쩌면 그 도터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부터 일그러졌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목소리가 들리느냐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는 뗄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종교적인것, 종교적이지 않은것에 대해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현실을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마루가 언급했던 카를 융의 말을 빌리자면 ‘차가워도, 차갑지 않아도 신은 그곳에 있다’ 라는 말처럼 신의 존재는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한결같이 어디서도 볼 수 없지만, 어디에도 존재한다. 다만 인간이 그것에 대해 무언가의 형태를 띄게끔 만들었기 때문에 그 신은 우리가 상상하는 어느 형태를 띄어 버리고 어딘가 특정한곳에 한정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그 본래의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리틀피플은 선인지 악인지(혹은 신인지) 구분할 수 없지만 확실히 그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냄에 대해 좋지 않은 분노의 방법을 표출한다. 그리고 교단 ‘선구’가 도터와 리더를 통해 그 목소리를 듣는 방법또한 우리가 상식적으로 ‘선’이라고 생각하는 범주에서 벗어난다. 이것들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목적과 방법이 ‘선’을 거스른다면, 그 신이라는 실체또한 충분히 일그러진 모습을 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목소리냐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떤 의도로, 제대로된 방식으로 받아들이느냐도 간과할 수 없거나 혹은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후카에리의 아버지가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는지 정확한 설명은 나와있지 않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일반적으로 ‘도덕’이라고 하는 선을 넘었고, 환영받지 못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1Q84의 본론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것은 곧 이야기를 여는 질문이 된다.

삶에는 많은 현상이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감각기관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뇌로(혹은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선구에서 보여지는 이 목소리, 그리고 리시버와 퍼시버의 관계는 한 인간이라는 우주에서 펼쳐지는 감각, 현실반응과 다름이 없다고 나는 확신을 굳혔다. 신을 그리고 사람(자신과 타인을 모두 포괄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하느냐에 따라 삶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오마메 자신또한 신을 향해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올리며 자신의 왕국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은 다름아닌 듣는 자신 목소리의 형태을 띄고 우리에게 들려올지 모른다. 그리고 곧 그것은 그 자기자신 스스로가 신이, 또는 목소리가 되기도 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현실에서 달이 한 개라고 본다면, 분명 달이 두 개인 1Q84의 세계는 분명 불가능한 세계이다. 하지만 불가능의 세계에서 덴고와 아오마메의 만남은 가능했다. 그리고 그외에도 여러 가지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했다. 1Q84에서는, 1984라는 세계에서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그 불가능의 세계는 간절한 자들이 만든 세계일지도 모른다. 마치 덴고와 아오마메가 직선처럼 보이는 시간의 틈에 곡선인지 굴곡인지 모를 1Q84라는 시간을 끼워넣어 그들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현실에 대응한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앞으로 뻗어가기 위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 내부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서로를 갈구한다. 물론 우시카와 또한 제 나름의 질문을 던진다. 단지 자신에게. 하지만 그 질문이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질문인지, 이 현실의 문제를 타계하고, 그 문제만을 위한 질문을 던지는지의 차이로 인해 이들의 운명이 엇갈리게 된다고 본다. 아오마메는 리더를 제거하기에 앞서 1Q84의 중요한 단서들을 리더에게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덴고를 위해 20년동안 만날수도 없었던 덴고를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려는 상황까지 이르게 하지만, 결국은 아오마메는 스스로 판단한다. 물론 거기에는 당연 덴고의 목소리가 닿았기 때문이다. 덴고 또한 아오마메와 함께할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을 공기 번데기에 쌓인 열살의 아오마메를 향해 상징적으로 확인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시카와는 설령 자신이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더 나은세계로 나갈만한 동력이 되지 못했을 터이다. 우시카와는 분명 다마루의 말대로 심부름꾼으로 쓰기에 아까운 존재이지만,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의 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서 저마다의 해답을 찾은 이들이다.

물론 행동력으로 따진다면 어쩌면 덴고는 우시카와보다 뒤쳐질지도 모른다. 특히나 덴고는 아오마메와 비교하자면 스스로가 그렇게 느낄만큼 그녀에게 빚졌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마치 그녀의 팔은 그를 향해 손을 쭉 뻗었지만, 그는 팔꿈치를 접고서 손을 내민것 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그저 ‘인간은 자신의 재량에 맞는 몫을 하면된다. 게으름피지 않으면서’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저 그것뿐일까? 덴고는 ‘수학’에 능통했다. 허나 인생에는 ‘수학’이라는 학문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수학 그 자체는 아니다. 답이 하나로 떨어지질 않는다. 각자의 답을 떠안고 살아가는 세계다. 더욱이 달이 두 개 떠있는 세상이라니, 답이 나올 리가 없다. 아오마메의 말처럼, 논리적이지 않은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긴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즉, 세계는 논리적이지 않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논리적인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긴밀하게 섞이고 연관되어 있다. 직접적인 성관계가 없음에도 수태라고 부를만한것을 할 수 있는 1Q84에만 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도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않는가. 이것이 덴고와 아오마메가 어떻게 1Q84를 나올 수 있었는지 설명된다. 그들은 끊임없이 존재에 대해, 세계에 대해 Q(Question)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의 해답을 내리고, 거기에 따라 행동했다. 다만 ‘수학’적이지 않은 현상으로 인해 덴고가 조금 천천히 걸었을 뿐이다. 상관없다. 아무리 불편한 사다리라도 아오마메의 의지가 그를 이끌었으니. 그리고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필연적으로, 아오마메와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그는 더이상 수학강의를 하지 못하고 결국은 자신 존재에 대한 흔적과 집필중인 소설만을 가지고 떠나게 되니깐 말이다.


하지만 모든것에는 저마다의 대가또한 필요하다.
덴고의 집에도, 아오마메와 우시카와가 잠시 머무는 집에도 NHK 수금원이 문을 두드린다. 그렇다. 어느 삶에도 대가가 필요하다. 다만, 공정한몫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 비록 평균적인 몫이 계산될지라도, 그렇지 않을때가 만연하다. 나는, 덴고가 없는 덴고의 집에, 전에 살던 집주인의 명패를 걸어놓은 아오마메와 우시카와의 집에 수금원이 문을 두드리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 그동안 얼마나 불행한 인생을 살아왔는지, 어떤형태를 띄는지는 중요치 않다. 1Q84에도 실체로서의 시간은 동등하게 흐르지만, 그것이 얼마만큼을 의미하는지는 제각각이다. 덴고와 아오마메처럼 누군가와, 혹은 혼자서 충만한 시간을 보낸자와 그렇지 않은자가 느끼는 시간성에 대한 대가는 분명 실체적으로는 동등한 시간임에도 다르게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개개인의 시간에 대한 개념에 차이가 생기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열심히 살아가는가 아닌가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그것이 선을 향해 가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열심의 결과와 대가는 하늘과 땅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우시카와 자체가 그것을 증명한다. 물론 그 누구도 그 문을 열길 원치 않으며, 그 대가의 출처또한 불분명하다. 어쩌면 그 대가를 말하는 수금원에 덴고와 아오마메가 침식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둘이 그들 서로의 대가를 짊어질정도로 강한 힘을 형성하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대가란 것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시간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해를 넘기지 않아야한다는 시간성이 그들을 재촉했던 것일까? 그들이 알던 모르던 말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 수금원에게 문을 열지는 않았어도 아오마메와 덴고는 스스로 그 문을 열고 나갔지만 우시카와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때를 기다렸지만, 때는 그가 살아 숨쉬는 순간에 오지 않았다. 결국 ‘선구’에 의해서 그는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시카와를 배제할 수 없다.
으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속에서 악은 배제되어야 할 존재이다. 다만, 우시카와를 악으로만 치부하기엔 다소 망설여진다.(물론 그가 나름의 목표를 달성했다면 이야기는 다소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왜냐하면 그도 확실히 달이 두 개인 세상속에서 살고 있던 존재이자, 고독의 심연속에서 낑낑대며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군상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환경은 우월했으나, 다만 거기까지였다. 그 환경은 그의 기이한 모습을 더욱 웅크러지게 만들었다. 그런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는 스스로(그 자신이 가능한 곳까지) 자신을 숨기고, 외로움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그의 모습은 더 서글퍼 보였다. 그는 오로지 자신만을 믿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이었다. 어쩌면 우시카와는 단지 마치 자신이 잘 할수 있는 일을, 어떤 대가라는 것을 받아내기위해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던 덴고의 아버지, 즉 NHK 수금원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보여진다. 다만 그렇다고 그 잘하는 것이 반드시 환영받는 것은 아닐뿐더러, 또한 거기에는 고민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 선인지 악인지보다, 문제를 어떤식으로 해결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오로지 자신의 인내와 감을 믿고서 말이다. 희망이 없는 삶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다른세계로 건너갈 수도 없다. 혹은 나아간다해도 온전하지 못하다. 어쩌면 우시카와의 기이한 외형은 그것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곧 살아있음에도 죽은자와 다름없이 타인과의 이타적인 ‘사랑’에 대해서 무감각해 있던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자신의 뒤를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느꼈다시피 결정적인 것을 놓치고, 자신의 뒤에서 숨죽여오는 다마루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덴고와 아오마메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리고 우시카와의 올가미가 결국 그들을 한데 묶어 버렸으니 우시카와라는 존재는 어쩌면 그들에게 장애물이 아닌 점프대였을지도 모르는 법이고 말이다. 하여간 그에게 유일하게 차별하지 않았을, 자신이 키우던 개를 죽음 앞의 주마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한번 우시카와를 보며 서글퍼진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우시카와와 같은 이들이 존재할 테니깐..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답을 만들고 그것이 간절한 바램을 거쳐 ‘현실’을 만들어간다.
 누군가 믿을만한 이가 답을 내어준다. 그것은 세계의 정답일 수 있다. 그들은 정말로 그런 것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다. 작가(하루키)는 후카에리도, 리더도 될 수 있다. 아니, 개인적으로 보자면 난 ‘리더’쪽에 가깝다고 본다. 리더는 세계에 대해서, 진실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것은 논리적이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대체로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엔 비논리적이겠다.) 강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리더의 모습을 띈 하루키라고 설명하자면, 그는 도터(문학)라는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목소리’를 전해준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리더는 아오마메는 살아남을 수 없고, 대신 덴고는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정확히는 3권의 결과적으로) 그들은 둘다 살아남았다. 내가 내리는 답은 나의 대답이다. 왜냐하면 내가 던진 질문의 답이 당신의 답이 될리 만무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용’ 이다. 그러니 우리가 누군가의 답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과도한 게으름과 안일함이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그 질문을 통해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갈 것을 상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시카와처럼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그 현실에서 끝이 나고 만다. 부인과 딸과 함께살지 못하고, 죽음앞에서 자신이 키우던 멍청한 개를 떠올려야만 하는 지독히 쓴 현실말이다.

덴고와 아오마메가 건너온 1984는 어쩌면 또 하나의 1Q84는 아닐까. 질문은 어느세계에서나 계속 되어야 한다. 물론 달은 한 개다. 덴고와 아오마메도 상징적인 하나이다. 하지만 태양이 두 개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름의 1984이지만, 곧 그것은 또하나의 1Q84라고 부르는것도 가능하리란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도, 또 그 이후에도. 그 내용과 농도는 다를지언정 질문이 멈춰서는 안될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들이 1Q84에 대해서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1984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질문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현실도피와는 다르다. 내가 딛고 있는곳이 땅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왜’ 땅인지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간에 Q(Question)를 넣어야만 한다. 그리고 아오마메처럼, 덴고처럼, 혹은 우시카와처럼 각자의 해답(다마루의 말처럼, '그것이 존재한다면')을 통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삶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답장(혹 그것이 존재한다면) 으로 페이지를 휙 넘기려는 태도가 아니라, 질문하는 것이다. 질문해서 얻은 자신의 해답이야 말로 세계를 향해 더욱 뻗어나가게 해주는 것이다. 사실상 질문하는 것 자체가 1Q84처럼, 세계에서 이탈된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의심과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지금에 머물러야 하는지, 출구를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내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1Q84에서 나갈 수 있는자와, 영영 머물러여 하는 자가 나눠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한번 정해진 마음에는 그게 너무 길다고 할 일은 없다.’ 3권 701p
이러니 단순히 러브스토리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많은 문학작품이 주제적인것 외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많다) 하지만 결국은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의 서사라는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을 통해 이야기되는것의 존재감이 꽤나 클 뿐이다. 20년이란 시간은 누구에게나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하지만 시간은 지극히 상대적이면서도, 지극히 주관적이다. 현실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와중에도 우리가 그것을 멈추어야 할 대상 愛人과 함께, 우리는 삶 여기저기서 다양한 형태의 도터를 만나고, 서로에게 도터이자 듣는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바램이라는 형태를 띄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간다.
물론 아오마메의 뱃속에 있는 작은 무언가에 대해서 ‘도터’라 명명했긴 하지만, 그것은 아오마메 에게 간절한 ‘희망’의 역할을 하였고, 어쩌면 그 희망을 통해 덴고를 찾아냈으니, 떨어져있는 두 마음이 서로를 향해 불가능해 보였던 ‘희망’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서로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그 ‘희망’이 실체가 되고 ‘진짜’로 이루어지는게 아닐까.

‘진짜’ 세계에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 하는 곳에 진짜 세계가 열리는 것 아닐까.


4권이 나온다해도, 질문은 계속된다.
개인적으로 3권의 결말이 좋다. 하지만 3권의 끝이 하루키 이야기의 끝은 아닐것이다. 1Q84 3권의 마지막장을 장식하는 ‘BOOK3 끝’, 그리고 하루키의 인터뷰, 남아있는 너무도 많은 궁금증들. 덴고와 아오마메에게 미안하지만 그것들은 하루키의 해답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물론 속편이 등장한다면 많은 사람들의 많은 해석들이 조금 더 명확해지거나, 지금까지의 추측을 모두 뒤엎을 만큼 가공할만한 진실이 등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들 완벽해질 수 있을까? 나로 말하자면 3권이든 4권이든 만족한다. 어쨌든 3권이든 4권이든 우리는 언젠가 책장을 덮을 것이고, 하루키가 우리에게 던져준 그 자신의 답과 또다른 질문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분명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것(혹은 이것, 저것, 그 무엇이라도)이 ‘진짜’인가.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그것이 ‘진짜’인가?  만약 그것에 조금이라도 의문이 든다면 우리는 그것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서 간절히 바라고, 행동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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