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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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탈주는 끝나지 않았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의 흑인 노예 소녀 코라의 탈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녀의 시대는 19세기이다. ‘얼마나 멀리 오니 그것이 다 잊혀 졌을까?’ 라면서 끝이 나지만 한 세기가 지나도록 그 대답은 할 수가 없다. 저들은 이들을 사로잡아 제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집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20세기의 엘우드 역시 탈주한다.

엘우드의 시대는 ‘버스승차거부’, ‘자유를 위한 행진’에서 거둔 승리와, ‘짐 크로법’ 폐지로 희망적이었다.


“반드시 우리의 영혼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중요한 사람입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이므로, 매일 삶의 여로를 걸을 때 이런 품위와 자부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레코드판이 계속 돌고 돌았다. 항상 난공불락의 전제로 되돌아오는 논리 같았다. 킹 목사의 말이 좁은 직사각형 모양의 집 앞쪽에 있는 거실을 가득 채웠다. 엘우드는 하나의 원칙에 마음이 기울었다. 킹 목사가 그 원칙에 형태와 소리와 의미를 주었다. 짐 크로처럼 검둥이들을 계속 누르려고 하는 거대한 힘이 있고, 엘우드 너를 계속 누르려고 하는 작은 힘이 있다. 이를테면 주위의 다른 사람들. 이런 크고 작은 힘 앞에서 너는 꼿꼿이 일어서 너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39p


킹 목사의 연설을 듣고 가슴이 뛰던 소년은 밸런타인 농장에서 자유를 꿈꾸던 코라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의 꿈은 안전할까?

책을 좋아하고 책을 통해 자신이 커서 되고 싶은 모습을 그리는 엘우드. 그는 그가 살고 있는 지역의 다른 소년들과는 다르게 살고 싶어 한다. 학자로서의 미래를 꿈꾼다. 그런 태도 때문에 주변인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도 한다. 아직은 꿈꾸는 것이 위험해 보인다.
그가 희망을 갖고 그 꿈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불운의 덫에 빠진다. 그를 둘러싼 세상은 진실에 눈을 뜨고 다르게 살려는 그에게 불친절할 뿐 아니라 폭력적이다. 그가 수용된 니클처럼….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 해리엇이 바라보는 세상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가설이 떠올랐다. 니클에서 자행되는 만행에 지침이 되는 상위 원칙 같은 것은 없다는 가설. 상대가 누구든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악의가 있을 뿐이었다. 10학년 과학 시간에 들은 적이 있는 상상의 이야기 하나가 그의 뇌리를 때렸다. 사람이 관여하지 않아도 저절로 돌아가는 ‘영구적인 불행 기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가 백과사전을 처음 펼쳤을 때 눈에 띈 항목 중 하나인 아르키메데스도 생각났다. 세상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지렛대는 폭력밖에 없다.
111p


억울한 혐의를 받고 제대로 재판조차 받지 못한 엘우드는 ‘니클’이라는 시설에 수감된다. ‘사회부적응 소년’들을 교화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학교이다. 학교로 불리지만 수업은 형편없고, 이곳에 수용된 소년들은 무기력하거나 불량하다. 니클에서는 폭력이 규칙이고 힘이다. 폭력의 끝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이 시설은 ‘나찌수용소’를 떠올리게 한다. 이곳에서도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이 존재한다. 하지만 차별 뒤에 도사리고 있는 더 근원적인 것을 보게 된다. 폭력! 그들을 지배하는 원리는 폭력이다.

과연 폭력은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외부로부터 오는 것일까? 누군가가 끌려가는 것을 보고 자신이 무사함을 안위하는 소년들의 모습이라든지, 한 밤중에 가해지는 구타와 채찍소리를 듣고 잠이 드는 아이들을 지배하는 두려움은 희생양이나 지배로서의 폭력을 떠올리게 된다. 외부적인 양상이다. 그러나 끝없이 가해지는 폭력을 보고 있으면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폭력이 선행되고 있는 폭력을 지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엘 우드와 니클의 아이들은 모두 고통을 이기는 능력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이 능력으로 숨을 쉬고, 음식을 먹고, 꿈을 꾸었다. 구타, 강간, 그들 사이에서 가차 없이 벌어지는 적자생존, 경쟁적으로 모방되는 폭력. 그들은 그런 것들을 견뎠다.


그곳에서 그렇게 망가지지 않았다면 그 아이들이 모두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병을 치료하거나 뇌수술을 하는 의사가 됐을 수도 있고,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물건을 발명하거나 대통령에 출마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천재였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재능. 물론 그들 모두가 천재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치키 피트가 특수 상대성 이론 문제를 풀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은 평범한 삶이라는 소박한 즐거움조차 누릴 기회가 없었다. 경주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불구가 되어 절룩거리며, 정상이 되는 방법을 끝내 알아내기 못했다.
209p


엘우드의 꿈이 애처롭다. 그의 탈출이 절망적이다. 그리고 터너의 회상이 가슴 아프다. 코라와 엘우드 터너 들은 아직도 탈주하고 있다. 노예해방을 위해, 진정한 자유를 위해, 차별받지 않기 위해……. 그러나 미국은 폭력을 향해 거꾸로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저자인 콜슨 화이트헤드는 2014년 플로리다주 도지어 남학교(Dozier School for Boys)에서 교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을 알게 되었다. 2011년 폐쇄된 이 학교의 생존자들의 회고, 신문기사, 법의학 보고서를 통해 자료를 수집했다. 그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이 소설을 썼고 2020년 다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2017년에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로 수상한 것에 이어 두 번째이다.


‘빠져 죽고 맞아 죽고, 선감학원 희생자 유해 발굴한다.’ ‘경기도, 40년간 아동 인권침해 ‘선감학원‘ 진실규명 나선다’ 각각 2017년, 2020년 신문기사 헤드라인이다. ‘니클’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폭력의 상흔은 깊이 박혀있고 그 진실을 발굴하는 것은 오래 걸린다. 이 글을 쓰며 역사 속에 오명을 남긴 수용소의 이름들이 지나간다.


근대에 이르러 무자비한 폭력은 정치 무대에서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적 영역에서 점차 정당성을 박탈당한다. 이와 함께 폭력을 전시할 무대도 사라져간다.……수용소의 무젤만(본래 이슬람교도를 의미하는 독일어 단어. 나치수용소에서 아사 직전에 이르러 피골이 상접한 수감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됨)은 이미 부끄러움을 알게 된 폭력의 희생자다. 폭력은 그 때문에 범죄로 느껴지는 것이고,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다. 주권자의 처형 폭력은 정당성을 상실한 뒤에 공공적인 성격을 지닌 장소를 떠난다. 수용소는 비-장소Ab-Ort이다. 그 점에서 수용소는 그래도 여전히 장소에 속하는 감옥과 구별된다.
-17p 『폭력의 위상학』, 한병철


여전히 인류는 폭력으로부터 탈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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