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의 오후 열린책들 세계문학 122
페터 한트케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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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의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등에서 생각의 흐름은 공간의 이동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낯선 장소로 여행하며 불안이라든가 아니면 과거에 대한 회상과 관련된 생각의 흐름을 읽게 된다. 이 작품 역시 이러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인 주인공은 산책을 하며 작품에 관한 생각들과 그 글로 인한 두려움, 망상, 현실과 환상의 혼동을 경험한다.
아마도 작가 자신이 이러한 산책이나 여행길에서 경험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언젠가 거의 1년 동안 언어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이래로 작가에게는 자신이 과거에 썼고, 앞으로 쓸 수 있다고 느낀 문장 모두가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말로 표현되지 않고 글로 쓰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언어가 그로 하여금 깊이 숨을 쉬게 했고, 그를 세계와 새롭게 맺어 주었다.
11p

그자신의 실상을 밝혀 주고 생동감 있게 해준 몇 줄의 도움으로 그날 하루도 잘 지나간 것 같았다.작가는 저녁나절을 순조롭게 보낼 수 있으리라는 기분으로 자신의 책상에서 일어섰다.
13p

집을 나서던 작가는

정원으로 통하는 문으로 가는 도중에 작가는 갑자기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후닥닥 서재로 올라가서는 거기서 어떤 단어를 다른 단어로 바꾸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방에서 땀 냄새를 맡았고 유리창에 증기가 낀 것을 보았다.
21p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들으며 글을 쓰던 작가는 목욕을 하고 옷을 입고 신발을 고쳐 신고 하는 동작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산책을 준비하며, 오랜 시간을 집안에 머문다. 머뭇거리듯 밖으로 나가기 전 긴 준비를 하고 나가다가 다시 집안으로 들어와 단어를 고치고, 그제야 다른 감각이 돌아온다. 준비 시간이 긴 것은 자신이 작업하고 있던 글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외부로 향하는 감각이 돌아오게 하는.
그리고 산책길에서

걸을수록 일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서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40p

그의 작품에 대한 생각을 이 소설의 주인공의 생각을 빌어 표현한다.

<작품>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는 재료란 거의 중요하지 않고 구조가 무척 중요한 것, 즉 특별한 속도 조절용 바퀴 없이 정지 상태에서 움직이는 어떤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요소들의 자유로운 상태로 열려 있는 것, 누구나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사용한다 해서 낡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40p

길게 이어진 골목- 출구라곤 도무지 보이지 않고 다만 굽은 길로 접어들 뿐인- 은 높은 집들의 지붕이 드리워져 이미 어둑어둑해진 반면, 길게 이어진 하늘은 골목의 잔상이 어린 듯 아직 밝았다. …… 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길이 좁아지는 곳에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담고 있는 것은 그에 대한 인정(認定)이 아니라 이해불능, 심지어는 적의였다. 그는 그들이 어떤 문학 텍스트의 의미나 의도, 배경을 지정해야한 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57p

작가가 매일 다니던 산책길, 일상적인 것들이 갑자기 낯설고 오히려 적의까지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단어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이제까지 써오던 문장들이 낯설고 의미를 상실한 순간들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작가는 저녁 산책길에서 무수한 얼굴들과 풍경들 그리고 환상을 통해 글쓰기를 상징한다. 의미와 상징을 읽어내지 못하면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길을 잃게 된다. 나 역시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어오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가 악몽을 꾸는 경우는 오로지 글을 쓸 때뿐이었다. 꿈속에서는 어떠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밤새도록 늘 똑같은 판결이 되풀이되었다. 무의미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래서도 안 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죄가 되는 일이었다. 예술 작품, 즉 책의 월권행위는 다른 어떤 죄악을 저질렀을 때보다 더한 영겁의 벌을 받게 되는 가장 고약한 죄악이었다. 그는 하루 일과가 끝나 버린 지금 이때에, 멀쩡한 정신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질러 세상에서 영원히 추방된 자가 된 듯한 감정을 체험했다.
95p

산책길에서 다시 서재로 돌아오는 그는 <작가로서의 나> 일까? <나로서의 작가>일까? 수많은 환상과 열려진 의미와 상징 속에서 독자도 무엇이 실재인지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작가로서 보고 있는 세상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품 속에 빠져있어 현실과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는 작가. 작품을 쓰기 위해 그가 잃어야할, 잃을 수밖에 없는 것들. 그것을 잃고 그는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자신을 적대하는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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