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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잘 있습니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0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평점 :
이병률 시인의『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 시집의 글들은 그러했다. 때때로 무언가에 대한 작가의 짧은 단상 같기도 했고, 때로는 작가 본인의 혼잣말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시를 읽는 이들에게 차분하고 평온한 어조로, 있잖아 오늘 말이야,라며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아 어쩐지 귀 기울이게 되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날 있었던 일, 자신의 비밀 하나, 사람과 사랑, 만남과 이별, 관계와 감정, 서로에게 가닿지도 못하고 가늠되지도 못한 어떤 말들. 그리고 어떤 때 시를 쓰느냐에 대한 대답과 시집의 맨 마지막 시는 무엇으로 할까에 대한 고민에 대해서.
만약 부제를 정해 보라 한다면, 윤동주의 시집 제목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차용해 ‘사람과 사랑과 별과 시’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그만큼 이 시집에서 사람, 사랑, 별은 자주 등장하는 단어였고,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들이 많았다. 더불어 시인의 세계에서는 자연적인 요소들이 종종 등장했는데, ‘선인장, 식물의 뿌리, 꽃을 피워 올리는 씨앗과 구근들, 꽃과 나무, 호수나 물, 불, 돌, 새 떼’처럼 이러한 대상들은 작가의 감정이나 생각을 투영하거나 생각을 전해주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중 누군가와 마주치게 되고 서로 말을 나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만남이 어떤 관계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대단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놀라움과 감탄도 잠시, 지속적으로 오래가는 관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관계도 있으며 대개 어느 한쪽이 감정이 다하고 나면 더는 상대를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게 관계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가까웠던 사람이 누구보다 멀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만남 역시 이별과 등을 딱 맞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다림이든 이별의 과정이든, 한동안 상대를 떠올리는 시간을 겪는데 시인은 이 부분에 대해 나직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었다.
헤어짐 이후, 개인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픔이 밀려올 때도 있을 것이고, 그리움이 왈칵 쏟아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가 대신해줄 수 없으니 그저 스스로 끊임없이 감당하고 감내하며 괜찮아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다.
비밀 하나를 이야기해야겠다
누군가 올 거라는 가정하에
가끔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간다는 비밀 하나를
(「이구아수 폭포 가는 방법」부분)
내 무릎 속에는 의자가 들어 있어
오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앉지를 않는구나
(「몇 번째 봄」부분)
눈보라가 칩니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만이 혼자만큼의 서로를 잊게 될 것입니다
(「이별의 원심력」부분)
한편, 이 시집에서는 여러 시를 통해 연(緣)에 대한 표현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렇다. 인연(因緣)의 그 ‘연(緣)’이며, 그 자체의 뜻도 ‘인연 연(緣)’이다. 인연은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뜻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물과의 관계를 말할 때도 인연이라고 표현된다. 글자를 잘 살펴보면 알겠지만, 연(緣)의 부수는 ‘실 사(絲)’로 가는 실로 묶여 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 시집에서만큼은 이별이 너무 고통스럽거나 슬픔으로만 남지 않았다. 그 자체가 개인에게 힘들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시를 통해 우리는 세상의 무언가와 이어져 있고 닿아있다고 끊임없이 환기 시켜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병률 시인은 단절성 대신 연결성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우리 손에는 실들이 묶여 있고 누군가와,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 말은 알게 모르게 작은 위로가 되어준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저 별들도 알고 보면 다 우리의 인연인 셈이다. 덕분에 마음 한편에는 따뜻함이 잔잔하게 퍼져나가는 기분이다.
오늘도 새벽에 들어왔습니다
일일이 별들을 둘러보고 오느라구요
(...중략...)
오늘도 새벽에게 나를 업어다달라고 하여
첫 별의 불꽃에서부터 끝 별의 생각까지 그어놓은
큰 별의 가슴팍으로부터 작은 별의 멍까지 이어놓은
헐렁해진 실들을 하나하나 매주었습니다
(「살림」부분)
인생이라는 잎들을 매단 큰 나무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이 저녁
내 손에 굵은 실을 매어줄 사람 하나
저 나무 뒤에서 오고 있다
(「사람이 온다」부분)
나의 완성은 그렇다
지구 사람 가운데 나에게 연(緣)이 하나 있다면
당신들의 흩어짐을 막는 것
지금은 다만 내 마음의 1층과 2층을 더디게 터서
언제쯤 나는 귀한 사람이 되려는지 지켜보자는 것
나의 궁리는 그렇다
(「지구 서랍」부분)
멍이 드는 관계가 있습니다
멍이 나가는 관계가 있습니다
저기 보이는 저 첫 별은
잠시 후면 이 호수에 당도해
홀로 남은 채로 멍이 퍼지고 있는 한 사람을 끌어줄 것입니다
(「호수」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