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야기 찔레꽃 울타리
질 바클렘 지음, 이연향 옮김 / 마루벌 / 199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화창한 봄날, 들쥐들이 살고 있는 찔레꽃울타리 마을.
눈부신 햇살이 마을의 집집마다 스며드는 아침이다.
『봄 이야기』는 자작나무 기둥 구멍에 사는 들쥐 가족, 그중에서도 이 집의 막내 ‘머위’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아이들에게 있어 생일은 설레고 기다려지는 날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머위에게도 마찬가지다. 제일 먼저 일어난 머위는 엄마 아빠의 방으로 달려가 새 피리를 선물로 받는다.

 


옆집 돌능금나무. 이 집에는 사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다.
마침 돌사과나무에도 분홍빛과 하얀색의 꽃이 가득 피어났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우면서도 포근한 기분이다. 
게다가 그 집의 단면도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책이 주는 묘미라는 점!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는 다락방, 푹신한 침대가 있는 침실, 난롯불을 쬘 수 있는 거실과 음식을 만드는 부엌, 지하 식품 저장고 등등.
마치 인형의 집 내부를 구경하는 것처럼 공간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과 할아버지는 들쥐 마을의 제일 웃어른이다.
사과 할아버지는 머위 몰래 생일 소풍 준비 계획을 세우고, 마을 들쥐들도 여기에 동참한다.
물론 이 사실은 머위에게 비밀이다.
머위를 위해 모두 한마음이 되어 생일 소풍을 준비하는 과정이 무척 보기 좋았다.
이야기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고 사람을 참으로 기분 좋게 만드는 책!
봄 이야기답게 여기저기 온통 봄꽃이 가득한 점도 너무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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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헐의 세계로』중에서)

 

 

플랑드르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피터 브뤼겔, 피터 브뢰겔)

그는 귀족이나 영웅을 그린 게 아닌 평범한 민중, 주변의 이웃의 모습을 그렸는데

「네덜란드 속담」, 「푸른 바벨탑」, 「농가의 결혼식」,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같은 작품이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명화집이나 어린이들을 위한 명화 그림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중 「어린이들의 놀이(=아이들의 놀이」)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 작품에는 80개가 넘는 다양한 종류의 놀이가 그려렸는데
지금부터 몇 백 년 전 유럽의 어린이들이 어떻게 놀았는지 알 수 있는 그림이라고 한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아는 놀이들도 많이 나와 어쩐지 반가운 느낌이 든다.

 

 

물가에서는 수영을 하고,

나무타는 아이도 보인다.

 

 

팽이치기, 물구나무 서기.

이 두가지는 알겠고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술래잡기.

아래쪽에는 혹시 공기놀이???

 

 

두 명이서 한 명 가마태워주기.

나무 목마를 타고 말타는 아이가 보인다.

 

 

굴렁쇠 굴리기.

저 위쪽에는 뜀틀놀이.

 

 

매달리기.

장대 위에 올라가 걷기 놀이 등등.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는 줄지어 늘어서서 허리 잡고 기차놀이를 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재미있었는데 말이다.

그냥 여럿이서 모이기만 해도 무슨 놀이를 할지 금방 떠올리고 친구들과 열심히 뛰어놀았던 어린 시절! 가끔은 그때가 참 좋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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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해야 할 일도 많고, 읽을 책도 많아

1년에 많은 책을 읽는 것을 큰 목표로 삼기도 하지만,

때로는 느긋하게 한 페이지를 원하는 시간만큼 바라보는 것도 참 좋다 싶다.

 

 

그림책의 어느 한 페이지에서 그림 구경을 해도 좋고

혹은 소설이나 에세이의 어느 한 페이지에서 작가의 생각에 공감하든가 다르게 생각해도 좋다.

어느 쪽이든 사유하는 시간이란 건 의미가 있으니까.

 

 

그리고 책을 접하다 보면 어찌 마음에 드는 게 한 페이지뿐이겠는가 싶겠지만,

그저 개인적인 취향, 그때그때 그냥 마음에 들었던 한 페이지, 인상 깊었던 곳을 골라

포스팅을 해볼까 한다.

한마디로 작성하는 사람 마음대로!

나도 내 마음을 몰라요~그때그때 달라요~라는 콘셉트로 자유롭게 페이지를 즐겨보기.

좋으면 좋은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그냥 눈에 들어오는 그 페이지에 머물러야지.

나중에는 그것이 일상의 한 풍경이 될 수도 있고, 음식이 될 수도 있고, 영화일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꾸준히 무언가가 내 마음을, 내 생각을 두드려주기를 바랄 뿐이다.

 

 

요즘에는 그림책에 빠져있는데, 나는 어른이라도 충분히 그림책을 즐길 수 있다고 본다.

작가들의 개성 담긴 그림, 상상력이 가득한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힐링이 된다고나 할까.

그래서 오늘 소개할 그림책은 '노란 풍선의 세계 여행'이다.

 

 

사실 온라인으로 주문하고서 받았을 때 여러모로 깜짝 놀랐던 책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선명한 색감이라든가 재미있는 요소가 많아 만족스러웠으나

이렇게 클 줄은 몰랐음.

웬만하면 큰 그림책 꽂을 수 있던 책장에도 이 책은 안 들어감!!

그래서 책장에서 누워서 지내는 아이. 크크크

아, 이보다 더 큰 책은 없을 거야 싶었는데 도서관에서 《놀라운 크로스 섹션》 빌리고 보니 그건 또 아니더라. 

그래서 크다고 마구 불평할 수도 없었다. 그냥 조금만... 후후훗.

(이왕이면 책장에 들어가서 말끔하게 자리잡으면 얼마나 좋아. ㅠㅠ)

페이지 소개한다고 해놓고는 이런 넋두리가 참 쓸데 없겠지만

혹시 구매하시는 분 계실지도 모르니까 참고하시라고 써둔다.

'만족스러운데 크기가 참...'볼 때마다 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바로 이 장면이다.

노란 풍선이 하늘로 둥실 둥실 떠다니며 사막이라든가 바다라든가 여러 곳을 여행하는데

도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이 장면!!

건물이 가득차서 복잡해 보일 수도 있으나 가장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 개인 취향이긴 한데 워낙 그림을 못 그려서

이것저것 사물이 많이 그려진 페이지를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비중을 따지자면 그렇다는 것.

이제 하나하나 차분하게 들여다보자.

 

 

교도소에서 죄수가 탈옥하는 중.

철조망에 이불을 돌돌말아서 무사히 잘 빠져나왔다.

 

 

기차역은 뭔가 설렘을 준다. 캐리어를 끄는 사람, 등에 배낭을 멘 사람,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 반가워서 인사를 하는 모습 등등.

물론 술을 마시고 대낮부터 취해있는 사람도 있다.

 

 

빠르게 대충 봤더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페이지 맨 아래쪽 구석.

건물 옥상에 있는 배트맨!!

건너편 건물에서는 누군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도로에서 토마토 트럭이 쓰러졌다.

그 와중에 품에 한가득 토마토 안고 도망가는사람. 깨알같은 재미를 준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라푼젤도 등장한다.

책 가운데 부분에 있어 이것도 하마터면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피카소 전시회장.

어린이들이 견학하기 위해 줄을 서 있고, 한쪽에 풍선 파는 아저씨도 보인다.

 

 

결혼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 함께 사진 찍는 중.

그리고 이 장면 주변이 유난히 꽁냥꽁냥한 커플들이 많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계단에서, 나무 아래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큰일이다. 어떤 건물에서는 불이 나 위험한 상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다급함, 걱정이 느껴지는데

흰 잠옷 차림에 나이트 모자까지 쓴 사람에게서는 묘하게 무심함, 여유가 느껴진다.

은근 씬 스틸러!  

 

 

그리고 그렇게나 찾고 싶었던 인물!! 저기 저 양탄자를 사는 아저씨다.

이 책은 매 페이지마다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마법 양탄자를 탄 아저씨다.

빨간 양탄자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도시 장면에서는 없는 건가 한참을 찾았더랬다.

포기할까 싶었는데 오기가 생겨서 도대체 어디 숨어 있는 거냐며 이리 들여다보고 저리 들여다봤다.

어머!! 여기 계셨네~ 양탄자를 사고 계셨던 거였음!!

아니 그런데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그냥 이렇게 막 시장에서 쉽게 구입 가능한 거였던가 싶어서 또 막 웃음 나오고 그랬다.

 

 

한 페이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두 페이지만

이렇게 하나의 장면만으로도 시간을 유쾌하게 즐길 수 있다는 거!

게다가 입체적으로 다양하게 잘 그려낸 작가 덕분에

정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기분을 느낄 수 있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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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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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종종 느끼는 게 있다. 어렸을 때는 동갑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누군가와 금방 친구가 되었는데 지금은 그게 참 어렵다고. 지금에야 생각해보면 나이만 같으면 다 친구라는 사고방식은 엄청난 단순함이었고, 아무것도 따질 필요 없이 바로 친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시절만의 순수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나는 가끔 그 시절의 나를 대단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점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서로 마음을 내보이며 친구가 되는 것. 이제 그것은 꽤 드물게 찾아오는 일이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의 간단명료함은 대체 언제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이제는 약간의 경계심, 점점 많아지는 생각, 한 발자국 물러서는 조심성 같은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중이다.

 


문화교류 행사로 일본 고등학교에서 온 쇼코와 동갑내기 나 「쇼코의 미소」,
독일에서 서로를 챙기며 가깝게 지냈지만 베트남전쟁 이야기에 한순간 마음의 거리가 생겨버린 응웬 아줌마와 엄마 「씬짜오, 씬짜오」,
어렸을 적, 할머니의 옷 수선집에 일자리를 얻은 순애이모와 언니가 생긴 것이 무척 좋았던 엄마의 이야기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프랑스 수도원에서 봉사자로 지내며 서로에 대해 알아갔던 나와 케냐 출신의 한지「한지와 영주」,
대학 시절 노래패 활동을 같이 했던 나와 미진 선배, 러시아에 도착해 미진선배를 아는 율랴와 함께 선배를 떠올리고 그리워하는 「먼 곳에서 온 노래」,
딸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은 엄마와 뉴스에 잠깐 비춘 엄마의 모습에 엄마를 찾으러 광화문 광장으로 나선 딸「미카엘라」,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주었던 손녀를 생각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편지를 쓰는 할머니「비밀」.

 


책 소개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은 “서로에 대한 마음의 ‘기댐’과 ‘기댐 받음’”에 대한 이야기다. 책을 읽다 보니 7개의 단편은 저마다 다 다른 인물들과 삶을 다루고 있지만, 알고 보면 그 안에는 친밀감, 그리고 관계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쇼코의 미소」에서 쇼코는 한국에서 머무는 일주일 동안 동갑내기인 소유의 집에 머물게 된다. 지방 도시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공통점, 게다가 같은 나이이기에 두 소녀는 금방 친해지게 된다. 쇼코가 일본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편지를 주고받지만 어느새 연락이 끊기게 되고, 우연히 쇼코 소식을 듣게 된 소유는 대학교 사학년 여름, 쇼코의 집에 찾아간다.  쇼코는 예전의 그 예의바른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소유를 맞이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을 독자들은 느낄 수 있다.

 

  어렸을 때 쇼코가 지었던 웃음과 같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차갑고 어른스럽게 보이던 그 웃음에서 나는 쇼코의 나약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읽었다. 쇼코를 나보다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쇼코는 약했다.
  분명히 쇼코도 그때 느끼고 있었겠지. 내가 쇼코보다 정신적으로 더 강하고 힘센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마음 한쪽이 부서져버린 한 인간을 보며 나는 무슨 일인지 이상한 우월감에 휩싸였다. (「쇼코의 미소」, p.26)

 


  이번 장면은 그랬지만 다음에는 상황이 반대가 되기도 한다. 쇼코는 자신감이 가득하고 잘 지내는 반면 소유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스스로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언제나 대등할 것만 같았던 관계, 그러나 삶이든 마음이든 전반적으로 한쪽은 안정적인 상황이고 다른 한쪽은 위축된 상황이 되면 대개의 사이는 높낮이와 거리감이 생기게 되는 것 같다. 여전히 보고 싶고 생각도 나고 애정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약간의 불편함도 느낀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평형은 점점 깨어지게 된다.
작가는 이런 부분을 다른 단편 속에서도 잘 표현하고 있다.

 

가끔씩 통화를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피상적인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이모는 엄마에게 솔직하지 못했고 엄마 또한 그랬다. 엄마는 살얼음판을 딛듯이 이모의 상처가 닿지 않은 마음들만을 디디려 했고 이모는 엄마가 이모를 조금이라도 가여워할까봐 애써 아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엄마는 심지어 이모가 안양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조차 몰랐다.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그런 태도가 서서히 그들의 사이를 멀게 했고, 함께 살았던 시간 동안 쌓아왔던 마음들도 더 이상 그 관계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p.114)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멀어져서 더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후자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p.115)

 


  소설 속 인물들에게는 한때 상대에게 무엇이든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던, 끈끈하고 소중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때만큼은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상관없이 오로지 너와 내가 중심이었던 시간이었다. 우리는 상대의 아픔과 기쁨에 공감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기댔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주어진 환경과 삶 속에서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고 그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그렇다 보니 사람은 어느새 변한다. 사실 변화는 나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단지 그 변화라는 게 사람 사이에서 마음의 형태, 기댐이 더욱 견고해지는 방향이면 좋겠지만, 대부분 단단함에서 약해지는 쪽으로 변해가기에 안타깝고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프고 슬프겠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그 특별함이 여전히 계속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언제까지고 그 생각에만 머무를 수도 없는 일이다. 이미 일어난 일이라면,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냥 받아들이고 흘러가게 둘 줄도 알기를. 때로는 자신의 마음을 위해서 우리는 그래야 한다.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을 언제나 기억한다. (「한지와 영주」, p.16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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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의 나는 당연히
지금의 나보다 더 순수했을 것이다,착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우연히, 그냥, 무심코 학창시절에 썼던 일기를 읽게 되었는데
읽는 순간 "누구세요?"라고 물을 뻔했다.
욕을 대놓고 안 썼다 뿐이니 격렬한 표현이 난무하다거나
때로는 너무 진지해 어떻게 하면 이런 문장이 내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아, 질풍노도의 시기란 이런 거구나. 일기장 속에는 솔직하고 날 것 그대로의 내가 있었다.
가끔은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유치함까지 보이니 자꾸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글씨체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

 


그래도 일기를 읽으며 그 시절의 좋았던 추억들도 새록새록 떠올라 재미있더라.
일기든 아니든 무언가를 쓸 때는 이왕이면 그 순간들을 자세히 써놓는 게 좋다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다.
상대방의 이름과, 주고 받던 대화라든가 말이다.
단순히 무슨 일이 있었다고 기록하는 것보다 당시의 분위기를, 기억을 더 잘 살려준다고나 할까.
왠지 모르게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기분마저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귀찮다며, 쓸 게 없다며 일기쓰기를 멈췄었는데 이제는 종종 쓰도록 노력해봐야겠다.
나중에 유치하다며, 왜 이런 글을 썼을까 또 혼자 부끄러워하더라도 이것은 글로 남기는 사진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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