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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 도덕을 추구했던 경제학자 ㅣ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다카시마 젠야 지음, 김동환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2월
평점 :
일본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였던 다카시마 젠야는 기푸현 출신으로 도쿄 상과 대학을 거쳐, 전쟁이 끝난 직후 도쿄 상공회의소의 교수를 역임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히토쓰바시 대학 및 간토 가쿠인 대학의 명예 교수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왕성한 저술 활동과 더불과 강단에서의 경력을 마쳤던 그는 지난 1990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이력에서 조금 흥미롭던 부분은 경제학자로서 일본 제국주의 시기를 온전히 경험했다는 점과 사회주의 운동으로 당국에 투옥된 이력도 있었는데요. 이런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학자 치고는 미국과 유럽에 이름이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책과 관련해 개인적으로 평가하고 싶은 부분은 저자인 그가 오랫동안 마르크스 연구를 해왔던 학자이고 마찬가지로 마르크스 연구를 위해 애덤 스미스의 연구까지 오랫동안 해왔던 부분은 꽤 적절한 객관성을 답보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앞선 일본 제국주의를 살다간 지식인으로서 일본의 근대화를 짤막하게 논하고 있는 부분도 꽤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이 책은 1968년에 초판, 이후 1990년에 개정판이 나왔으며, 일본의 유명한 지식 관련 출판 시리즈인 ‘이와나미 시리즈‘의 구성 도서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국내에는 2020년 2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자인 다카시마 젠야가 많은 지식인들의 틀에박힌 애덤 스미스에 대한 연구를 약간 비튼 것으로 보이는, ˝이들 모두는 자신이야말로 스미스를 가장 잘 파악, 발전시키고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흔히 신자유주의의 이론가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이 자유시장 경제학의 사조로 이 애덤 스미스를 무분별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무분별이라는 단어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이 어떤 계층에 의해 너무 획일적으로만 이해되고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약간 다른 부분이지만 저는 한때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한 매우 편파적인 입장을 갖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후에 여러 다른 독서를 통해 스트라우스가 그래도 사회과학 발전에 일정 부분 기여한 점을 인정하게 되었는데요. 물론 저들의 애덤 스미스에 관한 오독과 잘못된 이해를 앞선 스트라우스의 경우에 빗댈 수는 없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점은 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의도적으로 곡해하고 있으며, 원래 스미스의 입장과는 달리 ‘무차별적으로 축적되는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마찬가지로 스미스가 동조했다는 식의 여러 불합리한 서술이 비슷하게 중요한 주장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여기 다카시마 젠야의 이 책이 이러한 애덤 스미스에 대한 일부 인식의 편의주의와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일정 부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애덤 스미스는 영국 도덕철학의 사조인 데이비드 흄과 개인적으로 가까웠던 것으로 이 책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점을 들어 애덤 스미스의 ‘도덕주의적 인식론‘을 연결시키는 것은 그 범위가 조금 과도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원래 그는 사상가이자 도덕철학자로 이름을 알린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스미스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오랜 정치적 갈등 그리고 1707년에 이르러 두 국가가 합병이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정치적 혼란기에 가톨릭 사회와 그 반대의 사회의 결합, 그리고 그러한 사회상의 도덕주의 문제를 꽤 중요하게 관찰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꽃을 피우기 전에 인간 관계 및 사회 구조 전반의 고찰을 요구했던 이 ‘도덕주의 철학‘의 필요성은 스미스에게도 중요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스미스의 이 도덕철학의 함의를 일정 부분 알리지 않는데 주력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들이 보기에는 자유 방임주의자가 도덕 철학을 운운하는 것이 뭔가 맞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겠죠. 마찬가지로 저자는 6장에서 당시 독일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스미스 비판을 재반박하면서 여러가지 입장을 재정립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스미스가 ‘자유방임‘의 신봉자라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국부론에서 인용되고 있는 바와 같이 스미스는 꽤 노동자에 대한 애정을 피력하고 있었으며, 경제학과 관련한 스미스의 근본 사상은 ˝모든 시민은 본래 자유롭고 평등해야 하기 때문에 같은 양의 노동 (생산물)은 같은 양의 노동 (생산물) 과 교환되어야 하며, 이는 자유경쟁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면 반드시 실현될 결과인 동시에 정의의 법과도 통한다˝고 언급합니다. 이는 스미스가 말하는 가치법칙의 본질적 내용이며 때때로 등가교환의 법칙의 주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진술과 구체적으로 반대되는 것은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적잖은 노동력의 소모가 있다 하더라도 무조건 자본가에 이득이 되면 그만˝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동안 왜곡된 자유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꽤 공을 들여 애덤 스미스를 ‘자본가의 이론적 화신‘으로 홍보해 왔는데요. 이 부분에서의 본질적인 문제는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곡해하는 것을 넘어 그의 저서를 반쯤 혹은 절반에 미치지도 않는 몇가지 짜맞추기식으로 자신들의 사조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인용해 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 자체를 어떤 ‘악(惡)‘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을 강화시키는 것에 너무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 사상가의 저서를 인용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죠. 즉, 열 가지의 진실은 그 열가지 진실이 모두 밝혀졌을 때 진정성이 있는 것이며, 그 중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를 말하면서 진정성을 논하는 것은 크게 양심을 벗어나는 일이라 밝혀두고 싶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애덤 스미스가 중요시했던 사유 재산의 문제라든지 스미스가 살았던 당시의 꽤 진취적인 경제 활동에 대해 거의 동의하는 편입니다. 지금처럼 왜곡된 소비 자본주의에 바우만과 같은 사회학의 거장들은 이를 비판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충분한 소비 또한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중에 하나인데요. 문제는 5장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더이상 장미빛 낙원을 약속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자유주의 경제에 경도된 지식인들과 학자들이 이 보이지 않는 손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인용한다 하더라도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겠죠. 역시나 이 부분에서도 파악되는 것은 신자유주의자들 대부분은 거대 자본 계급의 이익과 노골적인 자본 축적을 옹호하는 이론으로서의 애덤 스미스를 오용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일반적으로 토마스 멜서스가 가난한 계층에 대한 혐오와 소위 생태사회적 격리에 집중했던 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권력 상황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저소득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에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과 일맥 상통합니다. 이 책에서도 짧게 논의되고 있습니다만 찰스 다윈을 오독한 사회진화론자들이 인간을 분류해 ‘낙오시키고 격리시키고자 하는‘ 잣대로 계층을 이해한 것도 마찬가지로 아주 명백한 관점입니다. 체제 자체를 ‘인간성‘을 제외하고 ‘도덕‘을 제거해 오로지 자본 축적의 용이함만을 찾는 것은 그야말로 전체주의보다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이 책을 일독하게 됨으로 제가 얻은 한가지 귀중한 인식은 애덤 스미스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프랑스 혁명에 대한 그의 의견이 오늘날에 전해지지는 않지만 반대로 혁명 자체를 그가 좋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젠야 교수가 언급하는 스미스의 사상 곳곳에는 노동자들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약간 상이한 예이기도 하지만 스미스가 일반 인민에게 맡겨서는 안 될 주권자의 의무에 대해 ˝첫째는 국방의 의무이고, 둘째는 사법의 의무이며, 셋째는 공공 토목사업 및 청소년 교육에 관한 의무˝를 들고 있습니다. 이는 종래의 스미스가 오로지 ‘야경 국가‘로서의 국가론만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반론이 되기도 하겠습니다. 물론 앞선 두번째의 의무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법의 지배에 따른 다른 형식으로 구현되고 있기도 합니다만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봤을 때, 스미스가 진보적인 근대화 내지는 일정 부분 미래의 시민사회의 단편을 그려본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스미스가 말하는 인간의 이기심이 어떤 식으로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좀 더 건설적인 연구가 필요하며, 노골적인 자유 방임을 부르짖는 일반적인 다수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자들의 터무니 없는 주장들에 대해 변별력을 가질 수 있는 시민들의 건강한 판단력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기로 생각됩니다.
시민사회란 전 시대의 사회에 비하여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며 문명화 된 사회을 의미한다
스미스가 자유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사유재산의 절대불가침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에서 자유경쟁이란 것은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약육강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사회상태가 아니라 홉스가 말한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상태, 즉 자연상태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스미스는 지주나 자본가에 대해 이렇듯 엄격한 태도를 취했던 반면 노동자에 대해서는 지극히 따뜻한 심정을 드러냈다
사실 방임이라는 말은 별로 어감이 좋지 않은 데다 자유주의나 개인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근원이 될 수도 있다
지금도 정부는 값싸고 작을수록 좋다는 것이 자유주의자가 갑는 일반적 견해인 것으로 통념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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