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
제랄드 브로네르 지음, 김수진 옮김 / 책세상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프랑스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작가인 제랄드 브로네르는 파리 디드로 대학의 교수이자 프랑스 인지 사회학 분야의 저명한 이론가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인종 혐오와 종교적 맹신과 같은 사회 현상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특히 프랑스 정부가 주도한 ‘지하디스트 급진화 예방 프로그램‘에 참여한 바가 있습니다. 물론 저 지하디스트 급진화 예방 프로그램‘이 과거 미군에 의해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의 전쟁 포로 학대와 같은 음험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만 이 프로그램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으리라 됩니다. 프랑스는 이웃 국가인 영국과 유사하게 중동에 있어서 이해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어떻게 인간을 폭력적이고 급진적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관심일 뿐만 아니라 근래 몇년 동안 유럽 사회학 학계에서도 이와 같은 맹종과 맹신에 대해 관심이 많기도 했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알제리와 튀니지 출신의 이슬람 이주민들이 이미 상당수가 유입된 상황이기에 자국내에 현존하는 이슬람 사회와 정치문화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상황임은 다들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면에서 저자는 ‘혐오감에 대한 사회학적 의미‘와 같은 논문을 쓰기도 했고, 지금 소개해 드리려는 이 책에서도 개략적으로 포용된 민주주의 및 민주정치가 어떻게 ‘쉽게 믿는 자들에 의해 위태로울 수 있는가‘에 대한 앞선 함의가 일정 부분 연관되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자가 언급하는 민주주의의 3요소인 ‘알 권리와 말할 권리 그리고 결정할 권리‘의 기본적인 토대가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꽤 신중하게 의견 피력을 하는 것으로 일단 짧게 나마 이 책의 주요 주장을 갈음해 보려고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13년 원제, La démocratie des crédules 로 프랑스에서 출간 되었으며, 국내에는 2020년 12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오늘날 광범위한 인터넷 검색 시스템을 비롯한 손쉬운 정보화 시대에 있어서 구글과 같은 거대 인터넷 기업이 편의적인 검색 체계를 도입해 일종의 ‘인지 시장‘을 주도하는 상황을 저자는 꽤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검색을 통해 제공되는 정보 자체의 신뢰성을 차치하더라도 페이지에 나타나는 글 전체를 제대로 보지 않고 대략 특정해서 받아들이는 시민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저자는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었는데요. 이 글의 1장과 2장은 이러한 매커니즘에 대한 신랄한 평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하고자 하는 ‘쉽게 믿는 자들‘이라는 관점은 ˝과거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의 과학자들이 이미 완성한 화성 식민지에 임기내에 몇 번이나 방문했다˝와 같은 음모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귀가 얇은 자들이 인지 편향과 확증 편향을 통해 ‘신념화‘하는 과정을 2장에서 소개하는 ‘찰스 포트‘를 통해 약간의 이론화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개하는 찰스 포트는 자신이 이 세계의 모든 지식을 흡수해 두각을 나타내 보이겠다는 황당한 야망을 가진 사람이었는데요. 이러한 그의 집착은 후에 ‘포티언‘이라는 일종의 괴현상을 발생시키기도 합니다. 이 찰스 포트는 지구가 평평하다는 주장을 철썩같이 믿기도 했습니다. 그에 대한 저자의 첨언에 의하면 그는 ˝미치광이도 그렇다고 바보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 음모론자들이 정신병이 있거나 편집증적인 증상이 있을것이라는 추측은 상당 부분 잘못된 것이죠.

이와같이 근래 대표적인 음모론의 역사는 ‘9.11 테러를 미국의 CIA가 일으켰다‘는 주장과 유사한 것들입니다. 많은 증거를 갖고 있는 지극히 당연한 사건에 대해서도 의심을 갖고 파헤치는 수많은 인터넷 탐정들과 이것을 조장하는 많은 시민들, 그리고 심지어는 ˝그 어떤 부류의 직업보다 정보의 신뢰성과 경쟁 간의 모호한 관계에 직면한 당사자들‘인 기자들에 의해서도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조장됩니다. 이를 아주 간단히 얘기하면 이러한 가짜 정보들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돈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이를 획책하는 이들에게는 과도한 관심과 지명도 혹은 업계의 선구자와 같은 허위로 과대 포장된 일종의 정신적 고양감을 가져다 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세상에 너무나 할일 없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모든 걸 일축해 버리는 소리로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광범위한 현상의 결론에는 ‘전체주의‘가 좀 더 가까워지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기에 이는 우리의 민주주의 정치에서 뿐만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도 꽤 불안한 현상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즉, 히틀러에 의해 시작된 나치는 처음부터 단순한 궤변을 넘어서는 황당한 논리들로 다수의 독일인들을 세뇌시켰기 때문입니다.

저자인 브로네르는 이같은 병적인 현상들에 있어 과연 대중이 특유의 비범함을 보이며 일축시킬 수 있겠는가에 대한 질문에 다소 확답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다수의 목소리를 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이것은 그 사람들의 교육 수준과는 상관이 없는 어느 정도 순수한 증오가 기반되어 있죠.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역사에서 전체주의를 통해 생생히 목격을 한 바가 있고 오늘날 비일비재한 인종혐오라든지 성차별 및 소수자에 대한 증오는 맹렬힌 포퓰리즘과 결합해 현재 유럽 사회에서는 분명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심스레 저자는 ‘신념화에 대한 맹신과 맹종에는 부족한 교육 수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만 민주주의의 상대주의적 관점도 이를 ‘다양한 의견의 개진‘이라는 압묵적인 수용도 분명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독일과 프랑스에서 보이는 ‘과거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인정하는 않는 수많은 의견들˝에 대해 법적인 처벌을 하고 있는 연유에는 건전한 사회를 터무니 없는 파편화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일겁니다. 사회의 안전성을 거부하고 불안과 폭력을 조장하는 수많은 음모론들의 이면에는 민주주의 자체에 거부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 사회가 이만큼 취약하니 ‘말할 권리‘로 포장하여 일종의 인간의 불확실성을 더욱 조장하는 것이겠죠. 그러다가 소수 전문가의 권력이라든지, 더 나아가서는 엘리트들의 소위 과두제의 필요성의 불이 붙을 것입니다. 여기에 버틀런드 러셀은 그다지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인간이 불확실한 존재‘임을 특유의 휴머니즘적 관점으로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회 계약이라는 것도 인간들의 불확실성을 의한 불안 요소를 방지하고자 고안한 장치일 수도 있을테죠. 물론 오로지 자신들의 주장만 존재하는 (과학적 증거와 논리적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음모들과 거짓 정보들에 대해 시민들이 어떠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겠느냐에 대한 물음은 이러한 인터넷 시대의 우울한 측면임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회의적인 측면을 넘어서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것으로 분화되고 확장되고 있는데요. 일례로 ‘고삐풀린 정보 자유주의‘에 기반한 폭력적인 정치 현상인 ‘포퓰리즘‘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과거 도널드 트럼프가 오바마 전 대통령에 대한 출생지 불분명과 같은 주장에 대해 이면에 담긴 인종혐오와 더불어 이같은 거짓 정보를 심지어 우리나라 정치인들까지 인용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교육 수준과 지능의 문제에 국한된 것은 아님은 확실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자고 하는 것은 분명 안될 일일 것입니다. 다만, 이 글 5장에서 밝히는대로 ˝전문가들의 평가가 대체로 안전한 정치적 결정을 기반해주는 현실˝과 관련된 사항 전부를 토론의 장으로 초대됨으로서 이 세계에는 전문가의 권위와 과학의 실효성이 점차 거부되고 있는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전문가들의 권력 자체가 남용되는 것은 민주주의 자체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특정한 전문 영역에 대한 일반인들의 논증 없는 거부감 또한 전반적인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죠.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저자와 약간 생각이 다른 점이 민주주의가 일찍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다양한 토론에 대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결코 부정해서는 안되며, 특히 정치와 관련된 문제는 그 매커니즘이 전문가의 영역에 걸쳐 있다 하더라도 시민들이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전문가 역시 증거에 기반한 논법과 제안을 피력하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증거에 기반한 결정 사항에 판단을 내린 정치 권력 자체에 반감을 가져서는 안되지만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돈과 권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양심에 의거해 발언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바로 막스 배버가 비슷한 취지로 소위 전문직종의 양심을 강조한 이유일 것입니다. 따라서 테크노크라시‘와 같은 문제를 시민들이 합리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전문가의 권위가 다소 퇴색되더라도 민주주의의 공개적 발언의 장이 마련되어 오용되는 전문 지식을 구별하고 견제하는 기능이 한편으론 마련되어야 합니다.

인류에게 있어서 민주주의가 완벽한 정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수에 의한 소수의 억압과 같은 문제와 민주주의 성격상 혼란한 정치 상황 자체는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주장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베트남이 자신들의 정치 문제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할 수 없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수많은 의견을 포용하거나 혹은 인정할 수 없는 그룹이나 특정 계층을 민주주의가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겠느냐의 물음도 있겠지만 보편적 상대주의라는 것은 소수를 억압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자들 조차도 민주주의의 이러한 보편적인 상대성에 말할 권리를 보장받은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수많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보호받고 있지만, 민주주의는 적나라한 비판까지도 수용할 수 있어야만 하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민주주의 자체가 많은 결함을 가진 불완전한 사상이라고 힐난하기 이전에 이러한 건전한 기반을 거리낌없이 이용하는 자들을 일차적으로 먼저 비핀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4장에서는 ˝귀가 얇아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포퓰리즘이 꽃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저자는 전제하며, 포퓰리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가장 명예롭지도 못하면서도 가장 많이 공유되는 성향에 주어지는 정치적 표현이라는 다소 온건한 설명을 곁들이고 있습니다만 이 포퓰리즘이 우리의 판단 착오로부터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와는 별개로 저자의 통찰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증오와 분노를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이 포퓰리즘이 과연 어떤식으로 귀결되지에 대해 그리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앞선 독일과 프랑스의 나치 부정에 대한 볍률과 마찬가지로 포퓰리즘이 돌이킬 수 없는 어떤 폭력과 죄없는 자들의 막대한 희생을 치루고서 겨우 ‘포퓰리즘 방지법‘과 같은 터무니없는 사후 약방문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뭔가 수사에 불과해 보일지도 모르는 우리의 지식 정보 사회가 일정 부분 제도권의 교육이 하지 못하는 일들도 하고 있기에 이른바 선한 행동을 추동하는 집단 지성의 존재 등과 같은 긍정적인 신호 또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모두가 자신들의 이성이 현명한 정치로서 발휘될 수 있도록 간절히 바랍니다.

같은 사회적 공간에 소속된 주체들 사이에 엄격한 협정을 맺어야만, 자유화가 진행 중인 다른 인지 시장에서 나타나는 주된 경향을 저지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인민을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정치권력의 통제를 위해 다소 형식적인 공간을 늘 마련했다

여성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캐럴 패이트먼이나 사회학자인 벤저민 바버 같은 이론가들은 시민 모두가 공적 사안에 뛰어드는 것이 진정한 정치적 자유의 조건이라고 보았다

다시 병에 대한 비유를 빌려 말하자면, 필자는 민주주의가 특벙한 기술적 여건 아래에서만 드러나는 유전병을 앓고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한 집단이 사화적 가변성의 관점에서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인간의 사고를 이루는 불변요소들 때문에 오류를 향해 수렴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어떤 포퓰리즘은 인미의 외국인 혐오증을 먹고 살고, 또 어떤 포퓰리즘은 부자와 권력자에 대한 인민의 혐오를 먹고 살며, 또 다른 포퓰리즘은 평등에 대한 인민의 지나치게 단순화한 인식을 먹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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