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국식민지화 - 담론과 권력
Alexis Dudden 지음, 홍지수 옮김 / 늘품(늘품플러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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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코네티컷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이자, 특히 일본제국주의 시대와 관련된 동북아 역사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 온 알렉시스 더든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학자입니다. 지난 2015년, 일본 종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 내 역사학자 성명을 이끈 공로로 만해평화상을 받은 이력이 있는데요. 당시에 일본 아베 정권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그녀의 ‘일본의 한국식민지화’라는 이 글 또한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연구라고 생각되는데요. 다만 이 책에 대한 서지 정보가 확실히 잡히지 않아 구글링을 하게 되었는데, 출판 연도가 2004년으로 나와 있지만 정보가 정확한지는 약간 불명확합니다. 이 점 양해 말씀 드립니다. 국내에는 출판사인 늘품플러스가 2016년 번역 출판하였습니다.

알렉시스 더든이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점은 이렇습니다. 1차대전 발발 이전의 제국주의 시대에서 야만국은 마땅히 문명국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계몽적 통치’에 대한 해석과 이를 바탕으로 일본이 근대화 된 군사무기로 팽창에 나서지만, 그것보다 “권력 다툼에서 군사력만이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넘어서 일본이 이 시기의 국제법과 국제조약 및 외교용어들을 조선과 청나라에 능수능란하게 교묘한 술수로 사용하며 팽창주의의 합법성을 얻으려고 한 이면을 파헤치고자 쓴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장황하지만 결국 요점은 “이른바 문명 국가들은 야만적인 국가들을 합법적으로 정복하고 통치할 수 있다”는 당시 식민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론적 잣대인 계몽적 통치와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조선을 병탄하고, 당시의 조선을 야만국으로 규정한 일본의 외교적 술수에 대한 분석이 주된 요점입니다.

일본은 1853년 미국 매튜 페리 제독의 흑선에 의해 소위 불평등 개항을 강제로 맞게 됩니다. 당시의 일본 식자들은 이러한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이 후에 일본이 기준에 맞는 힘을 되찾게 될 때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그것보다도 도쿠가와 막부가 붕괴하고 일왕이 전면에 등장하는 정치적 격변의 시기와 부분적 근대화를 통한 국력을 신장한 경험으로 자신들의 제국주의 시대를 열게 되는데요. 물론 저는 이 점을 옹호하고자 저런 수사를 붙인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알렉시스 더든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짤막한 평가인 “일본제국주의 역사 속에는 한국, 중국, 그 밖의 도처에서 강제로 이주당해 공장과 군막사에서 노동자로, 성노예로 착취당한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가슴 복잡한 이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지금도 일본의 대다수의 지식인들과 무지한 시민들은 2차대전 이전의 아시아에 대한 침략행위가 일본제국이 종말을 고함으로써 끝났다고 동시에 그 책임이 소멸했으며, “일본의 팽창주의 산물인 제국이 붕괴된 후 반세기가 지난 현재,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 서로 다른 방법을 이용해 마치 입을 맞춘 듯 서로 도와가며 역사적 과오를 정화하하려고 하고 있다”고 저자 역시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글의 시작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의 진화론적 사회학에 입각해 유럽 제국주의의에 의한 식민통치를 번영이라 여기고 이 왜곡된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여기고 있던 당시의 시대상이 저자인 더든의 글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일찍이 E. H. 카는 1차대전 이전의 이러한 이상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평화 분위기가 끔찍한 대전의 원인이었다고 여기는 것에 한편으로 동의가 될 만큼 이들은 자신들을 문명국이라 자처하면서 번영의 시대라고 여기고 있었죠. 가까스로 신흥국의 반열에 들어선 일본은 자신들도 역시 열강의 틈바구니 안에 들어가길 원했습니다. 여기에는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international 인터내셔널, 국제 및 국제주의와 국제법과 관련한 당시 동아시아에는 생소했던 이들과 관련된 연구를 일본인들이 끊임없이 지속해 왔고 이것이 단순한 상업행위를 통한 교역을 야만과 비야만을 구분하는데 그치지 않고 도로 조선과 청나라를 야만으로 규정하는 데 교묘히 쓰였다는 점에서 통렬한 감정이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의 정한론과 조선 병합의 목적을 추구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 말려들어간 이유도 이와 같이 인도주의적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얼마나 교묘한 언술에 지나지 않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들 손으로 더러운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이완용과 송병준 같은 부역자를 이용해 추잡한 짓을 벌인 일은 일본인들이 과연 인도주의와 정의를 입에 담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저는 이 미국의 여류 역사학자의 이 연구에서 특히, 일본이 당시 조선을 의사-독립국으로 여긴 점이 관심을 끌었는데요. 조선이 법적으로 청나라 속국이었던 것은 명백했지만 독립국으로서 조선 국왕이 자주권으로 통치하고 있었으나 이 중국 대륙에 의한 전통적인 동아시아 정치적 관계를 잘 알고 자신들도 그러한 범주안에 속해 있던 일본이 그것을 모른척하면서 조선을 독립과 자주권을 주장할 수 없는 국가로 술책을 부린 것은 1870년대 초 일본에서 불던 정한론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는 노골적인 야욕이라고 해야할까요. 저자도 분명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강화도 조약으로 시작해 1910년 말장난에 불과한 대한제국 병탄을 한일합방으로 포장하기까지 면밀한 정치외교적 과정을 꼼꼼히 갖춰나가면서 당시 열강국들로부터 승인받으며 대한제국 편입을 마무리 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심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1943년 미드웨이 해전 패배 후 미국과의 단독 강화 시도를 통해 만주와 대만, 한반도의 지배 만이라도 유지하려고 했던 일본제국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바로 3장이 일본의 동아시아 침탈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국제법과 국제용어 해석과 이론 습득에 나선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조선 사법권 박탈과 관련된 프랑스인 구스타브 봐소나드의 일화가 쓰여져 있는데요. 저자인 더든이 이런 사례까지 조사한 것은 한국 학자들보다 더 치밀한 연구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한국의 국사학계가 당시 메이지 유신에 대한 천편일률적 해석과 일본의 근대에 대한 지속적인 폄하를 해오고 있는데요. 저는 지금이라도 우리 학계가 이것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에 많은 학자들은 1905년 태프트-가쓰라 밀약과 1902년 이후 영일동맹이 갱신되면서 인도와 대한제국을 맞교환한 영일 양국의 우호조약에만 신경쓴 나머지 이것만을 알파와 오메가로 여기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한론에 대한 연구도 이런 차원에서 다시 조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끝으로 오늘날의 일본인들과 일본 정부가 2차대전 종전 이후, 과거의 일본제국과 미군에 의해 민주정치로 개조된 자신들의 현재 정부가 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과거 제국주의의 유산과는 다르다고 선을 긋고는 있지만 전후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주의적 입장과 종래의 평화헌법 개정과 관련된 시도에서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우려를 금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사과가 국격의 손상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태도에서 앞으로 역사 문제 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까지 일본과 관련된 요건들이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지는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어 보입니다.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이 알맹이가 빠진 협력 운운이 차라리 아예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이 역사 문제가 과연 해결될 문제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는 모두가 답을 짐작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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