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토마스 홉스 지음, 이준호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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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크 루소와 사회계약론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위대한 주저 ‘리바이어던’의 저자인 토마스 홉스의 ‘인간론 (On Man)’을 읽었습니다. 홉스의 이 책은 얼마전에 서평을 쓴 코리 로빈의 ‘보수주의자들은 왜?’에 인용이 되어 참고로 읽게 되었는데요. 뒤이어 연결되는 홉스의 ‘시민론’을 읽기 전에 이 ‘인간론’을 먼저 읽는 것이 개인적으로 필요해 보입니다.

이 책을 구입하기 전에 너무 얇은 분량이라 과연 완역본일까 고민을 했는데요. 하지만 따로 대안은 없었습니다. 다만 따로 삽입된 해설에서 홉스의 인간론 영역본이 1장부터 9장까지 인간에 대한 직접적 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서 편집이 되었고 바로 이 영역본을 번역한 것이 이 글인데, 결국 10장부터 15장까지의 분량을 책에 실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역본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토머스 홉스가 프랑스 망명 중에 불어본으로 이 글을 출판해서 아마도 그런 연유에서 영역본이라는 판본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보는데요. 따로 찾아보지는 않았습니다. 이 점 양해 말씀 드립니다.

여기에 할애된 분량은 언어와 학문, 욕구와 혐오, 만족과 불만 그리고 그 원인에 관해, 정념 또는 정신의 동요에 관해, 기질과 태도에 관해, 종교에 관해, 인공 인간에 관해로 분리되어 있는데요. 한 가지 특이할 만한 부분은 마지막 장인 15장 ‘인공 인간에 관해’에서 보듯이 일종의 물리학과 자연법칙 등을 넘나들며 이론의 수단으로 취합하는 홉스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는 당시 영국 귀족의 교육이 여러 방면의 전인을 만들어내기 위한 방편으로서 나타난 결과가 아닌가 추측하면서, 이러한 다방면의 이해도를 갖춘 사상가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지식인과는 조금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스스로 수용한 학문의 밀도 격차가 있어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홉스도 도박에 중독된 불우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삼촌의 배려로 당시 귀족의 준하는 교육을 받은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실로 크나큰 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홉스가 인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유한 ‘인간의 그 기질’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규명하고 구분하는데 수단인 언어를 비롯한 학문, 의지와 무관한 감정 상태인 여러 상반되는 개념들과 인간 고유의 특징이라고 봐도 무방한 정념에 대한 홉스의 부정과 가까운 태도는 흥미로웠습니다. 이러한 홉스의 태도는 이를테면, 언어가 학문을 만들어내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언어의 단점인 ‘오류와 망상의 원천이기도 하다’라고 서술하는 것에서는 그의 면밀한 이성적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홉스는 익히 알려진대로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이기적이라고 언급한바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후에 토크빌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장 자크 루소도 마찬가지로 ‘특별한 계약 상태’ 에 따른 인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사상의 많은 부분을 천착해 왔습니다. 다시 홉스로 되돌아와서, 그가 이렇게 양쪽의 대비되는 가치들을 서로 연계하여 분석하고 이를통해 균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명확한 의미 부여가 되지 않나 판단해 봅니다. 더 나아가서는 “홉스가 인간의 정신을 과학적 방법으로 탐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역자의 해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인간 정념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종교에 대한 제한적인 의미 부여, 즉 ‘신앙은 법률에 따른다’ 와 같은 경우도 홉스가 얼마나 현실 전제 왕권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영국의 성공회가 국왕에 귀속된 상황에 대해 옳다고 믿었던 것 같고, 이러한 측면의 입장은 영국 국왕의 종교 수장으로서의 지위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도 느껴집니다. 여기에 인간 괘락의 감정에 대해 이것은 ‘경험적인 것’이라고 밝히며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서도 확실하게 홉스가 이성의 우위나 이성의 감정에 얼마나 주안점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끝으로 인문학 특히 역사학이 유용하다고 언급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로서 가늠해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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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의 기원 - 패권 경쟁의 격화와 제국체제의 해체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논저) 612
박상섭 지음 / 아카넷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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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와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서울대 명예 교수로 있는 박상섭 선생의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일독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접해왔던 1,2차 양차대전의 글들은 주로 영미 출신 학자들의 주저였습니다. 대중적으로도 명성들이 있어서 일반 독자들에게도 익히 관심을 받고 있는데요. 여기의 박상섭 교수의 책은 국내 연구자가 쓰고 종래의 전쟁사 기술과는 다른 1차대전 참전국 5개국의 외교, 정치, 군사적 상황을 바탕으로 이것이 어떻게 거대한 전쟁으로 이끌었는지에 대한 치우치지 않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싶습니다. 사실 이 책을 손에 쥔 이유는 며칠전에 서평을 쓴 로버트 거워스의 ‘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에 대한 다른 보론이 필요해서라고 먼저 밝히고 싶은데요. 이 책을 이틀 내내 읽는 동안 막힘 없이 수월하게 읽혀졌고, 꽤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이 책을 위해 준비한 박상섭 교수의 온전한 연구 노력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기존의 1차대전 연구들은 서부전선 당시 지독한 참호전과 독가스 살포에 집중하며 군사 작전에 보급과 지원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의 사라예보 암살사건이 전통적으로 큰 분기점으로 이해되었지만 점차 이것은 여러 요인 중에 하나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즉, 동맹과 협상국에 따른 국제 관계의 불안정성과 각국의 잘못된 정보로 인한 판단 실책 등의 복잡한 정치외교적 행위가 거대한 확전을 불러 일으킨 중요한 근거로 해석되고 있는데요. 이에 저자인 박상섭 교수는 큰 틀에서 영국-독일, 오스트리아-러시아의 대립축이 대전의 원인이었으며 심혈을 기울인 독일 제국 재상 비스마르크의 이전 독일 중심의 비스마르크 체제가 독일 황제의 친정체제로 전환된 것도 여기에 일조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사실 비스마르크에 의해 보불 전쟁을 통한 독일 제국의 탄생은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지속하여 후발 제국주의적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싶어하는 독일 황제와 독일인들의 야망을 현실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독일 해군 건설에 따른 영국과의 갈등이 해결 불가능한 문제였고, ‘범슬라브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던 세르비아와 갓 보스니아 지역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빼앗아 편입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러시아에 대한 오판과 정치적 패착 등 이 두 개의 큰 골격의 첨예한 갈등이 전쟁을 터무니없이 확전시킨 이유가 되지 않았나 판단해봅니다.

물론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암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최후 통첩을 내리고 나서 그 기간의 각국의 정치외교적 행위가 이해관계에 따른 돌이킬 수 없는 결과에 이르고, 그것의 기름을 끼얹은 러시아 제국의 총동원령이 독일의 총동원령과 선전포고에 이르러 확전이 되었다는 기존의 학설 또한 충분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러일 전쟁 이후 러시아가 지역내에서 종이호랑이 취급을 받으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및 독일 제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러시아 제국이 극심한 수모를 당했다는 피해 의식과 관련하여 “러시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및 독일에게 겪은 수모감이 1차 세계대전의 반발과 관련된 수많은 요인 가운데 하나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임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덧붙입니다. 반대로 영국은 유럽 대륙 자체에 대한 기존의 중립적 태도가 일관될 것이라는 초기 독일 외교의 오판과 중립국 벨기에와 동맹인 프랑스의 안위가 걸려 참전했고, “1차 세계대전 주요 참전국 5개국 가운데 유일하게 프랑스는 참전을 원하기 보다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발을 들여 놓은 나라이다” 라고 구분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런 초기 정치적 상황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손보고, 이 ‘범슬라브 민족주의’를 성공적으로 제거하고 발칸에서 교두보를 마련하는 정도의 한정되고 제한된 전쟁으로 오판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원인일 것입니다. 영국이 러시아와 밀접한 동맹 관계도 아님에도 프랑스와의 동맹인 관계로 그 지원에 나설 수 밖에 없는 것도 참고해야 될 부분이겠죠.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될 사실은 전장의 주요 무대였던 발칸 반도가 오스만 제국의 급격한 영향력 축소와 정치적 퇴출로 인해 힘의 공백이 발생했고, 이런 상황에서 이 지역내의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갖기 시작했으며,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를 거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종전 후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앞선 것으로 아마도 세르비아처럼 오래전 독립국가였던 국가의 민족이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나 ‘민족국가’를 세우고 싶어 하는 열망은 공감이 되나, 보스니아 지역의 사람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호에 들어가면서 오스만 제국 시절과는 다른 기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조금 생각해 볼만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프랑스와 맞닿은 서부전선을 신속히 제압해 프랑스를 굴복시킨다는 ‘슐리펜 계획’에 대해 저자는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즉, 온전한 철도 기반과 보급 문제 해결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독일 군부와 정치권이 ‘리더쉽이 결여된 채’로 이러한 낙관적인 기대만으로 이 계획을 만들었고 다소간의 독일 제국 인사들의 터무니 없는 낙관주의가 전쟁을 오판하게 된 것이 아닌가하는 개인적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독일 제국 황제의 전쟁에 대한 다소 우유부단하고 수동적인 태도도 병사들을 사지에 내몰면서도 이들을 지휘할 엘리트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무책임했는지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각 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전쟁 후반기의 극심한 소모전과 독일의 루덴도르프 공세가 실패로 끝나면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불러온 미국의 참전을 무시한 것도 독일 정치 엘리트의 무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1차대전은 귀족과 전제정치를 비롯한 구체제의 종말 뿐만 아니라 전쟁 자제에 대한 다소간의 낭만주의적 태도와 낙관주의를 일시에 제거한 사건이라고도 평가할 만합니다.

이 책에 결론에서 저자는 1차대전 종전 후의 전제정치와 귀족정치의 종말로 인한 국민국가 내지는 대중국가의 출현으로 인한 결과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요. 이 당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식민지 지역의 유색인종들을 배제한 발칸반도와 동부 유럽에만 해당되는 제한적 주장으로 그 한계가 명확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뒤이어 대중을 선동하는 파시즘이 출현했다는 점에서 견고한 교육체계가 결여되고 정치의식이 전무한 대중주의 정치가 아무런 기반없이 출현한 것은 두고봐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대전으로 막대한 희생을 치룬 일반 대중들의 희생이 정치적 유연화를 가져온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이 대중들이 정치 전면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과 일반 투표권을 비롯한 참정권에 대한 한계가 영국을 비롯한 각국에서도 보였다는 점에서 이러한 점을 전면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회의감이 듭니다. 끝으로 5장에 있는 보론은 특히 중요하게 읽어야되는 부분으로 여겨지는데요. 슐리펜 계획과 발칸 문제, 피셔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5장만 보더라도 이 글을 향한 저자의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앞선 서두에 그동안에 소개된 1차대전 자료와 글들 중 영문으로 나와 있는 자료들만을 참고해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밝히면서, 앞으로 이후 연구자들이 좀 더 보완되고 가치있는 글이 나오기를 바라는 저자의 기대가 보였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연구물이 시장 논리와 상관없이 계속 나왔으면 하는데요. 다행히 제가 구입한 이 책이 3쇄를 찍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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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자들은 왜?
코리 로빈 지음, 천태화 옮김 / 모요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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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하고 현재 브루클린 대학과 뉴욕 시립대학원에서 정치학 등을 가르치고 있는 코리 로빈은 저명한 정치 이론가이자 언론인이며, 그의 주요 관심사는 약간의 예상대로 과거 냉전시기의 미국 정치 전반인데요. 원제 The Reactionary Mind인 이 책은 2011년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국내엔 이듬해인 2012년 후반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책에도 간략히 소개되어 있지만 코리 로빈의 이 글은 출판 당시 미국 정치 평론계와 일반 정치를 다루는 블로그로부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가 있는데요. 저자는 서두에서 보수주의를 선악의 대비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 어쩌면 소모적이고 감정적인 상황이 나타난 것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의도했다고는 보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요. 대체로 미국의 보수주의와 보수주의자들의 아픈 구석을 사정없이 드러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들었습니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요. 1부는 6개의 장으로 2부는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 1부의 큰 맥락대로 보수주의 자체의 기원은 에드먼드 버크의 위기감 섞인 주장대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동적인 성격으로 잉태되었다고 저자는 요약합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혁명과 이상에 대해 주저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현실 자체를 타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순응하고 적응하는 일종의 취향의 문제로 이들을 판단합니다. “보수주의는 원래 교조주의 운동이었으며, 취향의 문제”라고 저자가 단정짓는 이유에는 바로 이러한 해석적 기반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1부 2장의 다소 노골적인 보수주의가 반혁명적인 측면이 있다고 밝히는 것처럼 보수주의가 현실 순응과 현재의 가치에 몰입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저로서도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보수주의자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모두에서 민주주의의 진보를 가로막으려 했다”는 주장도 이것을 저자의 편협한 해석으로 여겨지기 보다는 혁명 자체의 반대, 이상의 거부라는 측면에서 인간 정치에 의한 민주주의적 체제를 보수주의가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기득권과 엘리트들에 있어서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하고, 그렇지 않은 계층에게는 달리 말하면 지배 계급에 대해 더 예속을 시킴과 동시에 그것 자체가 이들에게 더 큰 안정과 보장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에서 단편적으로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죠.

저는 이 책의 일독 중간에 “보수주의가 과연 민주주의를 존중하는가” 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는데요. 허버트 스펜서를 추종하는 사회진화론자들, 사회생태학자들 및 그것의 기반의 보수주의자들이 일종의 인간에게도 생태적 도태를 강조한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허버트 스펜서가 그러한 사회진화론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론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지만 어찌됐든 그런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행태이기도 합니다. 또한 상당한 보수주의자들 가운데에서도 시장 자본주의와 자유 시장에 대한 지지를 밝히고 있는 자들도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시장과 자본의 기득권을 갖고 있는 상위 계층에 대한 좀 더 지배적인 자유권을 보장하기 위한 기반으로서의 입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모든 평등한 인간이 누려야 할 자유가 아니라 전통적인 계급적인 이론의 수단에서 적잖은 보수주의자들이 이러한 관념 체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엔 이러한 보수주의가 민주주의적 가치에 얼만큼 동조하고 편입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사실상 회의적인 판단이 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지배와 의존이라는 관계의 존재만으로도 우리를 ‘자유인’에서 노예 상태로 전락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고 강조하는 것도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나 기득권의 좀 더 수월한 움직임, 반대의 진보와 좌파 세력에게 이러한 점을 주지시키고자 하는 것도 신념 체계로서 ‘보수주의’가 반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와 정치적 진보가 끊임없이 인류의 역사를 통해 노정해 왔는데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체제에 대한 소수의 결속과 이득을 표면적으로 내새울 수는 없겠으나, 그것을 잠정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이들의 본질이기 때문이죠. 물론 저는 사회 가치와 체제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의 균형적 발전이 분명 필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 미국의 사회정치 현실이 트럼프를 포함한 우익 포퓰리즘의 대두 뿐만 아니라 종래의 티파티 운동이 진보와 좌파를 제거 대상으로 노골적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할 만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보수주의 자체가 새로울 것도 뭔가 가치 중심적인 것은 이 책을 통해서도 별반 드러나지는 않지만 진보의 개혁 보다도 보수의 계급 정치적 폐쇄성이 시민 사회와 민주주의 자체에 있어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미국은 이런 해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요. 이 책 2부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격렬한 냉전 시기에 CIA와 보수 진영의 전략가들이 니카라과와 파나마, 온두라스에 효과적으로 투입한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정치 및 군사 작전의 결과가무고한 인명 피해를 수반했다는 점에서 이것이 그냥 단순한 ‘부수적 피해’로 국한될 것인지는 모두가 자문해봐도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막대한 부수적 피해를 생산해가며 기존의 가치를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미명이 언제까지 그 근거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이 책을 통해서 명백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온전한 정치를 위해 보수주의가 자신들의 유일성만을 위해 움직일 것이 아니라 그외 다른 사상, 이를테면 동성애와 여성 인권, 진보주의와 공존하고 공생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저자가 말하는 보수주의 자체의 급락과 지지부진함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차원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수주의가 다른 상반된 가치들을 제거와 도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민주주의가 주장하는 가치로서 토론과 타협 등으로 기득권과 엘리트 지배 정치, 계급주의적 동의에만 신경쓰지 말고 좀 더 대의적인 건전한 시민 정치와 민주주의의 성숙에 신경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오해와 억측을 받고 있는 허버트 스펜서는 보수주의자들이야 말로 민주주의의 온존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네오콘과 보수주의의 아이콘인 아인 랜드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등, 저자의 태도를 불편하게 여기고 터무니 없는 것이라 여기는 보수주의 및 보수주의자들이 이 책 자체를 백안시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과 현실이라는 양대 가치에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차포를 떼고 보면 이처럼 단순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 그동안 여러 측면의 과오가 보수주의로부터 촉발되었고 그 명확하지 않은 태도로 말미암아 많은 시민들로부터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이 어쩌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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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 - 폭력과 갈등으로 얼룩진 20세기의 기원
로버트 거워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김영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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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현재 아일랜드 더블린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교수이자 전쟁 연구 센터 소장인 로버트 거워스는 올해 한국 나이로 43세인 젊은 학자입니다. 이 책과 같이 유사한 전쟁사론을 쓴 해외의 여러 학자들에 비해 연구 경력이 일천하다고 폄하될 수도 있겠으나 그의 책을 이렇게 일독해 보니 기우에 불과했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만큼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 1차 대전에 대한 본질을 이 책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제는 ‘The Vanquished : Why The First World War Failed To End’ 로 지난 201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일찍이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는 1차대전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이라고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학자들과 지식인 사이에서 이 전쟁 기간에 대해 다소 논쟁이 있지만 보통 1914년부터 1918년 11월까지로 인식하고 있는데요. 이 책의 저자인 거워스는 1918년이 아니라 그리스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국지전이 종료된 1923년경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기의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등장을 감안한다면 양차 대전의 경계 설정이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전쟁사의 연대기적 서술을 이해한다면 개략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이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1800년대 초반의 프랑스의 나폴레옹 전쟁을 제외하면 1차대전 이전 시기까지 빈체제 이후의 구체제 회귀와 유럽이 본격적으로 식민지 건설을 발전시킨 시기로 그전까지 식민지 지역에 있던 원주민들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과 같은 전투 경험만으로 유럽에서의 이 전쟁에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낭만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등의 왕정 체제와 귀족이 전후의 결과로 싸그리 소멸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겁니다. 이에 거워스는 제국의 소멸과 대다수 귀족들의 퇴출이 민주주의의 씨앗을 틔우는데 일조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드로 윌슨의 민족 자결론이 유럽 백인들만을 위한 테제로서 그외 유색인종에 대한 자결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강조한 윌슨의 태도는 이 당시에도 얼마나 오리엔탈리즘적 인종주의의 시기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발생한 볼셰비키 혁명의 결과로 이념적 투쟁이 실제로 처음 라트비아의 리가 등지에서 나타났고 그것의 증오의 결과로 무자비한 학살과 복수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이런 폭력이 이성을 무너뜨리는 장면의 곳곳을 거워스는 여러 기록으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1918년 6월과 12월 라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약 10만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고 언급되는 것은 뒤이어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종청소’의 무자비함이 1차대전에서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1차 세계대전 동안 이미 민간인과 전투원 사이의 구분은 이런 유형의 갈등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것에도 많은 증거 자료들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대전 기간중 프랑스와 독일간의 극렬한 참호전과 상대방에 대한 무차별적인 독가스 살포 외에도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는 1차대전을 설명하는 여러 수단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2차대전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항공 폭격은 그 즈음이 처음이 아니라 1차대전 당시에도 러시아 혁명 시기의 러시아 백군과 적군 사이에서도 초창기 이념 대결의 장에서 상대방에게 가해진 비참한 살육전에도 보여집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이뤄진 종전 체제 기간 즈음에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전후 세계는 ‘민주주의에 안전한’ 곳이 될 것이다”라고 판단했지만 이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자인 거워스는 글을 쓰는 내내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등을 중부 유럽이라는 특정 공간을 통해 1차 대전을 바라보고 있는데요. 이들 지역의 대두하는 민족주의적 열망이 크게 좌절됨으로써 뒤이어 따라오는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인 수정주의적 입장과 국민주의적 민주국가 수립에 실패함으로써 이미 붕괴의 결말이 예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쟁 자체가 무조건 정의로울 수는 없지만 이 시기의 많은 국가들이 이성을 도외시하며 벌인 일들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례와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강제력으로 억눌려 있던 이 중부 유럽의 민족주의가 이들 지역에 민주주의 국가를 완성하는데 일조가 되었을지는 이 점 자체가 이제 역사의 가정에 불과해졌지만 배타적 민족주의가 민주국가 수립에 조력자가 될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입니다. 패전과 더불어 중부 유럽에 국경선이 재정립 되면서 관계국들은 서로 너나 할 것 없이 수십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추방시키고 자국인들로 채우게 됩니다. 영토의 구획 과정은 역시나 정치 논리에 의해 사람들을 뒷전으로 만들고 이러한 경험은 아마도 고스란히 뒤에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인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히틀러가 자신이 총통이 되어서 오스트리아를 강제로 독일에 병합시키고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 야욕을 드러낸 것은 꼭 베르사유 협상 이후의 직면한 굴욕감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전후 과정을 스스로 이용하기 위한 학습 효과가 아니었을까 고민해봤습니다.

끝으로 저자인 거워스가 제시한 여러 정보들 중에서 레닌과 독일과의 관계가 흥미로웠는데요. 저는 일전에 켄 폴릿의 소설을 통해 러시아 혁명 시기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레닌과 그를 통해 러시아에 혼란을 부추기려고 했던 독일 제국의 모략을 접한바가 있는데요. 이것이 역사적으로도 신빙성이 있던 사료였나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도 꽤 흥미로웠습니다. 더불어 여느 전쟁사, 대전사와는 달리 민족과 이념, 국가와 숨겨진 정치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읽다보면 가슴 아픈 기록도 너무나 많고, 특히 항간에 알려진 대로 전쟁이 고도의 정치 행위가 되지 못하는 것은 곳곳에 자리한 수많은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붕괴와 최소한의 정의는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일 겁니다. 라트비아 리가에서 벌어진 ‘여자 소총수들’에 대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복수 행위는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봐야겠죠. 또한 전쟁을 수시로 입에 담는 정치인들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도 이 책의 교훈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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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민주주의
찰스 틸리 지음, 이승협.이주영 옮김 / 전략과문화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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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토론토 대학과 미시간 대학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의 석좌교수를 역임한 고 찰스 틸리 교수의 유명한 저작 ‘위기의 민주주의’를 읽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찰스 틸리 교수는 로버트 달과 더불어 미국 정치학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는데요. 그의 바로 이 책은 이러한 찰스 틸리의 학문적 명성이 결코 퇴색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느껴졌습니다. 근래 읽었던 시민 정치와 정치학 및 민주주의와 관련된 논저들 가운데 저에게 큰 영감을 안겨준 글이었다고 밝히고 싶군요.

이 책은 크게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앞의 1장과 2장은 우리가 그동안 익히 접했던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 뒤이어 3장과 6장까지에서는 민주주의의 원리와 정신에 대한 객관적이고 상세한 분석과 평가를 끝으로 7장과 8장은 근래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불리우는 포퓰리즘과 앞으로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고언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틸리의 이 책은 저자 고유의 독창적 해석이 여러 이론적 접근에서 드러나 있고, 고능력과 저능력 민주주의 체제 및 비민주주의 체제라는 분석에서 드러나듯이 무조건적으로 비민주주의 대 민주주의 선악 대결과 같은 일반적인 도덕론적 입장이나 종래 양자의 가치적 입장에만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세계의 여러 국가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정치 체제라는 측면에서 이를 상세화시켜 여기에 다수 인간과 그를 위한 정치라는 수단으로 포괄적이게 다루고 있습니다. 비민주주의 체제를 일단적인 악마화시키지 않고 그런 비민주주의 국가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큰 틀에서 민주주의 체제와 비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면밀한 비교 분석은 분명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서두에 틸리 교수는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중국의 엔쉐퉁과 같은 일부 학자들은 전세계가 너무나 ‘민주주의적 과잉의 시대’라고 지식인의 양심과 맞지 않은 궤변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실상은 세계의 많은 곳에서 권위주의 체제하에 놓여 있고 어떤 곳은 과거의 전제 군주제와 비슷한 독재 정치에 빠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여기의 저자 입장은 원론적인 입장의 수준에서 ‘다수의 일반 시민은 실제 민주주의적 정치를 형성하는데 주변적인 역할만을 수행’한다고 정리하고 있는데요. 아마도 시민의 정치 활동에 대한 명확한 한계를 인지한 상태에서 이런 결론이 나온것으로 보여지는데요. 이것은 시민 정치가 필요불가적으로 가져야만 하는 정치 의식을 대변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치 의식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시민들은 제도적 민주주의 체제하에 주변인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1945년 부터 1980년까지의 기간에서 민주화를 겪은 국가들을 설명하고, 이 시기에 또한 동일하게 있었던 탈민주화에 대한 분석도 저자는 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탈민주화’는 이 시기의 인도와 그리스 등에서 벌어졌던 과거 권위주의 체제의 회귀에 대한 것인데요. 틸리는 우리가 알고 익히 인식하고 있는 민주화와 그 과정에 있어서 탈민주화도 경험했던 스위스의 사례를 크게 할애하여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스위스의 사례는 각 주별로 세계 어느 국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직접 민주주의적 절차’의 산 증거로 자유주의자들과 권위주의자들의 정치적 대결 및 갈등의 심화로 결국엔 민주주의화의 이행 과정에서 탈민주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분석으로 보여집니다. 제가 봤을 때는 이 탈민주화가 틸리 교수가 중요하게 언급한 ‘범주의 불평등’과 다소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이 범주의 불평등은 성별, 인종, 카스트, 민족, 국적, 종교나 사회 계급에 따라 나타나는데 민주주의 체제 아래 있지만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정치적 평등성을 저해하는 차별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여러 국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수한 요소일 것입니다. 이런 동일선상에서 뒤이어 나오는 각 계급과 단체 및 시민들간의 네트워크에 대한 해설과 이들간의 신뢰와 불신이 교차하여 나타나는 민주주의 체제의 일차적인 갈등 구조를 언급하고 이어 민주주의 원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평등과 불평등’을 다룹니다.

이 ‘평등과 불평등’에는 앞서 설명한 범주적 불평등이 저자가 분석하는 대표적 원인이 되고 있는데요. 여기에도 저자의 고유한 입장이 드러나 있습니다. 즉, ‘정치적 과정들이 일상적인 범주적 불평등이 공공정치에로 직접 반영되는 가능성을 축소할 때 민주주의는 더욱 효과적으로 운영되며 민주화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라는 인식입니다. 기본적인 불평등이 민주화와 체제 변화에 대한 원동력이 된다는 취지일텐데요. 그런데 민주주의 체제에서 토크빌의 말대로 기본적 불평등이 우선적으로 제거되어야만 하는데 이 인식은 정치 행위 자체가 소수의 독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앞선 틸리의 문장은 범주적 불평등이 민주화를 이끄는 요소이기는 하나 그 자체만으로 시민의 고통을 초래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사례에서 경험하듯이 내전과 쿠데타는 급격한 탈민주화로 귀결시킨다는 7장의 내용은 차베스와 같은 포퓰리즘 정치가 궁극적으로는 시민들에게 민주주의를 박탈시킨다는 점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포퓰리즘 자체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체주의와 같은 결과를 보인다는 점에서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익히 알려진대로 ‘위험한 사생아’로 보입니다. 결국 정부의 집중된 손쉬운 여러 권위주의 수단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력과 관련된 부분, 각 개인에게 보장된 기회의 평등 그리고 시민 사회의 신뢰 네트워크의 확산 등이 민주주의를 좀 더 시민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앞선 ‘범주적 불평등’을 보편적으로 제거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군요. 끝으로 틸리 교수가 전제한 민주화에 대한 세 가지 필수 조건에 대해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1. 개인간의 신뢰 네트워크의 공공 정치로의 통합
2. 범주적 불평등으로부터 공공 정치의 분리
3. 공공 정치에 대한 일반인의 영향력과 국가 행위에 대한 공공 정치의 통제력을 강황함으로써 자율적이고 강제력을 통제하는 권력 센터를 제거 또는 무효화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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