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 예일대학 최고의 명강의 오픈예일코스
스티븐 스미스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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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 스티븐 스미스는 미국 테네시 대학을 졸업하고, 더럼 대학과 시카고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이후, 미국의 정치 및 철학 명문 예일 대학에서 오랫동안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레오 스트라우스의 권위자이자 마찬가지로 정치철학과 정치사상사를 깊게 연구한 바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접했던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이 ‘정치철학’ 이라는 분야를 개인적 차원에서 세계와 인간사를 조망하기 위한 필연적인 선결 조건으로 그동안 이해해 왔습니다. 저자인 스티븐 스미스는 이와 비슷한 관점으로 “정치철학은 정치적 삶에서 가장 심오하고 다루기 힘들며 영속적인 문제들을 연구해 왔다”고 평가하며, 현재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왜 이 정치철학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만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여기 이 책이 잘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감한 연구물은 국내에 오픈 예일 코스라는 예일대학 최고 명강의 시리즈로 앞선 이안 샤피로의 ‘정치의 도덕적 기초’가 첫 테이프를 끊은 바가 있습니다. 원제는 ‘political philosophy’로 지난 201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번역 출판이 되었습니다.

이 책의 구성은 총 12장의 다소 구분된 주제로 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정치철학이 있게 한 중요한 사상가들을 각각 분석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빌헬름 바이셰델의 ‘철학의 뒤안길’과 유사한 서술 구조가 아닌가 판단해 봅니다. 또한 우리의 정치학과 정치철학이 어떻게 탄생했고 뒤이어 어떤 식으로 분화되고 발전되었는지 ‘인식의 조감도’를 이 책을 통해 조망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내용으로 미국의 한 대학의 학부에서 강의로 이뤄지고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의 교습 행위 정도가 아니라 강의를 듣는 이들의 면밀한 배경지식과 수준높은 이해력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학부생들이 이러한 강의를 들을 수 있고, 또한 이해하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은 미국의 최고위 학부여서 그런지 아니면 이미 미국 고교 시절부터 이러한 선행학습을 몸에 익힌 것인지는 추정하기 어렵지만 하여튼 사뭇 놀라운 감정이 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더군요.

본격적으로 글을 논의하기에 앞서, 이 정치철학이라는 분야가 저자의 언급대로 ‘정치학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분야’인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다만 철학과 정치학의 경계를 여기저기 넘나드는 것이 정치철학이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주의깊게 또 의지를 갖고 살펴봐야 하는 것이 ‘당위적 본질’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에게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를 가진 사상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엘리트에 의한 집단 지배적 정치 체제를 옹호 했고, 특히 인간 정념의 불확실성을 신뢰했기 때문에 과연 이성으로서 이것을 제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현재의 우리에게도 남기고 있는데요. 특수한 부류의 특수한 공화국을 꿈꿨던 플라톤에게 저자는 극단주의자 라는 꼬리표를 붙이면서 소크라테스를 대척점의 소위 ‘교훈적 역할’로 당시의 정치 전반과 철학적 물음을 온전히 전개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상과 현실 가운데 현실집중적 사상가로 평가하며 그에게 고안할 수 없거나 고안하기 힘든 현실적 재료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꽤 열성적으로 현실의 실험재료를 갖고 자신의 정치현실적 이상을 만들어 내는데 노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뒤에 토마스 홉스는 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상당히 비판하지만 홉스의 리바이어던 만큼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 놨던 정치 이론적 체계는 꽤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 정치학 및 정치철학적 개념을 고안해 놓은 것은 크게 인정받을 만하고, 특히나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에 있어서 그가 기여한 부분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앞선 플라톤은 “정치 권력이야 말로 철학의 깊은 염원이라고 평가했다”는 저자의 단언은 쉽게 이해에 다가가기는 힘들었지만, 토대적 입장에서 정치 권력이 어떠한 속성과 목표를 지니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플라톤의 태도가 장 자크 루소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플라톤의 반대의 입장에서 사회계약과 일반의지를 다룬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더불어 “시민 대다수가 플라톤식의 정의로운 국가에 살지는 모르지만, 그 중 극소수만 플라톤식의 정의로운 삶을 살게 되리라는 점은 아이러니다”라는 점 또한 그가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보이면서도 그 대안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고대 그리스의 소위 민주주의가 불평등한 노예 제도가 경제적으로 뒷받침을 해 그들의 민주주의가 여러 측면에서 안정적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측면에서 고심해 볼만한 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뒤이어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논쟁이 되고 있는 마키아벨리는 저자가 유명한 레오 스트라우스의 연구자로서 레오 스트라우스가 얼마나 마키아벨리에 집중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스트라우스가 마키아벨리에 집중했는지에 대해 그리고 제가 갖고 있던 스트라우스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거나 뒤바꿔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중대한 위기의 순간, 사회 존재 자체가 위험에 처한 순간에만 인간의 본성이 가장 완벽하게 발휘된다는 마키아벨리의 믿음”과 같이 그동안 체사레 보르자와 쌍으로 묶여 권모와 술수에 능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어떠한 수단이든 투입하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다는 대표적인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적 사상이 일관된 도덕적 거부감을 넘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들이 이러한 정치적 이득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백성들에게 돌려주면 된다는 맹목적 결과론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고민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그에게 도덕적 정당성 보다는 정치 행위 자체의 안정과 과감한 결단을 통한 다수의 이익을 그려왔던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현재에 이르러 마키아벨리가 광범위하게 거부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저자는 그의 군주론에 필적하는 논저 로마사논고를 통해 마키아벨리에 대한 약간의 옹호를 보이고 있기는 한데요. 꽤 애매한 부분으로 보이긴 했습니다. 군주론과는 다른 대략적으로 공화주의적 이상을 담고 있는 다음 논저가 과연 그에 대한 사상적 전환이 될지는 아쉬운 논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홉스와 로크, 루소는 ‘자연상태’와 인간의 평등권으로 묶어 함께 생각해 볼 만한 주제였는데요. 앞의 자연상태는 이미 플라톤이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홉스가 그 바통을 이어 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인간들이 그 자연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절대주의적 정치 체제가 필요하다는 관점과 더불어 자유 사상의 고취 또한 홉스의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반면 로크는 사적 소유권을 표방한 자연권에 대한 언급과 정치 권력에 의한 자유 재량권 및 상업 제도에 대한 독특한 발상이 나타납니다. 홉스와 로크는 둘 다 자유주의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오늘날에도 거의 완벽한 논저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이 점은 저자 역시 동일하게 평가하고 있는데요. 홉스는 그가 과거의 전통주의에서 고안한 정치체에 대한 약간 경직된 체계가 있다면 로크는 당시에는 꽤 혁명적인 입헌주의 사상이라든지, 개인의 소유권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꽤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일찍이 에드먼드 버크가 과격한 혁명주의 및 혁명사상에 일조한 인물로 루소를 지목했던 것과 같이 또한 로비에스피에르 자신이 루소와 동일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루소는 공화주의에 있어서 지배층의 우려를 불러 일으킨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나날이 심도가 깊어지는 계몽주의적 사조에 인간이 스스로 타고난 ‘의지’로 스스로의 정부 내지는 정치체제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당연히 도출될 문제였습니다. 물론 루소 이전에 종교 개혁을 통한 이러한 기반의 뿌리가 무르익고 있었지만, 이것에 불과 기름을 부은 것은 바로 장 자크 루소였습니다. 그가 요즘 말로 ‘히키코모리’삶을 지향하며 자신의 자유와 자연상태를 만끽하면서 이러한 사상을 잉태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 유리된 상황에서 전세계의 많은 공화주의적 이념을 확신시키고 그야말로 많은 자연인들을 ‘노예 상태’에 벗어나게 만들어 준 그에게 한편으로는 고마움을 갖게 됩니다. 비록 에밀과 관련된 논란과 다소 과격한 혁명 사상과 계급 투쟁을 지지한 것으로 오독되기도 하지만 그와 토크빌이 없었다면 세계의 민주주의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갓 태어난 미국의 민주주의에 큰 희망을 보았던 토크빌은 루소의 공화주의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후세들’에게 여러 경각심을 남깁니다. 개인들이 이익을 당연시하고 극도한 사익추구를 감행할 경우 민주주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경고와 다수에 의한 횡포, 고착화된 권력이 어떻게 시민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익히 우리가 들어왔던 문제들입니다. 권력의 집중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나을지,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록 시민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을지 등에 대한 일종의 답을 토크빌이 제시해 왔습니다. 이 (꽤 광범위한) 의지의 문제를 홉스 등도 다루고 있지만 민주주의 정치를 위한 ‘시민 다수의 의지’라는 주제는 토크빌이 평생 기울여 왔던 화두와도 같았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역사에서 인종을 따로 구분하면서 분석한 것은 분명 논쟁적이긴 합니다만 당시의 유럽 백인들의 선입견과 사상이 인종주의적이었고 당시 유럽의 노예 문제를 대하는 지식인들의 태도를 보더라도 ‘시대의 한계’랄까 그런 모순이 있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크빌이 ‘민주주의의 밧줄은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귀담아 들을 만합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정치학과 정치철학의 주제들을 잡고 사는 것이 과연 우리 시민들에게 허황된 꿈인지 말입니다. 정치를 엘리트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생업이나 열심히 하는게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시민들이 정치에 나설 대리인들을 선출했으니, 사상의 고안과 정치적 의지. 행동 등 모든것을 이들에 다 맡겨놔야 하는지 설사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상황에선 딱히 할게 없다고 자위하는 것이 맞는 건지, 또한 그 전제로 이러한 정치학, 정치철학의 질문과 이해는 정치학을 전공하거나 그 학문적 토양 위에 있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인지는 그 답이 일견 의문과 함께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티븐 스미스 교수의 이 책에 대한 부족한 서평을 쓰면서 동시에 우리의 정치가 더 나아가고 있는지 다시금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약간의 우스개 소리로, 레오 스트라우스를 위대한 정치철학자라고 평가한 것에 전면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정치학과 정치학의 계보를 역사와 철학을 통해 상당히 꼼꼼하게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장점이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많은 분들도 이 책을 통해 우리 정치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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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불평등한가 - 탐욕스러운 1%가 99%의 삶을 파괴한다
척 콜린스 지음, 이상규 옮김 / 이상미디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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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척 콜린스는 미국 뉴 헴프셔 대학 출신으로 정책연구소(IPS)의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미국의 불평등과 부유한 개인들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연구를 지속해 온 전문가입니다. 검색으로 나오는 그의 논저들이 대부분 위의 주제들과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데요. 다만 국내에 이 책이 번역 출간되었을 때, 큰 호응을 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저도 역시 국내에 소개된 뒤 한참 뒤에서야 책을 손에 쥐게 되었네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나 논증이 꽤 단순하고 명료하고 글의 가독성도 나쁘지 않은데, 요즘 같은 거대한 불평등의 화두의 시기에 어떻게 관심을 끌지 못했는지 꽤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저의 사견입니다. 원제는 ‘99 To 1 : How Wealth Inequality Is Wrecking the World and What We Can Do about I’으로 201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 소개된 연도도 마찬가지로 동일합니다.

이 책의 간략한 주제는 “부와 권력의 극심한 불평등은 민주주의 체제와 국민의 신뢰를 좀 먹는다”는 한줄의 문장으로 설명될 만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다소 과격한 논법으로 1% vs 99% 의 대결과 같은 계급투쟁을 암시한다는 주변의 평가를 담고 있습니다만 특별히 그것에 개의치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식으로든 부의 집중과 불평등 문제는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로서, 크게는 민주주의와 우리의 정치에 있어서 작게는 시민의 안정된 삶을 위해 그 당위성을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약간의 이 글의 장점은 막대한 부의 계층을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몇가지 해결을 위한 상세한 대안들을 결론에 도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경제적인 측면의 대안을 위해 재건 은행을 만들다던가, 부유층의 자본소득세와 배당세 및 금융거래세 등을 부과해야 한다는 관점 등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대안들에 대해 마땅히 충분한 근거와 설득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월스트리트를 당장 없애자와 같은 주장에는 개인적으로는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미국 은행법이 지난 오바마 정부에 들어서 다소 규제책이 만들어지긴 했습니다만 더욱더 강력하게 일반 은행과 투자 은행의 분리를 확실히 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미국 내에 만연된 불평등과 관련해 “미국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역사적으로 불평등을 상당히 너그럽게 생각해 왔다”고 인식하면서, 국내적인 요건들에 대해서도 그렇고, “미국인들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세계적인 규칙 변화에 어떤 방식으로 협력했는지 살펴볼 책임”이 있다는 확대된 주장도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세계 경제를 조정해 온 미국 정부와 그것을 지지해 온 미국 시민들에 대한 일정한 책임론으로 이해 되었는데요. 충분히 공감을 가질만한 내용입니다.

우선 이 탐욕스러운 1%들에 대해 특히 민주주의적 과세주의에 반하는 조세피난처에 자산을 숨기는 광범위한 조세 포탈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들이 일종의 ‘게임 조작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을 전략적으로 사용한다’는 해석과 이를 통해 막대한 정치 자금을 정치권에 투입해 사실상 미국 의회를 자신들의 영향력 안에 두고 있다는 엄중한 현실 판단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과 관련하여 저자의 통찰력을 느끼는 동시에 근본적인 의문이 생기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부자들은 우익에 돈을 투입한다 라는 저자의 설명이었습니다. 단순히 부유층과 우익의 이해 관계가 일치한다고 봐야 하겠지만, 정말로 우익들은 장 지글러의 언급대로 정말 민주주의를 마뜩치 않아 하는 걸까요. 우리와 같은 많은 시민들은 “보다 더 평등하고 경제적으로 안정화 된 사회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라는 평가는 부유층과 우익들의 이해와 정말 달리 하는 것인지, 그런식으로 이해 대립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어려운 부분입니다. 더군다나 여기에 언급되는 많은 최상위 부유층들은 자신들에 대한 부의 집중이 사회에 대한 공공선으로 실현될 것이라는 당위성을 갖고 있었는데 이 점이 이들의 명확한 가치 체계라면 정말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많은 경제학자들이나 부유층 및 기업인들이 결국 이제 와서 계급 투쟁을 하자는 것이냐고 볼멘 소리를 합니다만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체제 자체를 정언으로 여기는 시민들에게는 당면한 심각한 불평등 문제가 다수의 이익에 반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굳이 제레미 벤담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일찍이 토크빌 역시 이러한 관점을 초기 민주주의 역사에서 피력한 바가 있습니다. 더욱이 자유 시장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애덤 스미스 조차도 노동자들이 시스템의 부품화가 되는 것에 큰 우려를 보였죠.

2008년 이후 미국의 기초 경제 기반은 중산층과 아프리카 계 가정들이 막대한 자산 상실을 시작으로 일반적인 부유층과 최상위 부유층에 대한 부의 집중으로 미국이 극심한 불평등의 시기에 놓여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는 비교 대상으로 북유럽 국가들의 ‘사회 이동성’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부의 재분배를 강조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의문은 과연 부자들이 주도하는 금권정치를 과연 어떻게 해소할 것이며, 이미 기울어진 부유층과 일반 시민들의 권력 격차를 또 어떻게 바로 잡을 것인지에 대한 불투명한 전망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결론에 이르러 ‘우리의 연대’를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습니다만 이해 관계의 지배권을 되찾고 앞선 이들이 민주주의 체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해소시키는 등의 대안을 달성하는 것은 민주주의 가치를 믿는 많은 시민들의 행동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대략적으로는 ‘시민 연합 vs 기업의 힘’ 으로 구도가 그려지기도 합니다만 단순한 의미 부여라기보다, 정치적 불안을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부유층이라면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만연된 불평등 문제에 자신들도 손을 보태 개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 대책없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완전 무결성 먼저 내려놓고, 민주주의가 잘 굴러가야 시장 역시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인식을 가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글의 끝머리에서 깊이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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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자유인가
필립 페팃 지음, 곽준혁.윤채영 옮김 / 한길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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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페팃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미국 프리스턴 대학 정치학과 및 호주국립대학교 철학과 석좌교수를 겸임하고 있는데요. 간략한 이력 뒤로 평생 공화주의에 대한 연구를 해왔고, 특히 정치철학의 필요성과 존재 이유에 대해 강한 의지를 보여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지난 2012년 번역 출간된 논저 ‘신공화주의’로 주목받은 바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앞의 ‘신공화주의’에 대한 보론으로서의 역할과 ‘비지배 자유’의 이해를 돕는 특별판으로 여겨졌습니다. 책 도입에 앞서 저자는 초반에 이 글이 사람들에게 점진적인 측면에서 논쟁적일 수도 있다고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철학의 존재 이유는 ‘교조적 생산’이 아니라 ‘가능한 최선의 실현’에 달려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사상가들 및 학자들의 이론적 권위가 도처에 깔려 있으면서 논박 가능성에 대해 여지를 두지 않으려는 태도는 이론의 입장과 현실의 건전한 활용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많은 독자들에게 ‘비지배 자유’에 대한 해석을 돕고 있는 이 책은 ‘Just Freedom : Moral Compass for a Complex World’로 지난 2014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올해 한길사에서 번역 출판을 맡았습니다.

저자인 필립 페팃이 밝히는 ‘비지배 자유’는 타인의 자의적인 의지로부터의 자유로서 “이 비지배 자유는 정치사회적 조직에서 희망하는 진보의 밑그림을 제공하는 매우 도전적인 이상”이라고 정의합니다. 저는 공화주의와 비지배 자유라는 부제를 보면서 ‘피지배 자유’를 요즘에 와서 새로 번역한 것인가 여겼는데요. 정치철학에 있어서 정확한 의미 구분으로는 많이 상이한 개념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이 비지배 자유는 공화주의의 토대에서 몇가지 필연적 기반을 바탕으로 보장될 수 있는 개념이었으며, 흔히 소극적 자유를 포함한 자유방임주의자들의 자유 원칙과는 매우 다른 입장이었습니다. 책의 5장까지 이어지는 논증에서 결국 이 비지배 자유가 민주주의적 시민의 기본적인 ‘시민권’과 유사했고 민주주의 정치 체제에서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삼권분립, 주권자들의 정부에 대한 감시 및 통제, 폐쇄적 권위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사법제도에 대한 견제 등의 소위 ‘민주적 통제’에 놓여야만 우리의 민주주의가 건전해지듯이 마찬가지로 지배적 자유 역시 동일한 토대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이 글을 통해 확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좀 더 개념적으로 상세한 논의들이 존재합니다만 개략적으로는 양자가 일맥상통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비지배적 자유는 일반 시민이 겪게 되거나 원치 않는 지배적 관계에 대해 먼저 시작됩니다. 타인의 의지에 의해 내 선택이 강요되는 경우를 바탕으로 그러한 구체적 사례에 대해 저자는 몇가지를 논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경찰과 사법제도에 더 밀착한 옆집 이웃과 나와의 차이가 그러하고 정말로 리베르 liber 혹은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을 첫번째, 당신이 선호하는 선택지를 취할 수 있는 여지와 자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두번째, 당신이 선호하는 바가 무엇이든 선택지에 있어야 한다. 세번째, 타인의 선호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는 세가지 조건을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저자는 앞의 두 가지 조건은 자유방임주의자들의 주장과 유사하지만 세번째는 퇴조한 공화주의적 입장에서도 중요하고 저자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진정한 비지배적 자유의 핵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글의 1장과 2장에서 역사의 공화주의의 장면을 언급하며, 홉스가 앞선 첫번째에 집중하고 그 이상을 나아가지 못한 것을 그의 사상적 한계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소 논란이 있겠습니다. 즉, 맨 처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떠한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과 뒤이어 개인에게 필수적인 선택의 자유를 조건과 환경 등 여러 면의 초점으로 살펴보고 이 선택의 문제를 결국 오직 공화주의 내에서만 보장할 수 있는 관점으로 저자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공화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정부란 자유 증진을 위한 필수적 수단”이라고 말하며 “자유를 단지 불간섭으로만 이해하면, 자유를 단순하고 다소 덜 부담스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라는 우리의 일반적인 관점의 재고를 요구합니다. 결국 ‘쳬계화 된 비지배자유’ 자체가 공화주의적 이상과 같고, 이것은 일찍이 장 자크 루소가 중요시 했던 공화주의와 비슷하죠. 여기에다 “자유인으로 여겨지려면 다양한 형태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하며, “단순히 법에서의 보장된 자유만으로는 다소 부족”하다는 것이 저자의 요점입니다. 이 부분은 심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런 공화주의적 이상을 공감하는 우리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동등한 시민권을 갖고 있는 많은 시민들이 몇 가지 (스스로 허락되지 않은) 지배에 노출되어 있고, 그가 강조하는 중요한 전제조건인 ‘기본적인 사회적, 의료적, 사법적 안전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통해 저자가 말하는 ‘비지배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다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기본적 자유가 확고히 자리 잡는 일은 자연적으로 달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부분과 관련하여 “많은 민주주의 국가가 형사 사법 제도를 정치판에서 독립된 곳에 두기보다 선출직 관리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두고 있다”는 설명에는 동의 및 비동의 문제라기보다 단순히 말하는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는데요. 사법 기관이 대체로 삼권 분림의 가치에 놓여 있고, 일반적으로 사법제도 자체를 많은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독립성을 보장하고 있는데, 선출된 관리의 직접적인 통제라는 것은 무엇인지 몇번을 봐도 이해가 되지는 않더군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비지배 자유의 구별되는 뚜렷한 두 가지 주제 논의는 사적, 지배적 권력에 따른 지배의 가능성에 대항해 어떻게 사람들에게 자원과 보호를 제공할 것이며, 이러한 보호를 제공하는 공적인 권력 또는 통치 권력 자체가 사람들을 지배하지 않도록 시민이 어떻게 그 질서를 형성하고 그 형성된 질서를 수정하느냐 의 문제인데요. 이 점은 명확히 민주적 통제의 필요성, 즉 시민들의 통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론과 시민단체의 면밀한 감시와 견제가 필요하며 소수의 이익 단체들의 정치 개입을 불식시키고 “모두가 동등한 영향력을 공유하는 정치체제의 확고화”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앞선 공화주의의 중요한 가치들에 언급했지만 결론에 이르러 “공화주의적 사양에 부합하는 국가가 정당한 이유는 그것이 시민에게서 자유를 빼앗지 않기 때문이다”라며 공화주의와 비지배 자유가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이 비지배 자유와 공화주의이 쇠퇴에 대해 저자는 두 가지 실례를 들고 있는데요. 그것은 나날이 강해지는 시민들의 투표 제약과 종신으로 임명되는 대법관의 권력입니다. 저자는 이것 말고도 글 중간에서 시민들이 갖는 사법 체제의 공포 등의 예를 들고 있는데요. 그가 사법 제도를 불신한다기 보다는 권위주의와 관련하여 특히 사법 기관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과 법 위의 평등이라는 아주 중요한 가치가 현재 미국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평가하는 등 대중주의라고 윤색한 포퓰리즘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 부분은 우려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저는 퇴근하고 바로 이 책을 잡고 나서 기필코 다 일독해 내야겠다는 감정에 사로 잡혔는데요. 아마도 잠이 들면 나쁜 머리로 인해 홀라당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은 상태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사실 책을 펴기에 앞서 신자유주의자들의 자유 운운하는 글인줄 알았으나 이렇게 중요한 정치철학적 물음을 던지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 저의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머리 나쁨을 핑계로 저의 얼토당토 않는 선입견을 끄집어 내어 희석시키고 있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책도 꽤 오랫동안 저의 기억에 남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가지 일침을 해야겠는데요. 책의 182페이지에 오자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국내 유수의 출판사라는 곳이 이렇게 편집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역자와 편집자의 노고라는 것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갓 출간한 책이 독자들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다면 그 마무리가 제대로 되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담아 주제넘게 질책을 담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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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8 1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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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 신화 - 우리는 왜 개인이 아닌가
피터 칼레로 지음, 김민수 옮김 / 황소걸음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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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 오리건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주로 현재 사회의 사회적 정체성과 정치학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피터 칼레로의 최근 번역된 ‘개인주의 신화’를 일독했습니다. 이 글을 완독하고 나서 알게된 사회학자 피터 칼레로는 실로 매우 실천적인 학자로 여겨졌는데요. 그 이유는 지난 미국 시애틀에서 있었던 반세계화 시민 운동에 직접 참여한 행적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루고 있는 자료들이 꽤 현실적이고 개인주의가 실제로는 사회에 속한 개인들의 해석 수단으로 어느 정도의 한계를 갖고 있는지에 논하는 과정에 많은 실제 사례들을 인용하고 있어 단순히 관련 이론을 논한 글과는 다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글이야 말로 에밀 뒤르켐이 강조했던 실증주의적이고 현실적인 논증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 봤습니다. 이 책은 ‘The Myth of Indivisualism’라는 원제로 지난 2009년 출간되었습니다. 덧붙여 피터 칼레로의 2017년 출간한 최근 논저 ’자아는 어떻게 권력과 특권을 만들고 파괴하는가’가 조만간 번역 출간되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데요. 이 부분과 관련하여 구글링을 해봤는데, 위의 글이 꽤 유명세를 타고 있었습니다. 만약 국내에 번역 출간이 된다면 꼭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인 피터 칼레로는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대략 두 가지 요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개인주의 대 사회 구도를 노골적으로 묘사할 필요는 없으나 사회의 개인들이 고정시키고 있는 이 개인주의가 사실상 현실에서는 극히 한계를 갖고 있으며, 이 점을 떠나서 경제적 불평등을 강화하고, 차별을 유지키는 이 개인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해야한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총 8장의 구분과 마지막 결론으로 개인주의와는 성격이 다른 수많은 개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학적 원리들에 대해 집중하고 이것을 소개하고 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실제 사례들과 해당하는 인물들의 실명과 관계들을 설명하면서 독자들에게 다른 이론서에서 볼 수 없었던 색다른 논박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번역도 나무랄데가 없어서 꽤 수월하게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개인주의 신화를 대표적인 주제로 잡으면서 이 신화에 대해 저자는 “잘못된 신념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행동을 파괴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신념 체계를 신화라고 부를 수 있다”고 정의 합니다. 이런 개인주의적 신화의 한계에 대해 여러 각도로 분석을 하고 있지만 특히 경제적 불평등과 관련해 밀턴 프리드먼을 비판하고 “불평등은 강력한 사회적 힘에 의해 조직된 사회적 상호작용속 에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부터 인식해야 한다” 면서 이 점은 빈곤과 가난이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라는 이들의 주장과 부자들이 근 20여년간 쌓아왔던 부의 실체가 실은 다수 개인들의 경제적 불평등과 심지어 이 부자들이 일종의 시스템적 이익을 독점한 것에 기인한다고 잠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후자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민주주의에서 정부는 가난한 자들과 가까워야 하지 부자와 더욱 가까워져서 안된다”는 현재의 상황을 빗댄 것은 자본주의 체제와 함께 가고 있는 미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현실을 보이고 있는 증명하는 것이겠죠. 사실 피터 칼레로 역시 6장에서 국가가 작동하는 원리에 있어서 개인들의 개인주의는 스스로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끼치기는 어려우며, 권력의 작동 원리의 상이한 상황과 더 나아가 국가가 민주주의적 사회의 구성원을 위한 적절한 기본 원리를 결여하고 있다는 측면의 해석도 곁들이고 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한 백인 경찰들의 과도한 법집행들을 다루고 있는데요. 이 점은 저자가 과거 노예 제도에 대한 백인들의 옹호와 흑백 분리주의가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던 것을 시종일관 비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점은 중산층 흑인 가정과 그렇지 않은 가정의 아이 두 명의 실명을 거론하며 부모에게서 부여받게 되는 소위 ‘문화 자본’이 얼마나 계층의 되물림을 이끌어 왔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열거하며 특히 이 흑인 중산층의 사내 아이가 다른 흑인 가정의 아이들과는 다른 환경에 놓여 있다는 점은 결국 미국 사회의 만연한 인종주의적 상황에서 같은 흑인들의 의도하지 않은 갈등과 사회적 동질성을 차단시키는 사회 구조적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상 미국의 민주주의가 백인들이 주도하는 인종주의적 편견에 사회적 기본권이 차등하게 규정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현실을 개인주의적 수단으로 모조리 해석하는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며 설사 많은 흑인 가정을 이 개인주의적 수단으로 재단한다 하더라도 백인 다수가 만든 불평등한 이 사회의 기준을 과연 일개 흑인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입니다. 결국 이런 측면에서 약간 샛길로 빠지는 평가라고 볼 수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탄생은 이러한 왜곡되고 불평등의 인식적 기반을 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바로 이 책의 3판 서문이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것 외에도 세계화 된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개인들의 일상적이고 경제적인 삶이 어떻게 파괴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거대 자본이 이리저리 옮겨감에 따라 개도국 국민들의 고된 삶 그리고 심지어 미국 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무분별한 ‘아웃 소싱’에 대해 저자는 매우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오레건 주에 기반한 기업들이 세계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발생하는 개인들의 삶의 불안정성과 아웃 소싱을 무차별적으로 끌어들이면서 발생하는 노동자들의 삶의 불안은 저자의 관점이 어떠한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동안의 자유 무역에 대한 견고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지지는 위와 같은 납득찮은 파급에 눈을 가려 왔는데요. 우리가 정확히 인지하고 있어야 되는 것은 자유 무역과 시장 자유주의가 모든 이들에게 결코 이득이 될 수는 없으며, 특히 차츰 사회적 경계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사회적 안정 장치 없이 이것을 지상 최대의 유일주의로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본주의가 모순을 내포가 있다는 사실 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은 사회학의 주된 목적이 과연 앞으로 어떤 식으로 가야될지 알려주는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글의 마무리에서 저자가 사회학과 사회학자의 정의와 역할에 대해 다소 언급한 것을 고려한다면, 배타적인 개인주의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고, 이 점을 사회학이 어떻게 분석하고 결과로 남겨야 하는지는 자명해 보입니다.

결론을 짓기에 앞서서 저는 이 개인주의에 대해 약간의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싶기도 합니다. 일찍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속세의 권력이 시민의 자유와 이익을 침해할 것으로 예상하고 개인 자유의 중요성을 주지했습니다. 미국의 개인주의는 시민의 자유에 대한 꽤 설득력 높은 가치였던 것은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고삐풀린 시장 자본주의가 다수의 고통을 초래하면서 개인주의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변화된 것은 분명합니다. 전체적으로는 민주주의의 공공선을 지향한다는 측면을 공익적 목표로 삼는다면 시민들이 자신의 자유와 개인주의를 스스로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해 보는데요. 다만 이 부분에 대한 전제 조건은 시민들이 대의가 무엇인지 먼저 인식하고 충분한 사유와 삶의 반추가 이뤄지고 그것을 통해 타인의 자유와 이익을 존중하는 태도를 길러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이것은 꽤 원칙론적인 입장입니다. 그것보다 우리의 삶을 고되게 하는 현실의 말도 안되는 이론적 바리케이트들을 치워내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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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종말, 세계의 탄생
에르베 켐프 지음, 권지현 옮김 / 생각의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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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아미앵 출신의 지식인이자 언론인인 에르베 켐프는 환경 및 생태 분야의 전문가로 1970년대 전세계적인 개발 붐과 경제적 발전으로 인한 환경 파괴에 대한 연구와 90년대 후반 프랑스의 대표적 언론인 르몽드에서 활동하며 그러한 고민의 결과물로 나온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가 전세계적으로 반향을 불러 일으켜 큰 관심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제가 읽은 이 책 또한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환경 문제를 다루면서 근래 많은 고위 경제인들과 정치인들이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이른바 표명에 불과한 수단으로 삼아 사실상 과두제에 놓인 현실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원제는 “fin de l’Occifent, naissance du monde”로 2013년에 출간되었습니다. 특별한 경우는 아니지만 책의 원제와 번역 출판된 이 책의 제목이 거의 의미가 동일합니다.

저자는 도입에서 약간의 지구와 인류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요. 이것은 전 세계가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불평등한 경제적 상태였다고 밝히는 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저는 약간의 풍자의 의미로 다가왔지만 하여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취지는 짐작될 만합니다. 뒤이어 유럽과 중국의 18세기 상황까지 대략 짚어보면서 그 이후 유럽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를 과학기술적 및 경제적으로 추월하게 된 이유를 또 분석해내고 있습니다. 저자인 켐프는 이와 관련하여 “유럽과 중국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생태학적 기회가 달랐기 때문”이라며 과거 몽고 제국 시절에 중국의 화약 기술이 유럽으로 전래된 것을 인용하면서 중국의 번영이 유럽을 앞지르던 시기가 분명 있었고, 다만 18세기 들어 영국이 산업혁명에 이른 것은 인도와 미국 등의 외부 요인을 완곡하게 들면서 그것들의 차이가 영국의 유럽과 중국의 차이라고 보고 있는 듯 했는데요. 사실 이 부분은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영국이 산업 혁명에 이를수 있었던 것은 제국주의 시기에 다른 대륙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인식과 특히 계몽적 착취 enlightened exploitation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농경지가 부족한 영국이 기존의 노동생산성을 증가시켜 그것을 만회하고자 석탄의 발견과 함께 그러한 요인들이 산업혁명을 만든 것으로 여기는 듯 한데요. 이에 약간 언저리로 말씀드린다면 우리 역사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에 일본인들이 원할한 한반도의 식민지적 착취를 만들어 놓은 근대화 기반 시설을 ‘식민지 근대화론’에 빗대어 해석하는 것과 일부 유사해 보이는데요. 약간 이것이 약간 다른점이라면 저자가 말한대로 인도의 섬유 제품의 생산력이 이미 영국에 의한 식민지 침탈 이전에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는 점이겠죠. 조선은 그것이 전무했다는 점이죠.

이 정도에서 제 의견을 정리하고, 일단 그가 유럽 대 세계에 대해 진단하고 있는 관점들이 크게 수긍할 만합니다. “유럽은 산업 혁명 이후 세계 전체를 봤을 때 ‘귀족사회’를 형성한 것”이라는 평가는 종래의 유럽 합리주의 시기에 전반적인 이익의 추구를 유럽이 추구하면서 일종의 귀족과 농노의 관계처럼 세계를 착취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결국 결론에서 이러한 불평등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선진국들이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연계합니다. 이미 지구 환경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그동안 선진국이 배출해 온 이산화탄소 문제를 앞으로 중국과 인도가 그 바통을 이어 받으려 하고 있고, 중국은 이미 미국의 탄소 배출을 넘어섰죠. 즉, 전세계가 소비 자본주의적 상황에 놓여 있는데, 현재 선진국 국민들이 누리고 있는 휴대전화 및 각종 디지털 기기 소유, 자동차, 적절한 의료 제공 등의 삶의 혜택을 분명 일정 시기가 되면 인도와 중국인들 역시 누리려고 할 것입니다. 이미 에너지 소비의 대폭적인 증가와 수산물 자원의 남획이 중국인들의 수요에 의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반적인 개인의 소비가 제반 산업과 관련된 자본주의적 권장 사항이 되면서 이것이 개도국이나 신흥국들이 마땅히 누리려고 할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켐프는 선진국의 소비 생활을 대폭 줄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사실 타당한 의견입니다. 다만 중국과 인도가 이것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인 경우죠.

그래서 저자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소비 수준은 얼마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1970년대 이후 30년간 융성했던 각종 산업자본이 대규모 금융 자본으로 전환되었지만 이러한 소비 지상주의는 여전했습니다. 무작정 개인의 소비를 위한 산업의 교묘함은 금융 자본이라는 패러다임의 변화해도 산업 자본주의의 근본 축이 되었고, 일정 부분 시민들의 소비에 대해 노동자들의 소득을 올려 내수를 크게 키우는 등의 불평등 문제의 해결책으로 연구되기도 해서 이 소비의 문제는 양가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다만 이것의 절제는 병든 민주주의를 개선시킬 수 있고, 특히 거의 경제 및 정치 엘리트들의 ‘과두제’에 있다고 봐도 무방한 이를테면 ‘우리의 정언적 민주주의의 위기의 시기’에서 매우 시급해 보입니다. 저자는 이에 일차적으로 이런 과두제를 타파하기 위해 시민의 정치 투쟁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데요. 이탈리아의 경우처럼 총리가 언론을 소유하고 있거나 미국의 루퍼트 머독의 사례 및 억만 장자들이 미국의 티파티 운동에 자금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앞서 평가한 대로 사실상 외형상으로는 거의 과두제와 다름없는 민주주의 국가의 엘리트들이 민주주의 자체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증명하는 사례로 여길만 합니다.

그리고 일종의 신기술 개발과 관련된 문제에 “이 기술 개발이 반대에 부딪히면 민주주의적 토론을 건너뛰고 막무가내로 날치기 통과시킬 위험이 있다”고 저자가 경고하는 것은 이런 맥락입니다. 언론이 자본의 지배에 놓여 있고, 특히 경제 시스템이 소수의 경제 엘리트들의 손에 쥐어져 있으면 이익의 극대화라는 명목으로 민주주의를 수단화 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공상과학 소설의 허무맹랑한 예측이 아닙니다. 이래서 과두제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는 저자의 해석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죠.

결국의 우리의 정치는 시민들에 의한 정치 투쟁과 보편적 가치인 공공재를 스스로 수호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제목대로 서구에서 비롯한 근대 산업주의와 소비 자본주의의 맹신이 스스로 절제를 보여야 하지만 과거 프랑스의 사르코지가 이민자들을 모욕하고 배외자 취급을 했던 것과 같은 정치인들의 비윤리적인 측면의 선명성은 너무나 차고 넘쳐 이러한 견고한 카르텔을 극복하고 시민이 효과적으로 정치에 나설 수 있을지 이것은 여타 선진국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대한 문제로 보여집니다. 희화적으로 지젝의 “앞으로 미래는 우리 모두의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인 그가 암울한 미래만를 맹목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보편적 가치와 공공선 및 시민의 정치 투쟁이 빛을 발하기만 하면 일단 희망은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이 길은 매우 험난하지만 분명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경험이 많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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