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종말, 세계의 탄생
에르베 켐프 지음, 권지현 옮김 / 생각의길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프랑스 아미앵 출신의 지식인이자 언론인인 에르베 켐프는 환경 및 생태 분야의 전문가로 1970년대 전세계적인 개발 붐과 경제적 발전으로 인한 환경 파괴에 대한 연구와 90년대 후반 프랑스의 대표적 언론인 르몽드에서 활동하며 그러한 고민의 결과물로 나온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가 전세계적으로 반향을 불러 일으켜 큰 관심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제가 읽은 이 책 또한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환경 문제를 다루면서 근래 많은 고위 경제인들과 정치인들이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이른바 표명에 불과한 수단으로 삼아 사실상 과두제에 놓인 현실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원제는 “fin de l’Occifent, naissance du monde”로 2013년에 출간되었습니다. 특별한 경우는 아니지만 책의 원제와 번역 출판된 이 책의 제목이 거의 의미가 동일합니다.

저자는 도입에서 약간의 지구와 인류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요. 이것은 전 세계가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불평등한 경제적 상태였다고 밝히는 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저는 약간의 풍자의 의미로 다가왔지만 하여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취지는 짐작될 만합니다. 뒤이어 유럽과 중국의 18세기 상황까지 대략 짚어보면서 그 이후 유럽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를 과학기술적 및 경제적으로 추월하게 된 이유를 또 분석해내고 있습니다. 저자인 켐프는 이와 관련하여 “유럽과 중국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생태학적 기회가 달랐기 때문”이라며 과거 몽고 제국 시절에 중국의 화약 기술이 유럽으로 전래된 것을 인용하면서 중국의 번영이 유럽을 앞지르던 시기가 분명 있었고, 다만 18세기 들어 영국이 산업혁명에 이른 것은 인도와 미국 등의 외부 요인을 완곡하게 들면서 그것들의 차이가 영국의 유럽과 중국의 차이라고 보고 있는 듯 했는데요. 사실 이 부분은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영국이 산업 혁명에 이를수 있었던 것은 제국주의 시기에 다른 대륙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인식과 특히 계몽적 착취 enlightened exploitation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농경지가 부족한 영국이 기존의 노동생산성을 증가시켜 그것을 만회하고자 석탄의 발견과 함께 그러한 요인들이 산업혁명을 만든 것으로 여기는 듯 한데요. 이에 약간 언저리로 말씀드린다면 우리 역사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에 일본인들이 원할한 한반도의 식민지적 착취를 만들어 놓은 근대화 기반 시설을 ‘식민지 근대화론’에 빗대어 해석하는 것과 일부 유사해 보이는데요. 약간 이것이 약간 다른점이라면 저자가 말한대로 인도의 섬유 제품의 생산력이 이미 영국에 의한 식민지 침탈 이전에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는 점이겠죠. 조선은 그것이 전무했다는 점이죠.

이 정도에서 제 의견을 정리하고, 일단 그가 유럽 대 세계에 대해 진단하고 있는 관점들이 크게 수긍할 만합니다. “유럽은 산업 혁명 이후 세계 전체를 봤을 때 ‘귀족사회’를 형성한 것”이라는 평가는 종래의 유럽 합리주의 시기에 전반적인 이익의 추구를 유럽이 추구하면서 일종의 귀족과 농노의 관계처럼 세계를 착취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결국 결론에서 이러한 불평등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선진국들이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연계합니다. 이미 지구 환경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그동안 선진국이 배출해 온 이산화탄소 문제를 앞으로 중국과 인도가 그 바통을 이어 받으려 하고 있고, 중국은 이미 미국의 탄소 배출을 넘어섰죠. 즉, 전세계가 소비 자본주의적 상황에 놓여 있는데, 현재 선진국 국민들이 누리고 있는 휴대전화 및 각종 디지털 기기 소유, 자동차, 적절한 의료 제공 등의 삶의 혜택을 분명 일정 시기가 되면 인도와 중국인들 역시 누리려고 할 것입니다. 이미 에너지 소비의 대폭적인 증가와 수산물 자원의 남획이 중국인들의 수요에 의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반적인 개인의 소비가 제반 산업과 관련된 자본주의적 권장 사항이 되면서 이것이 개도국이나 신흥국들이 마땅히 누리려고 할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켐프는 선진국의 소비 생활을 대폭 줄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사실 타당한 의견입니다. 다만 중국과 인도가 이것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인 경우죠.

그래서 저자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소비 수준은 얼마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1970년대 이후 30년간 융성했던 각종 산업자본이 대규모 금융 자본으로 전환되었지만 이러한 소비 지상주의는 여전했습니다. 무작정 개인의 소비를 위한 산업의 교묘함은 금융 자본이라는 패러다임의 변화해도 산업 자본주의의 근본 축이 되었고, 일정 부분 시민들의 소비에 대해 노동자들의 소득을 올려 내수를 크게 키우는 등의 불평등 문제의 해결책으로 연구되기도 해서 이 소비의 문제는 양가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다만 이것의 절제는 병든 민주주의를 개선시킬 수 있고, 특히 거의 경제 및 정치 엘리트들의 ‘과두제’에 있다고 봐도 무방한 이를테면 ‘우리의 정언적 민주주의의 위기의 시기’에서 매우 시급해 보입니다. 저자는 이에 일차적으로 이런 과두제를 타파하기 위해 시민의 정치 투쟁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데요. 이탈리아의 경우처럼 총리가 언론을 소유하고 있거나 미국의 루퍼트 머독의 사례 및 억만 장자들이 미국의 티파티 운동에 자금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앞서 평가한 대로 사실상 외형상으로는 거의 과두제와 다름없는 민주주의 국가의 엘리트들이 민주주의 자체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증명하는 사례로 여길만 합니다.

그리고 일종의 신기술 개발과 관련된 문제에 “이 기술 개발이 반대에 부딪히면 민주주의적 토론을 건너뛰고 막무가내로 날치기 통과시킬 위험이 있다”고 저자가 경고하는 것은 이런 맥락입니다. 언론이 자본의 지배에 놓여 있고, 특히 경제 시스템이 소수의 경제 엘리트들의 손에 쥐어져 있으면 이익의 극대화라는 명목으로 민주주의를 수단화 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공상과학 소설의 허무맹랑한 예측이 아닙니다. 이래서 과두제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는 저자의 해석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죠.

결국의 우리의 정치는 시민들에 의한 정치 투쟁과 보편적 가치인 공공재를 스스로 수호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제목대로 서구에서 비롯한 근대 산업주의와 소비 자본주의의 맹신이 스스로 절제를 보여야 하지만 과거 프랑스의 사르코지가 이민자들을 모욕하고 배외자 취급을 했던 것과 같은 정치인들의 비윤리적인 측면의 선명성은 너무나 차고 넘쳐 이러한 견고한 카르텔을 극복하고 시민이 효과적으로 정치에 나설 수 있을지 이것은 여타 선진국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대한 문제로 보여집니다. 희화적으로 지젝의 “앞으로 미래는 우리 모두의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인 그가 암울한 미래만를 맹목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보편적 가치와 공공선 및 시민의 정치 투쟁이 빛을 발하기만 하면 일단 희망은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이 길은 매우 험난하지만 분명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경험이 많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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