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 예일대학 최고의 명강의 오픈예일코스
스티븐 스미스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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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 스티븐 스미스는 미국 테네시 대학을 졸업하고, 더럼 대학과 시카고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이후, 미국의 정치 및 철학 명문 예일 대학에서 오랫동안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레오 스트라우스의 권위자이자 마찬가지로 정치철학과 정치사상사를 깊게 연구한 바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접했던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이 ‘정치철학’ 이라는 분야를 개인적 차원에서 세계와 인간사를 조망하기 위한 필연적인 선결 조건으로 그동안 이해해 왔습니다. 저자인 스티븐 스미스는 이와 비슷한 관점으로 “정치철학은 정치적 삶에서 가장 심오하고 다루기 힘들며 영속적인 문제들을 연구해 왔다”고 평가하며, 현재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왜 이 정치철학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만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여기 이 책이 잘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감한 연구물은 국내에 오픈 예일 코스라는 예일대학 최고 명강의 시리즈로 앞선 이안 샤피로의 ‘정치의 도덕적 기초’가 첫 테이프를 끊은 바가 있습니다. 원제는 ‘political philosophy’로 지난 201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번역 출판이 되었습니다.

이 책의 구성은 총 12장의 다소 구분된 주제로 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정치철학이 있게 한 중요한 사상가들을 각각 분석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빌헬름 바이셰델의 ‘철학의 뒤안길’과 유사한 서술 구조가 아닌가 판단해 봅니다. 또한 우리의 정치학과 정치철학이 어떻게 탄생했고 뒤이어 어떤 식으로 분화되고 발전되었는지 ‘인식의 조감도’를 이 책을 통해 조망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내용으로 미국의 한 대학의 학부에서 강의로 이뤄지고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의 교습 행위 정도가 아니라 강의를 듣는 이들의 면밀한 배경지식과 수준높은 이해력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학부생들이 이러한 강의를 들을 수 있고, 또한 이해하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은 미국의 최고위 학부여서 그런지 아니면 이미 미국 고교 시절부터 이러한 선행학습을 몸에 익힌 것인지는 추정하기 어렵지만 하여튼 사뭇 놀라운 감정이 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더군요.

본격적으로 글을 논의하기에 앞서, 이 정치철학이라는 분야가 저자의 언급대로 ‘정치학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분야’인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다만 철학과 정치학의 경계를 여기저기 넘나드는 것이 정치철학이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주의깊게 또 의지를 갖고 살펴봐야 하는 것이 ‘당위적 본질’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에게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를 가진 사상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엘리트에 의한 집단 지배적 정치 체제를 옹호 했고, 특히 인간 정념의 불확실성을 신뢰했기 때문에 과연 이성으로서 이것을 제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현재의 우리에게도 남기고 있는데요. 특수한 부류의 특수한 공화국을 꿈꿨던 플라톤에게 저자는 극단주의자 라는 꼬리표를 붙이면서 소크라테스를 대척점의 소위 ‘교훈적 역할’로 당시의 정치 전반과 철학적 물음을 온전히 전개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상과 현실 가운데 현실집중적 사상가로 평가하며 그에게 고안할 수 없거나 고안하기 힘든 현실적 재료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꽤 열성적으로 현실의 실험재료를 갖고 자신의 정치현실적 이상을 만들어 내는데 노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뒤에 토마스 홉스는 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상당히 비판하지만 홉스의 리바이어던 만큼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 놨던 정치 이론적 체계는 꽤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 정치학 및 정치철학적 개념을 고안해 놓은 것은 크게 인정받을 만하고, 특히나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에 있어서 그가 기여한 부분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앞선 플라톤은 “정치 권력이야 말로 철학의 깊은 염원이라고 평가했다”는 저자의 단언은 쉽게 이해에 다가가기는 힘들었지만, 토대적 입장에서 정치 권력이 어떠한 속성과 목표를 지니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플라톤의 태도가 장 자크 루소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플라톤의 반대의 입장에서 사회계약과 일반의지를 다룬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더불어 “시민 대다수가 플라톤식의 정의로운 국가에 살지는 모르지만, 그 중 극소수만 플라톤식의 정의로운 삶을 살게 되리라는 점은 아이러니다”라는 점 또한 그가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보이면서도 그 대안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고대 그리스의 소위 민주주의가 불평등한 노예 제도가 경제적으로 뒷받침을 해 그들의 민주주의가 여러 측면에서 안정적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측면에서 고심해 볼만한 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뒤이어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논쟁이 되고 있는 마키아벨리는 저자가 유명한 레오 스트라우스의 연구자로서 레오 스트라우스가 얼마나 마키아벨리에 집중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스트라우스가 마키아벨리에 집중했는지에 대해 그리고 제가 갖고 있던 스트라우스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거나 뒤바꿔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중대한 위기의 순간, 사회 존재 자체가 위험에 처한 순간에만 인간의 본성이 가장 완벽하게 발휘된다는 마키아벨리의 믿음”과 같이 그동안 체사레 보르자와 쌍으로 묶여 권모와 술수에 능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어떠한 수단이든 투입하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다는 대표적인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적 사상이 일관된 도덕적 거부감을 넘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들이 이러한 정치적 이득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백성들에게 돌려주면 된다는 맹목적 결과론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고민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그에게 도덕적 정당성 보다는 정치 행위 자체의 안정과 과감한 결단을 통한 다수의 이익을 그려왔던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현재에 이르러 마키아벨리가 광범위하게 거부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저자는 그의 군주론에 필적하는 논저 로마사논고를 통해 마키아벨리에 대한 약간의 옹호를 보이고 있기는 한데요. 꽤 애매한 부분으로 보이긴 했습니다. 군주론과는 다른 대략적으로 공화주의적 이상을 담고 있는 다음 논저가 과연 그에 대한 사상적 전환이 될지는 아쉬운 논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홉스와 로크, 루소는 ‘자연상태’와 인간의 평등권으로 묶어 함께 생각해 볼 만한 주제였는데요. 앞의 자연상태는 이미 플라톤이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홉스가 그 바통을 이어 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인간들이 그 자연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절대주의적 정치 체제가 필요하다는 관점과 더불어 자유 사상의 고취 또한 홉스의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반면 로크는 사적 소유권을 표방한 자연권에 대한 언급과 정치 권력에 의한 자유 재량권 및 상업 제도에 대한 독특한 발상이 나타납니다. 홉스와 로크는 둘 다 자유주의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오늘날에도 거의 완벽한 논저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이 점은 저자 역시 동일하게 평가하고 있는데요. 홉스는 그가 과거의 전통주의에서 고안한 정치체에 대한 약간 경직된 체계가 있다면 로크는 당시에는 꽤 혁명적인 입헌주의 사상이라든지, 개인의 소유권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꽤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일찍이 에드먼드 버크가 과격한 혁명주의 및 혁명사상에 일조한 인물로 루소를 지목했던 것과 같이 또한 로비에스피에르 자신이 루소와 동일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루소는 공화주의에 있어서 지배층의 우려를 불러 일으킨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나날이 심도가 깊어지는 계몽주의적 사조에 인간이 스스로 타고난 ‘의지’로 스스로의 정부 내지는 정치체제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당연히 도출될 문제였습니다. 물론 루소 이전에 종교 개혁을 통한 이러한 기반의 뿌리가 무르익고 있었지만, 이것에 불과 기름을 부은 것은 바로 장 자크 루소였습니다. 그가 요즘 말로 ‘히키코모리’삶을 지향하며 자신의 자유와 자연상태를 만끽하면서 이러한 사상을 잉태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 유리된 상황에서 전세계의 많은 공화주의적 이념을 확신시키고 그야말로 많은 자연인들을 ‘노예 상태’에 벗어나게 만들어 준 그에게 한편으로는 고마움을 갖게 됩니다. 비록 에밀과 관련된 논란과 다소 과격한 혁명 사상과 계급 투쟁을 지지한 것으로 오독되기도 하지만 그와 토크빌이 없었다면 세계의 민주주의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갓 태어난 미국의 민주주의에 큰 희망을 보았던 토크빌은 루소의 공화주의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후세들’에게 여러 경각심을 남깁니다. 개인들이 이익을 당연시하고 극도한 사익추구를 감행할 경우 민주주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경고와 다수에 의한 횡포, 고착화된 권력이 어떻게 시민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익히 우리가 들어왔던 문제들입니다. 권력의 집중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나을지,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록 시민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을지 등에 대한 일종의 답을 토크빌이 제시해 왔습니다. 이 (꽤 광범위한) 의지의 문제를 홉스 등도 다루고 있지만 민주주의 정치를 위한 ‘시민 다수의 의지’라는 주제는 토크빌이 평생 기울여 왔던 화두와도 같았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역사에서 인종을 따로 구분하면서 분석한 것은 분명 논쟁적이긴 합니다만 당시의 유럽 백인들의 선입견과 사상이 인종주의적이었고 당시 유럽의 노예 문제를 대하는 지식인들의 태도를 보더라도 ‘시대의 한계’랄까 그런 모순이 있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크빌이 ‘민주주의의 밧줄은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귀담아 들을 만합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정치학과 정치철학의 주제들을 잡고 사는 것이 과연 우리 시민들에게 허황된 꿈인지 말입니다. 정치를 엘리트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생업이나 열심히 하는게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시민들이 정치에 나설 대리인들을 선출했으니, 사상의 고안과 정치적 의지. 행동 등 모든것을 이들에 다 맡겨놔야 하는지 설사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상황에선 딱히 할게 없다고 자위하는 것이 맞는 건지, 또한 그 전제로 이러한 정치학, 정치철학의 질문과 이해는 정치학을 전공하거나 그 학문적 토양 위에 있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인지는 그 답이 일견 의문과 함께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티븐 스미스 교수의 이 책에 대한 부족한 서평을 쓰면서 동시에 우리의 정치가 더 나아가고 있는지 다시금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약간의 우스개 소리로, 레오 스트라우스를 위대한 정치철학자라고 평가한 것에 전면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정치학과 정치학의 계보를 역사와 철학을 통해 상당히 꼼꼼하게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장점이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많은 분들도 이 책을 통해 우리 정치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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