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신화 - 우리는 왜 개인이 아닌가
피터 칼레로 지음, 김민수 옮김 / 황소걸음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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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 오리건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주로 현재 사회의 사회적 정체성과 정치학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피터 칼레로의 최근 번역된 ‘개인주의 신화’를 일독했습니다. 이 글을 완독하고 나서 알게된 사회학자 피터 칼레로는 실로 매우 실천적인 학자로 여겨졌는데요. 그 이유는 지난 미국 시애틀에서 있었던 반세계화 시민 운동에 직접 참여한 행적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루고 있는 자료들이 꽤 현실적이고 개인주의가 실제로는 사회에 속한 개인들의 해석 수단으로 어느 정도의 한계를 갖고 있는지에 논하는 과정에 많은 실제 사례들을 인용하고 있어 단순히 관련 이론을 논한 글과는 다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글이야 말로 에밀 뒤르켐이 강조했던 실증주의적이고 현실적인 논증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 봤습니다. 이 책은 ‘The Myth of Indivisualism’라는 원제로 지난 2009년 출간되었습니다. 덧붙여 피터 칼레로의 2017년 출간한 최근 논저 ’자아는 어떻게 권력과 특권을 만들고 파괴하는가’가 조만간 번역 출간되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데요. 이 부분과 관련하여 구글링을 해봤는데, 위의 글이 꽤 유명세를 타고 있었습니다. 만약 국내에 번역 출간이 된다면 꼭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인 피터 칼레로는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대략 두 가지 요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개인주의 대 사회 구도를 노골적으로 묘사할 필요는 없으나 사회의 개인들이 고정시키고 있는 이 개인주의가 사실상 현실에서는 극히 한계를 갖고 있으며, 이 점을 떠나서 경제적 불평등을 강화하고, 차별을 유지키는 이 개인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해야한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총 8장의 구분과 마지막 결론으로 개인주의와는 성격이 다른 수많은 개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학적 원리들에 대해 집중하고 이것을 소개하고 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실제 사례들과 해당하는 인물들의 실명과 관계들을 설명하면서 독자들에게 다른 이론서에서 볼 수 없었던 색다른 논박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번역도 나무랄데가 없어서 꽤 수월하게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개인주의 신화를 대표적인 주제로 잡으면서 이 신화에 대해 저자는 “잘못된 신념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행동을 파괴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신념 체계를 신화라고 부를 수 있다”고 정의 합니다. 이런 개인주의적 신화의 한계에 대해 여러 각도로 분석을 하고 있지만 특히 경제적 불평등과 관련해 밀턴 프리드먼을 비판하고 “불평등은 강력한 사회적 힘에 의해 조직된 사회적 상호작용속 에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부터 인식해야 한다” 면서 이 점은 빈곤과 가난이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라는 이들의 주장과 부자들이 근 20여년간 쌓아왔던 부의 실체가 실은 다수 개인들의 경제적 불평등과 심지어 이 부자들이 일종의 시스템적 이익을 독점한 것에 기인한다고 잠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후자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민주주의에서 정부는 가난한 자들과 가까워야 하지 부자와 더욱 가까워져서 안된다”는 현재의 상황을 빗댄 것은 자본주의 체제와 함께 가고 있는 미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현실을 보이고 있는 증명하는 것이겠죠. 사실 피터 칼레로 역시 6장에서 국가가 작동하는 원리에 있어서 개인들의 개인주의는 스스로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끼치기는 어려우며, 권력의 작동 원리의 상이한 상황과 더 나아가 국가가 민주주의적 사회의 구성원을 위한 적절한 기본 원리를 결여하고 있다는 측면의 해석도 곁들이고 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한 백인 경찰들의 과도한 법집행들을 다루고 있는데요. 이 점은 저자가 과거 노예 제도에 대한 백인들의 옹호와 흑백 분리주의가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던 것을 시종일관 비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점은 중산층 흑인 가정과 그렇지 않은 가정의 아이 두 명의 실명을 거론하며 부모에게서 부여받게 되는 소위 ‘문화 자본’이 얼마나 계층의 되물림을 이끌어 왔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열거하며 특히 이 흑인 중산층의 사내 아이가 다른 흑인 가정의 아이들과는 다른 환경에 놓여 있다는 점은 결국 미국 사회의 만연한 인종주의적 상황에서 같은 흑인들의 의도하지 않은 갈등과 사회적 동질성을 차단시키는 사회 구조적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상 미국의 민주주의가 백인들이 주도하는 인종주의적 편견에 사회적 기본권이 차등하게 규정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현실을 개인주의적 수단으로 모조리 해석하는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며 설사 많은 흑인 가정을 이 개인주의적 수단으로 재단한다 하더라도 백인 다수가 만든 불평등한 이 사회의 기준을 과연 일개 흑인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입니다. 결국 이런 측면에서 약간 샛길로 빠지는 평가라고 볼 수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탄생은 이러한 왜곡되고 불평등의 인식적 기반을 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바로 이 책의 3판 서문이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것 외에도 세계화 된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개인들의 일상적이고 경제적인 삶이 어떻게 파괴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거대 자본이 이리저리 옮겨감에 따라 개도국 국민들의 고된 삶 그리고 심지어 미국 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무분별한 ‘아웃 소싱’에 대해 저자는 매우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오레건 주에 기반한 기업들이 세계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발생하는 개인들의 삶의 불안정성과 아웃 소싱을 무차별적으로 끌어들이면서 발생하는 노동자들의 삶의 불안은 저자의 관점이 어떠한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동안의 자유 무역에 대한 견고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지지는 위와 같은 납득찮은 파급에 눈을 가려 왔는데요. 우리가 정확히 인지하고 있어야 되는 것은 자유 무역과 시장 자유주의가 모든 이들에게 결코 이득이 될 수는 없으며, 특히 차츰 사회적 경계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사회적 안정 장치 없이 이것을 지상 최대의 유일주의로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본주의가 모순을 내포가 있다는 사실 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은 사회학의 주된 목적이 과연 앞으로 어떤 식으로 가야될지 알려주는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글의 마무리에서 저자가 사회학과 사회학자의 정의와 역할에 대해 다소 언급한 것을 고려한다면, 배타적인 개인주의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고, 이 점을 사회학이 어떻게 분석하고 결과로 남겨야 하는지는 자명해 보입니다.

결론을 짓기에 앞서서 저는 이 개인주의에 대해 약간의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싶기도 합니다. 일찍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속세의 권력이 시민의 자유와 이익을 침해할 것으로 예상하고 개인 자유의 중요성을 주지했습니다. 미국의 개인주의는 시민의 자유에 대한 꽤 설득력 높은 가치였던 것은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고삐풀린 시장 자본주의가 다수의 고통을 초래하면서 개인주의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변화된 것은 분명합니다. 전체적으로는 민주주의의 공공선을 지향한다는 측면을 공익적 목표로 삼는다면 시민들이 자신의 자유와 개인주의를 스스로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해 보는데요. 다만 이 부분에 대한 전제 조건은 시민들이 대의가 무엇인지 먼저 인식하고 충분한 사유와 삶의 반추가 이뤄지고 그것을 통해 타인의 자유와 이익을 존중하는 태도를 길러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이것은 꽤 원칙론적인 입장입니다. 그것보다 우리의 삶을 고되게 하는 현실의 말도 안되는 이론적 바리케이트들을 치워내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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