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죽음
피터 플레밍 지음, 박영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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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의 저자인 피터 플레밍은 케임브리지 대학과 런던 대학교 퀸 메리 칼리지를 거쳐 현재 런던 대학의 경영대학원인 카스 비즈니스 스쿨의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강고한 비판자이기도 한데요. 마찬가지로 동일한 주제를 놓고 영국 가디언지에 정기 기고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민간 및 공공 부분의 조직적인 부패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고 후기 자본주의에 따른 경영 전반에 대한 재인식과 현재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는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학자이기도 합니다. 지금 소개할 이 책은 얼마전에 서평을 썼던 "슈거 대디 자본주의"와 함께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두 편의 논저 가운데 하나인데요. 엄밀히 따져본다면 이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죽음"은 최근에 나온 "슈거 대디 자본주의"의 약간의 보론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이 글은 원제, "The Death of Homo Economicus : Work, Debt and the Myth of Endless Accumulation"으로 지난 2017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8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인 플레밍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2008년에 마땅히 죽었어야 했으며, 명확히 지금의 자본주의를 분석해 보자면 "불로소득 자본주의적 권력 시스템"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이 글을 통해 규정하고 있습니다. 서문에서 그는 신자유주의가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번영을 구가한다"고 맹렬히 비판하면서, 글의 2장에서 꽤 심도있게 논의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매우 극심하게 "자기 파괴적 속성"을 갖고 있어 그 자체로 파괴적 경제의 본모습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지난날 미국 시카고 대학의 소위 '시카고 학파'가 이러한 토대를 강화시켜 온 것으로서, 만약 밀턴 프리드먼이 지금 살아있다면 과연 지금의 자본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 것인가에 대해 플레밍은 깊은 의문을 전달하고 있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 글의 논조가 신랄하고 비판적이며, 투쟁적이기 때문에 여느 신자유주의적 비판자와는 다른 어조를 보입니다. 또한, 전체적인 글의 구조는 주장에 대한 충분한 사례와 함께 약간의 르포 형태가 가미된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요. 실제적으로 이론에 그치지 않고 영국을 비롯한 미국과 유럽 등지의 사례와 권력 및 기업들의 파괴적 경제 행위 및 도덕적 해이 등을 깊이 다루고 있어서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의 보다 명확한 실체가 궁금한 분들께는 이보다 더 좋은 책을 권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느 신자유주의적 비판적 이론들에게서 볼 수 없는 이 책만의 고유한 점은,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쉽게 금융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따른 세계화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고 "불로소득 이데올로기에 따른 권력화"가 자본주의의 건전성을 해치고 있다는 점을 기본 토대로 분석해 나가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순수한 자본주의의 본질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자본주의가 후기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넘어서 1980년대 이후, 대부분의 자본 축적이 금융 자본에 의한 서류에 잡히지 않는 이득으로 계산되면서 발생하는 퇴행적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의 냉엄한 실체 즉, "작은 이득이라도 긁어서 호주머니에 넣는 것이 중요하며, 무한한 금전적 이득이야 말로 인간 진보"라는 그 왜곡된 신념을 까발리는게 이 책의 주요한 골자가 되겠습니다. 뒤이어 3장에서는 푸코가 착안한 이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왜 죽어야만 하는가에 대해 논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신봉하고 뒤따르고 있던 이 자본주의가 사실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은지 너무나 오래되었다고 저자는 비판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서구 유럽과 미국이 이미 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적 기조에 벗어나, 알게 모르게 기업들에게 보조금을 투하하고 있으므로 해서 여기에 순수 자본주의를 논하는 것"은 실로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증을 토대로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었는데요. 대다수의 시민들과 사회적 토대에서 이 자본주의가 우리를 얼마나 풍요롭게 해왔으며 이러한 이행이 인간의 진보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이룩한 눈부신 성과가 사실은 오래전에 끝나버린 사실이라는 것을 거듭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테크노크라트가 신자유주의와 야합하고 이를 보수주의 정치가 지원하는 형태의 변종으로서, 차라리 사회 체제의 인식으로서 그 변화가 어떤식으로 작용되었는지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 오히려 더 건설적이 일이 될 수 있을것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요약해 보자면 현재의 자본주의는 그저 권력의 속성과 추이를 나타내는 수준의 협소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3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호주 출신의 재계 거물 지나 라인하트는 앞선 2장의 '파괴의 경제학'에서 자본주의가 아닌 계급적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딱 부합되는 인물로 볼 수 있을텐데요. 그녀는 철광업계의 거두인 아버지 랑 핸콕으로부터 수십억 달러를 상속받은 인물로 종전에 우리가 기대고 있는 자수성가형 자본주의적 신화와는 아주 거리가 먼 인물이면서 현재의 3세 상속자들의 본질적 측면을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플레밍이 인용하고 있는 피케티의 언급과 마찬가지로 "현대 계급 구조의 바탕이 되는 것은 불로소득"이며 오히려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러한 현실은 신자유주의가 이미 어떠한 식으로든 이익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 선(善)과 다름없다"고 밝힌 부분과 일맥상통합니다. 무슨 수를 쓰던 간에 돈만 벌면 된다는 그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에서 각각의 시민들은 민주주의적 토대의 동반자이자 동료인 이웃들을 가진 재산과 소유한 돈에 따라 서슴없이 분류하고 '구별짓기'에 나섰고 이것이 자신의 사소한 이익에 도움이 되는 한 결코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민주주의적 위기'를 후안무치하게 내뱉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실상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가 더 강화되어 왔던 그 결과로 극단적인 포퓰리즘 정치가 정치적 토양을 제공받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시민들의 파편화를 비롯해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많은 시민들의 고용 불안 등은 마땅히 신자유주의적 강고화에 책임을 물어야 했으나, 오히려 민주 정치와 정치의 무능으로 그 화살을 돌려 끝내 '시민들의 변별력'을 무력화시키고 지식인-언론-정치인의 삼자 연합을 무차별적으로 지원해 오늘날의 사태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다음 4장에서 플레밍은 파시즘을 먼저 언급하면서, "오랫동안 계몽으로 이룩한 현실을 돈이 끼어들게 됨으로써 퇴행적인 정치적 관점"을 불러일으켰다 주장하고 있는데요. 이는 미국의 극심한 금권 정치와 기필코 과두 정치를 실현시키려고 하는 테크노크라트의 내심이 기반이 되고 있는데요. 플레밍은 기득권 세력과 테크노크라트의 "시민 다수의 민주적 권리"에 대한 '악에바친 혐오'를 언급하면서 소위 선진 사회라고 일컬어지는 각각의 국가들이 구축한 민주제도와 민주 정치가 이들 기득권 세력에게는 먼저 자본주의가 계급 정치를 용인하지 않고 있음에도 이미 권력화되어 오랫동안 헌법을 고립시켜 사회 내의 주도 세력으로 자리한 연유에는 바로 이와 같은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더 강화되고 있는 '능력주의'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개인주의는 이를 신봉하고 있는 정치인들조차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언제나 외치고 있지만 속으로는 소위 전문가가 주도하는 다수의 시민 배제 정치를 원하고 있으며, 사실 이러한 기반의 인식이 정치인들에게는 충분한 이익이 되기 때문에 경제적 관념의 우월성은 이토록 2세기 이상을 지배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를 저자인 플레밍 식으로 분석해 본다면 대중에게 가해지는 소위 선동 정치에서 돈 자체는 자유롭고 중립적이기 때문에,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말대로 자유 시장이 건전한 사회를 위해 어느 정도 기여하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는 불확실한 그의 의견이 있지만 과연 하이에크의 그 판타지적 이론이 얼마나 사회를 위해 경제와 정치의 조화를 원했는지는 아마 어린아이도 짐작할 만한 일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은 거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미 노동자이자 시민인 우리에게는 자본주의가 너무나 내면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불로소득 자본주의 체제에서 시민의 실패는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국한되었고 그 파급을 조금이라도 보상 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부조는 이미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제거되었기에 사실 극단적으로 뭔가 변화가 있어야만하는 것은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이와 비슷한 예로 런던의 상수도가 1990년대에 민영화 되고 나서 호주의 '흡혈 캥거루' 맥쿼리가 한 것은 요금을 올리고 주주들에게 배당을 돌린 것에 불과하다는 점은 신자유주의적 민영화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공익과 공공선 그리고 도덕주의를 붕괴시켰고 그러한 가운데 시민들이 오로지 자본의 논리 한 가운데에 놓여 스스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권리 마저 보장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저자인 플레밍의 말대로 서구 유럽과 미국의 자유주의라는 것이 이러한 맥락으로 진행되어 겉보기에는 모두가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것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그것의 본질은 약육강식의 비인간화였던 것이죠. 앞서 제가 잠깐 소개했던 바와 같이 기득권과 테크노크라트는 시민의 민주적 권리에 대해 치를 떨고 있기에 1980년대 이후 진행된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이 건전한 민주주의의 이념 마저도 시민과 멀어지게 함으로써 작금에 이르러서는 시민 정치가 근본적인 힘을 잃게 된 연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회학은 이러한 매커니즘을 먼저 가르치고 알려야 했지만 이 글에서 드러나고 있는 대학의 냉혹한 자본주의화는 자본에 대한 자정 기능을 한참이나 후퇴시키는 것으로 마찬가지로 우려될 만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경고의 글은 너무나 많이 출판되어 왔기에 단순히 확대해석이나 음모론으로 치부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측면에서 기득권과 테크노크라트가 시민들의 스스로에 대한 교육이나 학문 자체에 대한 접근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은행에 대한 긴급 구제 상태가 발생한 이후, 국민들 대부분은 자신이 그동안 품위있는 삶을 포기한 채 허리띠를 졸라매고 세금을 바쳐왔던 국가가 비정상적인 형태의 공공 영역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대기업들은 자신들의 비생산적인 기업 활동을 방조하고 주주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하는 일을 지원하는 부도덕한 정부를 필요로 한다

현대 국가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사실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

아마 기술이 진정으로 첨단의 능력을 발휘하는 유일한 영역은 사람들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도구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리차드 탈러는 토마 피케티의 경제적 불평등 이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받고, 진정한 문제의 원인은 시카고학파 계열의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에 있다고 대답했다

신자유주의적 독단론은 명백히 오류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좀비 같은 모습으로 우리 사회 한가운데를 활보한다

소위 ‘달러를 사냥하는 동물‘의 위상은 개인주의와 기업에 초점을 맞추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부상을 통해 본격적으로 굳어졌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란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범대서양 무역투자동반자협정에서 유출된 문서를 보면 시민들의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에 대한 지배 엘리트들의 증오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 사회가 보수파의 세상으로 변하면서, 이제 임시적인 조치나 부분적인 개선으로서는 현재의 상황을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세계를 좌지우지 하는 지배자들은 ‘검은 돈‘을 상징하는 금권 정치가들이며, 피도 눈물도 없는 부의 축적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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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천국 가는 法 -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불평등에 관한 논쟁
폴 크루그먼 외 지음, 양상모 옮김 / 오래된생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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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자극적인 국문 제목을 갖고 있는 이 책은 캐나다 최고의 정책 토론인 '멍크 디베이트'에서의 토론을 글로 엮은 것입니다. 이 멍크 디베이트는 2008년에 처음 시작되어 우리나라에도 이미 번역이 된 토론이 있는데요. 그것은 헨리 키신저와 니얼 퍼거슨, 파리드 자카리아 등이 참여한 "21세기 패자는 중국인가' 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소개할 이 토론에는 노벨 경제학자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과 전 그리스 총리인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전 미국 하원의장인 뉴트 깅리치와 래퍼 곡선의 창시자이자 공급 중시 경제학의 학자인 아서 래퍼가 참여했습니다. 앞선 부분에서 제가 이 책의 국문 제목을 비판했습니다만, 글의 원제이자 주제인 "부자들에게 감세를 해야만 하는가?" 주요한 토론 주제가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Should We Tax The Rich More?"로 지난 2013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 역시 저런 자극적인 제목 설정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겠습니다.

간략하게 부자 증세에 대한 입장은 폴 크루그먼과 파판드레우 전 총리는 찬성하고 있는 반면에 깅리치 전 하원의장은 반대 의견을, 그리고 아서 래퍼 박사는 일단 반대하면서도 세제 개혁과 모든 시민들에 대한 실효적인 증세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사회자인 러디어드 그리피스는 마크 트웨인의 '도금 시대'를 인용하며 자본주의의 진행 방향이 다소 왜곡될 가능성을 피력하고 있었는데요. 이에 크루그먼은 이미 우리는 '도금 시대'에 들어왔다고 언급을 합니다. 아마도 크루그먼의 저 말은 '금융 자본주의의 이행'을 뜻하는 것으로 보였는데요. 두 사람의 맥락이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깅리치와 래퍼는 다소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즉, 미국의 상위 부유층에 대한 감세 자체가 직접 소득에 대한 징세로서 1990년대에 이미 자본 소득에 대한 감세가 이뤄졌고, 2010년에 32조달러에 이르는 눈먼 돈이 역외 기업을 통해 조세피난처에 흘러들어가고 있는 상황을 그저 정부의 무능으로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깅리치는 이미 부유층이 보유한 사회적 자원을 비롯해 변호사와 회계사의 아낌없는 조력을 받고 있는 상황이 그렇지 않은 시민들과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게 어떻다는 것이냐'로 맞대응을 하고 있었습니다. 빌 게이츠의 재산을 전부 깎아 먹고 10억 달러만 남겨 놔도 그 10억 달러 만으로도 대단한 부자임을 그는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이 점에 대한 아주 간단한 요약을 파판드레우 전 총리가 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유층이 경제력 이상의 힘을 쥐고 있었다"는 인식입니다.

이미 깅리치를 비롯해 4명의 연사가 전부 오늘날 심화되고 잇는 '불평등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깅리치야 자신이 정치인이니 이 불평등 문제를 모로쇠로 일관하면 아마도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가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차치하더라도 작금의 심각한 불평등 문제가 사회 전반에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은 굳이 지식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인지하고 있을 내용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깅리치는 먼저 '무능한 정부'를 비난하면서 세수를 획득한 정부가 효율성을 갖추지 못해 빈곤층 문제와 어린 아이들의 의료 문제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실효적인 지원이 부족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를 엄밀히 따져보면, 너무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방위적인 사회적 부조를 삭감했던 저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이를 통해 제조업 분야 조차도 더 많은 이익을 위해 헤외로 공장을 이전하는 등의 전반적인 구조적 변화를 정부의 무능으로 갈음하는 것은 단순히 반대 의견을 보내는 것보다 어리석은 논리 전개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깅리치는 꾸준하게 '효율주의'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 효율성에 매몰된 결과가 어떤 식으로 사회의 불균형을 초래했는지는 매우 명확한 문제입니다. 그런 연유로 그 효율성의 매개로 부자들이 막대한 자신들의 재산을 조세 피난처에 숨긴다거나 일류에 근접하는 변호사와 회계사를 고용해 자신들의 이익 보존을 위해 매진하는 행위가 과연 동등한 사회적 자원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이것이 이치에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그저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너희들도 그렇게 해라'라고 말하는 것들은 따로 사례가 필요 없을 정도로 단순한 논리이지요.

더불어 저는 이 지점에서 보수주의 정치인의 후안무치한 인식을 엿볼 수가 있었는데요. 이 토론이 있었던 2013년 경이면 아마도 그 역시 2008년의 뉴욕을 금방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막대한 공적 자금을 풀어 월 스트리트를 정부가 구원했으면서도 그 자금의 일부가 자신들의 은퇴 돈잔치에 쓰이기까지 했지요. 그러면서 그 종말의 책임이 있는 어느 누구도 기소되지 않고 유유히 말년을 즐기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주장대로 그 정부를 그렇게까지 무능하게 만든 것은 바로 신자유주의와 화해하고 맹렬히 결합한 보수주의자들의 선택에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피터 플레밍의 말대로 정부를 그저 '카지노 딜러'처럼 만든건 바로 신자유주의자들이었지요. 이제와서 깅리치처럼 정부의 무능을 운운하는 것은 실로 뻔뻔하다 못해 공언무시와도 같은 말일 것입니다. 물론 깅리치가 말하는 것에 한가지 동의할 만한 부분은 있습니다. 부자들의 알량한 직접 수입이 아니라 모든 수입에 대한 징세가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미국의 사례를 들어 막강한 로비스트들과 그들의 이익을 채워주고 있는 정치인들이 과연 부자들에 대한 '혁명적인 징세 개혁'에 과연 동의할까요?

그럼에도 미국은 한 두가지 희망은 있어 보였습니다. 지금 셰일 가스 개발과 같은 자원 혁명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을 잘 이용한다면 충분한 세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깝게는 알래스카의 사례가 있을텐데요. 바로 '천연가스 배당'이 그렇습니다. 미국은 자원의 보유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국가이니 이것을 잘 이용만 할 수 있다면 지금의 사회적 지원의 부족한 점을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곁가지는 이 정도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폴 크루그먼의 대략적인 주장에 동의하는데요. 물론 크루그먼 조차도 엄밀히 따지면 보수적인 개혁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세금 회피에 대한 직접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 크루그먼의 한계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그가 미국은 민주적인 통치 시스템을 갖고 있는 나라라고 강조하면서도 조세 회피에 대한 강력한 법집행을 주저하고 있는 점은 뭔가 잘 매치가 되지 않습니다. 과거의 미국은 빈곤층의 자녀들도 꽤 잘 정립된 주립 대학에 갈 수 있을정도로 보조금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의 사회적 부조들이 대부분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의해 불살라졌던 것은 언급 조차 되지 않는 점은 그것대로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더욱이 번역의 조심스러움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유주의적 이행'으로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는 점은 그저 제가 오해하고 있는 거라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입니다.

끝으로 깅리치는 자신을 '저렴한 매파'라고 말하면서 국방비를 줄일 수 있는 현대화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고 있었는데요. 현재 미국의 비대화된 국방비 지출은 이 뿐만 아니라 고도화된 첩보 조직에 의한 비용 지출도 상당히 증가했던 것에도 있습니다. 9.11 테러 이후, 국토 안보부를 신설해 인력 충원과 그에 따른 막대한 돈이 지출되었죠. 또 다시 지그문트 바우만을 언급하게 되었습니다만 어느 나라의 안보에 대한 열망은 아무리 돈을 투입하고 역량을 강화시켜도 결코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저의 평가는 명목적인 것이고 아마도 관료 조직 내부에서 전방위적인 요구가 있었을 겁니다. 특히 FBI는 600만이 넘는 안면 인식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지금은 더 늘었겠지요. 결국 이러한 부분에서 미국은 재정적인 측면에서 돈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보장을 위한 지원 자체에 대한 인식 부족과 더불어 실질적으로 차용할 수 없는 현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겠죠. 이처럼 테크노크라트의 관료제가 좀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경제학에서의 '작은 정부'를 오히려 반대로 나아가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 논점과 벗어난 글을 썼습니다만 우리 나라도 부유층의 은닉 재산에 대한 전수 조사가 사회적 하위 계급 조차도 반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국도 아마 우리 나라와 비슷한 사정을 갖고 있을 겁니다. 이미 토머스 프랭크에 의해 하위 계층의 비이성적인 계급 이반을 논했던 바가 있습니다. 사회의 안정적인 재구축을 위해 필요한 개혁을 반대하는 하위층이 있다는 것은 현실은 이론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겠죠. 아니면 다른 한편으로 언론과 여론이 제대로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다만, 중요한 논지는 세제에 대한 실효적인 개혁과 부유층에 대한 실질적인 증세가 다방면에서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깅리치는 중국의 경제 성장을 불평등 경제로 국한해 인식하고 있었는데요. 미국의 중요한 정치인이었던 그가 중국의 경제 성장이 분명 신자유주의적 기조로 인해 미국에도 상당한 이익으로 돌아왔음에도 이를 경시하고 언급조차 하지 않는 점은 시민들이 어리석다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요. 


특히 파판드레우가 청중에게 경계를 촉구한 것은 그리스의 부유층이 경제력 이상의 힘을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2011년에 미국의 고액 남세자 상위 1%의 사람들은 자본이득을 별개로 하고도 약 1초 4,00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2010년에 역외회사가 벌어들인 32조달러가 과세를 면했다

총리(파판드레우)를 하고 있을 무렵, 나는 국내외에서 엄청난 부의 집중을 목격했다. 그것은 민주 정치의 토대를 침식했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임시변통으로 어리석게 세율을 올리는 것이 아니다. 포괄적인 세제 개혁이 필요하다. 모든 소득을 과세 대상으로 해야 한다. 자산 가치 상승에 의한 자본이득, 내국세법 제501조 C항 3호에서 비과세가 인장된 비영리법인, 자선 목적의 기부 등 이 모든 것에 일률적인 세율의 세금을 부과할 필요가 있다

요즘 보이는 부의 집중은 정부가 공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 이익집단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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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3 16: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착 소개 하신거 보고 책 담으려 했는데 정말 제목 보니 정 떨어지네요 ㅎㅎㅎ
책의 내용을 덮어버리는 제목이네요

베터라이프 2021-07-03 16:24   좋아요 0 | URL
저런 국문 제목은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요. 원제목처럼 부자들에 대한 증세라고 간단히 표현하면 좋았을텐데 아무래도 출판사의 책 판매고 욕심이 기반되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책 내용은 크게 나무랄게 없었어요. 어차피 대담집 형식이라 출판사가 관여할 게 별로 없기도 하고 여기에 참여한 토론자들의 입장 차이가 명확한지라 기본 번역 많으로도 어려울게 없었는데 차라리 폴 크루그먼을 전면에 내세우는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슈거 대디 자본주의 - 친밀한 착취가 만들어낸 고립된 노동의 디스토피아
피터 플레밍 지음, 김승진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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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대학의 카스 비즈니스 스쿨의 교수인 피터 플레밍은 영국 내의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의 비판자입니다. 그는 비즈니스와 사회 간의 변화하는 관계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이를 공시적으로 '탈공식화'라는 표현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시장의 비즈니스 전반이 인간성을 상실하고 전반적인 고통을 시민들에게 전가하는 등의 일종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그는 비판적 인식을 보이고 있는데요. 사실 제가 그동안 '신자유주의'에 대한 글을 많이 읽기도 했습니다만 보통은 신자유주의의 실체에 대해 비판하는 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을 향해 소위 보수 우파들이 이를 음모론으로 공격하고 그저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논리 등으로 맞받아치고 있기도 한데요. 이에 저자는 신자유주의는 밀턴 프리드먼이 사망한 2006년에 이미 종말을 고했다고 보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아직도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대표적 경제 이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신자유주의와 관련된 자유 지상주의 및 극단적 개인주의를 연계해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다양한 사례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실체가 없다던 신자유주의'에 사실상 '실체'를 규명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봐도 무방할 것 같아 보입니다. 이 책은 2019년에 원제, "Sugar Daddy Capitalism : The Dark Side of The New Economy"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1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플레밍의 이 책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요. 플레밍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비판하면서 그의 유명한 논저 '노예의 길'을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와 같은 글로 비난하고, 밀턴 프리드먼과 하이에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잘 작동하는 시장이 모든 인간의 갈등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불행하지만 허구에 지나지 않았음을 증명해 냈습니다. 이것은 플레밍의 표현대로라면 '하이에크의 뒷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에크를 아꼈던 대처에 의해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강화되어 왔고, 여기에 밀턴 프리드먼은 하이에크의 그런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말년에 노구를 이끌고 강연에 뛰어들었던 것은 매우 유명하기도 합니다. 프리드먼이나 하이에크가 얼마나 사회학과 철학에 올바르게 심취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홉스와 로크에 의해 이 '자연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인간이 사회라는 계약을 맺게 되었던 것을 망각하고 오로지 자유지상주의와 마찬가지인 시장 자유가 개인들의 갈등을 '경제적 계약'을 통해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던 것은 의도된 무시라고 생각되는데요. 왜냐하면 프리드먼이 애덤 스미스의 글을 작심하고 제대로 읽었다면 그의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과 '노동의 가치'에 대해 인지하고 '노동'과 '근로 단체'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보다 프리드먼은 일찍이 '사회에 정의 따위는 필요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의 사상적 체계가 어느쪽으로 향해 있는지는 충분히 인지할 수 있을 겁니다. 

초기의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이 집중했던 것은 '정부'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이들은 사실상 정부가 '최소한의 법이 얼마나 유지되는지 제3자의 입장에서 관리하는 정도"의 그것을 열렬히 원했는데요. 정부를 악마화시킨 것은 둘째 지더라도, 사회진화론에 심취해 사회 자체에 '약육강식론'을 대입시킨 것은 매우 유명합니다. 정부나 사회의 개입 필요 없이 개인들간의 자유로운 계약이 이 자연 상태를 벗어나게 하고 더 나아가 인간 사회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은 오늘날과 같은 통합된 지식의 시대에 얼마나 그 궤를 벗어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저자인 플레밍도 이 글의 2장과 3장에서 이런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에 대해 여실히 비판하고 있기도 하는데요. 신자유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사고 메커니즘은 "시장에서의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가 이를테면 "경제는 삶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저들의 잘못된 명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의 제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글의 2부의 제목인 "당신의 가격은 얼마?"에 사례로 인용되어 나오는 브랜던 웨이드의 사업 아이디어에서 현 자본주의의 왜곡된 본질이 거의 과감없이 드러나 있다 생각됩니다. 제목의 모티브가 된 브랜던 웨이드는 소위 3~40대 재력가 남자들과 10대에서 20대의 젊은 여성을 연결시켜 주면서, 거의 매매춘과 다름없는 사업으로 부를 획득하게 되는데요. 이 '슈거 대디'들과 직접 만나 데이트를 하는 이 '슈거 베이비'인 젊은 여성들은 데이트의 마지막엔 이들 남성들과 성관계를 해야만 하는 압박을 받으며, 그 일련의 남성들의 호의는 바로 이 최종적인 목표를 위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들간의 금전 거래와도 같은 일례들이 성까지 사고 팔 수 있게 만들었으면 이러한 심각한 자본주의의 비인간화는 '오로지 모든 것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미명하에 이미 도덕과 최소한의 법이 유명무실해진 시장에서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3부에서는 '규제' 자체에 대해 경기를 일으키는 이 신자유주의가 정부와 국가에는 최소한의 법으로 야경 국가만을 위해 존재할 수 있도록 그동안 거의 강제적인 사회 체제 변용을 저들은 추인했고 더 나아가 민주적 통제 자체를 '급진적 민주주의'로 몰아가면서 오늘날과 같은 돈과 거래에만 극단의 효용성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구축했습니다. 사실 신자유주의자들의 규제에 대한 증오는 전반적인 관료제에 대한 거부감과 멸시로 이어지는데요. 밀턴 프리드먼이 조직화 된 의사 단체들에 대해 공격을 퍼부었던 것으로 보아 '조직화 된 힘'에 대한 거부감과 더불어 자신의 조국이 너무 집합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터무니 없는 공격을 했기에  플레밍이 강조하는 탈공식화는 물론이고 사회에서 인간성을 제거하는데에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짤막하게 미국의 의료 시스템을 고찰해 본다면 이미 극단적인 자본의 논리에 융합되어 '환자를 돈의 유무'와 '보험의 등급'으로 나눠 사실상의 생명 경시를 초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1장에서 플레밍은 개인이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계약에 나설 때, 이미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한계는 명확하며 병을 얻게된 그 자체의 이유 마저도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 '마땅히 시민이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짓밟게 하는 것이 어떻게 민주주의적 가치에 부합되는지 저는 깊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플레밍의 이 글에서는 논증상 한가지 미흡한 부분이 있는데요. 그것은 어떻게 보수 우파들이 신자유주의와 영합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저자가 주장에 대한 논거를 위해 공들여 사례로 입증하는 것으로 볼 때, 이 점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그저 보수주의적 법학자인 리처드 엡스타인을 통해 어떻게 보수주의가 신자유주의와 한 몸이 되었는지에 대해 약간 짐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만 '개인이 추구하는 경제적 이익'을 자본주의적 논리에 부합한다는 결론을 내린 보수주의 정치가 80년대 이후 '사회적 부조'에 치를 떨게 되면서 이어지는 이 신자유주의적 탄생에 이바지 했던 점은 거의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플레밍은 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로 변화되었다는 문장으로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종래의 자유주의의 변질이 결국은 사회에 대한 배신이 되었던 것도 거의 확실합니다. 거듭 강조하는 부분이지만 사회에서의 도덕주의와 인간성의 상실은 개인의 보호라는 사회적 의무가 단순한 계약관계에 의해 축소되면서 모든 책임은 오로지 개인들에게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저는 신자유주의의 맹점을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자유 경쟁과 시장 자유를 부르짖으면서도 왜 의사나 변호사를 비롯한 일반 전문직에 관료제의 의한 공적 시험이 아니라 시민 모두가 다 종사할 수 있게 하자고 하지 않는지 아주 의문입니다. 물론 저들이 위의 전문직은 타고난 사람들이 맡아야 한다는 인식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지는 않을겁니다. 다만, 그런식으로 입맛대로 이뤄지는 사고는 시민들에게 더욱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약간 덧붙여 플레밍은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인식을 피력하면서, "자유지상주의 사상의 역사에는 산업 활동에 대한 담론에서 '노동'을 공식적으로 제거하려 했던 오랜 전통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들의 시민의 노동을 공장을 돌아가게 하는 일개 부품의 역할로 여겼는지는 모르겠으나 자본주의적 자아 실현에 대해 그만큼 강조하고 긍정적으로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을 자본 축적의 방해물로 여긴 것은 극히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결국 이러한 체제적 강화에서 신자유주의를 견제하고 비판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구축되지 못했고 2008년의 그 극명한 붕괴 이후에도 아직도 신자유주의적 노선이 건재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경제에 대한 맹신에 그 역사는 얼마 되지도 않았다"고 비판했던 바가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은 제약에서 벗어난 자본주의가 우리를 더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게 해주리라 믿었다"고 언급하기에 이르는데요. 저는 저 두 사람이 실제로 그렇게 믿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시민들이 자신들의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을 때, 사회는 그저 시장 규칙이나 준수하라는 일갈만을 외치던 자들이 과연 인간성을 갖고 있었을지 의문이 듭니다. 과연 이러한 사회와 삶 자체가 우리가 원했던 것일까요. 어처구니가 없게도 이 신자유주의자들은 우리가 스스로 이러한 세상을 원했다고 주장들을 하고 있지요.

-번역이 크게 문제가 있어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피터 플레밍의 논조는 대체적으로 신랄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그의 주장이 콜린 크라우치보다 더 극적이면서 강조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비판적 의견을 담고 있다 봐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한 번쯤은 읽어보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저자의 비유대로라면 신자유주의는 "당신의 가격은 얼마인가"로 함축된다고 생각됩니다. 저 문장에는 실로 핵심이 담겨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인식하고 동의할 수 있을 만큼의 ‘공동의 선‘은 분명 존재한다

고립된 개인은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권력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자유지상주의 사상의 역사에는 산업 활동에 대한 담론에서 ‘노동‘을 공식적으로 제거하려 했던 오랜 전통이 있다

모든 이가 평평한 운동장에서 경쟁하고 있다는 시카고 학파의 유토피아적 판타지가 무엇을 말해 주겠는가

불평등을 옹호하는 신자유주의 논리는 약화되기는 커녕 강화됐다

정부는 그저 카지노의 딜러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최저임금법이나 실업 복지와 같은 국가의 개입에 맹렬히 반대한다

산업 자본주의가 생긴 이래 소유주는 늘 노동자와 전쟁 상태였다

시장 자유주의는 ‘자유로운 선택‘과 별로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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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크 시민정부 효형 클래식
존 로크 지음, 남경태 옮김 / 효형출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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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근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아버지로 잘 알려져 있는 존 로크는 이 뿐만 아니라 경험론과 계몽주의 철학의 효시라고도 읽히고 있는데요. 특히 그는 사회계약과 관련된 루소의 혁명적인 이론보다 거의 몇세기를 앞서 나간 인물이기도 한데요. 혹자들은 로크의 이론을 홉스에서 차용된 일종의 동어반복으로 격하시키기도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자들은 로크가 주장한 '재산권'에 한정된 부분만을 차용해 그를 자신들의 부류로 만드는 데 막대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칸트를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엄밀하게 그에 대해 분석을 해본다면 통치론의 후반부를 편역해 내놓은 이 책에서도 인간의 자유와 정치적 권력, 시민 정치 및 자연법에 의한 입법주의 등 근대 민주주의의 이론적 양식들을 거침없이 내놓은 중요한 선각자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그의 인식에서 공리와 기본적 자유에 대한 개념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기본적인 민주주의 이론의 밑바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자유주의의 아버지보다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통치론 Two treatises of Government 의 후반부를 편역한 것으로, 국내에는 지난 2012년 4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우선 로크가 강조하는 '재산권'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싶은데요. 이미 '통치론'에 대한 수많은 강의와 해설서 및 서평들이 적잖게 나와있는 상황에서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라고 할 수 있는 시민들의 재산권 보호에 대한 로크의 주장을 설레발로 자본주의적 맥락이라 해석하는 일부의 사람들이 있는데요. 로크는 단순히 재산권 뿐만 아니라 후에 나오는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노동 자체에 대한 의미있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는 각 개인들의 노동들이 사회를 지탱하는 요소라고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마찬가지로 스미스도 노동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을 갖고 있었고 이를 중상주의를 비판하는데 할애하기도 했습니다. 즉, 노동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며, '탐욕을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반증은 자본주의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고 봐야하며, 또한 이 시기에는 엄밀히 자본주의적 개념이 미처 나올 수가 없는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가 말하는 '자유'에 대한 의미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차원의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로크는 방종과 자유를 구분하고 있었고 자유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의 제한적인 자유로서 마찬가지로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다시 로크가 재산권에 보이는 기본 인식은 사회와 위임된 권력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 의무 내지는 자연법적 인식을 내포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인지한 인간들이 복합적인 의미의 '자연상태'를 사회계약의 의무로서 공익을 위해 편성되어야 하는 기본적인 정부의 함의들을 위해 필요한 개념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로크의 주장대로 각 개인들이 각자 의지에 따라 재산권을 갖게 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것이며, 이것의 전제 조건은 방만하고 제약없는 자유로서의 재산권 추구가 아니라 스스로 이성을 발휘해 자유의 (이성적인) 제한을 토대로 주장할 수 있는 합리적인 재산권에 대한 인식을 뜻합니다. 이것은 관습법 체계에서의 기반이 아니라 인간이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법전으로 쓰여있지 않은 자연법의 인식하에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이에 로크는 '이성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인간들도 있다'고 언급하면서 대체로 모두가 이성을 수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다수가 모인 의견과 의지는 마땅히 모두가 따라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나 가브리엘 타르드, 세르주 모스코비치 등에 의해 이를 다수에 의한 선동으로 몰아가면서 민주주의 자체에서도 '다수결의 폭력'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실 여기서 따져봐야 할 점은 당시의 저런 군중이라는 인식을 만들어 낸 지식인들의 대부분이 자신은 실로 '군중'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얼마나 오만한 발언인지 여러분도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다수의 인민들이 사회의 의견을 결정하는 절대 다수의 의견을 시민들의 비이성적인 측면을 연계시켜 반대의 '소수의 권리'라는 대립물의 자체가 본질적으로 변질되면서 사회적 기득권이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절대 부유층의 권리로 교묘하게 인식시켜 왔는데요. 이는 노엄 촘스키의 말처럼 '절대 부유층의 권리', '기득권층의 이익'이라는 아예 노골적인 언행이 지식인들의 입에서 감히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이 '소수의 권리'가 오용되어 왔던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동성애자들이나 성소수자 혹은 하층 계급의 시민들의 마땅한 권리를 보수 우파들과 극우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면서 소수에 대한 정의를 아예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사회적 부조를 강하게 불식시키면서 실질적 배려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았던 것이 바로 이 신자유주의자들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로크는 "각 개인은 다수의 결정에 복종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서 물론 앞서 언급했던 대로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사회 계약과 관련된 시민의 속성 자체를 '믿을 수 없고 즉흥적이다'라는 공격으로 일관한단면 애초에 사회 계약 따위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크가 말하는 '자연상태' 자체가 남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배타적 자유의 다름 아님을 이미 피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모두가 인정하는 계약의 틀 안에서 법의 준수와 복종이라는 의무를 명확히 이해하고 나서야 로크가 말하는 '부여된 정치 권력'의 단계를 비로소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부분을 로크는 '시민사회'와 '정치사회'로 구분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양자에 대한 로크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로 결집해 모두 자신의 자연법 집행권을 공공에 위임하고 양도하면 그것으로써, 또 그럴 경우에만 정치사회 혹은 시민사회가 성립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시민사회에서는 누구도 사회의 법으로부터 면제되지 않는다"고 그는 명확히 밝히고 있는데요. "누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 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배상이나 안전을 호소할 수 있는 곳이 없다면 자연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라는 평가는 이처럼 의미심장하다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시민사회를 규정하는 사회의 입법권과 관련해, 로크는 "자연법은 성문화되어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있기 때문에" , "자연법은 사람들의 권리를 정하고 재산을 보호하는 본연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선을 그으며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사회는 입법 체계가 필요한 것이며, 이것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것은 제도와 재판관에 대한 시민들의 태도가 단순한 복종을 넘어 시스템에 대한 덕성의 존재와 깊은 이해를 갖게 되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은 이 법 기관이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여 시민들에게 신뢰를 받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논증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법 기관에 대한 다수 시민들의 존중과 수용은 무조건적인 어떤 사법 체계와 헌법 이론에 의해 강조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올바른 판결과 시민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재판관들이 사회 전체에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로크의 연계된 인식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로크는 전제 왕권을 약간 논하면서 '덕성을 갖춘 지도자가 존재한다면 그것 자체로 사회에 이득이 될 수 있다"는 논점이 그에게는 이미 선험된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는데요. 도덕성 자체가 제도와 틀 안에서 필수불가결한 논제는 아니지만 그것이 바탕이 된다면 양쪽 즉 입법과 시민 사이에 어느 정도 신뢰감과 유대감을 갖게 된다는 점을 밝히고 싶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물론 오늘날은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헌법의 고유한 의미에 따라 시민 모두가 사법 체계 전반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법은 모두가 지켜야 하고 그것을 시민 모두가 맹세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전제로 그저 의무로 받아들에게 하는 것보다 다소 부족할 수도 있지만 사회 계약의 논리로 자연상태를 벗어나 인간이 누구나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받기 위한 사회 구성의 요건으로 다수의 시민들을 이해시키는 것이 좀 더 필요한 작업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끝으로, 로크의 이 글은 자연상태와 자유, 시민, 시민사회 그리고 위임된 권력을 통한 입법 체계 등 각각의 가치가 서로 연계되어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기본적 토대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지금에서야 이를 읽어나가면 어쩌면 당연한 말들의 향연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사실 무엇보다 이 글의 중요한 논점은 인간이 폭력적인 자연 상태를 벗어나 모두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는 '사회계약'의 단계에서 무엇보다 이성을 보유한 다수의 결정을 존중하고 이를 바탕으로 모두의 동의를 거쳐 입법의 준수를 피력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건전한 목표라는 점입니다. 다만, 순진한 민주주의의 시대가 저물어 이제는 자본주의 심화단계에서 민주적 정치가 날로 침해당하면서 계약의 의미가 자본주의에 의해 다소 변질된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구도로 몰아가 선악의 문제로 만들려는 것은 아닙니다. 주입된 자본의 논리를 차치하더라도 우리의 삶에서 자본주의는 무척 중요한 문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미 시민들에게 이 자본주의는 자아실현과 만족하는 삶에 대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깊이 내면화가 된 상황입니다. 바로 이런 자본주의를 건전하게 만드는 데 있어 아직도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독재와 폭력적인 권위주의와 화해할 수는 없지만 반대로 자본주의는 여건만 맞는다면 독재와 반민주주의와도 이론적으로 양립이 가능하다는 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변화시킨 신자유주의 역시 시장우월을 기반으로 여러 정치적 논법들을 사회에서 제거시키고 이익이 보장된다면 흡사 지옥과도 화해할 수 있을정도로 배타적이 되었는데요. 그래서 로크의 이 글은 지금의 엄혹한 현실에서도 시민들이 다시 민주주의의 기본을 유념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여겨집니다.   



- 위탁된 취지와 반대로 국민에게 국가의 힘을 사용한다면 국민을 상대로 전쟁 상태에 돌입하는 것이다 라는 문장은 사뭇 눈길을 끌었는데요. 이는 루소가 말한 인민은 정부를 갈아치울 권리가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졌습니다.


-로크는 이 글을 통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기독교적 사고관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신성을 통해 그는 인간은 다수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에게 부여받은 세계라는 의미가 바로 이러한 맥락이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모든 사람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서로 위해를 가하지 않고, 자연법을 준수하면 전 인류의 평화와 보호를 보장할 수 있다

사람들 간의 자연 상태가 종식되려면 계약이 아니라 서로 하나의 공동체에 포함되어 단일한 정치체를 이룬다는 합의가 필요하다

즉 모두가 활용할 수 있을 만큼 가진다는 규칙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도 여전히 세계에 통용되어야 한다

그 법은 오로지 이성만이 포고하고 알려주는 것이었으므로 자신의 이성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은 그 법에 따른다고 말할 수 없다

진정한 자유는 자신이 따라야 할 법의 테두리 내에서, 타인의 전횡적인 의지에 종속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신의 신체, 행동, 소유물, 전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하는 자유를 가리킨다

나는 인간이 성숙한 상태에 이르면 자연법을 체득하게 되고 그 테두리 내에서 행동하게 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로 결집해 모두 자신의 자연법 집행권을 공동에 위임하고 양도하면 그것으로써, 또 그럴 경우에만 정치사회 혹은 시민사회가 성립한다

위탁된 취지와 반대로 국민에게 국가의 힘을 사용한다면 국민을 상대로 전쟁상태에 돌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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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인간 - 팬데믹에 대한 인문적 사유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 효형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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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조르지오 아감벤은 카를 슈미트의 '예외 상태' 연구로서 그리고 민주주의적 삼권 분립에 대한 명료한 인식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그는 어느 지식인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도 한데요. 과거 역사에서 무솔리니를 몸소 체험한 이탈리아 인으로서 이러한 그의 믿음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물론 아감벤의 이런 정치적 신념을 차치하더라도 현재 세계 학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은 대단하다고 봐야 할 텐데요. 작고한 움베르토 에코와 더불어 전세계인이 그의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미셸 푸코와 발터 벤야민 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았고 이러한 기반으로 현재에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해박한 분석을 통해 대중들에게 자신의 고유한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아감벤은 여러 외신들을 통해 전세계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분석으로 더 유명해지기도 했는데요. 이탈리아 내에서도 그에 대한 여러 비판이 있었고 여기에는 슬라보예 지젝까지 일정 부분 동참하기까지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자유와 인권의 측면에서 각국의 봉쇄 정책이 씁쓸한 뒷맛을 남길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못하고 있는데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아감벤이 인문학적이고 정치사회적인 비판을 가감없이 드러내 보인 것이 지금 소개할 이 책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글과 관련해 구글 검색으로 원전을 찾아보려 했지만 정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시는 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아감벤의 이 책은 2020년 5월 경부터 2021년 1월 경까지의 짤막한 시론을 모은 글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서두에 경희대 이택광 교수의 추천사가 있어서 내심 반갑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아감벤의 일관된 논지와는 별개로 그가 2020년 10월 이후에 같은 맥락으로 글을 썼다면 어조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추측해보기도 합니다. 최근에 그에 대한 논란으로 인해 저 역시도 이 책을 다른 글보다 좀 더 꼼꼼하게 읽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아감벤이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점은 "생존 외에 다른 인류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를 명확히 대변한다 생각합니다. 그는 초지일관 작금의 과학 기술주의에 대한 맹신으로 주도되고 있는 각국의 사회 격리와 이를 바탕으로 권력이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헌법의 명령 없이 제한하게 될지도 모르는 가까운 미래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갖고 글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파시즘의 나치의 학살자 아이히만을 언급하면서까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데요. 어떤 측면에서는 너무 과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많은 정권이 소위 '공중 보건'이라는 핑계로 권위적인 테크노크라트 정치를 시도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경계를 가질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면에서 이 책의 제목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연상시키면서도 한편으론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오늘날의 상황을 적절히 잘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우려를 클로드 르포르 식으로 해석해 본다면 '인간의 자유를 어떤 식으로도 희생해 본 적이 없는 미국과 프랑스'와 달리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미 전체주의의 경험을 갖고 있기에 아감벤이 이탈리아 인으로서 우려하는 바는 지극히 온당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에밀 뒤르켐이 오래전부터 분석해 왔던 이런 경험주의적 인식론은 전체주의적 종말을 그려보지 않더라도 일말의 정치사회적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시민들을 위해 먼저 선행적인 고찰을 해야만 하는 지식인의 의무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전방위적인 펜데믹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에 대한 냉엄한 질문 말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보건 관료들과 의료진들에 대해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일종의 정치사회적인 헤게모니로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은 분명 거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많은 지식인들이 인문학의 쇠퇴와 종교가 과학 기술의 맹종을 견제하는데 실패한 부분을 우려스럽게 보기도 했습니다만 인류가 무분별한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끝내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여러 의견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의 기본적인 우려대로 기술 과학이 민주주의나 보편적인 인권 및 자유를 침범해서는 안되는 것은 명확하며, 의학 전반이 인간성과 도덕적인 의무를 저버리고 단순한 수단화에 이르게 된다면 마땅히 이를 견제해야만 할 것입니다.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정치가 매번 사회에 옳은 결과만을 가져다는 것은 아니며 이들이 사회 전반의 비판적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때 파시즘의 준하는 정치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은 거의 분명합니다. 이것을 음모론이나 과도한 회의주의라 공격할 수도 있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두고 성찰하는 것 또한 미래 세대를 위한 우리의 의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비판들 가운데 아감벤은 특히 법학자들에 대해 더욱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삼권 분립의 가치를 사실상 훼손하는 행정부에 의한 입법부를 대체하는 긴급한 수단들이 처방되는 지금의 상황을 법을 전공한 많은 학자들이 입을 닫고 있는 것에 대해 일정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도 하는데요. 여기서 그가 히틀러 시대의 카를 슈미트를 오버랩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정 부분 학자의 양심을 저버리고 있다 보는 듯 했습니다. 이와 같은 예외 상태를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법률학자들의 침묵이 아감벤의 의견대로 도덕적 인식의 종말을 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와 시민이 필요할 때 이상하게 입을 닫는 지식인들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이 '바이오 보안'의 정치가 시민을 관리하는 정부들의 손쉬운 정치적 획득물로 여겨질 수도 있기에 지금과 같은 '중요한 보건 위기'의 시대에서 인문학 분야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있는 지식인들의 관심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끝으로, 최근의 아감벤에 대한 논란은 기자의 양심을 망각한 일부 언론인들에 의해 과도화 된 측면이 있습니다. 공중 보건에 대한 그의 관심이 충분한 함의를 갖고 있음에도 이를 언론이 반사회적 논법으로 과장해 온 것은 일개 시민 대 언론의 비균형적인 힘의 논리를 일견 떠올리게 하는데요. 아감벤과는 약간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장 지글러 역시 유사한 고초를 겪은 바가 있습니다. 다행히 프랑스나 영국의 많은 언론들이 최근에는 공중 보건에 대해 균형잡힌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만 저 역시도 부분적으로는 봉쇄에 대한 자유와 개인의 기본권의 제한이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틀에서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마땅히 헌법의 제한을 제외하고 이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시민들에게 자유라는 가치는 충분히 중요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현대의 정치사회적인 메커니즘이 민주주의의 확대와 더불어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 증진에 있어왔던 것은 분명 부정할 수 없으며 그런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나 독재와 공존할 수 없음은 확실합니다. 이에 펜테믹 사태에 따른 각국의 정부가 보여온 보건 정책에 대해 자신들이 파국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마땅히 필요해 보입니다.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신성화 된 의료 과학은 이단과의 불협화음이 있다

그렇게 개인의 두려움, 집단적 패닉의 악순환의 고리를 통해 정부는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안전에 대한 욕구를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었다

역사는 모든 사회 현상에 정치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아울러 자신의 책임을 제대로 하지 못한 또 다른 부류는 법학자들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삼권 분립의 원칙이 훼손되고 행정권이 실질적으로 입법권을 대체하는 긴급 명령이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경우를 오래전부터 익숙히 봐 왔다

나는 분명 도덕적 명분을 위해 뒤따르는 거대한 희생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들에게 나는 나치의 장교 아이히만을 말해 주고 싶다

거짓으로 밝혀진다 해도 반드시 참이어야 하는 거짓은 사실처럼 여겨질 것이다

여전히 다수의 이탈리아인이 은연중에 사용하는, 문화 곳곳에 퍼져 있는 반유대주의에 동조하는 유대인 박멸이라는 소재를 전염병 사태와 같은 선상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최근까지 음모와 작당 모의, 비밀 조직이 만연했던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에서 보건 긴급 사태를 향한 비판적 시각을 음모라고 완고하게 치부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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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6-25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존 외에 인류가 추구하는 다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란 어떤 것인가?

오늘도 베터라이프님의 서재와 왔다 얻어 갑니다.

베터라이프 2021-06-25 10:46   좋아요 0 | URL
부족항 글 항상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감벤도 역시 바우만과 비슷한 어조였는데 분명 희망은 있겠지요 ^^;;

chaos 2021-07-09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내내 불편했는데 아마도 아감벤의 논의가 인간 혹은 인류라는 이야기로 돌아가기에 그 어디서도 자본주의비판 또는 이 문제에 대한 계급적 관점은 보여지지 않았습니다

베터라이프 2021-07-09 01:59   좋아요 0 | URL
현재의 펜데믹 사태로 인한 사회 부조의 불확실성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행을 주요한 관점으로 아감벤이 다루고 있는데 쓰신 글이 어떤 관점으로 비판을 하시고 있는지 저로서도 이해가 안되네요. 혹여 쓰신글을 제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유럽과 미국의 의료 붕괴와 그러한 시민들의 고통은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바로 이부분을 아감벤은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chaos 2021-07-09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연한 신자유주의 비판은 아감벤 아니라도 널려있죠. 한데 현재 팬더믹과 관련하여 정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인류 일반인가요? 정치경제학 비판이 빠진 자본주의 문화비판이란게.. 신자유주의 비판이라셨는데 신자유주의 극복 대안이 인류의 자유인가요? 삼권분립이 민주주의인가요?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끔직히 싫어하겠네요? 아감벤은.. 현학적인 말투로 유럽의 현자인듯 글을 써서 도대체 글을 읽고 무얼 생각해 볼 수 있는건지 전혀 모르겠던데요.

베터라이프 2021-07-09 13:24   좋아요 0 | URL
종래의 신자유주의 비판이 그저 막연한 비판들로 채워져 있다 생각하시는지요? 아감벤은 이 글에서 펜더믹 사태로 인한 정부의 대응과 결과물에 대해서 파시즘의 그것과 비슷한 관점을 보이고 있는데요. 그것의 동의 여부를 떠나 현재의 펜데믹으로 인해 얼마간의 공공 의료가 준비가 안된 것은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의한 것은 확실합니다. 반대로 님께 되묻고 싶은것이 자본의 축적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이론적 차원의 문제를 떠나서 인류가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인간답게 영위하는데 신자유주의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회적 안전망과 부조, 공공성 및 도덕적 근거의 사회적 책임 모두를 앗아간게 신자유주의인데 이것 조차도 긍정을 하시지 않는다면 달리 드릴말씀이 없네요. 그리고 저 뿐만 아니라 아감벤 역시 민주주의의 확대와 좀 거 건전한 정치 인식을 주장하고 있고 이에 선결 조건이 신자유주의적 기조의 개선 즉, 공공성을 회복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바우만이 말한대로 모두가 모두를 책임지는 일종의 미래지향적 목표라도 가져야하는것이죠. 이렇게 후기 자본주의 상황에서 극심한 불평등을 초래한 것은 신자유주의이고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거의 사회가 테크노크라트의 과두제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권력의 균형추가 이미 너무 기울어진 상태라 기득권과 부유층의 기존 세력화에 일반 시민들이 비벼볼 틈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단 아감벤의 이 글은 정부의 공중 보건 개입에 대한 권력의 남용을 우려한 글로서 이 부분은 가능성의 여부를 떠나 이해하고 있는것이 좋겠죠. 일반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런 비상 대책은 그 후이든
어떻든 간에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전적으로 아감벤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슈미트의 과거를 떠울리며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철학자의 양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지합니다.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오로지 시민이 더 많은 사회적 변별력을 갖추고 어느 정도 실질적인 정치조직화 선행되어야 하겠죠. 지금처럼 엘리트 위임 방식이 아니고요. 이 모든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님은 분명합니다. 저의 글 논조가 딱딱하실수 있는데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핸폰으로 쓰다보니 너무 두서없이 쓴 것 같아 송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