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크 시민정부 효형 클래식
존 로크 지음, 남경태 옮김 / 효형출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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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근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아버지로 잘 알려져 있는 존 로크는 이 뿐만 아니라 경험론과 계몽주의 철학의 효시라고도 읽히고 있는데요. 특히 그는 사회계약과 관련된 루소의 혁명적인 이론보다 거의 몇세기를 앞서 나간 인물이기도 한데요. 혹자들은 로크의 이론을 홉스에서 차용된 일종의 동어반복으로 격하시키기도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자들은 로크가 주장한 '재산권'에 한정된 부분만을 차용해 그를 자신들의 부류로 만드는 데 막대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칸트를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엄밀하게 그에 대해 분석을 해본다면 통치론의 후반부를 편역해 내놓은 이 책에서도 인간의 자유와 정치적 권력, 시민 정치 및 자연법에 의한 입법주의 등 근대 민주주의의 이론적 양식들을 거침없이 내놓은 중요한 선각자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그의 인식에서 공리와 기본적 자유에 대한 개념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기본적인 민주주의 이론의 밑바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자유주의의 아버지보다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통치론 Two treatises of Government 의 후반부를 편역한 것으로, 국내에는 지난 2012년 4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우선 로크가 강조하는 '재산권'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싶은데요. 이미 '통치론'에 대한 수많은 강의와 해설서 및 서평들이 적잖게 나와있는 상황에서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라고 할 수 있는 시민들의 재산권 보호에 대한 로크의 주장을 설레발로 자본주의적 맥락이라 해석하는 일부의 사람들이 있는데요. 로크는 단순히 재산권 뿐만 아니라 후에 나오는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노동 자체에 대한 의미있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는 각 개인들의 노동들이 사회를 지탱하는 요소라고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마찬가지로 스미스도 노동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을 갖고 있었고 이를 중상주의를 비판하는데 할애하기도 했습니다. 즉, 노동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며, '탐욕을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반증은 자본주의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고 봐야하며, 또한 이 시기에는 엄밀히 자본주의적 개념이 미처 나올 수가 없는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가 말하는 '자유'에 대한 의미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차원의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로크는 방종과 자유를 구분하고 있었고 자유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의 제한적인 자유로서 마찬가지로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다시 로크가 재산권에 보이는 기본 인식은 사회와 위임된 권력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 의무 내지는 자연법적 인식을 내포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인지한 인간들이 복합적인 의미의 '자연상태'를 사회계약의 의무로서 공익을 위해 편성되어야 하는 기본적인 정부의 함의들을 위해 필요한 개념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로크의 주장대로 각 개인들이 각자 의지에 따라 재산권을 갖게 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것이며, 이것의 전제 조건은 방만하고 제약없는 자유로서의 재산권 추구가 아니라 스스로 이성을 발휘해 자유의 (이성적인) 제한을 토대로 주장할 수 있는 합리적인 재산권에 대한 인식을 뜻합니다. 이것은 관습법 체계에서의 기반이 아니라 인간이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법전으로 쓰여있지 않은 자연법의 인식하에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이에 로크는 '이성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인간들도 있다'고 언급하면서 대체로 모두가 이성을 수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다수가 모인 의견과 의지는 마땅히 모두가 따라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나 가브리엘 타르드, 세르주 모스코비치 등에 의해 이를 다수에 의한 선동으로 몰아가면서 민주주의 자체에서도 '다수결의 폭력'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실 여기서 따져봐야 할 점은 당시의 저런 군중이라는 인식을 만들어 낸 지식인들의 대부분이 자신은 실로 '군중'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얼마나 오만한 발언인지 여러분도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다수의 인민들이 사회의 의견을 결정하는 절대 다수의 의견을 시민들의 비이성적인 측면을 연계시켜 반대의 '소수의 권리'라는 대립물의 자체가 본질적으로 변질되면서 사회적 기득권이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절대 부유층의 권리로 교묘하게 인식시켜 왔는데요. 이는 노엄 촘스키의 말처럼 '절대 부유층의 권리', '기득권층의 이익'이라는 아예 노골적인 언행이 지식인들의 입에서 감히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이 '소수의 권리'가 오용되어 왔던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동성애자들이나 성소수자 혹은 하층 계급의 시민들의 마땅한 권리를 보수 우파들과 극우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면서 소수에 대한 정의를 아예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사회적 부조를 강하게 불식시키면서 실질적 배려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았던 것이 바로 이 신자유주의자들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로크는 "각 개인은 다수의 결정에 복종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서 물론 앞서 언급했던 대로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사회 계약과 관련된 시민의 속성 자체를 '믿을 수 없고 즉흥적이다'라는 공격으로 일관한단면 애초에 사회 계약 따위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크가 말하는 '자연상태' 자체가 남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배타적 자유의 다름 아님을 이미 피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모두가 인정하는 계약의 틀 안에서 법의 준수와 복종이라는 의무를 명확히 이해하고 나서야 로크가 말하는 '부여된 정치 권력'의 단계를 비로소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부분을 로크는 '시민사회'와 '정치사회'로 구분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양자에 대한 로크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로 결집해 모두 자신의 자연법 집행권을 공공에 위임하고 양도하면 그것으로써, 또 그럴 경우에만 정치사회 혹은 시민사회가 성립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시민사회에서는 누구도 사회의 법으로부터 면제되지 않는다"고 그는 명확히 밝히고 있는데요. "누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 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배상이나 안전을 호소할 수 있는 곳이 없다면 자연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라는 평가는 이처럼 의미심장하다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시민사회를 규정하는 사회의 입법권과 관련해, 로크는 "자연법은 성문화되어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있기 때문에" , "자연법은 사람들의 권리를 정하고 재산을 보호하는 본연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선을 그으며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사회는 입법 체계가 필요한 것이며, 이것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것은 제도와 재판관에 대한 시민들의 태도가 단순한 복종을 넘어 시스템에 대한 덕성의 존재와 깊은 이해를 갖게 되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은 이 법 기관이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여 시민들에게 신뢰를 받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논증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법 기관에 대한 다수 시민들의 존중과 수용은 무조건적인 어떤 사법 체계와 헌법 이론에 의해 강조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올바른 판결과 시민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재판관들이 사회 전체에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로크의 연계된 인식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로크는 전제 왕권을 약간 논하면서 '덕성을 갖춘 지도자가 존재한다면 그것 자체로 사회에 이득이 될 수 있다"는 논점이 그에게는 이미 선험된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는데요. 도덕성 자체가 제도와 틀 안에서 필수불가결한 논제는 아니지만 그것이 바탕이 된다면 양쪽 즉 입법과 시민 사이에 어느 정도 신뢰감과 유대감을 갖게 된다는 점을 밝히고 싶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물론 오늘날은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헌법의 고유한 의미에 따라 시민 모두가 사법 체계 전반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법은 모두가 지켜야 하고 그것을 시민 모두가 맹세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전제로 그저 의무로 받아들에게 하는 것보다 다소 부족할 수도 있지만 사회 계약의 논리로 자연상태를 벗어나 인간이 누구나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받기 위한 사회 구성의 요건으로 다수의 시민들을 이해시키는 것이 좀 더 필요한 작업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끝으로, 로크의 이 글은 자연상태와 자유, 시민, 시민사회 그리고 위임된 권력을 통한 입법 체계 등 각각의 가치가 서로 연계되어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기본적 토대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지금에서야 이를 읽어나가면 어쩌면 당연한 말들의 향연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사실 무엇보다 이 글의 중요한 논점은 인간이 폭력적인 자연 상태를 벗어나 모두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는 '사회계약'의 단계에서 무엇보다 이성을 보유한 다수의 결정을 존중하고 이를 바탕으로 모두의 동의를 거쳐 입법의 준수를 피력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건전한 목표라는 점입니다. 다만, 순진한 민주주의의 시대가 저물어 이제는 자본주의 심화단계에서 민주적 정치가 날로 침해당하면서 계약의 의미가 자본주의에 의해 다소 변질된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구도로 몰아가 선악의 문제로 만들려는 것은 아닙니다. 주입된 자본의 논리를 차치하더라도 우리의 삶에서 자본주의는 무척 중요한 문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미 시민들에게 이 자본주의는 자아실현과 만족하는 삶에 대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깊이 내면화가 된 상황입니다. 바로 이런 자본주의를 건전하게 만드는 데 있어 아직도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독재와 폭력적인 권위주의와 화해할 수는 없지만 반대로 자본주의는 여건만 맞는다면 독재와 반민주주의와도 이론적으로 양립이 가능하다는 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변화시킨 신자유주의 역시 시장우월을 기반으로 여러 정치적 논법들을 사회에서 제거시키고 이익이 보장된다면 흡사 지옥과도 화해할 수 있을정도로 배타적이 되었는데요. 그래서 로크의 이 글은 지금의 엄혹한 현실에서도 시민들이 다시 민주주의의 기본을 유념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여겨집니다.   



- 위탁된 취지와 반대로 국민에게 국가의 힘을 사용한다면 국민을 상대로 전쟁 상태에 돌입하는 것이다 라는 문장은 사뭇 눈길을 끌었는데요. 이는 루소가 말한 인민은 정부를 갈아치울 권리가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졌습니다.


-로크는 이 글을 통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기독교적 사고관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신성을 통해 그는 인간은 다수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에게 부여받은 세계라는 의미가 바로 이러한 맥락이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모든 사람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서로 위해를 가하지 않고, 자연법을 준수하면 전 인류의 평화와 보호를 보장할 수 있다

사람들 간의 자연 상태가 종식되려면 계약이 아니라 서로 하나의 공동체에 포함되어 단일한 정치체를 이룬다는 합의가 필요하다

즉 모두가 활용할 수 있을 만큼 가진다는 규칙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도 여전히 세계에 통용되어야 한다

그 법은 오로지 이성만이 포고하고 알려주는 것이었으므로 자신의 이성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은 그 법에 따른다고 말할 수 없다

진정한 자유는 자신이 따라야 할 법의 테두리 내에서, 타인의 전횡적인 의지에 종속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신의 신체, 행동, 소유물, 전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하는 자유를 가리킨다

나는 인간이 성숙한 상태에 이르면 자연법을 체득하게 되고 그 테두리 내에서 행동하게 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로 결집해 모두 자신의 자연법 집행권을 공동에 위임하고 양도하면 그것으로써, 또 그럴 경우에만 정치사회 혹은 시민사회가 성립한다

위탁된 취지와 반대로 국민에게 국가의 힘을 사용한다면 국민을 상대로 전쟁상태에 돌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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