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소울 1 블랙 캣(Black Cat) 6
가키네 료스케 지음 / 영림카디널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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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즈 워즈도 그렇고, 한국을 찾는 입양인이나 혼혈인들은 하나같이 조국을 미워하지 않으며, 한때는 원망했지만 지금은 자랑스럽다고 입을 모은다. 물론 매스컴에서 그런 멘트를 유도하는 면도 있겠지만 왜 그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선량한지...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명쯤은 따끔한 말을 해줘도 되지 않을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달콤한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정신이 버쩍 들게 하는 말 말이다. 이 책과 대비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너무나 '착한 영혼'들이다.

1960년대, 일본에서는 남미 이민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주로 가난한 농민을 대상으로 브라질 농장으로의 이민을 추진한 것이다. 현대 도시인들에게 '파라다이스'라고 하면 해변가의 야자수 아래에 긴 의자가 떠오르지만, 당시의 농민들에게 파라다이스란 끝없이 펼쳐진 비옥한 토지였다. 더군다나 비옥한 토지에 자리잡은 넓은 주택, 국가에서 농민들을 그곳으로 보내준다... 이것의 진의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비옥한 토지도, 주택도 없었다. 개간이 불가능한 토지와 풍토병이 밀림에 던져진 이주민들을 죽여갔고, 그들의 항의와 원망은 일본 관료들에게 닿지 않았다. 남미 이민 정책은 일본정부의 기민정책이었기 때문이다. 배가 무거울 때 바다에 던져진 짐처럼, 아무도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주민들은 하나 둘씩 도망쳐서 부랑자로 전락하거나 밀림에서 풍토병으로 죽어갔다. 이것이 정부의 정체인가. 배신감을 넘어 허탈함까지 느껴진다. 국가란 기득권층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고, 그들에게 하층민이나 농민들이란 귀찮을 때 버려도 될 패라는 것을 일본의 남미 이민 정책은 선명하게 보여준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면 이민 정책으로부터 40년 후, 일본 정부에 대한 네 명의 복수가 시작된다. 가족과 부모의 죽음, 힘겨웠던 자신들의 인생에 대한 복수. 밀림에서 아내와 동생을 잃고 떠돌았지만 야채 중개업으로 성공한 에토, 이웃들이 다 떠나간 밀림에서 부모을 잃고 혼자 남겨진 후 에토에게 발견되는 케이, 부모가 살해당한 후 마약 조직 보스의 양자로 키워진 마쓰오, 정부에 대한 한과 세 남자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합류한 야마모토. 이들의 복수극은 치밀하고, 철저한 인과응보를 따른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지만, 유쾌하다. 그것은 등장인물 중의 한명인 케이에 힘입은 바가 크다. 부모가 죽은 밀림에서 짐승처럼 살아남은 어두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그는 호색한에다 예의와 죄책감도 없고, 매사가 유쾌한 인물이다. 친구 마쓰오의 생각을 옮기자면 '진짜 악당'이 될 소질이 다분한 놈이다. (놈이라 부르는 게 미안하긴 하지만 그의 친구들이나 애인도 그렇게 부르니 어쩔 수 없다.)

이런 케이와, 애초에는 복수의 수단으로 접근한 방송국 기자인 다카고의 관계는 시원스러운 복수극과 더불어 앞부분의 어두움에 점점 밝은 기운을 더해간다. 복수가 꼭 처절하고 비극적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어두운 복수는 보람도 없다. 케이의 말대로 복수는 복수일 뿐 그걸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복수 자체가 또 하나의 악몽이 돼서는 곤란하다. 이것은 사실 동양적인 진지한 세계관에서는 약간 무리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재미보면서 사는 브라질인들의 기운을 수혈받았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다만 끝이 아무리 유쾌하다 하더라도 이 책이 해피엔딩인 것은 아니다. 야마모토의 선택, 그리고 조직 보스의 양자로 살아온 선량하지만 외로운 마쓰오의 운명은, 이민 1세대이자 복수극을 가능하게 한 에토의 말년과 더불어 한번 끊어진 행복의 실타래가 다시 이어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의 악의로 망가진 인생. 그들이 성장하고 성공해 힘을 가졌어도 한 번 망가진 인생은 회복되기 어렵다. 제발 마쓰오에게 행운과 따듯함이 찾아오기를... 그렇게 보면 이 책은 처음에는 처절하고 나중에는 유쾌하지만 모든 인물을 가볍게 다루지 않는, 도리를 지키는 책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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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 프랑스 현대문학선 2 프랑스 현대문학선 2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 세계사 / 199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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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있다. 그 황제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제국 중의 하나를 다스렸다. 그 제국은 넓은만큼 오만했고, 어떤 가치가 있었으며, 그래서 후세에까지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 제국이 한창 전성기를 맞아 뻗어나가고, 가장 화려한 인물들을 배출한 후 휴식기에 접어들었을 때, 안정을 취해야 하는 제국을 현명하게 다스린 지도자. 이 회상록의 주인공인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다.

작가가 있다. 그는 거의 이천년 전의 한 위대한 인간을 묘사하면서 자신의 위대함 또한 완성해나갔다. 20대에 처음 쓰기를 시도하여, 포기하다가, 다시 시작하고, 포기하고, 완전한 결심하에 매달려 50대에 이르러 완성한 책 한 권. 이천년 전의 황제가 20년 동안 제국을 다스리면서 황제로서의 위대함을 완성했다면, 이 작가는 20년 동안 책 한 권에 매달리면서 작가로서의 위대함을 완성했다. 역시 황제에 도전할 정도의 오만함을 가진 이는 예술가밖에 없는가.

양자인 마르쿠스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되는 이 회상록은 철학자가 됐을 수도 있었을 한 남자가 권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그 권력의 자리에서 남은 생을 보내며 황제의 의무를 완성하기까지 내면에 새겨진 기록이다. 일종의 생에 대한 본능으로, 삶에 대한 의지로, 자신에 대한 자부심으로, 신분에 대한 의무감으로 한발 한발 완성해 간 황제의 자리.

유르스나르의 손에서 다시 태어난 하드리아누스는 현명한 만큼 현실적이고, 관대한 만큼 냉정하며, 자상하고, 준열하다. 원래 제국의 현제쯤 되면 이렇게 완벽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만큼. 하기야 원래 다비드상의 모델이 다비드만큼 아름다웠겠는가. 비너스상의 모델이 비너스만큼 황홀했겠는가. 유르스나르의 펜을 거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조각가의 손을 거친 다비드상만큼 훌륭해졌고, 더 완벽해졌다. 역사의 인간은 역사의 이상이 되었다.

완벽한 인간을 묘사했는데도 지리멸렬하지 않은 것은, 그 인간이 직면한 '실존'이 주는 공감 때문이다. 삶에 대처하는 자세랄까, 자기 삶을 정비해나가는 것은 어부나 황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황제로서 자기 삶을 정비했을 뿐. "이 남자가 만일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지 못했고, 로마 제국의 경계를 쇄신시키지 못했더라면, 나는 그의 개인적인 행복과 불행에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면 '일기'와 '회상록'의 차이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유르스나르는 왜 제목이 '하드리아누스의 일기'가 아니고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이냐는 질문에 대해 작가노트에 이렇게 기록했다. "행동하는 남자는 일기쓰는 법이 거의 없다는 걸 사람들은 잊고 있다. 거의 언제나 후에 가서 무위의 시절 깊숙이서, 그 사람은 기억을 되살리고, 쓰고, 그리고 아주 자주 놀란다." 성공만 했다하면 자서전과 어록을 남발하는 요즘 유명인사들이 들었으면 좋을법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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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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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출간당시 ‘음란물’로 고소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그만큼 이 소설은 파괴적이다. 하드보일드한 묘사가 나와서가 아니라-실제로는 키스 장면조차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일부일처제에 대한 환상이랄까, 믿음을 정면으로 깨부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누가 행복한 부부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단란한 가정의 가치가 부정당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결혼이 여전히 신성시되는 것은 결혼이 행복과 안정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무언가가 평생 부글부글 끓는다면? 돈으로도, 성실한 배우자로도, 귀여운 자식으로도 만족되지 않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욕망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은 바로 나다”라는 고백으로 소설 이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었다. 플로베르는 가정이나 안정적인 생활 안에서 만족되지 못하는 인간의 욕구가 있음을 한 세기 전에 인정했다. 적어도 그는 정직했던 셈이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따분한 시골에서 가사 일을 돌보고 있던 엠마에게 괜찮은 남자가 나타난다. 아버지를 진찰하러 온 의사인 그는 점잖고, 수줍음을 탔다. 그리고 처음엔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는지 모를 정도로 순진했다. 남자가 엠마를 좋아했던 것만큼 엠마는 남자가 마음에 들었고, 그녀의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청혼을 했고, 결혼식 날은 모든 것이 행복했다. 엠마는 의사 부인이 되었고, 딸도 낳았다.


하지만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엠마는 당황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것인가? 왜 삶은 여전히 따분하고, 사람들은 지루한가? 그녀의 남편은 저녁식사 후 소파에 앉아 기분 좋게 잠들어버리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는 남자였다. 엠마는 그렇지 않았다. 이 안정적인 생활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한다. 엠마는 그것을 단 하루 초대된 남작의 파티에서 봤다고 생각했다. 화려함, 떠들썩함, 사치스러운 유흥의 세계 속에서... 그리고 다른 남자와의 불륜 속에서...


그렇다. 엠마는 어리석은 여자이다. 채워지지 않는 신기루를 향해 돌진하다 안정적이고 행복할 수 있었던 현재의 생활을 망쳐버렸다. 부유한 재산을 탕진했고, 그녀만을 사랑하는 남편과 딸을 내동댕이쳤다. 하지만 쉽게 엠마를 비난할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그녀의 절박함을 알기 때문이다. 작고 보수적인 소도시의 중산층 부인인 그녀가 돈 주앙같은 모험가가 되거나 파리의 화려한 배우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넘치는 에너지와 끼가 있었던들 엠마는 의사 부인인 마담 보바리일 뿐이었다.


누구나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때로는 성공적인 방법으로, 때로는 어리석은 방법으로. 엠마는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불행하게도 그 방법이 무모했다. 그리고 딸이 자라는 모습이나 남편의 든든함, 혹은 독서나 소모임에서 인생의 낙을 찾지 않은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 대가가 얼마나 컸던가. 그녀는 밤새 마차를 타고 헤매고 싶었고, 화려한 조명 아래서 춤을 추고 싶었고, 하늘을 날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없었다. 날개도 없었다. 마담 보바리에게 인생은 권태로웠고, 그녀에게 다른 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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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8
이토야마 아키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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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짝사랑을 받는 사람은 행복한 악역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는 사랑을 받는 동안은 얼마든지 무관심해도, 귀찮다고 투덜거려도 기꺼이 용서된다. 항상 그 사람만 바라보는 누군가는 그 모든걸 감내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사람은 본의아니게 불쌍하고 선한 역을 맏게 된다. 그 사람이 아무리 성깔이 있고, 자존심 상하는 건 못 견디는 사람이라도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동안 그 잘난 성깔과 자존심은 잠시 주머니에 넣어놔야 한다. 자존심이란 손을 넣어 만지작거리고 꺼내고 싶다가도 결국 꺼내지 못하는 카드가 되어버린다.

이 얼마나 불리한 게임이고, 불평등한 세상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랑의 세계에서 양쪽의 저울추가 평형을 유지하는 행운은 쉽게 일어나지 않으니까.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는 그 불리한 게임에 돌진하는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고등학교 때 '꽂힌' 남자를 18년이나 짝사랑하는 여자. 그 동안 다른 남자와 연애도 해봤지만 번번히 싱겁게 끝나고 만다. 그리고 끝내 여자는 생각하게 된다. "바람피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세상은 변하지 않고, 내가 짝사랑하는 남자의 애매한 무덤덤함도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밖에 없다. 좀 더 침착하게..............그를 사랑하자.

두번째 연작인 '오다리기 다카시의 변명'은 짝사랑하는 여자와 짝사랑받는 남자의 입장이 교차되서 보여진다.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에서 짝사랑하는 여자의 입장은 들어봤으니 '오다기리 다카시의 변명'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짝사랑을 받는 남자, 오다기리씨의 입장이다. 고등학교 때 쿨한 십대의 모습으로 한 여자의 마음을 훔친 그는 의외로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아 대학도 삼수로 들어갔고, 현재는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무명작가다. 그는 여자의 마음을 알고 있지만 어떻게 하지는 않는다. 여자의 마음을 받아들이기에는 누구와도 공존할 수 없는 못말리는 개인주의자이고, 여자의 마음을 딱 거절하기에는 인생이 쓸쓸하다. 이기적인 고양이같은 남자.

그렇다. 역시 짝사랑을 받는 사람은 악역일 수밖에 없다. 김제동이 한 토크쇼에서 말했듯이 길가의 꽃은 함부러 꺾지 말것이며, 꺾었다면 버리지 말 것이며, 버렸다면 뒤돌아보지 말아야하는 게 사랑의 정석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 남자, 그리 밉지는 않다. 살짝 건방지고 냉담하지만, 한 여자의 짝사랑을 18년동안 받는 동안 나름대로 진심을 보이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일까. 그 진심이 사랑과 우정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장상사와의 하룻밤으로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한 여자를 위로하고 병원에 데려다주고, 한밤중에 걸려오는 여자의 횡설수설 전화에 성심성의껏 반응한다. 절대 누군가를 책임질 수 없다던 남자는 결국 여자를 책임지지는 못하겠지만 둘 사이의 온기가 상승할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자유방임형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베테랑 샐러리우먼. 의외로 잘 어울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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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스 : 자아를 찾은 아이 Body Club Books 13
버지니아 M. 액슬린 지음 / 시간과공간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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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아이를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한국의 딥스-영수이야기'라는 책을 먼저 읽었기 때문이다. 그 책에서 '딥스'는 부모에게 받은 상처로 마음을 닫고 문제행동을 보이는 아이가 놀이치료를 통해 어떻게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가는지 언급하고 있었다. 딥스는 모든 아이는 회복되어질 수 있다는 증거, 기적의 상징이었다.

액슬린 박사가 딥스를 만날 무렵, 딥스는 외부 세계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도 거부하는 자폐아에 가까운 아이였다. 부유층이었던 그의 부모는 딥스를 정신지체아라 했다. 하지만 유치원 선생들은 딥스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자기 안에만 틀어박혀 있기는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라 하였다. 딥스를 관찰한 액슬린 박사는 딥스가 정신지체가 아니라고 확신했고, 놀이치료를 시도해보기로 한다.

놀이치료란 아이와 선생이 몇 가지 놀이도구가 있는 작은 방에 들어가 정기적으로, 일정시간 동안 놀이활동을 하는 것이다. 듣기에는 무척 썰렁하지만, 이것은 아이에게는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닌다. 아이는 일정시간 동안 어른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가, 간섭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기 주도적인 활동을 할 수 있고, 상상 속에서 세상을 재창조할 수도 있다. 이때 동행한 선생은 아이의 수동적인 친구가 되어 아이의 행동과 말에 적절한 반응만 해주면 된다. 사람들, 특히 부모에게 상처를 받아 문제행동을 보이는 아이는 놀이치료를 통해 간섭만 받아왔던 생활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자기에 대한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고, 상상놀이를 통해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증오를 표현하고, 용서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응어리를 풀어갈 수도 있다.

딥스의 아버지는 과학자, 어머니는 외과의사로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유층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계획에 없던 아이를 임신하자 어머니는 외과의사로서의 커리어를 포기해야 했고,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혼란스러워했다. 이런 태도는 딥스가 태어나고도 변하지 않았고, 아이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던 부모들은 지적교류를 통해서만 아이와 소통하려 했다. 어머니는 딥스를 안아주는 대신 2살짜리에게 글과 숫자를 가르쳤고, 아버지는 아이의 행동에 반응하는 대신 꾸중하고 야단만 칠 뿐이었다. 애정을 받기 전에 부모의 시험에 든 아이는 당연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 딥스는 5살이 되기 전에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누구에게도 글을 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외부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놀이방에서 딥스는 자기를 이해해주는 액슬린 박사와 함께 전에는 꾸중만 들었던 모래놀이와 물놀이를 하며 옷을 더럽히기도 했고, 그림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그리고 인형으로 가족놀이를 하며 아빠와 엄마에게 그동안 쌓였던 분노를 표출했다(그 과정에서 아빠 인형은 모래밭에 몇 번이나 매장되어야 했다). 처음에는 목요일에 한 시간으로 정해졌던 놀이치료 시간이 끝나면 집에 가기 싫다고 울던 딥스였지만 점차 안정을 찾아가면서 놀이치료 과정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딥스는 상처를 버리고 자아존중감을 회복해 갔고, 부모에 대한 원망에서 자유스러워졌다.

아마 어른이라면 어떤 치료를 동원해도 그토록 크게 받은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이가 기적의 존재라는 것은, 이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두고 말한 게 아닌가 싶다. 아이이게 가하는 상처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이해자가 이끌어주면 아이는 얼마나 빠르게 회복되어 새 삶을 살 수 있는지 딥스는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말미에 실린 10대 중반이 된 딥스의 모습은, 이 세상 어느 휴먼드라마보다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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