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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8
이토야마 아키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누군가의 짝사랑을 받는 사람은 행복한 악역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는 사랑을 받는 동안은 얼마든지 무관심해도, 귀찮다고 투덜거려도 기꺼이 용서된다. 항상 그 사람만 바라보는 누군가는 그 모든걸 감내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사람은 본의아니게 불쌍하고 선한 역을 맏게 된다. 그 사람이 아무리 성깔이 있고, 자존심 상하는 건 못 견디는 사람이라도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동안 그 잘난 성깔과 자존심은 잠시 주머니에 넣어놔야 한다. 자존심이란 손을 넣어 만지작거리고 꺼내고 싶다가도 결국 꺼내지 못하는 카드가 되어버린다.
이 얼마나 불리한 게임이고, 불평등한 세상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랑의 세계에서 양쪽의 저울추가 평형을 유지하는 행운은 쉽게 일어나지 않으니까.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는 그 불리한 게임에 돌진하는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고등학교 때 '꽂힌' 남자를 18년이나 짝사랑하는 여자. 그 동안 다른 남자와 연애도 해봤지만 번번히 싱겁게 끝나고 만다. 그리고 끝내 여자는 생각하게 된다. "바람피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세상은 변하지 않고, 내가 짝사랑하는 남자의 애매한 무덤덤함도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밖에 없다. 좀 더 침착하게..............그를 사랑하자.
두번째 연작인 '오다리기 다카시의 변명'은 짝사랑하는 여자와 짝사랑받는 남자의 입장이 교차되서 보여진다.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에서 짝사랑하는 여자의 입장은 들어봤으니 '오다기리 다카시의 변명'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짝사랑을 받는 남자, 오다기리씨의 입장이다. 고등학교 때 쿨한 십대의 모습으로 한 여자의 마음을 훔친 그는 의외로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아 대학도 삼수로 들어갔고, 현재는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무명작가다. 그는 여자의 마음을 알고 있지만 어떻게 하지는 않는다. 여자의 마음을 받아들이기에는 누구와도 공존할 수 없는 못말리는 개인주의자이고, 여자의 마음을 딱 거절하기에는 인생이 쓸쓸하다. 이기적인 고양이같은 남자.
그렇다. 역시 짝사랑을 받는 사람은 악역일 수밖에 없다. 김제동이 한 토크쇼에서 말했듯이 길가의 꽃은 함부러 꺾지 말것이며, 꺾었다면 버리지 말 것이며, 버렸다면 뒤돌아보지 말아야하는 게 사랑의 정석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 남자, 그리 밉지는 않다. 살짝 건방지고 냉담하지만, 한 여자의 짝사랑을 18년동안 받는 동안 나름대로 진심을 보이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일까. 그 진심이 사랑과 우정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장상사와의 하룻밤으로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한 여자를 위로하고 병원에 데려다주고, 한밤중에 걸려오는 여자의 횡설수설 전화에 성심성의껏 반응한다. 절대 누군가를 책임질 수 없다던 남자는 결국 여자를 책임지지는 못하겠지만 둘 사이의 온기가 상승할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자유방임형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베테랑 샐러리우먼. 의외로 잘 어울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