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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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셴바하는 독일의 시인이자 작가이다. 고귀한 정신과 예술성으로 널리 존경받고 있으며 그의 문체는 학생들의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공인'되어 있다. 아셴바하의 모범적인 명성은 귀족 칭호를 받음으로써 더욱 공고해졌다. 또한 아셴바하는 평생을 규칙적인 습관과 자기 절제로 다스려왔으며 정념이나 상상의 표현마저도 희랍의 고전을 빌려서 할 만큼 정제되어 있다. 하지만 그에게 일탈의 욕구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억누르고 무시했왔던 것이었다. 여름의 휴가에 아셴바하는 답답했던 자신에게 휴식을 주고, 평생 눈길을 돌리지 않았던 방랑의 욕구를 표출하기 위해 베니스로 떠나게 된다.

베니스. 물의 도시이자 문화의 도시이며 동시에 불결함과 잘 꾸며 놓은 퇴락의 도시. 질펀하며 정열적인 이탈리아인과 도시 깊숙이 흐르고 있는 바다가 혼합된 도시. 아셴바하는 그 모든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관찰하면서 고급 호텔에 도착한다. 태양이 내려쬐는 모래사장을 끼고 있는 그 호텔에서 휴양을 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간 호텔의 식당에서 아셴바하는 보고야 만다. 천상의 미소년, 타치오를.

그는 애써 태연한 척 했고, 불안과 초조를 숨기지 못하자 그 도시를 떠나려고까지 하지만 결심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셴바하는 다시 호텔로 돌아와 타치오를 주시한다. 소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멀찍이서 눈에 띄지 않게. 타치오에 대한 아셴바하의 동경, 그는 그것을 아름다움에 대한 추함의 사랑, 젊음에 대한 늙음의 사랑이라고 정의 내리고 고통스런 마음으로 소년의 모습을 응시한다. 한 마디의 말 건넴이나 머리카락을 톡 쳐줄 만한 장난은 시도해 보지도 못한 채. 아셴바하는 타치오에 대한 찬미를 시로 표현함으로써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고귀한 정신의 정복을 꿈꾸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타치오는 환상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누나들을 따라 베니스로 휴양 온 타치오가 아셴바하가 동경하던 그 타치오와 동일 인물인가? 아니다. 아셴바하는 타치오를 멀리서 지켜보고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자신의 환상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타치오는 하나의 아름다운 상징이었다. 만인의 존경을 받던 문인이 그 동안 버려와야 했던 자신의 정념과 자유. 그리고 고귀한 정신을 갈고 닦음으로써 자기 것으로 만들고 획득하고자 했던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인간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미 사랑에 빠진 아셴바하에게는 맹목적인 정열만이 남아 있었다. 전염병이 돈다는 불길한 소문과 징조도 무시한 채 타치오의 금빛 머리카락이 보이는 사정권 안에서 괴로워할 뿐이었다. 아셴바하는 타치오를 걱정하면서도 소년의 어머니에게 떠나라는 충고조차 하지 못한다. 베니스의 전염병이 계속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경우에 사랑은 죽음이다. 아셴바하는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있었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방법으로 사랑하고 있었고, 단념해야 할 때를 놓치고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약해서 오래 살 수 없을 것 같은 타치오의 곁에 있기 위해 전염병이 돌고 있는 도시에 끈질기게 머무르는 아셴바하는, 이미 눈이 먼 채로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다. 타치오란 환상의 존재가 아셴바하에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었을까. 난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긴,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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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남편 외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정명자 외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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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도스토예프스키는 '영혼의 괴물들'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들만 봐도 세상의 불완전함과 자신의 불완전함, 세상의 고뇌와 자신의 고뇌를 구분하지 않는 신경질적인 정열가들의 사색과 극단적인 행동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건 어떨까?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정점을 맞는 '혼의 리얼리즘'의 줄기와 더불어 인간의 속물성을 풍자하는 골계미와 익살스럽기까지 한 희비극 소설의 줄기도 있다는 사실은.

그 중 하나가 <영원한 남편>이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같은 작품이 흥미롭다면, 그리고 독자의 사색과 탐구를 자극함으로써 그들과 일체과 되어 고민하게 한다면, <영원한 남편>같은 작품에서는 연극처럼 재미있고 테크닉을 갈고 닦은 이야기꾼 도스토예프스키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영원한 남편>은 엉뚱한 곳에서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며 <아저씨의 꿈>, <스뻬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악어>를 통해 추구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시도 중 하나가 만개한 작품이다. 이들 '두 번째 줄기'의 특징은 인간의 속물성을 여러 가지 비유와 촌철살인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아내 나딸리야의 간통을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남편 빠벨 빠블로비치와 나딸리야의 애인이었던 벨차니노프. 벨차니노프가 그들을 떠난 후에는 만날 리가 없었던 두 남자는 나딸리야가 죽은 후, 백야의 더운 날씨 속에서 극적으로 해후하게 된다. 벨차니노프는 빠벨 빠블로비치를 비웃으면서도 켕기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고, 빠벨 빠블로비치는 벨차니노프의 정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를 한결같이 존경하고 있다. 과연 정말로 몰랐을까? 아내가 죽은 후 발견된 편지함에 가득했던 아내의 애인들 편지 중에는 벨차니노프의 것이 없었을까? 오, 모를 일이다! 일이 어떻게 꼬일지.

여기에 나딸리야와 빠벨 빠블로비치의 딸인 리자, 하지만 나딸리야와 벨차니노프의 딸로 추정되는 어린 딸 리자가 개입되고, 나딸리야의 또 다른 애인이었던 바가우또프가 죽으면서 갈등의 타래는 더욱 것잡을 수 없이 얽힌다. 빠벨 빠블로비치는 벨차니노프를 증오하고 있는가, 존경하고 있는가? 벨차니노프는 리자를 사랑함으로써 정말 새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벨차니포를 향한 빠벨 빠블로비치의 키스가 본심인가, 칼질이 본심인가? 빠벨 빠블로비치는 두 번째 결혼을 통해서도 '영원한 남편(아내의 간통을 영원히 모르는 남편을 가리키는 벨차니노프의 정의)'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인간이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속물이 되어버리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빠벨 빠블로비치의 칠칠맞음과 16세 소녀와의 두 번째 결혼을 향한 무모한 시도, 벨차니노프의 뻔뻔함과 인간성에 대한 불성실은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어떻게 해야 온전한 인간으로 행동하는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희비극이다. 소설에서는 너무 일찍 사라졌지만 여러 애인을 거느리고도 자신을 현모양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딸리야 부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세 사람의 딸 리자는, 그렇기 때문에 오래 살 수 없는 여리고 순수한 창조물이었다.

나딸리야 부인처럼 요절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모습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똑같은 모습으로 지속될 것이다. (몇 년 뒤 기차에서 마주친 그들의 모습을 보라!) 이 소설을 비판한 당대의 비평가 중 하나는 중점을 어디다 두고 읽어야 할지, 희극으로 봐야할지 비극으로 봐야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영원한 남편>은 훌륭한 소설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 비평가의 삶은 어땠을지, 그 비평을 쓴 날에도 모순되는 행동으로 자괴감에 빠지지는 않았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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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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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예수보다 더 신비화된 인물이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고 학설은 도처로 뻗어나가고 인용되었지만 그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있는 것은 신화뿐이었다. 마르크스란 거물의 몇몇 특징은 그 신화에 권위를 더해주었다. 그의 저작은 한 개인의 수준을 뛰어넘은 양과 질을 자랑함으로써 천재란 한 사람의 일생으로는 이룰 수 없는 업적을 이룩한 사람이라는 촌평에 확신을 부여했다. 영향력은 더 거대해서 그를 숭배했던 쪽이나 비판했던 쪽이나 마르크스의 그림자 아래서 20세기를 지나왔다. 적어도 자본주의와 그 대안으로 내세운 사회주의를 다루는 데 있어서 마르크스보다 뛰어난 사상가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속표지의 프랜시스 윈의 사진을 보면 '그래서 어쨌다고? 마르크스란 친구가 어떤 인물인지 당신이 알기는 하나?'라고 묻는 것 같다.

마르크스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천재도 알고 보니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공식은 마르크스에게는 맞지 않는다. 젊을 때부터 거인같은 지성으로 좌중을 사로잡은 선동가이자 이론가. 밤늦게까지 맥주집에서 난동을 피우고 밤거리를 배회했던 방탕아. 독설과 논쟁의 선수. 질투와 과시욕의 소유자. 그는 특별했지만 인간성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인물이나 자신보다 튀는 사람을 모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정적으로는 어땠을까? 마르크스는 연상의 귀족 숙녀인 예니 베스트팔렌과 오랜 약혼 끝에 결혼한다. 많은 아이를 낳았지만 성년이 된 자식은 셋,마르크스보다 오래 산 자식은 둘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병으로 죽었다. 독일에서 망명한 후 유럽을 떠돌다 영국에 정착했지만 궁핍에서 벗어난 적은 거의 없었다. 한번도 생업에 종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부인을 끔직이 사랑했지만 하녀에게 사생아를 낳게 해 아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했다. 말년에 부인과 결혼한 딸 예니헨이 먼저 죽자 더이상 살 의욕을 잃고 얼마 뒤 그들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회적으로는? 일단 활동을 시작하면 누구도 그에게 무관심할 수 없었다. 어느 조직에서나 마르크는 두뇌이자 실세였다. 그의 박학다식, 통찰력, 언변, 카리스마, 심지어는 외모까지 지도자가 되기 위해 타고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저술들은 너무 늦게 인정받아서 그로 인한 혜택은 받을 수 없었다. 더구나 평생을 살았던 영국에서는 매우 인색한 평가밖에 받지 못했다. 그는 이미 살았을 때 인용되기는 했지만 장례식에는 11명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센세이션은 일으켰으나 진가를 인정받지는 못한 결과였다.

유명하지만 이해되지 못했다는 것은 당대 뿐 아니라 20세기, 그리고 현재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전히 착취당하고 있는 노동자가 스스로 훈련된 이론과 행동으로 시민의 권리를 온전히 손에 넣을 때까지 그는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되면 손해보는 유식한 기득권층이 뭣하러 그를 이해하려 하겠는가?

마르크스를 비판했던 쪽이 의기양양했던 것은 소련이 망하고 난 뒤였다. 말하자면 러시아를 포함한 거대한 연방체가 무너지기 전에는 마르크스 한 사람의 가치를 무력화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무너진 뒤 자본주의가 저 혼자 비틀거리는 거인의 몰골을 연출하고 있는 지금, 마르크스 이상의 철학이 부재한 지금, 그의 빈자리는 더 크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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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과의 대화 한나래 시네마 3
프랑수아 트뤼포 지음, 곽한주 외 옮김 / 한나래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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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이 영화가 탄생하기 전인 19세기 이전에 살았던 인물이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화가로서 만족하기에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어 못견뎠을 것 같고, 문학으로 만족하기에는 이미지와 영상에의 갈급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히치콕은 역시 카메라 뒤에 서서 필름을 다루며 관객의 반응을 기대하는 모습이 가장 어울린다. 그가 영화사에 기여한 만큼이나 영화도 그의 삶에 기여한 것이다.

예술이란 때때로 요즘 것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고전으로 분류되고 접근하기 어려운 장막이 쳐진다. 히치콕의 영화도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에게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히치콕의 매니아인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가 50여 시간에 걸쳐 인터뷰했고, 히치콕의 말년과 죽음의 후일담까지 전하고 있는 이 책은 히치콕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영화 일반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를 전해줌으로써 히치콕과 영화 양쪽에 친하지 못한 이들에게 최상의 가이드 역할을 해주고 있다.

히치콕은 영화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는 원칙을 정점까지 밀고 나갔던 감독이다. 그는 무성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은 유성영화도 잘 만들지만 무성영화를 잘 만들지 못하는 감독은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영상만으로 감독을 감동시킬 수 없다면, 설명과 말을 통해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다면 더 이상 영화감독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관객을 즐겁게 하는데 노력했고,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상업영화감독으로도 원하는 것을 이뤘지만 히치콕은 새로운 형식을 끊임없이 도입하고, 서스펜스를 능숙하게 다루며, 인물의 다양하고 병리적인 내면을 묘사하는 시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평생을 불안과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인간이기도 했다.

히치콕은 주연으로 하여금 관객에게 환상과 즐거움을 주는데 발군을 재능을 보여줬지만 정작 자신은 조연들과 동일시했다고 한다. '아내가 바람피웠거나 좌절을 겪은 남자, 살인자나 극악무도한 사람, 다른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 사랑할 권리도 갖지 못한 사람, 참여하지 못하고 겉도는 사람'들은 그의 내면의 분신이었다. 남다르게 뚱뚱한 몸과 내향적인 성격으로 어렸을 때부터 남과 어울리기보다는 그들을 관찰하기를 선택했던 히치콕. 그는 평범하고 잔잔한 삶의 단면을 묘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긴박한 순간, 쫓고 쫓기는 사람들, 끔찍한 살인, 누명을 쓴 주인공을 통해 인간 내면의 단면을 묘사했다. 히치콕은 '삶을 반영하는 수단이 아니라 삶을 강화하는 매체'로 영화를 이용했던 것이다.

히치콕 뿐 아니라 히치콕이 예를 들었던 풍부한 영화유산에도 불구하고 요즘 영화들은 히치콕이 우려했던 현상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영상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단순한 화면에(스펙터클하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될수록 쉬운 설명으로 일관하고, 혹은 기존에 있는 원작에 영상을 덧입히는 그림책 같은 영화가 많아지고 있다. 몇 장면의 도입부만으로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예시하고 긴장감을 만들어냈던 히치콕의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고전'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히치콕을 샅샅이 인터뷰했던 이 책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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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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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인 지로에게 형 이치로는 대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자기중심적이고, 무뚝뚝하며, 웃을 줄도 모른다. 형수와 자신과의 관계를 의심하는가 하면 '절대'라는 명제에 사로잡혀 점점 정상적인 인간의 궤도에서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치로는 그런 지로에게 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존경받는 지식인이다.

진지한 지식인이란 모순적인 세계의 정체를 알고 싶어, 혹은 그 모순을 해결하고 싶어 평생을 학문에 바치는 사람이다. 지식의 역사는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불만을 그치지 못한 탐구자들의 역사인 것이다. 형인 이치로 또한 그랬다. 그의 예민한 감각과 비타협적인 성격은 세계의 모순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하고 체화할 때까지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죽거나 발광하기를.

자기에게 그렇게 엄격한 이치로가 남에게라고 너그러웠을리는 없다. 이치로에게는 부모님이나 형제들 모두가 마음이 통하지 않는 존재였지만 아내와는 더욱 그랬고, 혹은 그런 식으로 몰아갔고, 아내와 소통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를 점차 절망으로 밀어넣었다. 절대적인 것을 얻으려 했지만 가장 가깝고 사랑하고 싶은 이를 잃은 것인데, 지식인의 유치함을 드러내는 이러한 결과는 이치로를 점점 극단으로 몰고갔다.

어찌해야 할까? 이치로는 전혀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지만, 사실 가장 의심스러웠던 것은 아내를 순수하게 사랑하고 딸에게 기꺼운 미소를 보낼 수 없게 되어버린 자신의 '정신적인 부정'이었을 것이다. 솔직한 감정의 상실. 하지만 절대에의 지향이라는 애매한 집착을 포기하지 못하는 그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이 소설에는 균형잡힌 인간이 없다. 이상에 자기를 바친 이치로는 불행해졌고, 그런 고민 없이 사는 이치로의 동생 지로나 친구 H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인간적인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성품이 여유롭고 솔직하며 매력적이기까지 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인물들인 것이다.

고래로부터 (서양에서) 내려온 절대적인 가치의 발견이라는 이상과, 과학문명시대인 현대에 흔들리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이 이치로의, 그리고 저자 나쓰메 소세키의 목적이었다고 한다면 실패한 셈이다. 이상은 실패하고, 평범한 것은 그대로 흘러가 사라질 뿐이며, 사랑은 소통될 수 없다는 것이 이치로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니까.

소설 <행인>은 주제에서 문체, 캐릭터, 문제의식까지 서양 근대 고전의 그것과 흡사하다. 다른 게 있다면 인물들이 침대가 아닌 다다미에서 잔다는 생활의 차이와, 프란체스코 뿐 아니라 교겐(승려)에 대해서까지 말할 수 있다는 지적 반경의 차이뿐. 과학문명시대의 인간상은 그렇다치고, 서양 형이상학의 줄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절대에의 탐구때문에 이치로가 자기를 망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이 서양문학의 일본버젼은, 대단하기는 하지만, 특히 절대에의 경도라는 면에서 남의 고민을 내것처럼 괴로워한 동양 지식인들의 비극을 가장한 소극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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