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행인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평점 :
동생인 지로에게 형 이치로는 대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자기중심적이고, 무뚝뚝하며, 웃을 줄도 모른다. 형수와 자신과의 관계를 의심하는가 하면 '절대'라는 명제에 사로잡혀 점점 정상적인 인간의 궤도에서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치로는 그런 지로에게 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존경받는 지식인이다.
진지한 지식인이란 모순적인 세계의 정체를 알고 싶어, 혹은 그 모순을 해결하고 싶어 평생을 학문에 바치는 사람이다. 지식의 역사는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불만을 그치지 못한 탐구자들의 역사인 것이다. 형인 이치로 또한 그랬다. 그의 예민한 감각과 비타협적인 성격은 세계의 모순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하고 체화할 때까지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죽거나 발광하기를.
자기에게 그렇게 엄격한 이치로가 남에게라고 너그러웠을리는 없다. 이치로에게는 부모님이나 형제들 모두가 마음이 통하지 않는 존재였지만 아내와는 더욱 그랬고, 혹은 그런 식으로 몰아갔고, 아내와 소통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를 점차 절망으로 밀어넣었다. 절대적인 것을 얻으려 했지만 가장 가깝고 사랑하고 싶은 이를 잃은 것인데, 지식인의 유치함을 드러내는 이러한 결과는 이치로를 점점 극단으로 몰고갔다.
어찌해야 할까? 이치로는 전혀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지만, 사실 가장 의심스러웠던 것은 아내를 순수하게 사랑하고 딸에게 기꺼운 미소를 보낼 수 없게 되어버린 자신의 '정신적인 부정'이었을 것이다. 솔직한 감정의 상실. 하지만 절대에의 지향이라는 애매한 집착을 포기하지 못하는 그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이 소설에는 균형잡힌 인간이 없다. 이상에 자기를 바친 이치로는 불행해졌고, 그런 고민 없이 사는 이치로의 동생 지로나 친구 H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인간적인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성품이 여유롭고 솔직하며 매력적이기까지 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인물들인 것이다.
고래로부터 (서양에서) 내려온 절대적인 가치의 발견이라는 이상과, 과학문명시대인 현대에 흔들리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이 이치로의, 그리고 저자 나쓰메 소세키의 목적이었다고 한다면 실패한 셈이다. 이상은 실패하고, 평범한 것은 그대로 흘러가 사라질 뿐이며, 사랑은 소통될 수 없다는 것이 이치로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니까.
소설 <행인>은 주제에서 문체, 캐릭터, 문제의식까지 서양 근대 고전의 그것과 흡사하다. 다른 게 있다면 인물들이 침대가 아닌 다다미에서 잔다는 생활의 차이와, 프란체스코 뿐 아니라 교겐(승려)에 대해서까지 말할 수 있다는 지적 반경의 차이뿐. 과학문명시대의 인간상은 그렇다치고, 서양 형이상학의 줄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절대에의 탐구때문에 이치로가 자기를 망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이 서양문학의 일본버젼은, 대단하기는 하지만, 특히 절대에의 경도라는 면에서 남의 고민을 내것처럼 괴로워한 동양 지식인들의 비극을 가장한 소극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