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요, 찬드라 - 불법 대한민국 외국인 이주 노동자의 삶의 이야기
이란주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하나. 몇 년 전부터 외국인 노동자 문제가 수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외국인 노동자를 처음 접한 것은 TV에서였는데, 얼굴이 변형될 정도로 피멍이 들고 붕대를 감은 채 서툰 한국말로 '우리를 때리지 마세요'라고 하거나 피켓을 든 장면이 간간히 지나가고부터였다. 그때 나는 참혹함과 당혹스러움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번번히, 심지어는 몽둥이로 구타당한다는 것, 10시간이 넘는 노동을 하고도 임금을 떼인다는 것, 갖은 협박에 시달린다는 것, 그런 악몽과 같은 현실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둘. 작년에 서울 외가에 갔을 때였다. 동대문을 돌아다니던 나는 무척 신기한 체험을 했다. 내 주위를 지나쳐가는 사람의 3분의 1은 외국인이었던 것이다. 동남아시아인은 주로 삼삼오오 모여 다녔고 젊은층들은 염색에 헐렁한 원색 옷을 입고 있기도 했다. 러시아 쪽에서 온 사람들이 지나쳐갈 때 들리는 특유한 억양은 내 귀를 인상적으로 때렸다. 외국인 노동자는 이미 한국 깊숙히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셋. 인권 옴니버스 영화 '여섯개의 시선'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였다. 한 네팔 여성이 식당에서 무전취식한 후 경찰에 잡혀 한국말을 못한다는 이유로 6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낸 사실은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라 믿기 싫은 정도로 황당하고 끔찍했다. 그러나 이 책에는 그런 사연들로 가득하다. 외국인 노동자를 가축을 대하는 무관심과 잔인함으로 일관하는 일반사람들과 그들에게서 한 푼의 고혈이라도 더 짜내려는 기업들, 가장 효과적인 착취구조를 연구하는 정부, 무책임과 지리멸렬함으로 일관하는 경찰과 공무원들이 이 사회를 채우고 있는 한 그런 일을 막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넷. 이 책을 쓴 이란주 씨는 '느낌표'라는 프로에 몇 번 나왔던 분이다. 마지막까지 몰릴 대로 몰린 외국인 노동자가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것이 이란주씨의 매일 매일의 일인 것 같았다. 이 책은 절벽 끝에서 만난 외국인 노동자들의 사연과, 끝내 버티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을 붙잡지 못했던 아픈 순간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독자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부담스러워할까봐 그랬는지 원래 낙천적이고 따듯한 성격인건지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에 대해 말할 때도 이야기에는 온기가 돌았다.

다섯. 그렇게 우리가 그들을 무시하고, 관심이 있더라도 부담스러워할 때 그들은 우리의 마음까지 생각해주고 있었다. 언젠가 신문에서 버마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한창 불법체류자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추방하겠다는 정부 시책이 발표될 즈음이었는데, 그의 글은 정부의 정책이 왜 외국인 노동자들과 한국 양쪽에 도움이 안되는지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놀랐던 건 공존을 말하는 그가, 외국인 노동자의 모든 고난을 예외없이 겪었을 그가 오히려 우리들을 관용으로 대하고 있다는 걸 느꼈을 때였다. 관용이란 강자의 여유라고 생각하던 내게 그건 충격이었다. 강한 것이 '파워'를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걸 그 때 깨달았다. 관용의 진짜 의미 또한.

여섯. 외국인 노동자 센터에서 일하는 이란주씨 같은 한국인이나,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다고 해서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물론 안다. 그들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견디기 힘든 분노와 증오까지도 삼켜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타당하고, 쫓기고, 병원도 가지 못하고 지하실에서 앓고 죽으면서 같은 분노를 겪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하루에 열 두 시간을 일해도 좋으니 월급을 떼이지 않고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것 뿐이었는데 왜 우리는 그들의 돈을 뺏고 짐승처럼 취급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그렇게까지 타락해야 했을까?

일곱. 어떤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보다 약한 사람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딸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일 수 없으며, 장애인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외국인 노동자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강한 사람들이다. 브로커에게 주기 위해 수천달러의 빚을 지거나 위태로운 보트에 몸을 실어 외국에 가서까지 운명을 개척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무턱대고 착취하지 않고 그들의 강함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견디기 힘들었던 시간들을 이겨낸 많은 경험들을 들으며, 그들이 가져온 자국의 문화를 나누며 공존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평점 :
품절


몇 권인가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었을 때 넉다운됐던 기억이 있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경탄. 날 것 그대로의 진정한 인간을 본 느낌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의 소설은 정말 오랜만에 만나본 진짜였고, 살면서 몇 번이고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사람이란 정도의 차이는 물론 있지만 기본적으로 각박한 삶에 내쳐진 존재다. 거기서 패배하지 않고 먹고사는 것, 그리고 비인간화되지 않고 인간으로 살아남는 것은 각자가 해나가야 할 지난한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나를 잃지 않게 힘을 주는 것은 가까운 사람의 사랑이기도 하고, 기타 자기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문학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힘을 주는 문학이란 것을 생각하면 어느 순간 힘이 빠지고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표현되는 강도는 어떻든간에 이게 바로 인간이다, 이게 바로 세상이다, 라는 것을 보여준 문학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문학을 표현의 장으로 보지 않고 도구로 보는 작가는 엉터리 피카소같은 글들을 쓰고 그것이 현대소설의 경향인 양 잘난 척 했고, 자아도취에 빠져 독자와 함께 징징거리기를 바란 작가도 많았다. 판타치는 달콤한 위로를 줄지언정 힘을 주지는 않았음은 물론이다.

근래의 소설이란 것이 국적에 상관 없이 비슷비슷했던 걸 보면 일본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거기에 반감을 느끼고 문단의 모든 염증나는 것들과 결별한 후 소설 하나에만 육박해 승부를 내고자 한 소설가가 하나쯤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강하게 살기 위해 소설가란 직업을 택한 마루야마 겐지같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영화를 좋아했다는 그가 영화관 하나 없는 시골로 이사간 것을 보면 도쿄의 문화혜택에도 별 가치를 못 느꼈던 것 같다. 하긴 소설가면서도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는 오히려 자기 정체를 숨기는 데 능란하고 서로에게 나긋나긋함만을 원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도시보다 시골에서 소설가로서의 자극을 느꼈던 것 같다. 시골은 아직도 사계절 땅을 파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곳이었고 느물느물하게 자기를 숨기기엔 사람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의 본모습을 관찰하기엔 더욱 좋은 장소였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가장 단순한 생활을 했고, 전원생활의 대상으로서의 시골이 아니라 자연 자체가 꿈틀거리는 것에 두려움과 힘을 느끼면서 밑천과 재산 하나 없는 자신의 삶을 위해 매일 중노동에 가까운 글쓰기를 했다. 과연 대단하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독립적으로 사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래서였던 것일까? 그도 자기와 같은 사람을 자기가 속한 세상에서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를 경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까? 그는 견딜 수 없는 게 많다고 하는데 나도 책을 읽으면서 그의 그런 점이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여자와 게이, 어린이 그리고 대부분의 남자들을 멸시했다. 진짜 사나이의 세상에 대한 평가라기에는 너무 적극적이고 집요한 증오에 가까워서 그가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생각으로만 그치면 상관이 없지만 작품에 나타났을 때는 소설 전체의 균형을 깨뜨려버리기도 했다.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나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의 경우 그는 모든 인물을 공정하게 다뤘다. 그래서 가장 시원찮은 남자나 집안에만 틀어박혀 살만 쪄가는 엄마도 한심하지만 생생한 인물로서 소설에 힘을 더해줬다. 그러나 '천년 동안에'는 작가의 자의식이 너무 전면에 나와 경멸감과 자부심을 너무 돌출해서 결국 우스꽝스러운 소설이 되고 말았다. 주인공의 포효에 다른 것은 모두 웃기게 돼버렸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로서의 각오, 인간으로서의 신념. 그것은 사실 그가 상식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그 상식을 위해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불특정 다수를 그렇게까지 경멸해야 했을까. 일본에서 소설가로 먹고 사는 마루야마 겐지보다 더 살벌한 현실과 대면하면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여자와 게이, 어린이가 무수히 많지 않은가. 그도 결국은 너무 좁은 세계에 살고 있지는 않은지 씁쓸해진다.

마루야마 겐지는 세상의 모든 의존적인 것을 거부하고 누구보다 강한 남자가 되고자 했다. 그리고 문학 주위의 모든 아지랑이를 거부한 채 펜 하나로 진짜 소설을 써내고자 평생을 걸었다. 그렇다면, 독자인 나도 그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가 어떤 소설을 써내는지 기다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길을 가는 마루야마 겐지가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것을 덮어놓고 경멸하고 보는, 그는 별로 자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나약하고 편벽한 소설가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단점에 불과한 그것을 버리고 갈 수 있다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박무영.김경미.조혜란 지음 / 돌베개 / 200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상과부의 흰 소복과 은장도, 시부모와 남편을 공경하는 한복 입은 여인, 열녀비. 조선시대의 여인은 이렇게 한 줄로도 정리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해 보인다. 그리고는 진절머리를 치게 된다. 그 시대에 안 태어나서 너무 다행이야, 라고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같은 교복, 같은 머리를 한 같은 학교의 여학생들도 모두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너무 간과한 것일까? 조선시대 여성으로서 조선시대가 요구했던 겉모습은 비슷했을지언정 한꺼풀 벗겨진 그들의 속모습은 십이폭 병풍처럼 너무도 다채로웠다.

갇혀진 만큼 그들의 꿈은 더욱 꿈틀거렸을지도 모른다.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은 조선 초기에 비교적 자유와 권리를 누린 시대를 살았다고는 하지만 문밖출입이 거의 봉쇄돼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담 밖의 세계를 보고, 발로 직접 돌아다니고 싶은 욕망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출해야 했다. 그 결과 신사임당이 그린 그림은 새가 날라오다 부딪혀 죽을 정도로 생생함을 띄게 되었고, 가지며 호박, 포도를 그린 그림은 정물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지금도 자라고 있는 야채를 보는 것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 더구나 그 야채들은 따듯한 햇살과 흙을 머금고 있는 듯 온기마저 품고 있다. 이 얼마나 하찮고,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신사임당은 금강산에 올라 진경산수화를 그리는 대신 뒷마당의 야채를 수없이 소묘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허난설헌은 그림을 그리는 대신 신선의 세계를 꿈꾸며 시를 짓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조선시대에 시작에 힘쓴 여인은 꽤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를 지음으로써 그들은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은 허난설헌 같은 양반 뿐 아니라 신분 때문에 설움받아야 했던 여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서녀로 태어난 태어난 재주 많은 여인들은 차라리 문재 높은 양반의 소실이 되거나 기녀를 자처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이런 소실이나 기녀 다섯이 모여 일종의 문학서클인 삼호정을 만들어 서로의 시를 교환하고 풍류를 즐기는 모임이 있었다. 이 특이한 모임은 사회에서 소외된 재주 많은 여성들의 소통의 구실을 했음은 물론이다.

"상자 속의 시 구절 누구와 화답할까. 거울 속의 여윈 모습 도리어 가련할 뿐. 스물세 해 무엇을 했던가. 절반은 바느질, 절반은 시를 쓰며 보냈으니"

이 시는 그 모임의 한 명이자 스스로 반벙어리란 뜻의 반아당이란 호를 칭한 여인이 쓴 것인데 그녀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동료들과 소통하기를 바랬는지 절실히 알 수 있다. 이렇게 조선시대 여인들은 시작을 하기도 했고 남몰래 학문에 힘쓰기도 했다. 그들의 모습이 어찌 한가지겠는가? 허난설헌처럼 세상을 원망하며 요절하는가 하면  집안에서 자리를 잡고 인정받으며 살기도 했다. 부녀의 길이 제일 중요하다고 여겨 시집 가자마자 처녀시절 닦았던 학문을 버린 여인도 있는 반면 평생 성리학을 연구해 철학서를 남긴 여인도 있었다. 얌전하고 헌신적인 부녀가 되라는 외부의 압력은 같았지만 이들이 거기에 반응한 방법은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내면을 '증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정보'는 넘쳐나지만 '증언'은 매우 드물다. 매스컴은 모든 것을 전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조선시대에도 사대부 남자들이 쓴 열녀문이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효행에 뛰어나고 삼강행실도에 힘쓴 여인이 시집간 후 남편이 죽거나 난리가 터져 지조를 지켜야 할 순간이 오면 주저않고 목숨을 끊음으로써 인간의 도리를 다했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회의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 있던가? 풍양 조씨라는 여인은 남편이 새파란 나이로 죽자 따라 자결하고자 했지만 두려움과 친청 식구들에 대한 염려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열녀가 되고자 했으나 실패하기까지의 심정과 과정을 세세한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백 가지의 열녀문을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진정성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매스컴'에 맞선 '증언'의 힘을 보여준 것이다.

수백년에 걸쳐 세계 어디보다도 강한 여성억압을 경험해야 했던 조선. "조선에 태어난 게 내 첫번째 한이요, 여자로 태어난 게 두번째 한이요, 김성립의 아내로 태어난 게 세 번째 한이다"라고 말해야 했던 여인이 허난설헌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남자들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며 금연을 시작할 때 여자는 나라의 백성이 아니냐며 패물과 쌀을 모으는 여성 중심의 국채보상운동을 해나간 것을 보면 조선이란 거대한 권력도 결국 이들의 기개를 꺽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조선 여성에 대해 다른 이미지를 가져보려 한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낮동안 분주하게 집안일을 하는 여인. 해가 지자 어른들께 인사하고 별채로 들어와 보자기에 쌓아둔 책을 펴고 전날 읽다 만 구절의 뜻을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뜻이 풀리거나 자기만의 생각이 떠오르면 혼자 씩 웃기도 했을 것이다.  때로는 너무 외롭고 자기 생각을 말할 곳조차 없어 답답하지만 한 장 한 장 적어둔 종이는 상자에 모두 모아놨을 것이다. 죽기 전에 모두 태우라는 쓰라린 유언을 남겨야 하기도 했겠지만 간혹 좋은 이해자를 만나 함께 생각을 나누고 분발하기도 했으리라. 여성에겐 암흑의 시대였지만 누구나 그 암흑에 몸을 낮춘 건 아니었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우리들의 조상인 그녀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 - 유재현의 역사문화기행
유재현 지음 / 창비 / 200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치 있는 책에는 나름의 장점이랄까, 미덕이란 것들이 있다. 이 책도 여러 미덕을 갖추고 있는데, 우선 다른 여행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해박한 역사지식을 들 수 있다. 여행서와 역사란 언뜻 무거운 궁합으로 보이지만 여행서를 읽는 대부분의 목적은 외국의 문화가 궁금해서가 아니던가. 그리고 문화란 다름아닌 그 나라가 겪어온 역사가 현재의 생활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깊이 알고 그 나라를 여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그래서 대부분의 여행서들은 추측과 인상으로 일관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캄보디아에 가면 캄보디아인의 역사가 펼쳐지고, 베트남에 가면 베트남인의 역사가 펼쳐진다. 앙코르 와트에 대해 몇몇 글들을 읽었지만 직접 앙코르에 가고 싶다고 느낀 것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보는 사람마다 똑같은 탄성만 내지르는 앙코르 와트라 오히려 심드렁한 기분이 없잖아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막연한 감동 대신 앙코르의 조각에서 캄보디아인의 문화와 생각들을 실감나게 읽어내고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신비의 극치를 달리는 국적불명의 유물만이 아닌, 고대 캄보디아인 삶과 정신세계가 깊게 아로새겨진 앙코르와트를 소개받은 것 같았다.

베트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경이라기엔 비효율적으로 길쭉한 베트남의 나라모양에 대해 오랜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에는 어느 정도 대답이 나와 있었다. 외침의 역사 못지 않게 비옥한 들을 가진 남쪽으로의 확장도 베트남 역사의 특징이었으며, 오랜 세월동안 계속된 남벌정책으로 결국에는 남부의 크메르인을 굴복시키고 길쭉한 국가모양을 갖게 된 베트남. 그리고 현대까지 지속되는 남북의 이질성에 대해 알고 나니 피상적인 베트남에 대한 인상은 사라지고 베트남을 좀 더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완벽한 무지에서 몇 가지 상식을 소개받았을 뿐인데도 인도차이나에 대한 나의 인식은 크게 바뀌었다.  전에는 간단하기 짝이없는 이미지로 인도차이나를 정리하곤 했지만, 이제는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그곳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채로운 세계인지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역사에 대한 서술도 상당히 많고, 제목대로 식민지, 전쟁, 독재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인도차이나의 슬픔을 다루고 있지만 의외로 이 책의 분위기는 재치있고 일견 발랄하기까지 하다. 쉽게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에피소드는 여느 가벼운 여행기는 따라가지 못할 유머를 지니고 있다. 저자는 특히 캄보디아에 애정을 갖고 있는 듯한데, 한때 컴퓨터를 가르쳐준 캄보디아 청년과의 우정은 무척 다정해서 읽기에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실제로 체류하기도 했던 캄보디아, 나아가 인도차이나와 작가의 밀착감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감동이다.  뭐니뭐니해도 여행한 곳을 사랑하는 여행가의 글이 가장 실감나고 재밌는 법이니까.

비록 위트있는 눈으로 보여지기는 하지만 이 책이 말하는 인도차이나는 아직도 아픔에 신음하는 곳이다. 많은 나라가 다닥다닥 국경선을 붙이고 있는 이 곳은 셀 수 없는 많은 전쟁이 있어왔다. 베트남은 시시때때로 중국과 서구열강의 점령시도에 시달렸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베트남의 등쌀에 고생해왔다.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강산은 반세기동안 고엽제와 폭탄에 불바다가 되기도 했다. 베트남의 밀림은 많이 회복됐지만, 캄보디아의 풍요로웠던 들은 생산도 할 수 없는 황무지로 변해버렸고 지금도 셀 수 없이 많은 지뢰와 불발탄을 껴안고 있다. 인적이 드문 곳의 아름다움에 끌려 걸어갔다가 지뢰를 밟을 수도 있는 곳, 그곳이 인도차이나다. 그곳은 여전히 슬프고 위험하지만, 수많은 인간군상이 살아가고, 외부인을 유혹하는 아름다움이 있는 흥미로운 곳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꼭 나만의 인도차이나를 담아오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털리 부인의 연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5
D.H. 로렌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창작물을 놓고 외설이냐 예술이냐를 시비하는 것만큼 독기 품은 논쟁은 없는 것 같다. 그 독기는 창작물을 대하는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창작물 자체도 타락시킨다. 외설 논쟁에 휩싸이는 순간 창작물이 가진 다양한 의미와 가치는 절단나 버리고 오직 스캔들만 남을 뿐이다. 마치 채털리 부인과 맬러즈의 사랑이 탄로나는 순간 그들을 관계는 더럽혀지고 추문만이 남을 것처럼.

그러나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채털리 부인은 공허한 정신만이 남은 불구 남편과 석탄가스로 가득 찬 영지에서 서서히 압살당해 가고 있었고, 맬러즈 또한 사랑의 모든 환희를 상실하고 숲 속에서 사냥터지기로 틀어박혀 있었으니. 나중에 사랑을 통해 그리 열정적으로 생의 환희를 가득 채웠던 그들이었는데 말이다. 그 둘은 서로를 진작에 알아차렸음에도 한동한 서로의 존재를 외면했다. 하지만 맬러즈가 고립된 채 살고 있던 오두막집 마당에서 하얗고 늘씬한 등을 드러내놓고 족제비같은 부드러운 날렵함으로 머리를 감는 것을 채털리 부인이 목격한 순간, 채털리 부인이 생명에 목말라하며 새끼 꿩을 손에 올려놓고 흘리는 눈물을 맬러즈가 느낀 순간, 그들은 서로가 살아있는 숨결과 관능과 따듯함으로 가득찬 인간임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갔고,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연인이 되긴 했지만, 첫경험이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맬러즈와 달리 채털리 부인은 뭔가 미진함을 느꼈다. 그러나 맬러즈는 다른 어떤 남자보다 완벽한 남자였다. 그는 남편같이 공허한 지성으로 가득 찬 남자도 아니었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취하는 마이콜리스같은 남자도 아니었으며, 채털리 부인이 자리에 있어야만 음담을 포함한 모든 대화를 끌어나갈 수 있으면서도 채털리 부인이 대화에 대해 아는 척 하면 불쾌해하는 그런 남자들은 더욱 아니었다. 맬러즈는 온전한  남자였으며, 그래서 채털리 부인을 온전한 여자로 대할 수 있었다.

그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고, 마침내 둘 사이에 놓인 간극을 없앤 채 상대방의 존재와 자신과의 합일을 전적으로 긍정하기까지는 시간이 흐르고, 만남이 지속되어야 했지만 그들이 출발은 어떤 만남보다 서로에게 가까이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이 작품은 일종의 교양소설이기도 하다. 비록 다른 고전 교양소설에서는 소년이 베아트리체같은 영원한 여성을 통해 성장하는 반면 여기서는 농밀한 섹스와 진지한, 혹은 유머러스한 대화를 통해 성장하지만 말이다. 또한 소년만 성장하고 여인은 구름 뒤에서 천사처럼 미소만 짓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같이 성장하며, 둘 다 완전한 성인임에도 새롭게 껍질을 깨뜨리고 날아오른다. 이에 비하면 괴테의 교양소설은 정체가 애매모호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세상과 고립된 채 서로의 몸을 나누고 눈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채털리 부인인 코니는 그러기를 바랬고, 맬러즈 또한 그러기를 바랬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맬러즈는 코니보다 열 배는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런 성격이었고, 코니보다 거의 10살은 위였으며, 온갖 세상경험을 한 사람이었다. 귀족부인과의 관계가 허무한 연기처럼 흩어지거나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 사랑의 도피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코니로 말하자면 맬러즈보다 사태의 심각성을 10분의 1밖에 실감하지 못했지만, 결국 코니의 두려움 없는 용기가 끝내 위태로운 이 둘의 관계에 가능성을 실어주게 된다. 이것이 책 제목이 '맬러즈씨의 연인'이 아닌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된 까닭이 아닐까.

이들은 당대의 계급모순과 물질문명에 대항해 사회 혁명을 주장하는 대신 일종의 인간성의 혁명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노동착취와 거드름을 통해 인간이하의 무엇이 되어버린, 그리고 기계들에 의해 점차 기계적이 되어가는 육체의 온전한 복원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섹스는 육체의 교류중에서 가장 긴밀한 교류이며, 그러므로 육체의 교류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과 상대를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정신만을 강조하는 건 겁쟁이의 기만술에 지나지 않았다. 연인에게 충만함을 주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과 어떠한 교류도 불가능할지니. 사실 이것은 예언으로 꽉 차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유명한 사실대로 출간전부터 외설논쟁에 휩쓸려 오늘날까지 왜곡되어 왔다. 이렇게 낙인찍힌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제인 오스틴을 뛰어넘은 로맨틱 코미디의 걸작이 아직 나오지 않았듯이, 현대인과 얽힌 사랑과 성을 다룬 작품중에 이것을 뛰어넘는 것은 없다고 본다. 기계시대에 걸맞게 '기계적인 행위'만이 반복되는 현대의 성문화를 노골적으로 팔아대는 포르노와 '채털리 부인의 연인'과 같은 작품을 비교하고 헷갈리게 만드는 것은 이제 그만두는 게 어떨까. 차라리 코니와 맬러즈에게 한 수 배워보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