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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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어린아이의 눈물'이라고 한다. 확실히 어린아이는 눈물을 흘려야만 성장한다. 아기 때의 생리적인 욕구충족을 위해 우는 것이 지나서 최초로 숨을 죽이며 흘리는 서러운 눈물은 아이를 사람으로 만드는 통과의례다. 그것이 좋건 나쁘건 간에. 부끄러움의 눈물, 자기애의 눈물, 두려움의 눈물, 한이 담긴 통한의 눈물까지... 어린아이가 흘린 눈물은 곧 그 아이가 성장하면서 어떠어떠한 것을 맞닦뜨려야만 했는가에 대한 혼자만의 증언이기도 하다.

저자인 서경식은 재일조선인 2세다. 양친은 배움이 없었지만 조선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자식이 책을 읽는 것은 끔찍히 좋아했고, 그래서 책값이 떨어질 날은 없었다고 한다. 약하고 내성적인 탓에 운동하고 노는 것 보다 책을 훨씬 좋아하기도 했고, 역시 독서가들이었던 형들의 영향으로 서경식의 독서는 어릴 때부터 꽤 조숙한 수준이었다. 거기다가 재일조선인이란 정체성이 주는 불안함은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그늘을 드리웠고, 원하지 않았음에도 지워진 짐은 스스로에게 그런 상황을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선천적으로 독서가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 어린 나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주제의 책을 읽으면서도 문장의 단아함과 잘 짜인 구조가 주는 기쁨을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다른 아이들의 독서처럼 어려움을 겪는 아동도서의 주인공과 자기를 동일시하며 애를 태우기도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책을 읽은 아이들은 그게 하나의 습관처럼 돼서 세상을 볼 때도 책의 필터를 통해 본다는 특징이 있는 것 같다. 그 또한 사춘기의 민감하디 민감한 자기애를 다자이 오사무의 '얄미운' 글을 통해서 확인했고, 형들이 득시글거렸던 집에서는 경멸의 대상에 속했던 시집들을 몰래 읽으며 억눌렸던 감수성을 성장시켜나갔다.

부침이 심한 집안사정에도 불구하고 큰 굴곡 없이 성장했던 그의 인생을 뒤흔든 사건은 역시 재일조선인이란 그와 그의 가족의 정체성 때문에 일어났다. 서경식의 양친도 현대사의 거대한 흙탕물과 함께 휩쓸려 결국 일본이란 타지에 정착하게 된 것이지만 그런 흙탕물은 서경식의 형제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덮쳤다. 서경식의 형들이 20대에 접어든 무렵은 박정희의 한일협정과 귀국운동으로 한창 시끄러울 때였다. 그의 형들 또한 스스로 조선인이란 정체성을 강하게 찾기 시작하면서 일련의 활동들에 동참하게 되고, 결국 모든 과오를 반공정책으로 덮으려 했던 박정희 정권의 그물에 걸려 간첩단이란 누명을 쓰고 구속된다. 구속된 두 형은 옥중서한과 인권운동으로 지금은 잘 알려진 서승과 서준식이다. 이 사건이 그의 가족에게 어떤 충격이었을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다. 다만 서준식의 옥중서한과 서경식의 이 책을 통해 짐작할 뿐이다.

쓰라렸으나 맑았던 소년의 눈물은 이제 한과 고통이 담긴 청년의 눈물이 되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자주 언급되는 책은 루쉰의 저작들이다. 그것은 거의 습관과 도락처럼 읽었던 독서인생의 변화이기도 했다. 이제 책은 실존을 마주보는 시험장이 되었고, 읽지 않아도 될 책들로 인생을 보내는 것에 대한 자책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때쯤에 막내형인 서준식이 보낸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안락하고 평범한 환경이 아닌 고문과 독서금지라는 징벌이 행해지던 감옥에서 온 이 편지는 서경식에게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소년세계와의 작별임과 동시에, 희망을 언급하지는 않으나 쉬지 않는 발자국만이 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한,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살아가고 만들어야만 하는 성인의 시작이기도 했다. 명문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중학교 유일의 재일 조선인으로써 일본 이름이 아닌 조선 이름을 쓰기로 고집했던 소년은 이제 완전히 성장해서 루쉰의 편지에서 삶과 생활을 봤고, 독서의 시야는 조선시집과 프란츠 파농으로 확대된다. 일본인이 펴낸 조선시집은 그 수준은 인정되나 그 언어는 부정되는 형태로 서경식에게 소개되었다. 한참 후에 한글을 익히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부정될 언어조차 배우지 못했던 서경식에게는 '일본어의 감옥'에 갖힌 재일 조선인의 자리를 다시 확인하게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보통 재일 동포나 재일 한국인이란 말은 잘 알았지만 재일 조선인이란 말은 낯설었었다. 재일조선인이란 말은 스스로를 북한 사람이라 느끼는 동포가 쓰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제3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남한과 북한이라는 것이 우리처럼 정체성을 결정짓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들의 부모는 한반도에서 살았었던 조선사람일 뿐이고 지금도 그렇게 불리기를 원한다.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미친 전쟁들을 치루고, 한반도 또한 전쟁을 겪으며 남과 북으로 나뉘어 서로에게 멀어지며 이름으로까지 서로를 구별하는 와중에도 일본의 교토에서 한 소년은 책을 읽고 세상을 관찰하며 성장하고 있었다. 그가 읽은 책들은 그가 겪었던 일들과 그가 흘린 눈물과 함께 한 인간을 만들었다. 이 책은 자기만의 생각과 삶에만 갇힌 나약한 사소설적 일기가 아닌, 경계인으로 태어났던 한 인간이 겪은 '영혼의 성장'과, 실존적인 삶을 정직하게 받아들인 한 인간에 대한 기록이다. 삶의 중요한 때와 함께 하고 그의 성장을 도우며, 강한 신념을 갖게 도와주는 독서. 너무 많이 말해져서 모든 가치가 상실된 것 같았던 '독서'란 말에 다시금 묵직한 무게가 실리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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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치인 개
기욤 게로 지음, 김지혜 옮김 / 자인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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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로 한 작업은 아니겠지만 홍세화씨의 책들은 결과적으로 프랑스를 이상사회로 여기게 하는 데 일조했다. 그들은 파업을 사회에 대한 정당한 발언권으로 보며, 사회이익보다는 사회정의를 중요시하고, 사람들간의 톨레랑스가 통하는 곳이다 등등. 물론 비율적으로 보면 다른 나라보다 그런 미덕을 좀 더 갖추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프랑스인인 작가의 어조를 빌린다면 그것도 "웃기고 있네!"다.

15살 소년 알렉스가 직업 체험 과목을 위해 신문사에서 실습을 할 때 목격하는 프랑스는 그야말로 평범한 인간세계다. 언론은 정의나 진실 따위에는 관심도 없고 흥미를 끌 만한 기사거리나 지역 지도층 인사들의 비위 맞추기를 더 좋아한다. 언론인다운 의견제시는 회의에서 무시당하기 싶상이다. (작가 자신이 너무 솔직한 글을 쓴다는 이유로 신문사에서 짤린 후 작가가 됐다는데, 그 경험이 반영됐을 것이다.) 파업은 노동자의 일방적인 외침으로 그치기 일쑤고 사회운동가의 양심은 무력 앞에 나뭇잎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어디나 그렇듯이 이것은 평범한 시민이나 부유층 보다는 약자에게 명백히 드러나는 부조리들이다. 이 모든 것을 목격하는 알렉스는 노조 활동 경력 때문에 다른 공장에 취직하기에 말못할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아버지를 두고 있다. 그랬기 때문에 소년은 그와 같은 부조리를 한층 민감하게 느꼈을 것이다. 알렉스가 한 눈에 반한 동양계 소녀는 파티에 금발의 어머니하고만 온다. 백인들의 파티에 베트남인인 아버지는 오지 않는 것이다. 애초에 직업 체험 활동을 의논하는 상담원에게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다고 한 이 성깔 있는 소년은 이런 현상에 반항하기로 결심한다.

장애인을 위한 복지재단에서 거액이 횡령되어 운영자의 손으로 들어가는 사건이 제보되었는데도 신문사가 가만 있자 겁없는 소년은 동서남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소년의 친구와 신문사 사진기자인 넥타이 씨, 소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힘을 합치게 된다. 짜잔. 물론 이것은 무척이나 짧고 웃기는 이야기다. 일종의 풍자극이다. 그러나 직업 체험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세상의 부조리를 모두 맛보며 성장해버려야 했던 소년의 모습은 결코 웃기지 않다. 저자인 기욤 게로는 특히 청소년들이 사랑하는 작가라는데 아마 그들도 이 책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봤을 것이다.

별 두 개를 깎아먹은 것은 작가 때문이라기보다는 출판사의 과대 포장과 광고 때문이다. 괜찮은 소설이었지만 이 작품이 걸작은 아니다. 그런데 천재작가 운운하며 독자를 바보 취급한 게 첫째고, 분량도 작은 책을 양장본으로 둘둘 말아 출판한 것이 둘째 이유다. 출판사 직원들이 나중에 하늘나라에 간다면 분명 평생 나무만 심어야 하는 벌을 받을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바라봐야 했던 소년의 아픔을 다룬 책을 내면서 하기엔 너무 양심없는 짓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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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탄
나카가미 겐지 지음, 허호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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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파괴적이고 자신을 내버리는 인물이 나오는 소설을 디게 싫어한다. 자신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은 보는 사람도 고양시키지만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은 보는 사람도 고갈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립, 폭력, 엽기적인 살인, 근친상간을 통해 인간을 탐구했다는 소설이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편이다. 그건 대개 러브하우스에 사는 행복한 가정을 통해 인간을 탐구하는 것만큼이나 지루한데다 짜증까지 덤으로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목탄'은 그 모든 요소를 담고 있었음에도 보고 말았다. '일본 문학 70년의 이상을 실현'했다는 평이 주는 유혹을 거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 책은 그 수준도 대단했고, 끔찍함도 대단했다.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알려진 이 작품은 어머니의 몇 번의 재혼과 아버지 쪽 인물들의 외도를 통해 얽히고 섥히게 된 핏줄이 야기한 비극을 다루고 있다. 배경을 이루고 있는 해안가의 작은 마을인 '고목탄'은 그들의 어지럽게 얽힌 핏줄에 폐쇄성까지 더해주고 있다. 이들은 산으로 막힌 해안 마을에서 이 사람 저 사람과 관계하며 탈출할 수 없는 핏줄의 계보를 만들어 놓았고, 이것은 결국 이들의 목을 죄게 된다.

납득이 안 갈 정도로 복잡한 집안관계여서 처음부터 충격적인 사건과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이 책의 주인공 아키유키는 꽤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비록 그의 이복형이 그와 어머니를 죽이고 싶어 안달하다가 10여년 전에 자살했고, 그 외 한 번의 살인과 누나가 발광했던 사건이 있었지만 지금은 집안도 평안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스물 여섯살의 건장한 쳥년이며 육체노동을 해서 먹고 살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아키유키는 아침과 더불어 일을 시작하고 밤과 더불어 일을 끝내면서 그날의 에너지를 그날에 소진하는 후련함과, 땅을 파는 곡괭이의 감촉, 땀을 흘리는 육체에 내리쬐는 햇살의 뜨거움에 평화로움까지 느끼곤 했다. 그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애인도 있었다.

하지만 잔잔해 보이는 물결 밑에 소용돌이는 항상 일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를 끊임없이 들추어내는 사람은 아키유키의 의붓고모인 유키였다. 그는 선대의 장녀로서 집안이 망해갈 때 유곽으로 팔려가 식구들을 굶주림과 파산에서 구했다. 그 때문에 누구나 그녀를 어려워했으나, 그녀가 남 얘기하는 낙으로만 살며 식구들의 치부를 끊임없이 들췄기 때문에 누구나 그녀를 혐오했다. 배다른 형제자매들로 얽혀 있는 집안에서 유키는 끊임없이 그들의 상처를 쑤시고 소문으로 퍼뜨렸다.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아키유키의 아버지가 이 마을에 오자마자 세 여자를 동시에 임신시키고 감옥에 갔다는 것, 감옥에서 나온 지금은 자신의 식구들까지 새로 거느리며 마을에서 실력자 행세를 하고 있지만 근본도 모르는 그가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떠벌리는 것도 유키의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아직도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아키유키의 아버지 하마무라 류조는 아키유키가 벗어버릴 수 없는 그물이자 그를 끈적끈적하게 감싸고 있는 아교였다. 아키유키에게 생부는 하나였지만 생부에게 자식은 그를 포함해 다섯이었다. 그 형제들이 서로를 증오한다는 것, 그리고 심지어 서로의 얼굴을 모르기도 한다는 것은 결국 비극의 원인이 되고 만다. 아키유키는 생부의 눈에 띄게 건장한 체격과 용모, 거친 성격을 가장 빼다박은 아들이었다. 외면하고자 애를 썼지만 마을에서 때때로 생부와 마주칠 때, 집안끼리 말썽에 얽히게 될 때마다 그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아키유키가 배다른 누이, 그리고  또 다른 남동생에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을 때 더욱 명백해진다. 그는 새아버지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지만 생부인 하마무라 류조의 분신일 수밖에 없었고, 그의 분신으로서 그의 악까지 계승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육체노동으로 자신을 비우고 단련했던들, 그에게 아무리 다정한 애인이 있었던들 그것은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이었다. 그것은 폐쇄적인 작은 마을에서 얽힌 피의 계보 자체가 배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이자 일본 신화를 원형으로 했다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와 신화는 결말 없이 이어진다는 특징을 공유하기 때문인지 이 이야기의 구조는 열려 있다. 끝은 명백히 비극으로 끝났지만  또 다른  비극이 사실 처음에도 벌어져 있었다. 아키유키가 생부인 하마무라 류조의 행동을 얼마나 더 계승할지, 아니면 하마무라 류조와는 결별하고 아키유키로만 살아갈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하마무라 류조를 죽일지도 모른다.

비극답지 않게,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이야기가 비극이긴 하지만 생활의 비극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비극은 서서히 준비됐다가 하나의 사건으로만 치닫는 것이 아니고 선대에도 있었으며, 10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일어났고, 10년 후에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 집안의 문제만은 아니며, 몇몇 인물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비극은 행복처럼 언제 일어날 지 모르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극은 끝내 참을 수 없어 터지는 웃음이나 울음과 같다. 소설의 중심인물도 아니었던 도루라는 청년과 백치소녀의 충격적인 모습이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이 '근본 모르는' 비극을 나타내기에 더없이 훌륭한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초래할 결과를 몰라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다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혹은 하고 싶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도루와 백치소녀는 보여준다. 그것이 비극의 원인이자 추동력이며, 그렇기 때문에 비극은 핏줄처럼 이어진다, 라는 것이 이 책에 깔려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물론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하지만 이 걸작을 다시 읽는 것은 좀 더 심신이 건강해진 멋 훗날이 될 것 같다. 그날까지는 책장에 소중히, 하지만 깊숙히 간직해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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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9-26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hat a good review!...

2005-10-11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0-12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0-19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닭털 같은 나날
류진운 지음, 김영철 옮김 / 소나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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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시민이란 사람들은 일단 너무 많아서 뭐라고 정의하기가 힘든 존재들이다. 그들은 어느 세상에서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뭐랄까, 너무 일상적인 존재들이기도 하다. 이들에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와 같은 구호를 외칠 터질 듯한 분노도, 저택을 살 때에도 주위에 얼마나 많은 부자 이웃들이 살고 있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부유층의 자기만족도 없다. 소시민은, 그냥 소시민인 것이다.

그들의 분노는 하찮게 얻은 요행으로도 풀어지고, 그들의 자기만족은 가게에 두부가 다 떨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무너지고 부부 싸움에 이르게 된다. 부부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그들이 사랑을 나눌 때에는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통근버스가 집앞으로 지나가게 되었다는 요행이 주는 기쁨 때문인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통근버스나 출세의 가능성 때문에 불붙는다.

그러나 이들이 애초에 이랬던 것은 아니다. 둘은 대학교육까지 받은 중국의 엘리트이며 아내는 모두가 호감을 갖는 참한 처녀였다. 둘에게는 찬란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야심찬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기성세대와는 다른, 안락하면서도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 그러나 어릴 때는 누구나 대통령이나 의사를 꿈꾸는 법. 이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꿈은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직장을 옮기는 것, 딸을 좋은 유아원에 보내는 것 정도이다.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아 촌극을 연출하곤 한다.

소시민은 이렇게 살면서 맥주 한 병에 모든 시름을 죽이지만  '관리들 만세'의 고위 관료라 해도 뾰족한 수는 없다. 은퇴나이가 다 돼서 물러나야 하는 것이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직할 수 없는 것보다 덜 괴로운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들은 고위관료답게 더 교활하고 한층 용의주도하다. 이들은 연합과 분열을 어지럽게 반복하면서 구조조정이라는 재앙을 피하려 하지만 닭털같기는 마찬가지다. 통근버스 대신 전용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닭털이긴 하지만.

세번째 소설인 '1942년을 돌아보다'는 사실 읽기가 겁났다. 삼백만명이 죽은 기아라니, 간접경험으로도 충분히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번째 이야기는 작가의 할머니의 촌철살인으로 시작된다. "굶어죽은 게 어디 한 두번 이냐? 도대체 언제를 말하는 거냐?" 민중은 그런 일이 너무 많아서 기억하지 못했고 지배층은 세계 정세나 새로운 체제에 대한 고심보다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억하지 않았다.

삼백만명이 아내와 자식을 팔고, 끝내 서로를 잡아먹으면서 현실화된 지옥중의 지옥이었지만 장개석은 그 사건을 들이미는 미국인 기자를 향해 신경질적인 안면의 근육 경련만을 보여줬을 뿐이다. 그와 같이 위대한 지도자에게 세계의 변화하는 국면 대신 굶어죽는 민중의 문제를 제기했으니 짜증이 날 만도 했다는 게 작가의 의견이다. 삼백만 쯤 죽는다고 중국이 없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어쩌면 "제주도민 삼십만이 없어지더라도 대한민국의 존립에는 지장없습니다"라고 한 이승만의 말과 그리도 닮았는가? 책에서 나온 말대로 나라의 크기나 국력에 상관 없이 통치자들이야말로 지구상에 유일한 같은 계급, 같은 형제였던 것이다. 그들의 피는 만국의 노동자들보다 진해서 거의 샴쌍둥이와 같다. 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더라도 이렇게 똑같은 말을 할 재주는 없었을 것이다.

다시 소시민 임씨네로 돌아가자. 아내는 도시 출신이지만 남편은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 혹시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1942년의 기아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이들 중 극소수는 고위관료로 출세해 은퇴 시기를 늦추기 위해 권모술수를 동원할지도 모르지만 대다수는 오리고기도 사치라고 생각하며 오리내장에 만족하며 살 것이다. 하기야, 굶어죽지 않는 것만도 어딘가? 이들은 보잘 것 없고 유치하지만 굳이 문학으로 묘사되고 말해져야 할 게 있다면 이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중국의 모습이지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고, 모든 아무개 나라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시민은 굶주려봤자 혁명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부자가 될 수완도 거의 없지만, 사실은 그들이 세상 자체이기 때문이다. 임씨의 말, "젠장, 세상에 가난뱅이도 더럽게 많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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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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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폭설이 내려 차의 통행마저 어렵게 되었을 때가 있었다. 차도와 인도의 구분도 필요없게 되자 나를 포함한 동네 주민들은 상의나 한듯 신호등을 무시하고 사차선 도로를 활보했다. 눈이 녹자 금방 원래대로 돌아가 모두 신호등을 잘 지키긴 했지만. 교통규칙이 눈 50cm보다 더 견고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긴 하더라도 살기 위해서는 무너지지 않을 규칙이 필요하다. 이것은 표류소년 중의 하나인 랠프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는 협력을 위해 소라를 불면 모두 모여야 한다는 규칙과 구조를 위해 끊임없이 봉화를 올려야 한다는 규칙을 마련했다. 그는 그것을 다른 아이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어휘의 배열에 신경쓸 정도로 세심하며, '문명적'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힘을 돋울 멧돼지 고기보다는 비를 피할 오두막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도자가 한 명 뿐인 집단이 있던가? 생존을 위해 중요한 것은 질서와 봉화가 아니라 권력과 멧돼지고기라고 생각하는 소년은 잭이었다. 그는 꺼져가는 봉화와 도망가는 멧돼지가 있다면 서슴없이 멧돼지를 쫓기를 택한다. 그는 타고난 사냥꾼이며 독재자였다. 그는 소라고동이나 설득력 있는 언변 대신 고기를 공급하고 힘을 과시함으로써 소년들을 규합한다.

하지만 이들이 상반된 타입이었기에 갈등이 커진 것은 아니었다. 랠프의 이성과 잭의 힘은 영국에서건 무인도에서건 살아남는데 필수불가결한 조건들일 뿐이다. 갈등을 키운 것은 무리중에서 제일 뛰어났던 두 소년이 권력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장점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둘 다 자신이 원하는 방법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무리를 분열시키고 긴장감으로 몰고갔다. 무인도에서의 이들의 표류일기는 곧 랠프와 잭이 권력을 향해 엎치락뒤치락 하는 백일천하이기도 하다. 랠프와 잭을 상징하는 두 무리가 일시적으로라도 화해할 때는 이름으로도 불리지 못하고 '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뚱보소년을 조롱하며 희생양 의식을 치룰 때와 고기를 먹을 때 뿐이다.

처음에는 '돼지'를 놀리는 것으로 무리의 단결과 화기애애함을 유지하던 그들이 멧돼지를 사냥함으로써 피맛을 본 후 희생양 의식의 대상을 다양하게 택하고 방법도 잔인해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마치 피냄새만 맡으면 잔인해지기 때문에 우유만 먹인다는 인도의 춤추는 코브라 같았다. 집을 나간 후 점점 사나워지는 들고양이거나. 네, 선생님, 아니요, 선생님이라고 재잘거리며 성가대원으로써 천상의 화음을 내었을 그들이 완벽한 잔인함을 보여주기까지는 몇 주의 시간과 몇 번의 사냥경험만 있으면 충분했다.

물론 이것은 잘 짜여진 우화이다. 그러나 너무 그럴듯한 우화이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 해도 무서울 지언정 놀랍지는 않을 것 같다. 이들이 점차 거칠고 잔인해지는 것은 선악의 구별이 없는 아이여서가 아니다. 소설의 배경은 바야흐로 세상이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거리던 2차 세계대전 중이 아닌가. 소년들은 어른의 보호와 통제를 받는 동안은 돌출시킬 필요가 없었던, 하지만 어른들은 익히 행하고 있던 인간게임의 법칙을 무인도에서 스스로 터득하고 행했을 뿐이다. 어른들의 세계대전은 핵폭탄과 함께 끝났지만, 아이들은 흔히 말하듯 어른들의 꿈을 먹고 자라는 이 세상의  미래니까 말이다. 끝까지 자기를 지키는 듯 보이는 랠프조차도 실은 그 게임의 주요인물이었을 뿐이다. 예외가 있다면 '돼지'와 사이먼 정도일 것이다. 그나저나 '돼지'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소설을 다 읽은 지금, 제일 궁금한 것은 그것이다. 돼지의 입으로 직접 그의 본명을 들었다면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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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2004-09-14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이상이면 항상 누군가 위에 군림하려는 인간사회의 특징을 담을 책이죠

hoyahan1 2004-09-16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소설에서도 권력에의 의지와 생존에의 의지는 구별되지 않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