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털 같은 나날
류진운 지음, 김영철 옮김 / 소나무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시민이란 사람들은 일단 너무 많아서 뭐라고 정의하기가 힘든 존재들이다. 그들은 어느 세상에서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뭐랄까, 너무 일상적인 존재들이기도 하다. 이들에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와 같은 구호를 외칠 터질 듯한 분노도, 저택을 살 때에도 주위에 얼마나 많은 부자 이웃들이 살고 있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부유층의 자기만족도 없다. 소시민은, 그냥 소시민인 것이다.

그들의 분노는 하찮게 얻은 요행으로도 풀어지고, 그들의 자기만족은 가게에 두부가 다 떨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무너지고 부부 싸움에 이르게 된다. 부부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그들이 사랑을 나눌 때에는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통근버스가 집앞으로 지나가게 되었다는 요행이 주는 기쁨 때문인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통근버스나 출세의 가능성 때문에 불붙는다.

그러나 이들이 애초에 이랬던 것은 아니다. 둘은 대학교육까지 받은 중국의 엘리트이며 아내는 모두가 호감을 갖는 참한 처녀였다. 둘에게는 찬란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야심찬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기성세대와는 다른, 안락하면서도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 그러나 어릴 때는 누구나 대통령이나 의사를 꿈꾸는 법. 이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꿈은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직장을 옮기는 것, 딸을 좋은 유아원에 보내는 것 정도이다.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아 촌극을 연출하곤 한다.

소시민은 이렇게 살면서 맥주 한 병에 모든 시름을 죽이지만  '관리들 만세'의 고위 관료라 해도 뾰족한 수는 없다. 은퇴나이가 다 돼서 물러나야 하는 것이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직할 수 없는 것보다 덜 괴로운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들은 고위관료답게 더 교활하고 한층 용의주도하다. 이들은 연합과 분열을 어지럽게 반복하면서 구조조정이라는 재앙을 피하려 하지만 닭털같기는 마찬가지다. 통근버스 대신 전용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닭털이긴 하지만.

세번째 소설인 '1942년을 돌아보다'는 사실 읽기가 겁났다. 삼백만명이 죽은 기아라니, 간접경험으로도 충분히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번째 이야기는 작가의 할머니의 촌철살인으로 시작된다. "굶어죽은 게 어디 한 두번 이냐? 도대체 언제를 말하는 거냐?" 민중은 그런 일이 너무 많아서 기억하지 못했고 지배층은 세계 정세나 새로운 체제에 대한 고심보다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억하지 않았다.

삼백만명이 아내와 자식을 팔고, 끝내 서로를 잡아먹으면서 현실화된 지옥중의 지옥이었지만 장개석은 그 사건을 들이미는 미국인 기자를 향해 신경질적인 안면의 근육 경련만을 보여줬을 뿐이다. 그와 같이 위대한 지도자에게 세계의 변화하는 국면 대신 굶어죽는 민중의 문제를 제기했으니 짜증이 날 만도 했다는 게 작가의 의견이다. 삼백만 쯤 죽는다고 중국이 없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어쩌면 "제주도민 삼십만이 없어지더라도 대한민국의 존립에는 지장없습니다"라고 한 이승만의 말과 그리도 닮았는가? 책에서 나온 말대로 나라의 크기나 국력에 상관 없이 통치자들이야말로 지구상에 유일한 같은 계급, 같은 형제였던 것이다. 그들의 피는 만국의 노동자들보다 진해서 거의 샴쌍둥이와 같다. 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더라도 이렇게 똑같은 말을 할 재주는 없었을 것이다.

다시 소시민 임씨네로 돌아가자. 아내는 도시 출신이지만 남편은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 혹시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1942년의 기아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이들 중 극소수는 고위관료로 출세해 은퇴 시기를 늦추기 위해 권모술수를 동원할지도 모르지만 대다수는 오리고기도 사치라고 생각하며 오리내장에 만족하며 살 것이다. 하기야, 굶어죽지 않는 것만도 어딘가? 이들은 보잘 것 없고 유치하지만 굳이 문학으로 묘사되고 말해져야 할 게 있다면 이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중국의 모습이지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고, 모든 아무개 나라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시민은 굶주려봤자 혁명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부자가 될 수완도 거의 없지만, 사실은 그들이 세상 자체이기 때문이다. 임씨의 말, "젠장, 세상에 가난뱅이도 더럽게 많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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