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원숭이
페터 회 지음 / 까치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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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왠지 모르게 선정적인 제목이다. 그리고 아리송하다. 제목만 보고는 절대 선택을 안 했겠지만 '스밀라'의 작가 페터 회라면, 그의 소설이 국내에 또 하나 나와있는게 있다면 당연히 그를 믿고 읽어보는 것에 한 표.

이 소설은 일종의 우화이지만, 동시에 현실을 향해 뾰족한 창을 들이대는 풍자이기도 하다. 페터 회의 치밀한 묘사는 한 여자와 원숭이의 만남을 있을 법한 현실로 만들고, 그 무대가 되는 런던의 공기까지 느끼게 한다. 낭만적인 안개 대신 매연을 숨기고 있을 법한, 매정한 현대도시의 공기.

'여자와 원숭이'에서 원숭이에 해당하는 '에라스무스'는 성인 남자 두 배쯤 되는 거대한 변종 원숭이다. 그의 몸집과 뇌의 크기는 인간을 압도한다. 그런 동물은 현대 세계에서는 희귀동물로 지명되어 발견되는 즉시 수집(납치)되고 연구(고문)된다. 에라스무스도 그 덫을 피해가지 못해 고향에서 납치되어 영국으로 왔다.

여자(마들렌느)는 덴마크의 상류층 출신으로, 억압적인 집안에서 도망치기 위해 영국 상류층 남자와 결혼해 런던으로 왔다. 하지만 공허로부터 도망치지는 못해 알콜중독으로 겨우 버텨나가고 있는 중이다. 마들렌느의 무기는 자연미 뒤에 감춰진 독성있는 매력이지만, 여태까지 그것을 써먹은 것은 남편을 고르기 위한 때밖에 없었다.

마들렌느와 원숭이가 만났다면 당연히 그녀는 원숭이에게 연민을 품고, 자기의 불행을 원숭이에게 투시했을 것이다. 새장에서 새를 풀어주며 멀리멀리 날아가라고 외치는 어린아이처럼 마들렌느는 원숭이를 풀어주면 자기도 자유로워질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납치되어 실험당하고 있는 거대한 몸집의 원숭이가 거미줄처럼 조직된 런던과 영국의 감시망에서 자유를 찾는다는 것은 그녀가 공허로부터 도망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여기에 이 소설의 시작이 있고 끝이 있으며, 주제와 문제의식이 있다. 자유를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얻기 위한 대가.

에라스무스는 당연히 르네상스 시대의 르네상스적인 지식인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도 원숭이 '에라스무스'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시대가 얼마나 억압적이고,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바보같은지 알려주는 역할. 그의 야수같은 힘, 어린아이와 같은 솔직함, 르네상스인과 같은 명민함은 현대인이 잃어버린 야생적인 힘, 자연스런 솔직함과 명민함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마들렌느는 에라스무스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따분하고 권태로운 일상과 사람들을 뒤로하고 모험을 해보기로 한다. 그녀 역시 에라스무스처럼 자유를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란 현대사회에서는 금단의 사과에 가깝다. 당연히 필요한 진리인 것처럼 말해지기는 하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금기다 . 자유, 평화, 평등, 사랑과 같은 것들을 적당하게 말하고 동경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적극적으로 취하려고 나서는 순간 그 사람의 행동은 광기로 평가되고 사람들에게 위험한 존재가 된다. 이 우화는 그런 금기를 얻으려고 애쓰고 모험을 하는 이들에 대한 격려이기도 하다. 

'스밀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이 세상을 인간이, 그중에서도 강자가 정복하고 있는 듯 보이더라도 '문명'이 차지하는 것은 결국 이 세계의 작은 일부에 불과하며, 그곳을 벗어나는 순간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 야생의 그린란드 대륙을 뒤덮었던 눈은 덴마크의 도시에서도 존재해 결국 아이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고 대가를 지불하게 했던 것처럼  문명의 법칙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에라스무스에게도, 마들렌느에게도 있었다. 그것이 아마 페터 회의 인물들이 실패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싶다. 현대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소설의 인물들은 보통 '패배했지만 실패하지는 않았다'류의 최후를 맞는 것이 보통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재미이다. 자유를 찾아 모험을 했지만 실패하지도 패배하지도 않은 마들렌느와 에라스무스. 이 소설은 기묘하고도 치밀하며, 낙관적인 우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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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초인 현대영미드라마학회 영한대역 22
조지 버나드 쇼 지음, 허종 옮김 / 동인(이성모)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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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간과 초인'은 한 번 읽고 끝나는 소설이 아닌 것 같다. 어려워서 그렇다기보다는 쇼의 신랄한 조크에 낄낄거리다 보면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오는 중요한 사상을 놓쳐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쇼의 입담을 즐기다 두 번째부터 구절구절을 샅샅이 읽는 게 이런 책의 독서법이다. 특히 돈 주안과 악마, 조각상의 화려한 사상의 대결은 주제는 다르지만 까라마조프가 형제들의 '대심문관'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희극버젼으로.

이 소설에는 크게 세 가지 인물유형이 있다. 인간으로 만족하는 사람, 인간으로 만족하지 않으나 어쩔 수 없이 인간인 사람, 인간을 뛰어넘는 사람이 그것이다. 첫번째는 범인이요 두번째는 모험가고 세번째는 초인이다.

인간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주어진 사회와 세상에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어떤 여성을 멋대로 이상화시켜놓고 숭배하며 따라다니는 시인기질의 미남 옥타비어스, 진보적인 인사로 자처하지만 실은 누구보다 보수적인 램스덴, 평생 아버지 밑에서 곱게 자라왔으나 자신의 결혼에 아버지가 반대하자 대책 없이 노동자로 독립하겠다고 날뛰는 헥터는 대표적인 얼간이로 꼽힌다. 이 중에서 사회와 세상을 냉철히 파악하고 자기가 원하는 바를 취하는 바이올렛은 그나마 괜찮은 인간으로 그려진다.

인간으로 만족하지 않으나 어쩔 수 없이 인간인 사람은 언뜻 보기에는 가장 특별해 보인다. 모험가인 잭 태너는 독창적인 사상과 생활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세상의 평판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맞받아 조롱을 보낼 수 있는 인물이다. 세상에 대한 그의 평과 조크는 의표를 찌르고 있고, 화려한 언변을 듣고 있으면 두려울 게 없는 사람같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평생 자유인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더구나 그는 부자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역시 말이 화려한 사람은 헛똑똑이기 쉽다.

초인은 모든 도덕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하지만 잭 태너같은 모험가와 명백하게 구별되는 것은, 초인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옥타비어스가 그토록 숭배하던 정숙한 여인 앤, 잭 태너가 음흉스럽고, 징그럽게 똑똑하며, 구렁이같이 집요하다고 악담을 퍼부은 앤이 그런 초인이다. 옥타이버스와 램스덴같은 범인에게 보이는 앤은 부모의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요조숙녀다. 아마 그녀는 일요일이면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파티에서는 피아노를 아름답게 연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잭 태너는 그녀의 본색을 알고 있다. 그녀는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하면서 부모님의 뜻이었다고 꾸밀 수 있고, 마음에도 없는 남자를 유혹하고 애태우면서 한번 점찍은 남자라면 끝내 차지하는 괴물이다. 잭같은 사람은 앤의 본색을 알아챌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믿어주지 않는다. 앤은 모험가를 무력화시키고, 사회를 휘어잡을 수 있다. 잭의 학설에 의하면 그녀는 생명의지에 충실한 여자로 남자를 도구로 쓰고 버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의 당연한 법칙이다. 자연은 생명을 이어나가고 번성시키는 여자를 위해 존재하며 남자는 그 올가미에 걸리지 않고 자유와 힘을 쟁취해야 한다는 게 잭의 의견이다. 문명이란 그런 남자들의 안간힘의 산물이다.

하지만 모험가에게는 초인이 되지 못하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모험가는 이카루스와 같아서 그의 의기양양한 날개는 태양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버린다. 모험가는 중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고 결국 그의 발목을 잡히는 것이다. 평지에 머무르지 않고 높이 날아오르려던 야심만큼 모험가의 전락은 더욱 낙차가 크다. 결혼하여 부인에게 쥐여사는 돈 주안을 상상해보라.

이 소설은 인간과 초인사이의 다양한 유형을 사회의 대표적인 구속이자, 도덕이며, 이상인 결혼제도를 통해 펼쳐보이고 있다. 결혼만큼 인간을 구속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없지만 동시에 그만큼 모든 인간의 희망인 것도 없다. 누구나 결혼을 망설이지만 누구나 결혼에 성공하기를 바란다. 결혼의 유무는 사람을 주류와 비주류로 갈라놓고 도덕가와 방탕아로 갈라놓는다. 그 막강한 결혼이란 것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느냐에 따라 인간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다시피 쇼의 초인은 고상하고 비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인 동시에 능청스럽고 뻔뻔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앤 같은 초인 혹은 팜므파탈로 살 수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그녀는 자유롭지만 동시에 인간적이지 않다. 혹은 인간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결혼 뿐 아니라 어떤 것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을 인물이다.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만 쉽게 원한다, 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내가 초인이 될 소질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 책을 두 번째 읽을 때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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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로
나쓰메 소세키 지음, 최재철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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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나츠메 소세키가 이렇게 괜찮은 작가인 줄 미처 몰랐다. 왜 일본인들이 그렇게 소세키를 사랑하는지 이해하게 된 것이 이 '산시로' 때문이다. '산시로'는 소년의 성장을 다룬 성장소설, 교양소설이다. 왠만한 독서가라면 빌헬름 마이스터 시리즈부터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까지 물리도록 읽었을 장르다. 그래도 훌륭한 소설답게 '산시로'는 색다른 재미가 있었고, 소세키다운 색채로 그다운 성장소설을 만들어냈다.

박경리가 간파하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널리 소개한 대로 일본인들 중에는 가끔 특이하게 순수한 타입이 있는 것 같다. 무심함과 순수함, 약간의 수동성이 섞인 소년같은 성인. 오가와 산시로도 그런 인물이다. 도쿄로 상경하는 기차안에서 만난 여인은 이런 산시로를 '배짱없다'라고 평하고, 산시로 자신도 이것을 인정한다. 대신 이 '배짱없음'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어서 단순한 소심함으로 표현될 때도 있고 여유로 표현될 때도 있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지도 못하지만 왠만한 일로는 울컥하고 흥분하는 일도 없다. 천방지축같은 친구 요지로의 '행태'들도 재밌게 여기고 넘겨버린다. 아마 나같으면 한달 생활비를 빌려가고 입씻은 요지로를 그렇게 너그럽게 봐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끔 청소년이나 세상 경험 없는 청년은 자기 안에 완성된 세계를 놓고 산다. 산시로도 그런 청년답게 세계를 세 가지로 편리하게 구분지어 논다. 어머니와 시골마을이 대표하는 1세계, 도서관과 학문적 토론이 존재하는 2세계, 여인의 아름다움과 화사함이 존재하는 3세계. 나는 이 중 어디에 속하고 싶은 것일까, 라고 산시로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21세기의 청년이라면 이런 세계구분은 하지 않는다. '산시로'는 20세기 초, 메이지 시대 일본 청년의 성장소설이며 그것이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다. 철도와 인력거, 전기와 램프, 벽돌 도서관과 초가지붕의 하숙집이 공존하는 시대. 산시로는 그런 시대에서 키모노를 입고 찬송가를 부르는 미네코라는 여성을 사랑하지만 산시로의 머뭇거림은 불타오를 수 있는 둘의 사랑에 어떠한 바람도 불어넣지 못한다. 너무 풋풋해서 그랬을까.

1900년대초의 남녀라면 내 기준으로는 파파 할아버지와 할머니다. 규율과 전통, 보수적인 기운으로 똘똘뭉친 완고한 어른들이 생각난다. 산시로와 미네코도 아마 나이가 좀 더 들었을 때는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무살 무렵의 그들은 오늘의 스무살과 다를 바 없었다. 청년이란 어느 시대에나 같은 모습인가보다. 대신 청년의 아름다움은 그들이 방황하는 동안만 지속된다. 산시로가 세 가지 세계 중 어느 세계에 속할 것인지를 정하고, 미네코의 혼처가 결정나면 그들의 방황은 종지부를 찍고, 더불어 청년이라는 표지도 없어진다. '산시로'는 아름답고 값지지만 성장을 끝내면 없어지는 목덜미의 솜털같은 청년기에 대한 소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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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유곤 옮김 / 문학사상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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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인물들은 '쿠시로에 내린 UFO'에서 나온 것처럼 안정적인 사랑(혹은 섹스)이 만족되면 '죽음이나 성병이나 우주의 무한함'에 더 이상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 강력하고 평범한 진실은 하루키의 인물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원하는 것이지만 의외로 손에 넣기 쉽지 않다. 그래서 그것을 묘사한 하루키의 소설은 그토록 잘 팔렸다, 고 난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다. 맥주와 위스키를 좋아하는 유순하고도 느긋한 남자가 보여주는 쿨한 라이프 스타일이라니. 선망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법하다. 현실로 말하자면 사랑이나 섹스보다는 '죽음이나 성병이나 우주의 무한함'의 공급이 더 많은 형편이다.

그런 하루키가 사회문제로 관심을 돌렸다고 한다. 그에 대한 반응은 '아니, 왜 네가...!'와  '드디어 재능있는 청년이 철들었다'로 나뉜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겐 어떤 방향선회를 했든 '얼마나 잘 해냈나'가 제일 중요하다. '조국 만세, 우리 조국에게 힘을!'이란 슬로건을 내걸기 시작했다는 무라카미 류처럼 방향선회 자체가 역겨운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사족이지만, 젊었을 때 자유롭고 퇴폐적인 척 했던 사람은 끝까지 그쪽으로 지조를 지켜줬으면 좋겠다. '나에게 사회란 없다. 오로지 마약과 쾌락뿐!'이라고 외쳐왔던 자가 국기를 흔들기 시작하는 것만큼 세상에 염증을 느끼게 하는 일은 없다.

다행히 하루키는 그런 쪽은 아닌가보다. 결론적으로, 방향선회를 시작해 '고베대지진'이란 사회비극을 소재로 다룬 연작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는 기분좋게 읽어줄 수 있는 습작이었다. 현실을 소재로 했으되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한 그의 소설은 기발하기도 했지만 소재를 빼놓고는 전작들과 별 변화를 느낄 수 없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무국적성'과 '시대에 대한 무관심'의 대표작가가 '사회문제'로 방향선회를 했는데 금방 걸작이 나와버린다면 그것도 너무 소설적인 일이다.

책의 앞과 뒤에 빽빽한 한일 작가와 평론가의 찬사와 해설은 그런 하루키의 방향선회에 대한 출판사(시장)의 불안감의 표현인 것 같다. 하루키의 책을 팔아 먹고 살던 쪽에서야 그의 방향선회는 반갑지 않은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작가들의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옛정을 생각하고, 현재에도 유지되고 있는 하루키식 위트를 고려해 나는 하루키의 실험을 두 팔 벗고 지지한다. 어느 평론가의 바램대로 '하루키식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만들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작가의 용기있는 실험은 독자의 기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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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0-05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든 하루키는 아직 접해보지 않았습니다만... ^^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도 류가 좀 역겨워요. 그리고 문학사상사의 표지에 관해선 늘 그저 할 말이 없을 따름이에요.

hoyahan1 2005-10-06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통 하루기를 위대한 작가군에 포함시키지는 않고, 저 또한 하루키가 라이프 스타일 외에 딱히 보여준 건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발전하는 미덕을 갖고 있는 작가죠. 작가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면이랄까요. 무라카미 류에게 비할 바가 아니죠^^
 
강경애 전집 - 수정증보판
이상경 엮음 / 소명출판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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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비극이 범상해질 때는 그 비극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을 때이다. 비극에서 힘이 빠지면 염세적인 소설이 된다. 그래서 염세적인 소설은 동서고금에 차고 넘치지만 그 중에서 진심으로 소설에 공감하고 작가에 감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세상이 어떻다는 건 일찍이 알고 있는 바고, 그것을 책을 읽으면서까지 우울한 기분으로 복습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비극은 강렬한 에너지를 동반한다. 이런 비극의 첫째 요건은 작가의 감상이 우선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작가의 감상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 소설은 비극이 아니라 넋두리를 늘어놓는 소설이 될 뿐이다. 작가의 감상은 배제하고, 평범한 사람도 급속도로 몰락할 수 있는 세상과, 그 세상에 당면한 인물들을 정직하게 묘사하는 것만으로 비극은 훌륭해진다.

강경애가 살았던 세기초부터 창작활동을 했던 1930년대까지의 조선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만큼 힘든 시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굶주림이 일상이었고, 농민들은 벼농사를 짓고 일년 내내 밭을 일구고도 조밥에 된장이나 굶지 않고 먹으면 호사였다. 노동자들은 뼈빠지는 노동에 시달리고도 최저생계비를 벌 수 없었고, 여공들은 담 높은 공장에 감금된 채 몇 년이고 일을 해야 했다.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서울유학과 일본유학을 갔다 오고 양장차림으로 명동거리를 주름잡는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이 있었고, 시골처녀들을 차례차례 첩으로 갈아치우는 지주들이 있었다. 검열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강경애 소설에서는 일본인과의 대립이나 항일분위기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일제시대라는건 풍경의 일부일 뿐이다. 그 대신 일제시대 전에도 있었고, 일제시대 후에도 있을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인간문제'만이 전면에 자리잡고 있다.

장편인 '어머니와 딸', '인간문제'도 무척 재미있었지만 단편들은 장편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단편이라면 짧은 분량안에 독자에게 인상다운 인상을 줘야 하는데 강경애는 그런 것에 강한 것 같다. 구성이 허술하고 갑자기 비약하는 것 같은 단편에서도 특유의 강렬함만은 대단했다. <채전>에서 부엌데기로 구박받는 딸 수방이가 비에 떨어진 과일을 먹지 못해 안타까워할 때나 집 일꾼이 사다 준 싸구려 머리핀을 만지작거리며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하며 우두커니 서 있을  때는 나의 가슴도 저절로 울먹거렸다. 결말은 충격적이고 지나치게 갑작스럽지만 수방이에 대한 묘사만으로도 <채전>은 읽을 만한 소설이다.

<채전>도 그런데 <지하촌>같은 완성도 높은 단편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가난하다는 것 만으로 동물보다 추해지는 사람들. 동물이 굶주렸다고 해서 이만큼 추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무산계급에 대한 미화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고, 가난해서 굶주리고, 장애를 얻고, 병을 얻고, 서로를 지겨워하는 가족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왜 이런 작품이 화자화되지 않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내 소견으로는 <감자><백치 아다다>가 유명하다면 <지하촌>은 그 이상의 대접을 받아도 마땅할 것 같다.

강경애의 소설에서는 날 것 그대로의 인간을 볼 수 있다. 전락할 대로 전락하고, 빼앗길 대로 빼앗긴 사람들에게선 인간의 흔한 특징인 허영심이나 기름기를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문제가 되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역설적으로 인간이란 얼마나 강한가를 알게된다. 비극이 훌륭해질 때는 그런 것을 보여줄 때이다. 나에게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란 인간의 강함에 대한 확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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