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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초인 ㅣ 현대영미드라마학회 영한대역 22
조지 버나드 쇼 지음, 허종 옮김 / 동인(이성모)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인간과 초인'은 한 번 읽고 끝나는 소설이 아닌 것 같다. 어려워서 그렇다기보다는 쇼의 신랄한 조크에 낄낄거리다 보면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오는 중요한 사상을 놓쳐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쇼의 입담을 즐기다 두 번째부터 구절구절을 샅샅이 읽는 게 이런 책의 독서법이다. 특히 돈 주안과 악마, 조각상의 화려한 사상의 대결은 주제는 다르지만 까라마조프가 형제들의 '대심문관'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희극버젼으로.
이 소설에는 크게 세 가지 인물유형이 있다. 인간으로 만족하는 사람, 인간으로 만족하지 않으나 어쩔 수 없이 인간인 사람, 인간을 뛰어넘는 사람이 그것이다. 첫번째는 범인이요 두번째는 모험가고 세번째는 초인이다.
인간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주어진 사회와 세상에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어떤 여성을 멋대로 이상화시켜놓고 숭배하며 따라다니는 시인기질의 미남 옥타비어스, 진보적인 인사로 자처하지만 실은 누구보다 보수적인 램스덴, 평생 아버지 밑에서 곱게 자라왔으나 자신의 결혼에 아버지가 반대하자 대책 없이 노동자로 독립하겠다고 날뛰는 헥터는 대표적인 얼간이로 꼽힌다. 이 중에서 사회와 세상을 냉철히 파악하고 자기가 원하는 바를 취하는 바이올렛은 그나마 괜찮은 인간으로 그려진다.
인간으로 만족하지 않으나 어쩔 수 없이 인간인 사람은 언뜻 보기에는 가장 특별해 보인다. 모험가인 잭 태너는 독창적인 사상과 생활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세상의 평판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맞받아 조롱을 보낼 수 있는 인물이다. 세상에 대한 그의 평과 조크는 의표를 찌르고 있고, 화려한 언변을 듣고 있으면 두려울 게 없는 사람같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평생 자유인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더구나 그는 부자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역시 말이 화려한 사람은 헛똑똑이기 쉽다.
초인은 모든 도덕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하지만 잭 태너같은 모험가와 명백하게 구별되는 것은, 초인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옥타비어스가 그토록 숭배하던 정숙한 여인 앤, 잭 태너가 음흉스럽고, 징그럽게 똑똑하며, 구렁이같이 집요하다고 악담을 퍼부은 앤이 그런 초인이다. 옥타이버스와 램스덴같은 범인에게 보이는 앤은 부모의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요조숙녀다. 아마 그녀는 일요일이면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파티에서는 피아노를 아름답게 연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잭 태너는 그녀의 본색을 알고 있다. 그녀는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하면서 부모님의 뜻이었다고 꾸밀 수 있고, 마음에도 없는 남자를 유혹하고 애태우면서 한번 점찍은 남자라면 끝내 차지하는 괴물이다. 잭같은 사람은 앤의 본색을 알아챌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믿어주지 않는다. 앤은 모험가를 무력화시키고, 사회를 휘어잡을 수 있다. 잭의 학설에 의하면 그녀는 생명의지에 충실한 여자로 남자를 도구로 쓰고 버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의 당연한 법칙이다. 자연은 생명을 이어나가고 번성시키는 여자를 위해 존재하며 남자는 그 올가미에 걸리지 않고 자유와 힘을 쟁취해야 한다는 게 잭의 의견이다. 문명이란 그런 남자들의 안간힘의 산물이다.
하지만 모험가에게는 초인이 되지 못하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모험가는 이카루스와 같아서 그의 의기양양한 날개는 태양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버린다. 모험가는 중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고 결국 그의 발목을 잡히는 것이다. 평지에 머무르지 않고 높이 날아오르려던 야심만큼 모험가의 전락은 더욱 낙차가 크다. 결혼하여 부인에게 쥐여사는 돈 주안을 상상해보라.
이 소설은 인간과 초인사이의 다양한 유형을 사회의 대표적인 구속이자, 도덕이며, 이상인 결혼제도를 통해 펼쳐보이고 있다. 결혼만큼 인간을 구속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없지만 동시에 그만큼 모든 인간의 희망인 것도 없다. 누구나 결혼을 망설이지만 누구나 결혼에 성공하기를 바란다. 결혼의 유무는 사람을 주류와 비주류로 갈라놓고 도덕가와 방탕아로 갈라놓는다. 그 막강한 결혼이란 것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느냐에 따라 인간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다시피 쇼의 초인은 고상하고 비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인 동시에 능청스럽고 뻔뻔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앤 같은 초인 혹은 팜므파탈로 살 수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그녀는 자유롭지만 동시에 인간적이지 않다. 혹은 인간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결혼 뿐 아니라 어떤 것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을 인물이다.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만 쉽게 원한다, 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내가 초인이 될 소질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 책을 두 번째 읽을 때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