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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애 전집 - 수정증보판
이상경 엮음 / 소명출판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비극이 범상해질 때는 그 비극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을 때이다. 비극에서 힘이 빠지면 염세적인 소설이 된다. 그래서 염세적인 소설은 동서고금에 차고 넘치지만 그 중에서 진심으로 소설에 공감하고 작가에 감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세상이 어떻다는 건 일찍이 알고 있는 바고, 그것을 책을 읽으면서까지 우울한 기분으로 복습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비극은 강렬한 에너지를 동반한다. 이런 비극의 첫째 요건은 작가의 감상이 우선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작가의 감상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 소설은 비극이 아니라 넋두리를 늘어놓는 소설이 될 뿐이다. 작가의 감상은 배제하고, 평범한 사람도 급속도로 몰락할 수 있는 세상과, 그 세상에 당면한 인물들을 정직하게 묘사하는 것만으로 비극은 훌륭해진다.
강경애가 살았던 세기초부터 창작활동을 했던 1930년대까지의 조선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만큼 힘든 시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굶주림이 일상이었고, 농민들은 벼농사를 짓고 일년 내내 밭을 일구고도 조밥에 된장이나 굶지 않고 먹으면 호사였다. 노동자들은 뼈빠지는 노동에 시달리고도 최저생계비를 벌 수 없었고, 여공들은 담 높은 공장에 감금된 채 몇 년이고 일을 해야 했다.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서울유학과 일본유학을 갔다 오고 양장차림으로 명동거리를 주름잡는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이 있었고, 시골처녀들을 차례차례 첩으로 갈아치우는 지주들이 있었다. 검열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강경애 소설에서는 일본인과의 대립이나 항일분위기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일제시대라는건 풍경의 일부일 뿐이다. 그 대신 일제시대 전에도 있었고, 일제시대 후에도 있을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인간문제'만이 전면에 자리잡고 있다.
장편인 '어머니와 딸', '인간문제'도 무척 재미있었지만 단편들은 장편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단편이라면 짧은 분량안에 독자에게 인상다운 인상을 줘야 하는데 강경애는 그런 것에 강한 것 같다. 구성이 허술하고 갑자기 비약하는 것 같은 단편에서도 특유의 강렬함만은 대단했다. <채전>에서 부엌데기로 구박받는 딸 수방이가 비에 떨어진 과일을 먹지 못해 안타까워할 때나 집 일꾼이 사다 준 싸구려 머리핀을 만지작거리며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하며 우두커니 서 있을 때는 나의 가슴도 저절로 울먹거렸다. 결말은 충격적이고 지나치게 갑작스럽지만 수방이에 대한 묘사만으로도 <채전>은 읽을 만한 소설이다.
<채전>도 그런데 <지하촌>같은 완성도 높은 단편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가난하다는 것 만으로 동물보다 추해지는 사람들. 동물이 굶주렸다고 해서 이만큼 추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무산계급에 대한 미화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고, 가난해서 굶주리고, 장애를 얻고, 병을 얻고, 서로를 지겨워하는 가족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왜 이런 작품이 화자화되지 않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내 소견으로는 <감자><백치 아다다>가 유명하다면 <지하촌>은 그 이상의 대접을 받아도 마땅할 것 같다.
강경애의 소설에서는 날 것 그대로의 인간을 볼 수 있다. 전락할 대로 전락하고, 빼앗길 대로 빼앗긴 사람들에게선 인간의 흔한 특징인 허영심이나 기름기를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문제가 되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역설적으로 인간이란 얼마나 강한가를 알게된다. 비극이 훌륭해질 때는 그런 것을 보여줄 때이다. 나에게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란 인간의 강함에 대한 확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