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문화재청이 페북을 통해 도난 문화재 소식을 알렸다.

지난 1988년 도난된 경남 고성 옥천사의 나한상이 미국의 모 경매에 나온 것을 국외소재 문화재 재단이 발견, 경매를 취소시키고 원만한 협상을 이루어냈다는 내용이다.

이 나한상은 이번 달 중 국내 귀환된다.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을 줄인 말로 문화재청의 설명에 의하면 온갖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어 사람들로부터 공양을 받을만한 공덕을 갖춘 자이다.

아라한(arhat)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보다 높은 깨달음을 얻은 최고의 존재이다.

에드워드 콘즈에 의하면 불교도들 스스로는 아라한을 적(敵)을 뜻하는 아리(ari)와 죽임을 뜻하는 한(han)이 만난 말 즉 인간의 욕망과 정념 등의 적을 죽인 사람으로 보는 반면 현대 학자들은 ‘~할 만한‘을 뜻하는 아르하티(arhati)에서 찾는다.

후자의 경우 아라한은 ‘숭배와 공양을 받을 만한‘,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된다.(‘한글세대를 위한 불교‘ 133, 135 페이지)

석가모니 붓다 자신도 아라한이다. 아라한은 초기불교의 이상적 인간이다.

팔리어로 외웠던 나모 다싸 타타갓다싸 아라핫도 삼마삼붓다싸(Namo tassa Tathagatassa Arahato Sammasambuddhahassa)란 귀의문(歸依文)을 급히 불러내게 된다.

‘그렇게 오셨으며 동등하시며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저 붓다께 절합니다‘란 의미이다.

붓다의 제자로서 나한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들이지만 동아시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된 나한은 실존하지 않는 공상적인 존재이다.(명법 스님 지음 ‘미술관에 간 붓다‘ 108 페이지)

아라한은 더 이상 닦아야 할 것이 없기에 무학(無學)이라 불리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등 아라한 이전의 단계들은 더 배우고 닦을 것이 있어 유학(有學)이라 불린다.(권오민 지음 ‘아비달마 불교‘ 265 페이지)

이 불교 지식들이 내게는 치유의 소재로 여겨진다. 그래서 유식(唯識)을 생각하게 된다.

오로지 앎만 있다는 의미의 유식은 나는 이렇게 알고 저 사람은 저렇게 아는 등 자기 경험에 비추어 제 각각 안다는 의미이다.(서광 스님 지음 ‘치유하는 유식 읽기‘ 38 페이지)

유식은 다름을 인정해야 소통이 가능해짐을 말한다. 유식의 한 게송(偈頌)에는 파도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바닷물과 바람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유식은 오직 마음만 존재하고 일체 만물 즉 현상은 인정하지 않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의 가르침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오해이다. 유식무경은 유식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유식은 식 즉 앎, 마음만을 인정하지도 않고 일체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유식 15송(頌)에서 보듯.(서광 스님 지음 ‘치유하는 유식 읽기‘ 145, 146 페이지)

치유는 그 냉엄한 현실을 바로 아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11월 24일 나는 치유를 위해 스승을 만나러 간다. 가기 전 잠시 도난 문화재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치유와 억지로 연결짓고 이렇게 내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나의 훈습(薰習; 어떤 성질에 물들거나 기운이 배어든 것)은 기승전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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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글일망정 오래도록 써온 부작용이 나타날 때가 있다. 글을 매개로 누군가를 가르치려 드는 것도,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는 것도 아니다.

그럼 바로 그렇게 예상 못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일까?

다름이 아니라 시험 공부를 하다가 보게 된 단어나 개념을 주제로 글을 쓰려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논술로 치르는 시험도 아닌 객관식 시험을 위해 책을 읽다가 이 무슨 딴 짓이란 말인가.

마르크스가 예술을 가장 잉여적인 생산물 즉 현실적 욕구가 충족된 후 생산되는 작품이라 말했지만 예술은 고통스러울 때에도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이 새로울 것 없는 말을 듣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시험은 코앞인데...)

‘그래 이건 내 이야기야‘란 생각을 하며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제시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글쓰기 그것도 비전문적인 글쓰기이다. 하지만 나는 예술처럼 글쓰기도 힘들 때 나타나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변명처럼 하는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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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는 끊임없이 태평성대 그 중에서도 특히 대동(大同)으로의 복귀를 주장한 이상주의자, 그의 도덕경(道德經)은 그런 가치관을 반영한 이상주의적 정치이념서적˝(안성재 지음 노자, 정치를 깨우다서문)이라는 글을 처음 접했을 때(20155)의 신선한 충격을 잊지 못한다.

 

저자는 이에 따라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대동사회의 나라를 다스리고 유지하는 제도는 말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만일 오늘날과 같은 보편타당한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변치 않고 오랫 동안 유지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라고 풀었다.

 

이한우 기자의 중용(中庸) 풀이를 보자. 저자에 의하면 공자는 중용(中庸)을 간절함, 절절함, 열렬함, 애씀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다는 것은 문제의 본질에 적중한다는 말이고 용()하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끌고 가는 것을 말한다.(‘슬픈 공자참고).. 독특한 해석이다.

 

중용의 일반적 해석(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은,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과 많이 다르다.

 

이런 해석은 이한우 기자가 유일한가 싶지만 신정근 교수의 해석을 볼 필요가 있다.

 

신 교수는 맹자(孟子)중용(中庸)’을 혁명을 선동하는 책으로 풀이했다. 언론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정부에 대해서라면 균형을 잡기 위해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용의 논리라는 것이다.

 

적당, 중간, 움직이지 않음(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논리에 따른 행동)과는 확연히 다르다.

 

한편 이한우 기자는 흔히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로 풀이하는 학이시습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를 임금에게 스승 같은 신하[師臣]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먼 곳의 벗이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로 풀이하는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를 임금에게 뜻을 같이하는 벗과 같은 신하[朋臣]가 있어야 한다는 말로 풀었다.

 

정치 이야기에 즈음해 아프지만 들춰보지 않을 수 없는 말이 있다.

 

˝현 정권에게 권력을 위임한 것은 우리 자신이며 그 점에서 위임자인 국민에게도 선택과 결정의 책임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짚어야 할 사항은 국민 어느 누구도 현 수권세력을 향해 민주주의를 하지 말라고 말한 일이 없다는 것, 민주주의 실현은 여전히 국민적 약속이고 국민의 위임사항이라는 것, 따라서 현임 정권과 국가기관들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것은 권력 남용이고 배임이 된다는 사실을 엄정히 지적하고 비판해서 수권세력이 민주주의를 할 수 밖에 없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지적과 비판이야말로 모든 시민의 책임이고 의무이다. 그 책임과 의무를 방기한다면 우리는 시민일 수가 없다.˝(2010년 출간 김상봉, 한홍구, 도정일 등 지음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15 페이지)

 

올바른 시민의식은 필수적이다. ˝어렵게 성취되었다가 허무하게 무너져버릴 수 있고 안정적이고 성숙한 단계에 진입했다고 방심하는 순간 안으로부터 타락할 수 있는 위태로운 성취물˝(김비환 지음 이것이 민주주의다‘ 5 페이지)인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아침이다.

 

지난 18일 민주시민사회 워크숍 뒷풀이 자리에 합석한 것을 계기로.. 그간 정치보다 실존에 우위를 두었다는 생각이 씁쓸하게 드는 아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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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대비 문제집이 책상 위에 놓여있다. 욕심으로 서평을 써주겠다고 해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이다.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기출 시험 문제집만을 공부하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다.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은 문제은행 방식이 아니라 매회 새로 출제되지만 중요한 주제만을 출제하기에 기존 문제들이 조금씩 변형, 반복 출제된다.

문제집을 일별하고 내가 내릴 수 밖에 없는 결론은 역사 지식이 평면적으로 또는 비유기적(非有機的)으로 조각 조각 나열되어 있다는 점이다.(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전북 군산의 한 문화관광 해설사는 “학교 수업시간처럼 역사만 너절하게 나열하면 딱딱하고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지 못”(2015년 7월 26일 오마이 뉴스 수록 임미현 해설사의 말)한다는 말을 했다.

너절하다는 말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새겨들을 말이다. 도대체 조각 조각 난 역사 지식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임미현 해설사의 말을 고려하자면 ‘조각 조각‘은 문제집에만 해당하지 않고 학교 역사 수업에도 해당되는 듯 하다.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필요하다. 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한 한국 학생이 이런 일을 겪었다고 한다.

교수가 갈릴레오에 대해 아는 사람 있으면 손을 들라고 하자 몇몇 학생이 손을 들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학생은 처음에는 눈치를 보며 손을 들지 않다가 용기를 내어 손을 들었다. 하지만 교수 또는 그 나라 학생들이 생각하는 앎과 우리나라 학생이 생각하는 앎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 학생은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 교황청과 갈등을 빚었다는 사실,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별 이야기) 등의 책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그를 안다고 생각하는데 외국 학생들은 그의 생애, 사상, 업적 등을 스토리로 엮어 몇십 분을 이야기해야 안다고 생각한다.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글로써 생각을 정리하면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알게 된다.

나는 글쓰기가 말하기보다 편하고 자유롭다. 하지만 이는 내가 글을 잘 쓴다는 말이 아니다.

나의 쓰기는 자주 쑤기가 된다. 죽을 쑤듯 글을 쓰면서 좌절(挫折)도 하지만 그래도 글은 말과 달리 고치고 또 고칠 수 있어 명료하고 간결하게, 정확하게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

죽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밥을 만들어야 하는데 죽 또는 멀건 밥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문제이다.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후에 단편적인 역사 지식을 글로써 하나로 엮어내는 작업을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 주위에서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시험 이전에 이미 글을 쓰고 생각하는 데 익숙했던 사람일 것이다.

시험의 대안(代案)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은 공무원, 기업체, 학교 등을 들어가는 데 필요한 가산점 취득의 도구로 활용되는 측면이 강하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역사 지식을 가졌지만 특정 주제나 이슈를 부여받고 글로 써나가는 것에는 자신 있다.

어제 전체를 꿰뚫는 해박한 역사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글을 쓰지는 않는다는 한 야학 교사를 만났다. 놀라운 일이다.

내가 자신 있다고 말한 것은 전술했듯 고치고 뜯어보고 이리 저리 생각하고 다듬을 수 있는 것에 근거를 둔 말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은 그 과제 수행에 잘 뛰어들지 않는다. 그들이 그 과제를 수행한다면 내 글 솜씨는 아마 하찮게만 보일지도 모른다.(솜씨랄 것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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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
슬퍼질 것이다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조은 시인의 ‘언젠가는‘의 일부이다. 해설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약간의 헛헛함과 약간의 아쉬움에 외워보는 시이다.

나는 정말 고작 버스나 기다리며 생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 열렬히 무언가를 추구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못하고 생을 건너온 것은 아닐까?

˝발자크가 사라지고 나자 보들레르가 지적했듯 소설에 관한 일체의 호기심은 사라졌다..˝는 미셸 레몽의 말과 함께 정녕 스타일이 없으면 스승과 결별할 수조차 없다는 김영민 교수(철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한 사람에 대한 전작주의자적 열망이 없다면 문학에 대한 관심 또는 호기심이 일거에 사라지는 경험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열정도 지리멸렬하게 사라져갈 듯. 삶도 그러하리라.

해설을 마치고 양주 사랑나무 어린이집으로 고**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내게서 일거에 사라진 것이 있을까 헤아려 본다.

그런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살지 않았다는 생각을 곱씹게 된다.(양주역에서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 정도를 갔는데 전화가 왔다. 양주역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모시러 갈 거라고, 가서 전화할 거라고..

그런데 양주역에서 내린 나는 습관적으로 버스를 기다린다. 전화를 기다리지 않고. 고작 버스나 기다리며 산 것이, 그에 익숙해진 것이 맞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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