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
슬퍼질 것이다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조은 시인의 ‘언젠가는‘의 일부이다. 해설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약간의 헛헛함과 약간의 아쉬움에 외워보는 시이다.
나는 정말 고작 버스나 기다리며 생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 열렬히 무언가를 추구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못하고 생을 건너온 것은 아닐까?
˝발자크가 사라지고 나자 보들레르가 지적했듯 소설에 관한 일체의 호기심은 사라졌다..˝는 미셸 레몽의 말과 함께 정녕 스타일이 없으면 스승과 결별할 수조차 없다는 김영민 교수(철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한 사람에 대한 전작주의자적 열망이 없다면 문학에 대한 관심 또는 호기심이 일거에 사라지는 경험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열정도 지리멸렬하게 사라져갈 듯. 삶도 그러하리라.
해설을 마치고 양주 사랑나무 어린이집으로 고**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내게서 일거에 사라진 것이 있을까 헤아려 본다.
그런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살지 않았다는 생각을 곱씹게 된다.(양주역에서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 정도를 갔는데 전화가 왔다. 양주역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모시러 갈 거라고, 가서 전화할 거라고..
그런데 양주역에서 내린 나는 습관적으로 버스를 기다린다. 전화를 기다리지 않고. 고작 버스나 기다리며 산 것이, 그에 익숙해진 것이 맞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