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읽기는 허공을 가르는 듯하다. 쉬운 책과 어려운 책 사이에서, 꼭 필요하지 않은 책과 필요한 책 사이에서 길을 잃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마수미란 이름이 내게 다가왔다. 알라딘 이벤트로 마수미의 ‘가상과 사건’ 서평회가 마련되어 있다. 젊은 서평자 세 명이 해당 책을 읽은 결과를 서평 형식으로 발표하고 질의 및 토론을 할 것이라고. 관심이 있지만 기피해오곤 한 저자이고 개념이다. 마수미의 책 제목을 블로그 이름으로 설정한 블로거도 있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영향력이 꽤 크다고 생각할 만하다. 문제는 내 읽기에 있다. 과연 필요한가, 란 의문이 선택을 막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책을 읽어 생각이 풍성해지는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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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압생트, 기시감, 미시감 등의 시어들로 생각을 유발하는 시, ‘압생트’는 조용미 시인의 신간 ‘나의 다른 이름들’에 담긴 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시인은 기시감과 미시감을 함께 앓는다. 고흐가 조증(躁症)과 울증(鬱症)을 앓았던 것처럼. 시인은 기시감과 미시감을 오가는 자신의 상황을 전생의 기억이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이 설명은 해석의 여지나 여운을 남긴다는 면에서는 좋지만 정확한 인식을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궁금한 것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데 익숙한 것으로 보이는 사태(기시감)나 익히 알고 봐오던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느끼는 사태(미시감)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이다. 이 문제의식은 표제작인 ‘나의 다른 이름들’에 나오는 “...나는 어디까지 나일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나임을 증명할 수 있으며...”란 구절과 차원이 같다.


‘베네치아 유감’이란 시에서 시인은 “... 두렵다가 친근/ 해졌다. 무관하다가 다시 두려웠다. 내가 만들어 낸 헛/ 것이 분명하다고 믿은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란 말을 한다. ‘나의 사랑하는 기이한 세계’ 역시 같은 차원으로 읽을 시이다. “내가 보고, 내게 보이는 것들/ 내게로 와 내 눈에만 살며시 보이는 헛것들// 속삭이며 귓속을 울리는 내 것이 아닌 이 숨소리들// 나의 감각이 구축한 튼튼하고 허약한 세계/ 내가 설계한 기이한 건축물...” 환(幻)이고 헛것이지만 “튼튼”하다고 볼 여지가 있는 세계를 알기 위해, 기원을 찾는 시인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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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을 살아보니
김형석 지음 / 덴스토리(Denstory)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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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을 살아보니'는 올해 97세를 맞은 김형석 교수의 철학적 수필집이다. 저자는 철학 교수로 오랜 시간 후학을 가르친 경험을 가진 분이다. 100세를 앞두었음에도 육체적 건강과 뇌 건강을 두루 유지하고 있는 저자는 특기할 만하다. 더구나 이렇게 책을 내기까지 하니 더욱 그렇다. "가르치는 일 한 가지만 하면 된다."는 저자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평생 철학을 가르친 분의 만족감을 짐작케 하는 담담한 회고라 할 수 있다.


70년 전 인연을 맺은 80살 제자를 만나고 돌아온 이야기처럼 감동적인 이야기가 관심을 집중시킨다. 남는 것은 사랑이 있는 고생 뿐인 것 같다는 생각을 간직한 채 살 수 있기를 희망하는 글은 남다르게 느껴진다. 저자는 사랑하고 결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무책임하게 결혼을 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많은 문제점을 안타까워 한다. 애욕의 애정으로의 승화를 말하는 저자의 글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읽힌다.


책에서 저자가 첫 순서로 언급한 철학자가 쇼펜하우어이다. 쇼펜하우어는 결혼을 거부했지만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허무한 고독을 느끼는 사람은 자녀 없이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나는 가벼운 글도 읽을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글 특히 저자처럼 90 평생 철학을 공부해온 분의 글에는 이론에 치우치지 않는 지혜, 개념이 아닌 느낌, 지식이 아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빛이 가득하다.


가령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는 괴테의 말을 적용할 수 있는 사례를 일상에서 길어올려 전하는 내용은 대표적이다. 놀라운 것은 저자의 상세한 기억력이다. 물론 당사자가 아닌 우리로서는 약간의 오류도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구체적 사례를 들어 치밀하게 글로 이어나가는 공력은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수십년 전의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자체로 흥밋거리이다.


섭리라는 말을 하며 철학적인 이야기여서 죄송하다고 말하는 저자는 사회학의 개척자인 오귀스트 콩트와 막스 셸러의 이론을 이야기 한다. 종교에 관한 두 철학자의 상반되는 견해가 흥미롭다. 섭리 체험이란 말을 종교를 긍정하는 말로 풀어내는 저자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저자에 의하면 섭리는 은총의 체험이다. 저자는 섭리를 운명도 허무도 아닌 제3의 것(대안)으로 인정한다. 저자가 반대하는 것은 종교적 폐쇄성(에 갇혀 있는 것)이다.


'백년을 살아보니'는 수필 형식의 글이기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읽힌다. 눈여겨 보게 되는 것은 책의 구성이다. 1부 행복론, 2부 결혼과 가정론, 3부 우정과 종교론, 4부 돈과 성공, 명예론, 5부 노년의 삶론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각 부의 내용들이 풍성하고 다양하다는 점이 놀랍다. 명불허전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라고 말한다. 이와 함께 저자는 너무 일찍 성장(정신적)을 포기하는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한다.


아무리 40대라도 공부하지 않고 일을 포기하면 녹스는 기계와 같아서 노쇠해진다는 것이다. 건강에 자신이 없었던 저자가 100세를 바라보게 된 것은 신체나 정신적 무리를 하지 않은 것이다. 50 고개를 넘겨서야 정상적인 건강에 자신을 찾았다는 저자이다. 저자는 노년기의 지혜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해서 지식을 넓혀가는 일이라 말한다. 좀 더 일찍 저자의 정통 철학서들을 접했으면 좋았을 것이란 마음이 든다. '백년을 살아보니'를 잔잔한 저녁 노을 같은 책이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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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도덕을 말하다 - 한국 스켑틱 Skeptic 2016 Vol.6 스켑틱 SKEPTIC 6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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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EPTIC vol 6’에서 눈에 띄는 기획은 ‘음양오행과 사주‘ 특집이다. 두 편의 글이 실렸는데 하나는 ’음양오행이라는 거대한 농담’이고, 다른 하나는 ‘역법이 달라지면 운명도 달라지나’이다. 앞의 글은 10여년에 걸쳐 사주, 풍수, 주역을 공부한 이지형이란 분의 글로 필자는 ‘강호인문학’, ‘사주 이야기’, ‘바람 부는 날이면 나는 점 보러 간다’ 등을 쓴 저술가이다. 두 번째 글인 ‘역법이 달라지면 운명도 달라지나’는 필자가 천문학 박사이기에 역법의 허술한 면모를 비판하는 것을 놀랍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10년간 사주, 풍수, 주역을 공부한 분의 글은 무게감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안상현이란 분의 글과 이지형이란 분의 글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자의성(恣意性)이란 단어이다. 자의성이란 일정한 원칙이나 법칙에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함을 의미한다. 가령 “왜 주역의 15번째 지산겸 괘(卦)가 겸손을 뜻하는 겸의 괘여야 하며, 이 괘의 5번째 효(爻)에 관한 해설이 침범하는 게 이롭다는 것은 복종하지 않는 지역을 징벌한다는 뜻이 되어야 하는지 음양적 근거 따위는 없다.”는 글(이지형), “역주는 자의적일 수 밖에 없다.”(안상현) 등의 글을 보라.


안상현 교수는 납일(臘日)을 예로 든다. 납일은 동지(冬至) 후 셋째 미(未)가 들어간 날이다. 그런데 왜 미로 했는가는 자의적이다. 조선은 동방에 있으므로 목(木)이고 오행상 목은 십이지의 미(未)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납일은 반드시 12월에 들어 있어야 하기에 두 번째 미일이나 네 번째 미일을 납일로 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의성이란 말을 우리는 어디서 의미 있게 만나는가.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글을 통해 만난다.


가령 체온이 일정한 척추동물인 날짐승을 새(bird)라 부르는 데에는 필연의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자의성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런 날짐승을 새가 아닌 다른 것으로 얼마든지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사주, 주역 등에 관한 필자(이지형)의 개인적 느낌 또는 사고의 변화를 반영한 글이 포함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란 점이다.


평생 주역을 공부했지만 점을 치는 용도로 주역을 활용하지 않았다는 말을 한 다산 선생의 경우도 점을 친 것으로 볼 만한 사례가 있었다. 관건은 점을 친 것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주역을 철학으로 활용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가를 묻고 싶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는 진리를 몸으로 익히는 데에 굳이 주역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란 의문이 든다.


그런 차원의 진리는 주역 외의 것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주역은 공부할 가치가 있다. 나의 경우 주역은 글감의 소재이다. 시경(詩經), 서경(書經)과 함께 3경(經)에 드는 주역은 동아시아 구체적으로는 중국의 사유 체계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전과학 시대의 담론도 때로 참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과학과 함께 참고하고 의미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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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인문학의 대화 - 철학사적 조망
황수영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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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참 지식 즉 에피스테메(episteme)와 억견(臆見: doxa)의 구분이다. 에피스테메는 엄밀한 근거로부터 얻은 지식을 말하고 억견은 그럴 듯한 의견들을 말한다.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과의 관계이다. 중요 부분이었던 자연학이 빠져 나간 것을 계기로 철학은 자연세계를 직접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 아닌 자연을 인식하는 인간의 정신을 탐구하는 학문이 되었다. 나는 철학을 과학의 종합으로 보는 프랑스적 전통을 바람직하게 본다. 아니 편하다고 해야 할까?


오늘날 철학은 일의적으로 규정할 수 없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정신, 반성과 비판 정신 등을 공통 요소라 할 수 있다.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같은 존재에 관한 물음은 철학 고유의 것이다. 동양에서 인문학과 철학은 분리되기보다 연속선상에서 다루어졌다. 반명 서양 가령 플라톤에게 철학은 참지식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자리매김되었던 데 비해 인문학적 영역에 속하는 것들은 가변적 인식 세계를 대상으로 한, 진리의 불완전한 모방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철학과 인문학은 밀접한 상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철학은 믿었던 장남(자연과학)에 버림받고 차남(사회과학)에게도 멸시받으며, 애초에 무시했던 딸(인문학)에게 얹혀 사는 형국이 된 것“이란 저자의 말은 그래서 시의적이다. ‘주역(周易)’의 비괘(賁卦: 64 괘 중 스물 두 번째 괘)에 ”천문을 살펴 계절의 변화를 알아내고, 인문을 살펴 천하의 변화를 이룬다“(관평천문觀平天文 이찰시변以察時變, 관평인문觀平人文 이화성천하以化成天下)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인문의 어원이다.


인문학은 인간현상을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다움, 인간적인 것 등의 이념으로 인간적 사실을 대하고 판단한다. 가치판단을 한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비판정신이 결여된 인간다움을 비판적으로 본다. 인문학은 인간이 대상이자 주체인 학문이다. 과거 내가 큰 관심을 기울였던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는 인간이 역사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를 해체하고 인간이 가진 타자성, 무의식, 감성과 욕망의 영역에 눈을 돌리는 학문이다.(42 페이지)


문화는 자연과 대립적인 개념이다. 자연과학의 성립에도 문화적 요소가 있다. 자연과학은 과학자 집단이 근거한 기존의 학문 풍토 즉 언어, 학문하는 방식, 세계관 등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그 학문풍토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하나의 문화현상으로서의 자연과학을 대상으로 삼되 그것이 형성된 배경, 성립조건, 철학적 전제 등을 문제 삼는다. 사회과학이 일정한 객관적 법칙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인문학은 객관적 사실의 탐구가 아니라 그 객관적 사실과 인간의 관계에 따른 의미를 찾는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과 세상을 대한 공자는 인문학의 대표 사례라 할 만하다. 인문학의 위기는 사실상 과학이 될 수 없는 인문학에 과학의 특성을 요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인문학은 효율성이나 엄밀성 면에서 과학에 뒤질 수 밖에 없다. 나도 여러 차례 제기했지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내가 즐겨 읽는)의 경우 엄밀한 뇌과학의 결여로 인해 객관적 학문이라 할 수 없다는 문제 제기에 노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저자는 인문학은 실증적이고 과학적이기보다 비판적 이성을 바탕으로 인간과 세계의 통일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독자적 방법이어야 할 것이라 말한다.(46 페이지) 인문학은 순수하다. 순수하다는 것은 대상을 설명하고 이해할 때 인간적 이해관계나 감정적 요인에 좌우되지 않는 것, 초자연적 지배자와 같은 비합리적 원인을 거부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이 말을 생각하며 이성(理性)에 대해 숙고해보자. 이성은 외적 감각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신의 고유한 능력인 논리적 추론이나 직관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60 페이지)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주장했다, 이데아는 그 자체로 존재하며 일체의 경험적 지식들의 근거로 작용하는 것이다. 칸트는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수학적 인식의 모델로 이성의 절대성을 주장한 합리론에서 지식의 형식적 측면을, 감각적 경험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인식자료로 보는 경험론에서는 지식의 내용(재료)적 측면을 취하여 이들을 토대로 종합적 판단을 구성했다.


칸트에 있어 인식은 감각을 토대로 형성되지만 감각은 그것만으로는 어떤 질서도 없는 무규정적인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주관 속에 있는 선험적 감성형식에 의해 비로소 경험으로 성립한다. 또한 감성의 표상들은 지성의 선험적 형식들에 의해 개념화될 때만 인식의 대상으로 성립한다.(89 페이지) 중요한 것은 인간의 초월적 주관 속에 선험적으로 있는 감성과 지성이라는 두 형식이다.


칸트에게서 지성과 이성은 구분된다. 지성이란 데까르트의 절대적 이성의 개념에서 합리적이고 수학적인 측면을 말하고, 이성은 지성에 의해 사유된 것들을 종합적으로 통일하는 능력을 말한다. 저자는 인본주의적이란 말을 인간에 관한 문제들을 과학적 방법으로는 다룰 수 없다고 주장하며 독자적인 이론과 방법을 제시하는 모든 흐름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다.(107 페이지)


해석학(解釋學)의 출발점은 심리적 기술이 아니라 개인이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고 행동하는 데서 나오는 직접적 체험이다.(112 페이지) 직접적 체험이란 인간의 의식 속에 있는 반성적 내용 즉 사유된 것이 아니라 반성 이전의 삶과 행동 그 자체이며 시간 속에서 일회적으로 일어나는 개별적 경험으로서 인간의 삶에서 일차적으로 주어진 것을 말한다. 후썰은 선입견에 물든 모든 입장을 배제하고 직접적으로 명증한 의식 안으로 들어가서 순수한 사태 그 자체를 직관할 것을 주장했다.


직접적 의식이 명증한 것은 외적 지각이 언제나 음영과 함께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데 반해 의식 안에서는 대상이 전체성 속에서 남김 없이 파악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이나 과학을 거부하지 않고 그것들의 근본 전제를 문제삼고 이를 생성의 형이상학으로 대체한 베르그손을 빼놓을 수 없다. 베르그손의 형이상학은 고정적이고 부동하는 본질의 세계에서 의미를 찾는 전통 형이상학이 아닌 운동과 변화, 생명과 시간을 전면에 내세우는 형이상학이다.


고전역학은 운동과 변화를 위치이동으로 간주하고 수학적 법칙으로 파악하는데 그것은 시간의 질적인 측면을 사상(捨象)하는 데서 성립한다. 의식 상태의 지속은 현재의 고유성에 과거 전체가 함께 어우러져 생성되는 새로움 자체이며 표면상의 자기동일성에도 불구하고 심층에서는 개별성, 특이성, 고유한 차이들을 간직하고 있다.(125 페이지) 베르그손 이래 그의 영감(靈感)을 취하는 프랑스 철학은 문학, 예술 및 여타 학문적 활동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학문간의 위계를 허무는데 이는 철학과 인문학이 분리된 고전적 학문풍토에서는 볼 수 없는 인문주의적 학풍의 등장을 예고한다.(126 페이지)


베르그손에서 경험은 좁은 의미의 감각 경험이 아니라 의식의 총체적 체험이며 사실의 직관이라는 그의 철학적 이상과 맞물려 과학과 철학을 매개한다. 베르그손은 물리적 환원주의를 거부하지만 인간의 독자성을 강조하기보다 존재자들의 다양성과 차이들을 긍정하고 개별 학문들의 독자적 존립 가능성을 시사한다.(134 페이지) 해석학, 현상학,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등의 인본주의적 입장은 주체의 역할을 너무 강조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유, 목적, 역사, 윤리 등의 인간적 가치들에 치중한다.(135 페이지)


구조주의는 계몽주의나, 헤겔, 마르크스의 역사관에서처럼 하나의 보편적 이념에 의해 역사가 인과적이고 일직선적인 흐름으로 진행된다고 보지 않는다. 구조주의는 이성적 주체와 동일성의 원리를 포기하고 각 문화현상이 갖는 독특한 구조에서 출발하여 각각의 특이성이 다른 것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탐구한다. 물론 구조주의는 인류가 가진 보편적 사고구조를 부인하지 않는다. 구조주의는 요소들간의 관계들의 체계를 조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철학과 인문학의 형성기에 있었던 대립은, 철학이 자연과학에서 나타나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이념을 공유한 반면 인문학은 인간과 사회의 가변적인 모습에 관심을 두었던 데서 유래한다.(161 페이지) 인문학적 탐구는 어떤 방향을 취하건 간에 철학적 입장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없다. 현재 철학은 인문학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오늘날 철학을 인문학의 하위개념으로 보는 것은 보편화된 경향이다. 물론 철학과 인문학 사이에는 일정한 간격과 긴장이 엄존한다.(164 페이지)


저자는 문제들은 곳곳에서 서로 관통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핵심적인 빛나는 지점들을 찾아내기란 진실로 쉽지 않은 일이라 말한다.(220 페이지) 문제들이 곳곳에서 서로 관통하고 있는데 어떤 핵심적인 빛나는 지점들을 찾아내기란 진실로 쉽지 않은 일이라 했다면 좋았을 문장이다. 저자는 인문학의 역량은 자유로운 유희에 있지 않을까?란 말을 한다.(22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남는 것은 역사이고 역사는 우리에게 인내와 관용을 가르쳐준다. ”철학적 진지함도 이 역사 속에서는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22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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