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납일까지 넘기며 붙잡아 두었던 단청과 조선왕조 책 스무 권을 도서관에 돌려주고 오는 길입니다. 새벽 세시 무렵 들린 카톡음을 듣지 못한 채 잠결에 어설프게 시연 내용을 외운 것도 같고 시연 꿈을 꾼 것도 같은 밤을 보내고 실제 시연까지 마치고 나니 조금 허무합니다. 스무날을 함께 한 책들을 돌려주고 나니 무언가 머릿 속에서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나의 책들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그것’들은 나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 와 일단 쓰인 뒤 내 몸을 빠져나간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공허한 기분에 빠져 몸 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 그분의 심경을 조금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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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는 손에 닿을 수 없는 보물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이 단어를 아이디로 하는 블로거에게 내 글에 대해 물었다. 늘 쉽게 쓰지 못한다는 자책감, 그리고 그런 까닭에 재미도 없다는 난감함에 시달리는 나를 그는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경복궁 단청에 대해 쓴 내 글에 그는 시작 부분이 너무 흥미가 떨어진다는 말, 듣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내 관심사에 따라 쓴 글이라는 말 등을 했다.

듣는 사람에게 추억을 만들어줄 이벤트성 멘트가 필요하고 설명은 잘 하지만 듣는 사람의 흥미를 이끌 요리를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글을 오래 지켜보아온 그의 진단이다. 흥미를 이끌 메뉴를 내놓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흥미 있는 메뉴를 잘 내놓지 못한다기보다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히는 글이다.

최근 내가 읽고 있는 정도언 박사의 ‘프로이트의 의자‘(개정판)를 추천하고 싶다. 쉽고 친절하게 풀어 쓴 정신분석 책이어서 개념을 익히는데도 유용하고 비유가 풍부해 설명 능력을 키우는데도 도움이 되는 책이다. 최근 나는 짧게 쓸 시간이 부족해 긴 글을 썼다는 파스칼의 말을 응용해 쉽게 쓸 시간이 부족해 어려운 글을 썼다는 말을 했다.

재미로 한 말이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쉽게 쓰는 것은 의지, 능력, 시간 등이 모두 필요한 과제이다. 절대적으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쉽고 친절해야 한다. 심찬이시(深撰易施)가 답이다. 깊이 연구해 쉽게 베풀자는(풀어내자는) 내 슬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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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6-11-22 1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벤투님 정도로 글 쓰시는 분도 자기 글에 대해 고민이 있으시군요..... 글 쓰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써도 자기 글이 마음에 드는 날 같은 건 오지 않는다는 말을 어디서 듣긴 했지만요.

그렇지만 저는 항상 벤투님의 기품있고 단정한 글을 좋아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11-22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감사드립니다. 늘 고민입니다. 서툴고 어설프지요... 힘이 되는 격려 잘 간직하겠습니다... syo님의 글, 저도 잘 읽고 있습니다. ^^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나에게도 장켈레비치는 ‘베르그송의 철학‘(김형효 지음)과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이해하기‘(황수영 지음) 등을 통해 단편적으로 접한 낯선 철학자이다. 장켈레비치는 “새는 날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날려고 하고, 황소는 뿔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받고자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리라.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황소는 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뿔을 갖게 되었고, 새는 먼저 날기를 원하였기에 날개를 갖게 되었고 그래서 날았다.”는 말을 했다.

 

최근 그의 ’죽음에 대하여‘란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에게 선택지가 있”는 바 짧지만 사랑을 주고받는 진정한 삶이거나 사랑 없는 무한정한 존재 즉 삶이라고 할 수 없는 영속적인 죽음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당연히 나는 사랑을 주고 받는 진정한 짧은 삶을 택할 것이다. 프랑스 철학계의 독창적 아웃사이더라 불리는 그의 철학은 가볍고 상쾌하다.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그를 따라 하늘을 나는 것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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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궁궐을 균형과 비례의 원칙에 따라 건축된 공간으로 생각한다. 이런 전제 하에 최근 나는 궁궐의 균형과 비례를 중용(中庸)으로 풀이한 글을 썼다. 그런데 이는 내 지론을 저버리는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중용은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상태, 치우침이 없는 상태 등을 뜻한다. 이와 관련해 거의 유일하게 일반적 의미와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이 이한우 교수이다. 그는 ‘슬픈 공자’에서 중용을 철저하고 완전히 뿌리를 뽑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한우 교수에 의하면 공자는 공부를 목표에 못 미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 그리고 목표에 미쳤을 때는 그것을 잃으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한 사람이다. “학여불급(學如不及) 유공실지(猶恐失之)”(’논어‘ ’태백泰伯‘편)의 차원이다. 이한우 교수는 중(中)하다는 것은 문제의 본질에 적중한다는 말로, 용(庸)하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끌고 가는 것으로 푼다.


’공자의 인생 강의‘에서 신정근 교수가 공자를,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엇이든 해보려고 시도한 사람(지기불가이지자: 知其不可而爲之者)으로 설명한 것과 맥락이 통한다. 신정근 교수의 풀이는 공자가 일반적 의미의 중용과 거리가 먼 사람임을 알게 한다. 공자가 (일반적 의미의) 중용적인 사람이었다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엇이든 해보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문제의식과 관련해 말하자면 명확하게 중용이란 말로 궁궐(경복궁)을 설명한 사람이 양택규 님이다.(’경복궁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참고) 문제는 나에게 있다. 저자의 권위에 의지하려는 마음 때문에 중도(中道)라는 말로 궁궐을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 의미의) 중용과 중도의 뉘앙스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 당당할 것,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물론 철저한 근거 제시에 입각한 당당함이어야 할 것이다. 철저(徹底)한 공자, 철저해야 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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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은 “죽은 건축 유형”(조재모 지음 ‘궁궐, 조선을 말하다’ 4 페이지)이다. 너무 앞서 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건축물들 중 대표적인 경복궁이 몇 번의 방문과 공부로 인해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간 단발적이나마 건축 관련 책들을 10여 권 읽었지만 문제의식 없이 읽었기에 공부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지금은 궁궐을 건축적 안목으로 보려 하고, 분석도 하고 종합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대하기에 예전에 생각하지 못한 생각들이 떠오른다.


경복궁의 왕의 침전(寢殿)인 강녕전(康寧殿)에 용마루가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에 대해 한 논자는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이란 단서를 단 뒤 용을 상징하는 왕이 잠자는 곳에 또 용을 둘 수 없어 그렇게 된 것이라는 말을 한다. 물론 경복궁의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과 창경궁의 전각인 통명전, 창덕궁의 침전인 대조전 주변의 집상전에도 용마루가 없다는 말을 하며 왕이 잠자는 곳에 또 용을 둘 수 없어 그렇게 되었다는 말의 오류를 지적하는 필자(김동욱 지음 ‘한국 건축 중국 건축 일본 건축’ 119, 120 페이지)도 있고, 용으로 비유되는 무소불위의 왕이 머무는 공간인 침전에 용마루를 두는 것은 용이 용을 누르는 형국이기에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야말로 속설일 뿐이라 지적하는 필자(이향우 지음 ‘궁궐로 떠나는 힐링 여행 경복궁’ 166, 167 페이지)도 있다.


이 분은 중국의 경우 왕의 권위와는 상관 없이 용마루 없는 무량각 지붕으로 지어진 일반 집들이 아주 흔하다는 말을 하며 차라리 음양오행의 상징적 개념으로 볼 때 자연의 기(氣)를 차단하는 용마루라는 무거운 인공 시설물을 설치하지 않고 곡와(曲瓦: 안장 기와)를 써서 무량각 지붕으로 처리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이치에 맞을 수도 있다고 덧붙인다.(같은 책 167, 168 페이지) 전자(前者)가 왕의 침전 외에 용마루가 없는 일반 건물도 있다는 말을 함으로써 무량각(無梁閣: 용마루 없는 건물) 관련 속설이 잘못된 것임을 일깨운 것이라면, 후자(後者) 역시 같은 차원의 말을 했으나 음양오행 차원의 이야기를 더한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후자의 두 번째 말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다른 곳은 왜 하중을 견디는 부담이 덜 가는 가벼운 건물인 무량각을 설치하지 않았는지, 하는 물음이다. 그리고 임금이 관료들과 정사를 토론하고 (성리)학자들로부터 경서(經書)와 역사서를 배운 편전(便殿)은 또 어떤가. 그곳에는 용마루가 있는데 임금 홀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관료들이나 학자들과 함께 하는 공간이기 때문인가? 용이 용을 누르는 것이든 무리한 하중을 가하는 것이든 타인들과 함께라면 견딜 만하다는 것인가?


단청의 녹색 안료(顔料)인 뇌록이 경상도 장기현 뇌성산에서만 나기에 다양성이 줄어들고 획일화된 것처럼, 안료가 비싸 소박하고 절제된 단청 채색이 된 것에서 보듯 물리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건축과 교수인 조재모 교수는 역사 전공자들은 궁궐을 둘러싼 사건 및 인물에 관심을 두고 건축 전공자들은 건물의 형태에 초점을 맞추고 대중적인 저술을 쓰는 사람들은 문양과 상징을 이야기한다는 말을 한다.(같은 책 6 페이지)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자신의 갈증은 그 사이 어느 지점에 존재하는 듯 하나는 말을 한다. 이 말을 접하며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단청을 궁궐과 임금의 중용을 상징하는 차원으로 보고 자료를 찾다 지친 나는 생태적 지위라는 뜻의 니치(niche)란 말을 생각하게 된다. 벽감(壁龕)이란 의미도 있고 틈새 시장이란 의미도 있지만 생태적 지위란 말을 선호하는 것은 무릇 모든 글은 지위(地位)를 얻기 위한 투쟁이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물론 틈새시장도 유사한 차원의 말이지만 즉물적이어서 싫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지 걱정이 큰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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