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궁궐을 균형과 비례의 원칙에 따라 건축된 공간으로 생각한다. 이런 전제 하에 최근 나는 궁궐의 균형과 비례를 중용(中庸)으로 풀이한 글을 썼다. 그런데 이는 내 지론을 저버리는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중용은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상태, 치우침이 없는 상태 등을 뜻한다. 이와 관련해 거의 유일하게 일반적 의미와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이 이한우 교수이다. 그는 ‘슬픈 공자’에서 중용을 철저하고 완전히 뿌리를 뽑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한우 교수에 의하면 공자는 공부를 목표에 못 미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 그리고 목표에 미쳤을 때는 그것을 잃으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한 사람이다. “학여불급(學如不及) 유공실지(猶恐失之)”(’논어‘ ’태백泰伯‘편)의 차원이다. 이한우 교수는 중(中)하다는 것은 문제의 본질에 적중한다는 말로, 용(庸)하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끌고 가는 것으로 푼다.


’공자의 인생 강의‘에서 신정근 교수가 공자를,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엇이든 해보려고 시도한 사람(지기불가이지자: 知其不可而爲之者)으로 설명한 것과 맥락이 통한다. 신정근 교수의 풀이는 공자가 일반적 의미의 중용과 거리가 먼 사람임을 알게 한다. 공자가 (일반적 의미의) 중용적인 사람이었다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엇이든 해보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문제의식과 관련해 말하자면 명확하게 중용이란 말로 궁궐(경복궁)을 설명한 사람이 양택규 님이다.(’경복궁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참고) 문제는 나에게 있다. 저자의 권위에 의지하려는 마음 때문에 중도(中道)라는 말로 궁궐을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 의미의) 중용과 중도의 뉘앙스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 당당할 것,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물론 철저한 근거 제시에 입각한 당당함이어야 할 것이다. 철저(徹底)한 공자, 철저해야 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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