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 불교에 부정적이었던 제가 약간 마음을 고친 계기가 된 것은 불교가 인도를 벗어나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될 때 가장 주된 후원 역할을 한 상인(商人)들이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이유에서 불상, 염주, 불경 등을 몸에 지녔다는 글을 읽고서입니다. 상인의 중요함은 동아시아 언어 학자인 루이스 랭커스터(Lewis Lancaster: 1932 - )가 세속(世俗)을, 특정한 부류의 상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불교평론’ 32호)고 말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세속이란 삶을 향유하면서도 깨달음을 추구하는 재가 보살을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 중 하나로 중국 감숙성(甘肅省: 간쑤성) 주천(酒泉: 주취안) 시의 오아시스 도시인 돈황(敦煌)을 들 수 있습니다. 사막의 대화랑(畵廊)이라 할 돈황 석굴(막고굴)에서 법화경 사본을 비롯한 5만 점의 고문서와 함께 법화경을 모티브로 한 벽화가 발견됩니다.(1900년 6월) 묘법연화경이 정식 명칭인 법화경은 우리나라 천태종의 근본경전입니다. 인도 경전인 법화경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공헌한 사람들 중 하나로 법화경을 번역한 구마라즙을 들 수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니치렌(日蓮; 1222 - 1282)이 법화경을 최고의 가르침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법화경과 니치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본 창가(創價)학회가 주관하는 ‘법화경 - 평화와 공생의 메시지전’이 9월 21일 시작되어 12월 21일까지 계속됩니다.(서울 구로 공원로 이케다 홀 특별전시장. 무료. www.thelotussutra.org) 하필 일본인가, 하시겠지만 그 이전에 법화경이라는 인도발(發) 대승경전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는 전시회라 생각됩니다. 이케다는 국제창가학회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를 말합니다. 창가학회는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국가신도(国家神道) 체제로 돌입하게 된 시점에서 대다수의 종교계와 달리 신찰(천황숭배)을 거부해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빛납니다.


러시아의 우주비행사 알렉산드르 세레브로프와의 대담집인 ‘우주와 지구와 인간’에서 “여러 차례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생각할수록 항상 나에게 새로운, 아니 더해지는 감탄과 외경심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률이 바로 그것”(234 페이지)이라는 칸트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 다이사쿠 회장. 지녀서 읽고 외우며 바르게 기억하며 그 도리를 이해하고 익히며 서사하는 자는 마땅히 곧 석가모니불을 보게 되리라 말(미즈노 고겐 지음 ‘경전의 성립과 전개’ 74 페이지)해지는 법화경. 종교를 떠나 인류 문화 유산을 배우는 차원으로 보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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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 스케치북
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 / 열화당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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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닉네임인 ‘벤투의 스케치북’은 미술비평가이자 소설가인 존 버거의 ‘벤투의 스케치북(Bento's Sketchbook)‘에서 따온 이름이다. 벤투는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약칭이다. 벤투는 스피노자의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바루흐 스피노자라 불리기도 하는데 스피노자는 유대교로부터 파문(破門: herem)당한 뒤 이름을 히브리어 바루흐에서 라틴어 베네딕투스(벤투)로 바꾼다. 스피노자에 대한 회고에 의하면 스피노자는 드로잉을 즐겼고 스케치북을 들고 다녔다. 그러나 그림은 발견되지 않았다.


‘벤투의 스케치북’은 스피노자의 드로잉이 있는 스케치북을 발견하는 상상을 한 존 버거의 사유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원래 네덜란드인들은 모두 타고난 화가“(나카노 교코 지음 ‘미술관 옆에서 읽은 인상주의’ 55 페이지)라는 말이 있다. 특히 17 세기 황금시대에는 시민계급이 미술 수집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17 세기(1632 - 1677)를 살았던 철학자이다. 얀 페르메르, 헤라르트 다우 등이 스피노자와 동시대 화가들이다.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의 화가 조르주 쇠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에서 시가 보인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눈에는 오직 과학이 보일 뿐이라는 말을 했다.


일치의 어려움을 말하는 듯 하다. 그런데 존 버거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이끌어 가는 어딘가, 또는 그 무언가에 대한 인식을 자신과 벤투가 공유했다는 말을 한다. 버거는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다.(15, 17, 20 페이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사유의 결과물을 구체화하기 위해 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행위자 자신들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작용은 굳건함과 연결시키고 다른 이들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작용은 관대함과 연결시킨 스피노자를 소개한다.


이 부분은 ‘에티카’ 3부, 정리 59의 주석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이 주석 마지막 부분에 우리는 외부 원인들에 의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휘둘리고 출구도 모른 채, 운명도 모른 채 동요(動搖)한다는 글이 있다. 스피노자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능가하는 외부의 무한한 힘으로 인해 정념(情念)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저자는 ”운명에 이름을 지어 줄 수 있을까. 운명에 종종 기하학 단위 같은 규칙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표현할 명사는 없다. 드로잉 한 점이 명사를 대신할 수 있을까. 오늘 아침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확신이 없다“고 말한다.(71 페이지)


스피노자는 어떤 이미지가 더 많은 다른 실재들과 결합할수록 그 이미지는 더 자주 생생해진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저항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저항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이라고. "저항은 영(零)으로, 강요된 침묵으로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전 세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숨어 있는 본질을 강조하는 서사를 지닌 이야기, 다른 하나는 드러난 것을 강조하는 서사를 지닌 이야기이다.


스피노자는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기쁨에서 생겨나는 욕망이 슬픔에서 생겨나는 욕망보다 더 강하다는 말을 했다.(‘에티카’ 4부, 정리 18) 저자는 “모터사이클을 타러 오셨나요, 벤투? 모터사이클과, 당신이 깎은 렌즈가 들어간 망원경을 직접 비교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몇몇 공통점이 있지요. 둘 다 목적지를 잘 찾아야 하고, 둘 다 거리를 줄여 주고, 둘 다 관심의 터널이 되며, 속도감을 줍니다.”라고 말한다.(117 페이지) 저자는 오랜 세월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과 드로잉을 하는 것 사이의 어떤 평행관계에 매혹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라봄으로써 더 가까이 가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습관적으로 혼란에 빠지며 그것을 마주함으로써 종종 어떤 분명함을 얻기도 한다고 말한다. 스피노자가 그 방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세 가지 형태의 지식에 대해 서술했다. 소문과 인상에만 근거하여 전체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제 멋대로의 지식, 적절한 개념을 활용하며 사물의 성질에 집중하는 지식, 사물의 본질에 집중하는, 그리하여 신에게 이르는 지식. 저자는 드로잉을 무언가를 지향하는 실천으로 정의한다.


저자는 드로잉을 무언가를 꼼꼼히 살피는 형식으로 정의하며 그림을 그리는 본능적인 충동은 무언가를 찾으려는 욕구, 점을 찍으려는 욕구, 사물들과 자신을 어딘가에 위치시키려는 욕구에서 나온다고 설명한다.(146 페이지) 저자는 드로잉을 시작할 때마다 우리는 그때만의 서로 다른 희망을 가지며 매번 드로잉은 예측할 수 없는 그때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드로잉은 비슷한 상상력의 작동으로 시작된다고 말한다.(157 페이지) 스피노자는 자신이 최상의 철학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참된 철학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말을 했다. 스피노자가 행했고 존 버거가 정성들여 서술한 ’그림‘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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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카페에서 읽는 인상주의 - 모네의 빛에서 고흐의 어둠으로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이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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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바로크 등의 말이 조롱의 의미가 담긴 말이었듯 인상주의도 조롱의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이 그림은 대체 뭘 그린 걸까? 벽지라도 이 그림보다는 낫겠다. 필시 이 그림에는 인상이 듬뿍 담겨 있으리라...”처럼. 이 그림이란 모네의 ‘인상, 해돋이’이고 그런 혹평을 받게 된 것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려다 보니 붓질이 빠르고 거친 데다가 간혹 칠하다 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상이란 말은 인상비평 등의 말을 통해 만날 수 있는데 이는 물론 부정적이다.


인상주의도 여러 가지여서 하나로 묶을 수 없다. 고흐는 인상주의로 분류하기에는 너무 독창적이었고 세잔은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좇다 보면 인간과 사물의 형태가 불명확해진다는 점을 용인하지 못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인상(印象)을 시뮬라크르(사건, 이미지, 감성적 언표 등등)에 비유할 만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림을 문학으로부터, 역사로부터, 신화로부터, 주제로부터 떼어내 독립시키려 했다. 인상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데생이 변변치 못함을 지적한다. 화법에 집착하여 주제를 버리다 보니 그림에서 이야기, 나아가 정신성까지 사라져 버려 식상하다는 말도 한다.


하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근대’를 그렸다. 인상주의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두 가지 기술은 튜브 물감과 사진 기술이다. 튜브 물감 이전 시대인 16세기에 활약했던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90 - 1576)는 워낙 톡특한 붉은 색으로 그림을 그려 그가 사용하는 색은 피를 섞어 만든 것이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인공 염료와 달리 당시의 물감은 금방 굳어 버려 사용할 만큼 매번 새로 준비해야 했다. 공방들마다 제조 기법이 달라 미묘한 색조 차이도 두드러졌던 시대이기도 했고.


J 모 시인의 신간 시집을 “심장의 피를 비커에 받아 가을 햇살로 우려내면 저런 숨 타는 소리가 나올까 싶은 시편들로 빼곡”한 시집으로 표현한 K 시인의 말을 접하며 문득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일화를 떠올려 본다. 사진의 경우도 흥미롭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화가처럼 움직이는 대상을 잡아내려 했지만 손이 흔들려 화면이 흐려지거나 프레임이 흔들려 예상 밖의 영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프랑스 제2 제정기(1852 - 1870)는 인상주의의 여명기와 겹친다. 에밀 졸라는 왕성한 미술평론가이기도 했다. 마네, 세잔, 드가, 모네 등과 친하게 지냈고 대중이 인상주의 회화를 수용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인상주의가 거센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봉오리를 피우고 마침내 커다란 꽃송이를 활짝 피어올린 때는 1870년대 말부터 1900년 사이였다. 산업혁명의 시대, 빛나는 근대화의 시대, 영광스러운 유럽의 시대였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대부분 파리의 거리를 캔버스에 담으려 했다.


거리 이야기가 나왔기에 하는 말이지만 당시에 이미 젠트리피케이션에 해당하는 기획이 있었다. 오스만 남작의 파리 개조 사업의 중요한 목적은 맹렬한 기세로 지방에서 유입되는 빈민(잠재적 범죄자로 여겨진)들을 일소하는 것이었다. 빈민을 중심부에서 몰아내려면 땅값을 올려 부자만 살 수 있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는 육체 노동자의 실상을 통해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모양새는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 한 것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신화, 성경 등의 내용에 주목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에 육체 노동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반면 일하는 여성은 빈번하지는 않지만 그림 속에 등장했다. 인상주의 화가들 중 로트레크, 고흐 등이 압생트 중독이었다.(20세기 초 제조 및 판매가 금지되었는데 오늘날 압생트와 전혀 다른 술이다.) 인상주의 화가 가운데 드물게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 - 1895)가 등장한다. 여자는 자유롭게 외출도 할 수 없었던 시대의 화가로 그로 인해 그녀는 주변 사람들과 주변 풍경들만을 그릴 수 밖에 없었다. 사소설 외의 것을 쓸 수 없게 강제된 소설가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로트레크가 반 고흐의 그림을 헐뜯는 사람을 때리려고 덤벼들었다는 에피소드와 고흐에게 남프랑스 아를로 가라고 권유했던 사람도 로트레크였다는 이야기도 흥미 거리이다. 고흐는 초기 작품만 보면 이런 그림으로 잘도 화가가 되려고 했구나, 하고 아연해질 실력이었음을 생각하면 악착 같이 밀어붙이면 사람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견본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흐는 자연광을 있는 그대로 붙잡으려 했던 모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고흐의 색채와 모네의 색채는 너무 다르다.


서양 회화는 여러 세대에 걸쳐 2차원의 화폭에 3차원 입체를 구현하기 위해 고심을 거듭하고 골똘히 궁리했는데 아예 그것을 문제삼지 않은 우키요에의 경쾌함과 자유로움이 고전의 속박에서 빠져나오려 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인상주의와 미국은 깊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롭고 젊은 미국이 프랑스 문화를 사랑(해 그림들을 구매)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새로운 화가들이 한껏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미국의 덕을 보았으면서도 벼락부자라 해서 경멸했다.


인상주의 회화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이유는 밝고 화사한 화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좋은 기분 좋은 분위기, 위로를 주고 지식이 없어도 즐길 수 있는 특성 등을 지녔기 때문이다. 물론 재해(災害) 장면을 보며 그저 감상의 대상으로 여겨 그림을 그리는 것은 독(毒)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그럼에도 아름답다’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독(毒)이자 매력이라 말한다. 이 책을 읽고 생각한 것은 역사적 지식, 문화사적 배경을 충분히 갖추는 것이 그림을 이해하는 데 필수라는 점이다. 그래야 올바른 설득력 있는 감상을 즐길 수 있다. ‘미술관 옆 카페에서 읽는 인상주의’를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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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기억하라 - 징비록
정종숙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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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숙 작가의 징비록 기억을 기억하라는 개인 회고록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132)된 서애(西厓) 류성룡의 징비록을 분석한 책이다. 전쟁 후 일본의 끈질긴 요구에 국교를 재개할 때 개방한 부산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당시 동아시아를 열광시킨 베스트셀러가 된 징비록(懲毖錄)은 그 만큼 임진왜란을 정확하게 묘사한 책으로 반대파의 탄핵으로 파면당했다가 회복되어 임금의 두 번의 부름을 받았으나 뿌리치고 정치의 중심이 아닌 전쟁의 전모를 담고자 한 류성룡의 집념이 만든 역작이다.


징비란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훗날의 환란이 없도록 조심하게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징비록에는 류성룡이,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보낸 통신사 일행 중 김성일(유일하게 일본의 침략 기세를 느끼지 못했다고 보고한)을 따로 만나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재차 묻는 장면이 나온다. 김성일은 황윤길의 말이 너무 강경해 잘못하면 온 나라가 동요(動搖)될까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라 답했다.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지 못하게 된 책임자로 지목되었다.


그런데 당시 선조(宣祖)는 여러 사람이 보고한 전쟁 가능성론을 듣지 않고 유일한 의견 즉 전쟁이 일어날 기세를 느끼지 못했다는 김성일의 의견을 수용한 뒤 전쟁이 일어나자 김성일을 희생양으로 지목했다. 선조는 무능한 만큼 간교했다. 기축옥사(정여립鄭汝立의 모반으로 서인에 의해 동인 1000여명이 고문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건)때 정철에게 전권을 주어 모진 고문으로 동인의 핵심 세력을 제거하게 한 것이다.


정철은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한 것이 빌미가 되어 삭탈관직되고 유배당했다. 관동별곡, 사미인곡등 걸작들을 남겼지만 피를 묻힌 손이었다. 정철은 임진왜란이 나자 선조의 부름을 받고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뒤 모함을 받는다. 이에 정철은 강화로 들어가 살다가 굶어죽는다. 선조는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는 일을 이르던 말)에 반대한 류성룡을 유도대장에 임명해 한양 사수를 지시했다. 소심한 복수였다.


전쟁이 나자 어명을 받고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薦擧)한 사람이 류성룡이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된 것은 일곱 품계를 뛰어넘는 초고속 승진이었다. 당연히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천거였다. 선조는 이순신의 임명 철회를 요구하는 빗발치는 상소를 윤허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당시의 주력 전함(戰艦)인 판옥선(板屋船)이 전투 요원이 노출되는 위험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판옥선에 뚜껑을 덮고 옆을 막은 것이 거북선이다.


군함 건조 역시 류성룡의 절대적 지지와 후원 덕에 가능했다. 놀라운 것은 조선 수군의 대응이었다. 조선 수군은 일본 함대가 새까맣게 몰려오는 것을 보고도 출정하지 않았다. 대포 한 방 쏘지 않고 상륙을 허락한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을 때의 대한민국 재난 구조 시스템을 연상하게 하는 상황이라는 말을 한다. 당시 조선의 수뇌부는 일본을 너무 몰랐다. 수군을 폐지하자는 말도 있었을 정도이다. 전쟁 발발 230일만에 수도를 적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조선의 방어체계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이었다. 유사시에 각 고을의 수령이 군사를 이끌고 자신의 고을을 떠나 약속된 방어 지역으로 집결하고 중앙에서 임명된 순번사, 방어사, 도원수 등이 도착하면 그 휘하에 예속되어 지휘를 받는 체제를 말한다. 그런데 류성룡은 이 체제가 지휘관이 적군보다 늦게 도착하면 싸우기도 전에 붕괴될 위험성이 있는 문제적 체제였기에 진관체제로 바꿀 것을 주장했다. 물론 반대에 부딪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류성룡은 전쟁 초기 도망치기 급급했던 조정의 모습을 숨김없이 기록했다. 백성들의 원망과 질책도 빼놓지 않았다. 저자는 선조가 전란 극복 과정에서 국왕으로서 전혀 모범을 보이지 않은 것을 임진왜란의 또 다른 비극이라 말한다. ()나라에서는 아무리 왜적(倭賊)이 강하다 해도 그렇게 빨리 치고 올라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고 요동을 넘보려 한다는 말이 나돌기까지 했다. 선조가 진짜인지 의심하기도 했다.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 다니기 바빴던 임금이기에 가짜 왕으로 의심받은 것, 그리고 일본군의 조롱과 협박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한때 수군을 폐지하려 했던 조정을 구한 것은 이순신의 수군이었다. 이순신은 한산해전에서 학익진 전술을 구사해 대승을 거두었다.(한산대첩) 류성룡은 한산해전의 승리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다고 썼다.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143 페이지) 근세일본국민사란 책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은 한산해전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썼다.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 사람들을 부왜(附倭)라 한다. 부왜는 전국 곳곳에 있었다. 적극적으로 간첩 활동을 한 자로부터 단순 부역자들에 이르기까지... 전쟁 초기 임금이 도성을 버리면서 문제의 싹이 튼 것이라 할 수 있다.(172 페이지)


행주대첩의 권율과 6진 개척의 김종서가 무관이 아닌 문관이었듯 류성룡 역시 문관으로 3도도체찰사(都體察使: 일본군이 남하하는 지역을 담당하는 총사령관) 역을 수행했다.(여담이지만 권율은 행주대첩을 자신의 최고 전공으로 생각하지 않고 웅치 - 이치 전투를 자랑스러워 했다. 한민족 4대 대첩은 살수, 귀주, 행주, 한산 대첩이다. 웅치熊峙는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과 전라남도 장흥군 장평면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이치梨峙는 전라도 진산군과 고산현 경계의 고개이다.)


()의 참전으로 전쟁을 새로운 계기를 맞는다. 우리는 그제나 이제나 작전 지휘권이 없는 나라이다. 명의 장군 이여송은 탄핵을 받았다. 그가 참획했다고 주장한 일본군 머리의 절반이 조선 사람의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명의 원조를 받아 전쟁을 치르는 입장이기에 사건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이여송이 행주에서 참패한 이래 사기가 꺾일대로 꺾인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준 것이다. 병력 손실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온건파였던 류성룡도 이 부분에서만은 강경했다. 류성룡은 명의 황제를 상징하는 기패(旗牌)에 참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명군과 일본군의 합의 내용을 전하는 기패였다. 합의 내용에는 철수하는 일본군을 공격하면 참형에 처할 것이라는 조항도 있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참배를 거부한 것은 합의 내용을 승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그렇게 강화를 반대하면서 왜 당신네 국왕은 도성도 버리고 도망쳤느냐는 말까지 들었다.


일본은 한양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철수하게 되자 진주성을 함락시킨 후 주민 6만을 몰살시켰다. 일본은 아예 남해안 각지에 성을 쌓고 들어앉아 장기 주둔 상태에 들어갔다. 전쟁 후 조선 최초의 직업군인인 훈련도감(訓練都監)이 설치되었다. 훈련도감은 류성룡의 제안으로 창설된 특수부대이다. 1594년 봄 류성룡은 선조에게 조총 제작 기술을 개발하자고 요청했다. 대구 광역시 달성군의 녹동서원에 임진왜란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총이 보관되어 있다. 당시 조선군으로 투항한 일본 장수 김충선(일본명 사가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만든 것이었다.


류성룡은 징비록의 끝을 이순신의 이야기로 장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전쟁도 끝이 났다. 선조는 종전과 함께 전란 극복에 기여한 공신들을 선정했다. 104명이 선정되었는데 직접 싸워 공을 세운 선무공신(宣武功臣)18명에 불과했다. 선무공신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18명의 무신(武臣)에게 내린 훈공(勳功)을 말한다. 어이없는 것은 호성공신 86명은 선조가 피난갈 때 호위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선조는 우리 장수들은 간혹 명군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요행히 잔적(殘賊)의 머리를 얻었을 뿐이라고 폄하했다. 선조는 전란 극복의 공을 명군에게 돌림으로써 이순신 같은 전쟁 영웅의 공을 상대적으로 축소시켰다. 선조에게 백성들이 따르고 존경한 이순신은 위협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선조는 곽재우, 조현, 고경명 등 의병장들은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선조가 명군을 절대적으로 평가한 것은 피난만 다닌 무능한 왕이 아니라 명군을 불러 전란을 극복한 구국의 왕으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급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명으로부터 재조지은(再造之恩: 거의 망하게 된 것을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을 입었다는 점을 강조한 탓에 그 논리에 갇혀 조선은 명청 교체의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다. 조선이 명을 섬겨야 할 나라가 인식했기에 막을 수 없었던 참변이었다. 저자는 역사는 기억하는대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류성룡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병산서원(屛山書院: 경북 안동)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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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은 작가의 소설집 '11;59 PM 밤의 시간'(2026년 9월 12일 출간)에 수록된 '파르마코스 - 희생양의 조건'은 심상치 않은 작품이다. 파르마코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제물로 바쳐진 인간 희생양들이었다.독일어 gift가 약과 독을 함께 의미하듯 파르마코스는 약과 독을 함께 의미하는 파르마콘과 관계 있는 말. 희생양, 인간 제물 등의 역사는 길고 잔혹하다. 오늘날 그런 폭력적이고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희생양 및 희생제물화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할 수 있지만 한 두 사람을 희생양(비유적 의미에서)으로 만들어 조직을 보전하는 행태는 계속되고 있다. '11;59 PM 밤의 시간'에서 만날 수 있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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