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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 스케치북
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 / 열화당 / 2012년 11월
평점 :
내 닉네임인 ‘벤투의 스케치북’은 미술비평가이자 소설가인 존 버거의 ‘벤투의 스케치북(Bento's Sketchbook)‘에서 따온 이름이다. 벤투는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약칭이다. 벤투는 스피노자의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바루흐 스피노자라 불리기도 하는데 스피노자는 유대교로부터 파문(破門: herem)당한 뒤 이름을 히브리어 바루흐에서 라틴어 베네딕투스(벤투)로 바꾼다. 스피노자에 대한 회고에 의하면 스피노자는 드로잉을 즐겼고 스케치북을 들고 다녔다. 그러나 그림은 발견되지 않았다.
‘벤투의 스케치북’은 스피노자의 드로잉이 있는 스케치북을 발견하는 상상을 한 존 버거의 사유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원래 네덜란드인들은 모두 타고난 화가“(나카노 교코 지음 ‘미술관 옆에서 읽은 인상주의’ 55 페이지)라는 말이 있다. 특히 17 세기 황금시대에는 시민계급이 미술 수집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17 세기(1632 - 1677)를 살았던 철학자이다. 얀 페르메르, 헤라르트 다우 등이 스피노자와 동시대 화가들이다.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의 화가 조르주 쇠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에서 시가 보인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눈에는 오직 과학이 보일 뿐이라는 말을 했다.
일치의 어려움을 말하는 듯 하다. 그런데 존 버거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이끌어 가는 어딘가, 또는 그 무언가에 대한 인식을 자신과 벤투가 공유했다는 말을 한다. 버거는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다.(15, 17, 20 페이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사유의 결과물을 구체화하기 위해 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행위자 자신들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작용은 굳건함과 연결시키고 다른 이들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작용은 관대함과 연결시킨 스피노자를 소개한다.
이 부분은 ‘에티카’ 3부, 정리 59의 주석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이 주석 마지막 부분에 우리는 외부 원인들에 의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휘둘리고 출구도 모른 채, 운명도 모른 채 동요(動搖)한다는 글이 있다. 스피노자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능가하는 외부의 무한한 힘으로 인해 정념(情念)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저자는 ”운명에 이름을 지어 줄 수 있을까. 운명에 종종 기하학 단위 같은 규칙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표현할 명사는 없다. 드로잉 한 점이 명사를 대신할 수 있을까. 오늘 아침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확신이 없다“고 말한다.(71 페이지)
스피노자는 어떤 이미지가 더 많은 다른 실재들과 결합할수록 그 이미지는 더 자주 생생해진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저항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저항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이라고. "저항은 영(零)으로, 강요된 침묵으로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전 세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숨어 있는 본질을 강조하는 서사를 지닌 이야기, 다른 하나는 드러난 것을 강조하는 서사를 지닌 이야기이다.
스피노자는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기쁨에서 생겨나는 욕망이 슬픔에서 생겨나는 욕망보다 더 강하다는 말을 했다.(‘에티카’ 4부, 정리 18) 저자는 “모터사이클을 타러 오셨나요, 벤투? 모터사이클과, 당신이 깎은 렌즈가 들어간 망원경을 직접 비교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몇몇 공통점이 있지요. 둘 다 목적지를 잘 찾아야 하고, 둘 다 거리를 줄여 주고, 둘 다 관심의 터널이 되며, 속도감을 줍니다.”라고 말한다.(117 페이지) 저자는 오랜 세월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과 드로잉을 하는 것 사이의 어떤 평행관계에 매혹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라봄으로써 더 가까이 가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습관적으로 혼란에 빠지며 그것을 마주함으로써 종종 어떤 분명함을 얻기도 한다고 말한다. 스피노자가 그 방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세 가지 형태의 지식에 대해 서술했다. 소문과 인상에만 근거하여 전체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제 멋대로의 지식, 적절한 개념을 활용하며 사물의 성질에 집중하는 지식, 사물의 본질에 집중하는, 그리하여 신에게 이르는 지식. 저자는 드로잉을 무언가를 지향하는 실천으로 정의한다.
저자는 드로잉을 무언가를 꼼꼼히 살피는 형식으로 정의하며 그림을 그리는 본능적인 충동은 무언가를 찾으려는 욕구, 점을 찍으려는 욕구, 사물들과 자신을 어딘가에 위치시키려는 욕구에서 나온다고 설명한다.(146 페이지) 저자는 드로잉을 시작할 때마다 우리는 그때만의 서로 다른 희망을 가지며 매번 드로잉은 예측할 수 없는 그때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드로잉은 비슷한 상상력의 작동으로 시작된다고 말한다.(157 페이지) 스피노자는 자신이 최상의 철학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참된 철학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말을 했다. 스피노자가 행했고 존 버거가 정성들여 서술한 ’그림‘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