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기억하라 - 징비록
정종숙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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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숙 작가의 징비록 기억을 기억하라는 개인 회고록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132)된 서애(西厓) 류성룡의 징비록을 분석한 책이다. 전쟁 후 일본의 끈질긴 요구에 국교를 재개할 때 개방한 부산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당시 동아시아를 열광시킨 베스트셀러가 된 징비록(懲毖錄)은 그 만큼 임진왜란을 정확하게 묘사한 책으로 반대파의 탄핵으로 파면당했다가 회복되어 임금의 두 번의 부름을 받았으나 뿌리치고 정치의 중심이 아닌 전쟁의 전모를 담고자 한 류성룡의 집념이 만든 역작이다.


징비란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훗날의 환란이 없도록 조심하게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징비록에는 류성룡이,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보낸 통신사 일행 중 김성일(유일하게 일본의 침략 기세를 느끼지 못했다고 보고한)을 따로 만나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재차 묻는 장면이 나온다. 김성일은 황윤길의 말이 너무 강경해 잘못하면 온 나라가 동요(動搖)될까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라 답했다.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지 못하게 된 책임자로 지목되었다.


그런데 당시 선조(宣祖)는 여러 사람이 보고한 전쟁 가능성론을 듣지 않고 유일한 의견 즉 전쟁이 일어날 기세를 느끼지 못했다는 김성일의 의견을 수용한 뒤 전쟁이 일어나자 김성일을 희생양으로 지목했다. 선조는 무능한 만큼 간교했다. 기축옥사(정여립鄭汝立의 모반으로 서인에 의해 동인 1000여명이 고문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건)때 정철에게 전권을 주어 모진 고문으로 동인의 핵심 세력을 제거하게 한 것이다.


정철은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한 것이 빌미가 되어 삭탈관직되고 유배당했다. 관동별곡, 사미인곡등 걸작들을 남겼지만 피를 묻힌 손이었다. 정철은 임진왜란이 나자 선조의 부름을 받고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뒤 모함을 받는다. 이에 정철은 강화로 들어가 살다가 굶어죽는다. 선조는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는 일을 이르던 말)에 반대한 류성룡을 유도대장에 임명해 한양 사수를 지시했다. 소심한 복수였다.


전쟁이 나자 어명을 받고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薦擧)한 사람이 류성룡이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된 것은 일곱 품계를 뛰어넘는 초고속 승진이었다. 당연히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천거였다. 선조는 이순신의 임명 철회를 요구하는 빗발치는 상소를 윤허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당시의 주력 전함(戰艦)인 판옥선(板屋船)이 전투 요원이 노출되는 위험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판옥선에 뚜껑을 덮고 옆을 막은 것이 거북선이다.


군함 건조 역시 류성룡의 절대적 지지와 후원 덕에 가능했다. 놀라운 것은 조선 수군의 대응이었다. 조선 수군은 일본 함대가 새까맣게 몰려오는 것을 보고도 출정하지 않았다. 대포 한 방 쏘지 않고 상륙을 허락한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을 때의 대한민국 재난 구조 시스템을 연상하게 하는 상황이라는 말을 한다. 당시 조선의 수뇌부는 일본을 너무 몰랐다. 수군을 폐지하자는 말도 있었을 정도이다. 전쟁 발발 230일만에 수도를 적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조선의 방어체계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이었다. 유사시에 각 고을의 수령이 군사를 이끌고 자신의 고을을 떠나 약속된 방어 지역으로 집결하고 중앙에서 임명된 순번사, 방어사, 도원수 등이 도착하면 그 휘하에 예속되어 지휘를 받는 체제를 말한다. 그런데 류성룡은 이 체제가 지휘관이 적군보다 늦게 도착하면 싸우기도 전에 붕괴될 위험성이 있는 문제적 체제였기에 진관체제로 바꿀 것을 주장했다. 물론 반대에 부딪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류성룡은 전쟁 초기 도망치기 급급했던 조정의 모습을 숨김없이 기록했다. 백성들의 원망과 질책도 빼놓지 않았다. 저자는 선조가 전란 극복 과정에서 국왕으로서 전혀 모범을 보이지 않은 것을 임진왜란의 또 다른 비극이라 말한다. ()나라에서는 아무리 왜적(倭賊)이 강하다 해도 그렇게 빨리 치고 올라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고 요동을 넘보려 한다는 말이 나돌기까지 했다. 선조가 진짜인지 의심하기도 했다.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 다니기 바빴던 임금이기에 가짜 왕으로 의심받은 것, 그리고 일본군의 조롱과 협박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한때 수군을 폐지하려 했던 조정을 구한 것은 이순신의 수군이었다. 이순신은 한산해전에서 학익진 전술을 구사해 대승을 거두었다.(한산대첩) 류성룡은 한산해전의 승리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다고 썼다.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143 페이지) 근세일본국민사란 책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은 한산해전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썼다.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 사람들을 부왜(附倭)라 한다. 부왜는 전국 곳곳에 있었다. 적극적으로 간첩 활동을 한 자로부터 단순 부역자들에 이르기까지... 전쟁 초기 임금이 도성을 버리면서 문제의 싹이 튼 것이라 할 수 있다.(172 페이지)


행주대첩의 권율과 6진 개척의 김종서가 무관이 아닌 문관이었듯 류성룡 역시 문관으로 3도도체찰사(都體察使: 일본군이 남하하는 지역을 담당하는 총사령관) 역을 수행했다.(여담이지만 권율은 행주대첩을 자신의 최고 전공으로 생각하지 않고 웅치 - 이치 전투를 자랑스러워 했다. 한민족 4대 대첩은 살수, 귀주, 행주, 한산 대첩이다. 웅치熊峙는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과 전라남도 장흥군 장평면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이치梨峙는 전라도 진산군과 고산현 경계의 고개이다.)


()의 참전으로 전쟁을 새로운 계기를 맞는다. 우리는 그제나 이제나 작전 지휘권이 없는 나라이다. 명의 장군 이여송은 탄핵을 받았다. 그가 참획했다고 주장한 일본군 머리의 절반이 조선 사람의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명의 원조를 받아 전쟁을 치르는 입장이기에 사건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이여송이 행주에서 참패한 이래 사기가 꺾일대로 꺾인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준 것이다. 병력 손실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온건파였던 류성룡도 이 부분에서만은 강경했다. 류성룡은 명의 황제를 상징하는 기패(旗牌)에 참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명군과 일본군의 합의 내용을 전하는 기패였다. 합의 내용에는 철수하는 일본군을 공격하면 참형에 처할 것이라는 조항도 있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참배를 거부한 것은 합의 내용을 승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그렇게 강화를 반대하면서 왜 당신네 국왕은 도성도 버리고 도망쳤느냐는 말까지 들었다.


일본은 한양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철수하게 되자 진주성을 함락시킨 후 주민 6만을 몰살시켰다. 일본은 아예 남해안 각지에 성을 쌓고 들어앉아 장기 주둔 상태에 들어갔다. 전쟁 후 조선 최초의 직업군인인 훈련도감(訓練都監)이 설치되었다. 훈련도감은 류성룡의 제안으로 창설된 특수부대이다. 1594년 봄 류성룡은 선조에게 조총 제작 기술을 개발하자고 요청했다. 대구 광역시 달성군의 녹동서원에 임진왜란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총이 보관되어 있다. 당시 조선군으로 투항한 일본 장수 김충선(일본명 사가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만든 것이었다.


류성룡은 징비록의 끝을 이순신의 이야기로 장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전쟁도 끝이 났다. 선조는 종전과 함께 전란 극복에 기여한 공신들을 선정했다. 104명이 선정되었는데 직접 싸워 공을 세운 선무공신(宣武功臣)18명에 불과했다. 선무공신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18명의 무신(武臣)에게 내린 훈공(勳功)을 말한다. 어이없는 것은 호성공신 86명은 선조가 피난갈 때 호위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선조는 우리 장수들은 간혹 명군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요행히 잔적(殘賊)의 머리를 얻었을 뿐이라고 폄하했다. 선조는 전란 극복의 공을 명군에게 돌림으로써 이순신 같은 전쟁 영웅의 공을 상대적으로 축소시켰다. 선조에게 백성들이 따르고 존경한 이순신은 위협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선조는 곽재우, 조현, 고경명 등 의병장들은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선조가 명군을 절대적으로 평가한 것은 피난만 다닌 무능한 왕이 아니라 명군을 불러 전란을 극복한 구국의 왕으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급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명으로부터 재조지은(再造之恩: 거의 망하게 된 것을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을 입었다는 점을 강조한 탓에 그 논리에 갇혀 조선은 명청 교체의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다. 조선이 명을 섬겨야 할 나라가 인식했기에 막을 수 없었던 참변이었다. 저자는 역사는 기억하는대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류성룡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병산서원(屛山書院: 경북 안동)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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