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윤석 시인이 산문집을 낸 이원 시인을 자신이 아는 유일한 정통파 시인, 드물게 보는 귀족 같은 시인이라 평한 페북 글을 읽었다. 흥미롭다. 이원 시인의 산문집을 먼저 읽을 것, 그리고 그의 시집들을 섭렵할 것...이상은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미션이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란 말을 체득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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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시인의 `그리워 하면 안 되나요`를 알게 되었다.


젖가슴에는 젖꼭지 대신 꽃봉오리
발가락에는 발톱 대신 자갈들이

이럴 때는
그리워하면 안 되나요
이럴 때는
딱 한 잔, 딱 두 잔, 딱 넉 잔
이럴 때는
달빛에 녹아내리는 벚꽃잎처럼
흩날려 사라지면 안 되나요

풍짝 풍짝 풍짝짝
사람들이 춤을 덩실덩실 출 때에
그 앞에서 음악이 되어 사라지면 안 되나요

목덜미에는 입술
허리에는 두 팔
머리카락에는 태엽 풀린 인형들
등 뒤에는 매미처럼 당신이


내가 처음 안 김소연 시인의 시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에 수록된 `목련나무가 있던 골목`이란 시이다. 마지막 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봄이 올 때까지 주먹을 펴진 않을 겁니다 내 주먹 안에/ 당신에게 줄 밥이 그릇그릇 가득합니다 뜸이 잘 들고 있/ 습니다 새봄에 새 밥상을 차리겠습니다 마디마디 열리는/ 따뜻한 밥을 당신은 다 받아먹으세요˝

희망을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시이고. 오늘 읽은 시 `그리워하면 안 되나요`는 김소연 시인의 다른 시들과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이 시를 읽고 생각한 시인이 있다. 짐작하겠지만 조용미 시인이다.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에 실린 `꽃잎`이란 시에서 시인은 ˝높은 곳에 서 있으면/ 바람의 힘을 빌려 몸을 날리는 꽃잎처럼/ 뛰어내리고 싶었다..˝는 구절을 선보였다.

`나의 다른 이름들`에 실린 `상리`란 시에서 조용미 시인은 ˝...어지러워, 이제 그만 나를 놓아 다오 몸살이 나듯 신열/ 이 돋아나고 있다 여기 이 화엄 언덕 아래의 작은 슬픔은/ 얼룩 같아 보기에 좋지 않구나 이렇듯 뜨거운 몸이 되려고/ 나 여기 왔나 아아 열꽃이 붉게도, 붉게도 피어나고 있다˝는 말을 화두처럼 들려주었다.

물론 화두라 했지만 이 시는 `꽃잎`의 뉘앙스에 수렴한다.

매월 2, 4주 일요일 사직동(社稷洞) J 시인의 집에서 열리는 시 낭송회에 고정 패널로 참여하는 시인. 11월 13일이나 27일 중 가능한 날이 있느냐는 물음에 내년에나 가능하다는 답을 하자 내년 1월 8일이 어떻겠느냐고 묻기에 나는 괜찮다고 했고 다시 그때 가서 연락하겠다는 총무격의 양 시인의 페북 댓글을 받은 것이 어제이다.

가장 추운 계절인 1월의 늦은 저녁인 17시에서 18시 30분까지의 90분의 선물 같은 시간.. 이벤트를 위한 입장료 1천원 포함 식사와 커피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1만 5천원도 기꺼이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건강이 좋지 않은 시인에게 무슨 말을 듣고 기대할 수 있을까? 설레고 행복한 시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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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주정랑探珠靜浪이란 말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장자` 천지편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황제가 적수(赤水)라는 호숫가에서 현주(玄珠)라는 구슬을 물에 빠뜨렸는데 지혜가 뛰어난 신하들이 모두 찾지 못했고 바보에 가까운 한 신하가 물이 고요해진 후에 찾아낸 이야기입니다. 물 속에 빠뜨린 구슬을 찾으려면 물이 고요해져야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태풍이 지나가면 많은 피해가 생기지만 심층의 물과 표층의 물을 뒤섞어 물고기의 먹이를 풍부하게 하고 물 속에 산소도 공급한다고 합니다. 어민들에게는 풍어를 선물로 안기고요. 공기도 깨끗해지고요. 케임브리지 대학 물리학도 출신의 아잔 브라흐마 스님은 가라앉히면 사라진다는 글에서 물 잔을 손에 들고 그 물을 고요하게 하려 하지 말고 잔을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죽어 물이 될 것을 바라며 처음에는 깨끗하지 않겠지만 흐르고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도 조금씩 씻어내고 맺혀 있던 여한도 씻어내고 앙금들도 씻어내다 보면 결국 욕심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요, 라고 물은 마종기 시인의 `물빛 1`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주역`에 심취해 변하는 것 가운데 확고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장자`에 심취해 탐주정랑의 메시지를 담은 책이 바로 헤세의 `유리알 유희` 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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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시인의 `찬찬찬`이란 시를 누군가 페북에 게시했다. 그러자 그 글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사실 적시(摘示)도 시가 될 수 있을까요.. 이런 시를 적어 두고 시로 읽어 달라는 것이야말로 너무나 작가주의적 시각이 아닐른지... 좋은 작품이란 생각은 안 드네요...˝ 이문재 시인의 시는 아빠는 몇년째 고시원에 있고(공부? 아니면 거주?) 엄마는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여학생을 화자로 한 시로 자신을 키운 것의 팔할이 컵라면, 텔레비전, 방과 후 학원이라는 그녀가 가출해 감행한 이런저런 일탈행위를 사실적으로 쓴 시이다.

아빠와 싸우고 싶어도 만날 수 없고, 엄마를 패주고 싶어도 마주칠 시간이 없다는 구절이 압권으로 다가온다. 가슴 아픈 시이다. 가정 이야기이지만 사회의 단면을 엿보게 하는 시이다. 사실 적시는 당연히 시의 주요 요소이다. 덧붙이고 싶은 말은 서정주 시인의 어법(8할이 무엇이라는 식의)이 남용되는 듯 한데 저 시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힘이 느껴지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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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글을 해석(또는 해설)하는 사람들이 일률적으로 보이는 아쉬운 점들 중 하나는 니체가 당시 기독교에 대해 가졌던 생각만을 나열할 뿐이라는 점이다. 니체는 기독교를 처음부터,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구토이자 권태로 보았다. 그의 말대로 기독교는 현생이 아닌 영생을, 이 세상이 아닌 천국을 원했다. 하지만 현재 기독교는 니체 당시와는 상당히 다르다.

 

환생을 믿는 기독교인들, 천국을 믿지 않는 기독교인들, 천국이나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돈과 명예, 쾌락 등 현세의 가치들을 탐하는 기독교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니체가 주문한 부정하고 거부하고 체념하는 허무주의가 아닌 영원회귀라는 적극적 허무주의는 사실 그 스스로 경멸해 마지 않았던 관념적인 것과 많이 닮았다. 그의 말대로 영원회귀를 계속하면 초인이 되는가? 니체의 영감은 어떤 시인도 쉽게 따르지 못할 만큼 빛난다.

 

가령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심연을 너무 오래 들여다 보면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 볼 것이다"란 말은 영감으로 빛나 아름답기까지 하다. 물론 나는 니체의 저 말을 "반쯤 괴물이 되지 않고서 어떻게 괴물을 상대하겠는가."란 카잔차키스의 말('그리스인 조르바'에서)과 비교도 했다.

 

니체는 자신의 첫 저서인 '비극의 탄생' 을 나무를 보려다가 숲은 보지 못한 책, 문학적 비유가 난무하는 여성적이고 감상적인 책이라 비판했다. 그러나 어쩌면 니체의 전 저서가 문학적 비유와 감성으로 빛나는 책들이라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니체의 책들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내 문제제기를 의미있는 논란거리로 볼 자신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 이의는 니체의 영감에 마음이 움직인 사람이 제기하는 문제제기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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