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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붓다 - 배트맨과 사천왕의 공통점에서 〈생각하는 사람〉과 〈반가사유상〉의 차이까지 명법 스님의 불교미학산책
명법 지음 / 나무를심는사람들 / 2014년 6월
평점 :
천변만화하는 세계상을 알게 하는 글이 있다. “텔레비전 화면상의 한 점에 밝은 점이 얼마간 있다가 사라지면 사실은 그 점에서 빛이 발생하는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 것인데 밝은 점이 생겨 있다가 멸하는 것으로 보게 된다.”(소광섭 지음 ‘물리학과 대승기신론’ 23 페이지)는 문장이다.
허상을 실재로 착각하지 말라는 의미의 글이다. 같은 이야기를 물리학이 아닌 미학의 관점에서 말하는 책이 있다. 명법 스님의 ‘미술관에 간 붓다’이다. 저자는 호랑이 뼈로 호랑이를 만든 마술사가 그 호랑이에 잡아먹혔다는 인도 전설과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졌다는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전한다.
이들은 이미지와 실제, 가상과 진상이 역전된 사태를 상징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그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현대인들도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컴퓨터 게임 등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미학(美學)이란 것이 서양 근대의 도구적 합리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출발했다고 말하는 저자는 천강의 달 그림자를 이야기한다. 이들은 불교 예술의 이미지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달 그림자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부질 없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하늘에 뜬 진짜 달과 함께 달의 진실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미지에 집착하지도 말고 이미지를 무(無)라고 내치지도 말라는 것일까? 저자에 의하면 천강의 달 그림자는 궁극적인 깨달음은 삶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 존재함을 알리는 은유이다.
‘미술관에 간 붓다’는 저자가 불교 예술을 통해 본 미학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미학적 관점이나 불교학적인 지식도 모두 내려놓고 상징물들이 불러일으키는 느낌에만 집중한 책이다. 저자의 작업을 잇는 키워드는 불교와 미학, 세간과 출세간이다.
이미지를 대하는 바람직한 방법을 설파(說破)한 저자는 형상과 형상 없음 사이에 있는 참된 붓다를 만나려면 형상에도 속아넘어가지 않고 관념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30 페이지)
붓다가 깨달은 것은 몸은 지수화풍 4대의 결합물 즉 가상이라는 점이다. 붓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이나 허무에 빠지는 대신 놀랍도록 담담하고 고요해졌다. 붓다의 적멸(寂滅)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즐거움이 아닌 일어남과 사라짐이 없는 영원한 즐거움이다.(39 페이지)
석가모니의 사유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사유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사유이다. 사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서양 미학에서 거대하고 압도적인 자연물이나 인공물 앞에서 위험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숭엄하고 거룩한 느낌과 스스로 고양됨을 느낄 때의 미적 감정을 숭고라고 한다.(44, 45 페이지)
그러나 고려 불화의 관음은 온 우주를 감싸는 부드러움과 온화함으로 느껴진다. 불교는 수행 과정에서 겪은 고통보다 깨달음을 향한 노력을 강조한다(25 페이지)고 말하는 저자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생사를 걸 때 그 절박함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이라 말한다.(59 페이지)
저자는 상상력이란 실재하지 않는 허구를 만들어내는 능력으로 오랫동안 동서양에서 감정이나 직관 등과 함께 오류와 허위의 주범으로 취급되었지만 올바른 인식의 한 단계이며 미적 인식의 하나이고 불교 수행의 한 방법인 매우 중요한 마음의 능력이라 말한다.(79 페이지)
상상력은 초월적 대상을 형상화해야 하는 불교에서 더욱 중요하다. 저자에 의하면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일상적인 장면과 지옥과 아귀가 묘사된 상상계가 함께 존재하는 ‘감로도’ 하단은 복잡하면서도 에너지가 넘친다.
불교적 관점에서 아귀와 지옥은 실재하지만 ‘감로도’에 묘사된 세계는 상상의 산물이다. 저자는 이를 에밀 뒤르켐의 이론으로 설명한다. 상상 속에는 한 문화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믿음 뿐만 아니라 시공간을 지각하는 특별한 방식과 같은 근본적인 개념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8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상상에는 상징적 의미가 숨어 있다. 저자는 세계의 비실재성과 심리적 현실성을 이야기한다.(92 페이지) 저자는 상상력은 도덕적 선의 위대한 수단이라는 들뢰즈의 말을 인용한다. 저자는 ‘감로도’의 상상력을 타자의 것으로 생각되는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라 말한다.
‘감로도’는 죽은 이의 넋을 위로하는 수륙재에 사용되는 그림이다. 수륙재는 부처의 제자 아난이 아귀에게 보시한 일화에서 시작된 것으로 상상계와 현실계를 연결하는 중심에 아귀가 있다. 아귀는 바늘처럼 가는 목구멍 때문에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항상 굶주림에 허덕인다. 한 스님이 감로수를 흩뿌리고 제주들이 정성을 다해 공양을 올리고 불보살이 내려오기를 기도한다.
저자는 모방을 뜻하는 서양 개념인 미메시스와 동양의 사(似)를 이야기한다. 동양에서는 외관을 유사하게 그린 것을 형사(形似)라고 하고 정신성이나 기운을 생동적으로 그려낸 것을 신사(神似)라고 한다. 더 높게 평가되는 것은 신사이다. 서양에는 이런 구별이 없다.
저자에 의하면 예술 작품에서 사실은 궁극적으로 가짜 현실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시가 역사보다 더 진실하다”는 말을 했다. 그가 말한 그럴 듯함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실재라고 믿는 우리의 믿음이다.(116 페이지)
‘미술관에 간 붓다’에는 반영, 투영 등의 말이 자주 등장한다. 신화를 빼놓을 수 없다. 저자에 의하면 신화에는 세계의 근원, 신, 자연현상, 죽음 등에 대한 옛사람들의 삶과 사유가 반영되어 있다. 신화는 인류의 지혜와 상상력이 응집된 보고로 오늘날까지도 소설, 영화, 컴퓨터 게임과 같은 형태로 현대인의 삶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146 페이지)
죽음 이후의 세계인 저승은 우리가 가 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적 상상력이 모여드는 중심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의 차원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상상 속 신화의 세계 역시 인간 세계를 그대로 모방한다.
이미지에 집착하지도 말고 이미지를 무(無)라고 내치지도 말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말을 한 저자는 명부전(冥府殿)의 동자상은 신화적 세계에서 그들이 맡은 역할도 미미하지만 조형적으로도 그다지 귀엽거나 사랑스럽지 않기 때문에 오랫 동안 사람들의 관심에서 밀려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서 억지로 다정스러움을 찾아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157 페이지)
저자는 딱딱하고 차가운 표정이 본질에서 나온 것이라면 오히려 그 표정이 감추고 있는 미덕을 찾아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저자는 빔비사라 왕과 왕비 위제희 부인,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아사세 사이에서 일어난 왕사성의 비극을 담은 ‘관무량수경’을 논한다. 비극이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오이디푸스 신화와 비교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말이 있듯 아사세 콤플렉스란 말도 있다.
빔비사라 왕이 왕비 위제희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늙어가자 불안감을 느껴 예언자를 찾아간다. 예언자로부터 숲 속의 선인이 3년 후에 죽어 왕자로 환생한다는 말을 들은 왕은 조급한 마음에 사람을 시켜 선인을 죽인다.
얼마 후 왕비가 아이를 낳는데 어느 관상가로부터 아이가 원한을 품고 있다는 말을 듣고 높은 누각에서 갓난 아이를 떨어뜨려 죽이려 한다. 하지만 왕비의 모성애와 지혜 덕에 살아난 아이는 자기를 죽이려 한 부왕의 진실을 알고 아버지를 죽인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은 아사세 컴플렉스를 작품화한 것이라고 한다. 오이디푸스의 운명 자체에 의해 결정된 것과 달리 아사세의 부친 살해와 모친 유폐는 아사세의 부왕인 빔비사라의 과거 악행의 결과이다. 비극, 비극, 비극...
저자는 이미지 범람의 시대를 말하며 감각의 구제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은 감각의 지멸(止滅)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관무량수경’ 이야기를 한다. 아사세에 의해 궁전에 유폐된 위제희 부인이 붓다에게 하늘에서 내려와 주기를 간청하자 붓다가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수행법으로 제시한 것이 ‘관무량수경’이다.
저자에 의하면 불교미술의 주인공인 붓다는 제한이 없다. 제약 없이 한 명이든 일곱 명이든 원하는 대로 붓다를 그려넣을 수 있는 불화와 달리 조각은 그 조성의 어려움이나 공간적 문제 때문에 천불이나 만불을 조성한 경우는 없었다.
둔황의 천불동이나 화순 운주사는 드물게 천불이 조성된 곳인데 애초부터 그렇게 계획했던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 조성해 가다 보니 천불이 된 것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불교 미술사는 불상의 조성을 신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대승불교로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로 설명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불상 역시 단순한 숭배의 대상이라 이해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불상은 다른 종교인들이 비판하는 우상숭배와 다름이 없고 대승불교 비판자의 견해처럼 대승불교는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초기불교로부터의 이탈로 간주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대승 불교의 공(空) 사상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너무 안일한 결론이다.(219 페이지) 저자는 법신(法身)에 대한 호소는 정신에 대한 호소이므로 형상화에 대한 제한도 과감하게 떨쳐버릴 수 있지 않았을까? 란 말을 한다.(220 페이지)
저자는 우리 시대를 몸을 잊어버린 몸짓이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자아마저 타인의 눈에 비친 이미지로 해체된 시뮬라크르의 시대로 정의한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 시대는 이미지들만 남아 부유하는 시대이다.(232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