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damn Particle‘에서 ‘God Particle‘로 바뀐 것이 리언 레더먼(Leon Lederman)의 ‘신의 입자‘이다.

빌어먹을, 제기랄 등을 뜻하는 ‘Goddamn‘의 부정성을 우려한 출판사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이다.

레더먼은 중성미자(neutrino)를, 우리들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관측할 수 없으면 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겨우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레더먼은 뮤온 뉴트리노와 바닥 쿼크(bottom quark)를 발견한 물리학자이다.

레더먼은 언어의 마술사라 할 만하다.

대표작인 ‘신의 입자‘도 언어적 감수성이 빛난다.

‘시인을 위한 양자 물리학‘에서 레더먼은 ˝최선의 시는 존재하지 않고 위대한 시에 대한 해석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381 페이지)는 말을 했다.

레더먼은 양자 물리학을 시와 같은 반열에 두는 듯 하다.

레더먼은 양자 물리학에 대한 최선의 기술(記述)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덧붙여 최선의 기술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말한다.

로버트 프로스트, 에밀리 디킨슨, 에드가 앨런 포, 오스카 와일드, 윌리엄 셰익스피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의 시를 인용하며 양자 물리학을 친근하게 대하도록 애쓴 레더먼의 노고는 칭찬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시인을 위한 양자 물리학‘은 시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한 책이기보다 양자 물리학과 시의 연관성에 초점을 둔 책이다.

레더먼은 아이스킬로스에서부터 토머스 핀천에 이르기까지 축적해온 시와 문학을 총동원해도 모든 개인의 경험을 다 아우르지 못한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런 점을 거대한 원자 집단들의 행동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엄격한 물리학 체계가 20세기 벽두에 완전히 무너진 것에 견준다.(25 페이지)

학 음악학자가 과학적 사실에 가장 무지한 사람으로 시인을 들었다.

어떻든 그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시인을 위한 양자 물리학‘은 가장 시적인 양자 물리 교양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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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7월 이후 올 2월까지 ‘양재시민의 숲’역을 네 번 찾았다.

인근에 윤봉길의사 기념관이 있어 매헌(梅軒)역이라고도 불리는 이 역에서 내려 세 번 모두 3번 출구를 통해 밖으로 올라왔었다.

서울을 찾으면 강북 그 중에서도 종로 일대에 머물곤 하는 내게는 이례적인 일이다.

한 숲 해설사는 ‘양재시민의 숲‘역에 내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3번 출구로 나와 숲을 찾는다는 말을 한다.

이 분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출구는 8번 출구이다. 이 출구를 통해 찾는 숲이야말로 양재동의 진짜 멋진 숲이라는 것이다.

물론 내가 3번 출구를 이용한 것은 모두 어떤 출판사에 가기 위해서였다.

어떻든 나는 (출판사 송년회를 위해 한 번 모인 것을 제외한) 출판사를 찾은 세 번 모두 택배를 통해서든 직접이든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얻어가지고 왔었다.

그러니 ’양재시민의 숲’역에 대한 내 기억은 좋을 수 밖에 없다.

말했듯 ‘양재시민의 숲’ 역 인근에는 숲이 있지만 와인바와 이색 맛집들도 즐비하다고 한다. 서울의 이색지대라 할 만하다.

이곳 ‘양재시민의 숲‘ 역 8번 출구는 사람들로 넘치는 인근의 강남역과는 너무도 다르게 한가롭다.

당연히 양재시민의 숲 역시 한가롭다.

그리고 자생하는 나무들 가운데 고요한 명상을 생각하게 하는 나무가 있다.

메타세쿼이아의 사촌급에 해당하는 낙우송(落羽松)이다.

메타세쿼이아(metasequoia)는 세쿼이아 다음(meta)에 발견된 나무이다.

지난 해 12월 정독 도서관 독서진흥과에 들렀을 때 직원 두 분이 내게 명함을 요구했었다.

그 중 한 분이 자신이 사는 곳이 바로 ’양재시민의 숲‘역 인근의 서초구 강남대로라는 말씀을 하셨다.
서울 강남이 계획도시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지만 양재마을은 더디게 강남권에 편입되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택지로 조성됐지만1980년대 초만 해도 버스 2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였던 그곳에 양재 시민의 숲이 들어선 것은 1983년이었다.

그 이후 8차선 도로가 뚫려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땅값이 올랐지만 강남에서 그나마 집값이 낮아 20~30대 직장인이 많아 자고 나면 생기는 것이 커피점과 24시간 편의점이었다고 한다.

나도 처음 출판사에 전화를 해 길을 물었을 때 직원으로부터 출판사가 있는 곳이 준 5도씨 인근이라는 말을 들었다.

준 5도씨가 June 5 도(度) C(centigrade)라는 카페라는 사실을 안 것은 나중이었다.

현재 논현동 청호불교문화원의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의 대표이신 묘원(妙圓) 법사님을 모시고 명상을 하던 지난 2002년 우리가 모이던 곳이 양재동 강남 여성회관이었다.

당시 함께 명상에 참여하셨던 여(女) 원장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였다.

그 이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명상이라 했지만 숲길을 산책하는 것도 좌정(坐定) 못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와인바와 이색 맛집보다 먼저 찾아야 할 곳이 숲길이 아닌가 싶다.

궁(경복궁, 창덕궁)과 능(선정릉), 그리고 서점 외에 내가 찾을 서울의 새 명소로 만들고 싶다.

다음 주 수요일 만남 프로그램에 양재시민의 숲 모임을 넣는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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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대학 생활 - 경제적.정치적.심리적.성적인 측면, 특히 지적인 측면에서의 사유와 치유 방법들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스트라스부르대학교 총학생회 지음, 민유기 옮김 / 책세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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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비참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재정을 좌지우지하는 권력과 교육 관료들의 눈치를 보며 발전 방향이나 미래상을 설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학은 사회를 선도하는 가치관을 제시하지 못하고 취업 기관의 역할에 그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 한하는 일은 아닌 듯 하다.

 

1957년에 결성된 단체로 프랑스 68운동의 슬로건인 반권위주의와 반관료주의, 소외의 극복과 지겨움의 탈피, 놀이를 통한 억압적 사회질서의 전복, 자주관리와 노동자평의회 등의 슬로건과 일치하는 이념을 표방했던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그리고 스트라스부르대학교 총학생회가 함께 지은 '비참한 대학생활'은 대학생들이 처한 경제적, 정치적, 심리적, 성적, 지적 측면에서 비참함을 논하고 치유 방법들을 제시한 책이다.

 

이 책은 나온 지 반세기가 지났고 내용도 유럽과 미국 등의 것에 대한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마치 현재진행형의 사태로 들린다. 저자들은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외와 같은 길을 따라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유를 알아야만 비판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저자들은 갈수록 많은 청소년이 노골적 착취 관계 속으로 더욱 빠르게 진입하기 위해 도덕적 선입관과 가족의 권위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는 시대를 이야기한다.

 

저자들은 소외를 만족스럽게 소비하려는 불건전한 대학생의 성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들은 대학생을 스토아철학의 노예라 부른다. 저자들에 의하면 그들은 권위의 사슬들이 얽어맬수록 자유롭다고 믿는다. 스토아철학이란 세상의 일에 초연하며 순수하고 보편적인 사상의 체계에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철학이다. 사토리(さとり) 세대라는 말을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일본에서 기원한 사토리 세대는 미래가 절망적이라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 깨달음을 얻은 듯 행동하는 세대를 말한다.

 

저자들은 대학은 제도화된 무지의 기구로 전락했고 고급문화 자체는 몇몇 교수들이 지식을 대량생산하는 가운데 사라져간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일상생활에서 대학생이 겪는 실제적인 비참함은 문화상품이라는 중요한 아편에서 직접적이고 환상적인 보상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대학생들을 슈퍼마켓에서 셀로판지로 포장되어 판매되는 얼어붙은 예술시체의 가장 탐욕스러운 소비자로 규정한다.(38 페이지)

 

저자들은 대학생들이 갖는 잘못된 믿음 즉 허위의식 같은 생각을 집중 비판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루신이 폭로한 정신 승리법을 생각하게도 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대학생들은 순진하고 어리석고 진부하다. 예술시체의 소비자로 규정된 대학생들은 어느덧 신의 오만한 시체를 숭배하는 무리들로 규정된다.

 

저자들은 대학생은 사회 전체에 대항 저항을 통해서만 극단적 소외에 대한 저항에 나설 수 있지만 이런 비판은 결코 대학생의 영역에서는 제기될 수 없다고 말한다.(46 페이지) 저자들은 청춘은 저항하는 반면 어른들은 매우 체념적이라는 통념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프로보타리아란 말이 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합성어로 세기의 모든 얼간이들이 알맹이 없이 잘난 체하는 말이다.(55 페이지) 저자들은 승리한 패배가 존재하고 패배보다 더 수치스러운 승리도 존재한다는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의 말을 인용한다.(70 페이지)

 

저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첫 번째 위대한 패배인 파리코뮌을 실제로는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로, 프롤레타리아의 첫 번째 위대한 승리인 볼셰비키 혁명을 결국 가장 무거운 결과를 초래한 패배로 규정한다.

 

저자들은 볼셰비키 당이라는 잘 맞지 않는 대상에 적용하긴 했지만 게오르크 루카치가 정확하게 파악한 것처럼 혁명 조직은 이론과 실천 사이에서, 인간과 역사 사이에서, 노동자 대중과 계급으로 뭉친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필요한 중재자라 말한다.(79 페이지)

 

저자들은 상품 물신화는 총체적 해방과 삶의 자유로운 구성에 저해되는 본질적인 장애물이라 말한다.(83 페이지) 저자들에 의하면 상품 생산의 원칙은 자신의 창조자에게서 완전히 벗어나는 세계를 무질서하고 무의식적으로 창조하면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다.(84 페이지)

 

저자들은 급진적 비판과 소외된 현실이 부과한 모든 행동들과 가치들의 자유로운 재구성이 프롤레타리아의 최대 강령이고 삶의 모든 순간과 사건들의 구성 속에서 해방된 창조성이 승인할 수 있는 유일한 시, 모두에 의해 쓰인 시이며 혁명적 축제의 시작이라 말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오로지 축제일 뿐이다. 혁명들이 안내할 삶 자체가 축제의 신호 아래에서 창조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놀이는 이런 축제의 궁극적 목적이며 승인할 수 없는 유일한 규칙들을 무의미한 시간 없이 살아가기 그리고 제한 없이 향유하기이다.(8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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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사람의 감정을 크게 기쁨과 슬픔으로 나누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기쁨은 좋고 슬픔은 나쁜 것인가?

스피노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사랑과 증오를 예로 들어 기쁨과 슬픔을 설명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사랑의 기쁨은 작은 완전성에서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감점이다.

반면 증오의 슬픔은 큰 완전성에서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감정이다.

물론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을 모두 능동적인 것 즉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것 즉 비주체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정념(情念)이라 정의했다.

중요한 것은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 양이 이전보다 많아졌는가 적어졌는가, 이다.

그래서 즐거움 속에도 슬픔이 숨어 있고 슬픔 속에도 기쁨이 숨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김수우 시인의 시집 ‘몰락경전’에 실린 시들을 읽다가 두 가지 점을 발견했다.

유명 시인인 저자에게도 시 쓰기란 쉬운 일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슬픔에 예민하다는 사실이다.

“...시의 턱뼈를 잃었다 자꾸 시가 우그러진다 자꾸 뭉그러/ 진다 문법의 발톱도 은유의 꼬리도 썩은 동아줄이 된다 바/ 닥으로 가라앉는다...”(‘다시, 訥’ 중에서),

“...흩어진 자음과 모음의 흰 알갱이들은 천정으로 스며들고/ 그물에 걸린 가시복어처럼/ 새벽안개에 끌려나온 몇 낯 국어들이 떨떠름해 한다...차라리 존엄해라 당당해라/ 결코 문장이 되지 않는 고통이여...”(‘사라진 詩’ 중에서)

시인은 “..난독증 환자가 되기에도/ 아홉 개 전생을 기억하는 고양이가 되기에도/ 우리는 아직, 슬픔이 부족하다..”고 말한다.(‘슬픔이 부족하다’ 중에서)

‘단풍든다는 것은’에서 시인은 “..물든다는 건 모든 삐걱이는 슬픔에게 저벅저벅 돌아가/ 는 일..”이라 말한다.

‘천수천안’에 표현된 “..슬픔의 늑골 사이로 천천히 발효되는 산제사..”란 구절이 눈에 띈다.

슬픔을 보는 힘으로 천천히 시를 발효시키는 시인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구절이다.

그리고 “.. 저, 부지런한 슬픔들..”이란 표현(‘부러진 날개’ 중에서), “..매일 빨아 입는 슬픔도, 자주 빨아 입지 못하는 절망..”이란 표현(‘빨래’ 중에서),

슬픔이란 말은 없지만 “.. 밥그릇 안에서 굴절되는 영혼처럼 눈물은 봄비로 굴절/ 되었다..”는 ‘굴절의 전통’과 “..나무는 무수한 몰락으로 자란다..”는 ‘몰락을 읽다’까지..

그리고 “..진리와 동떨어진 슬픔, 그 틈/ 슬픔과 동떨어진 진리, 그 틈..”(‘나팔꽃, 떠내려가다’)까지..

나무가 무수한 몰락으로 자라듯 시인은 슬픔으로 시를 쓰고 “부족한 슬픔”을 염려하고 슬픔이 진리와, 진리가 슬픔과 동떨어지는 것을 우려하는 것 같다.

슬픔들... 힘이 되는 슬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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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 아름다운 삶을 위한 철학의 기술
빌헬름 슈미트 지음, 장영태 옮김 / 책세상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독일 철학자 빌헬름 슈미트의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 - 1967)의 회화작품을 근거로 삼아 철학으로의 소풍을 시도한 책이다.

호퍼는 미국 출신의 화가로 사실주의 작품을 많이 그렸다. '철학으로의 소풍(Excursion into philosophy)'이란 그림이 있다.

저자에 의하면 아름다운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관성의 법칙에 따라 단순히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실존에 개입하고 실존을 의식적 수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철학으로의 소풍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림질로 빳빳하게 줄을 세운 바지를 입은 한 남자가 이마에 깊이 주름살이 팬 얼굴과 긴장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심사숙고하고 있고 등 뒤 침대 겸용 소파에는 반라의 여인이 등을 보이고 누워 있는 그림이 '철학으로의 소풍'이다.

그림의 남자가 취한 자세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와 비슷하다.

저자가 말했듯 플라톤은 개인이 결코 실망하지 않을 참된 아름다움이라는 이념을 지향하려면 관능적 쾌락을 직접 경험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19 페이지)

저자는 소외에 대해 새삼스럽게 언급하는 것은 신과의 보편적 소통과 연결을 추구하는 시대의 뼈저린 아픔이라 말한다.(25 페이지)

철학으로의 소풍은 정확히 실존이 문제가 되는 순간에 일어난다.(27 페이지)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을 보고 철학적 사색을 펼친 '철학으로의 소풍'은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의 한 챕터이다.

이 책에는 저자의 농밀한 사유의 향연이 발휘되는 글들이 빼곡하다. 가령 '쾌락 누리기'란 챕터를 보자.

이 챕터에서 저자는 염려와 쾌락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며 염려 자체는 쾌락의 완전한 향유를 추구한다는 주장을 편다.

쾌락을 이야기한 저자는 고통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저자에 의하면 고통의 일시적 자극이 없으면 삶에는 쾌락은커녕 활기조차 없다.(82 페이지)

이 챕터에 다시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에 의하면 두 명의 개별자는 각자 자신의 고통에 골몰한다.(93 페이지)

저자는 근본적으로 고통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파괴적인 방식과 생산적인 방식이 그것이다.

이 두 작용 방식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저자는 우리는 근대가 고통을 추방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조차 망각했다는 이야기를, 다시 말해 죽음이 근대적 삶으로부터 제외되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말한다.(99 페이지)

저자는 한계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죽음과 친밀해지는 무엇보다 삶을 위해 자유로워지고 죽음을 가볍게 해주는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105 페이지)

저자의 글은 일상적인 것들 가령 시간 사용하기, 부정적으로 사고하기,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등에 대한 방법을 알리는 글들이다.

그러면서도 철학자들의 사유를 곁들인 글들이기에 품격이 있다. 격정을 다루는 분노의 기술은 또 어떤가. 이것 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칸트는 걱정과 열정을 구분한다. 격정은 순식간에 분출하여 주체가 한 순간 완전히 당황하게 된다. 열정은 지속적이어서 주체의 태도의 구성요소가 될 수 있다.(145 페이지)

저자는 분노를 얕잡거나 무시하는 것 모두 실수라 말한다.(154 페이지) 내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주제는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마음의 평정이다.

파토스를 떨쳐버리지 못한 채 새로운 시대의 지배적 가치평가 및 건너편에서의 당당한 마음의 평정에 대해 강력한 지지 의사를 표하고 마음의 평정의 요소로서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주장한 사람은 니체이다.(202 페이지)

하이데거는 자연스럽게 극동의 성현의 가르침에 눈에 띌 정도로 접근해 좌선 같은 것에서 마음의 평정을 얻는 방법을 찾 기도 했다.(203 페이지)

저자는 마음의 평정은 삶의 기술 철학이 기초 닦기를 촉진하는 새로운 삶의 테크닉에 기여한다고 말한다.(206 페이지)

저자는 뜻 밖에 행복에 대한 질문은 인간들을 안절부절 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267 페이지) 저자는 아름다움에 이끌리지 않는 삶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묻는다.(284 페이지)

저자는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현존재는 심미적인 즉 긍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현상으로서만 정당하다는 것이다.(29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긍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은 참된 삶이다.(295 페이지) 내가 저자에게서 읽은 바는 아름다움에 대한 긍정, 고통을 배제하지 않는 적극적 삶의 자세이다. 열정적 태도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저자의 치밀한 사유를 따라가려면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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