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균의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를 읽었다.

쉬운 설명으로 역사와 지리(地理)의 차이를 알게 해주는 주목할 책이다.

역사가 공허하기도 한 것은 계속 상상으로만 이야기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반면 지리에 주목해 답사(踏査)길에 나서는 것은 현장감을 갖기 어려운 문헌 자료 중심의 공부와 달리 장소감을 가질 수 있는 공간 중심의 공부가 되기에 바람직하다는 설명도 있다.

지난 1월 정조(正祖)를 주제로 한 해설 시연을 한 것을 계기로 정조의 능인 화성의 건릉(健陵)에 가려 했었는데 너무 멀다는 생각에 정조와 관련이 깊은 창덕궁 후원을 찾고 말았었다.

서울 이북의 경기도 그 중에서도 최북단인 연천에 사는 나에게 서울 남쪽의 경기도의 시들은 그렇게 낯설다.

이런 가운데 최근 정조(正祖)와 관련된 세 도시에 주목하게 되었다.

세 도시란 수원(水原), 화성(華城), 과천(果川)을 말한다.

수원 화성은 화봉삼축(華封三祝)의 고사에서 영감을 얻은 정조의 의사가 반영된 이름을 가진 성(城)이고, 수원과 이웃한 화성(華城)은 수원과 뿌리가 같은 도시이다.

중국 화(華)나라의 국경을 지키는 사람인 봉인(封人)이 요(堯) 임금에게 장수와 부귀, 다자녀 등의 세 가지를 축원한 것을 의미하는 화봉삼축(華封三祝)의 고사에 주목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隆陵)이 자리한 화산(花山)의 화(花)와 화봉삼축(華封三祝)의 화(華)가 의미면에서 같다고 보았다.

화성은 매홀군(買忽郡), 수성군(水城郡), 수주(水州) 등으로 이름이 바뀌어 불리다가 고려 원종때인 1271년 수원으로 개칭되었다.

1931년 수원면에서 수원읍이 되었고 1949년 수원시가 되었을 때 군의 나머지 지역이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 화성군으로 개편되었을 때 수원읍이 시로 승격되어 화성군에서 분리된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과천에서 정조와 관련된 곳이 남태령이다.

관악산과 우면산이 만나는 낮은 목을 넘어가는 남태령은 서울과 과천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이다.
원래 이름은 여우고개였으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행(陵幸) 중 잠시 쉬며 고개 이름을 묻자 마중 나온 과천현의 이방이 이름이 속되다고 판단해 한양에서 남행(南行)할 때 나오는 첫번째 고개라는 의미로 남태령(南泰嶺)이라 아뢴 이래 남태령이라 불리게 되었다.

온온사(穏穏舍)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 세자의 능행 중에 남태령을 넘어가서 묵었던 객사이다.

온온사가 오늘의 이름을 얻게 된 것에도 정조와 관계된 사연이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행 중 과천 객사에 묵으면서 경치가 좋고 쉬어가기 편하다는 이유로 서헌에 온온사란 이름을, 객사 동헌에 옛 과천의 별호인 부림헌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했다.

그 후 온온사는 완전히 허물어졌었다.

지금의 온온사는 보고 따라 지을 모델이 없자 전남 승주 낙안읍성의 낙안 객사를 본떠 복원한 건물이다.

지하철 4호선 사당역 사거리에서 과천, 평촌, 안양으로 가는 버스는 모두 남태령을 넘어간다.

남태령을 넘어가는 도로 옆으로 난 오솔길인 남태령 옛길을 걸어보자.

봄이 아닌가..

빼어난 주변 풍경을 가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둘러보며 산책도 하는 역사지리 탐방길.....

소요산 전철역에서 남태령역까지 1시간 50분 정도가 걸린다. 소요산에서 종로 3가까지보다 왕복 한 시간 정도를 더 쓰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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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이다. 4월 교향악 축제 소식에 기대를 건다.
연주곡을 기준으로 보면 다음의 프로그램들이 흥미를 부른다.

4월 5일 수원시립교향악단(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말러 교향곡 7번 ‘밤의 노래‘),

4월 6일 대전시립교향악단(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4월 8일 KBS 교향악단(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교향곡 4번),

4월 14일 원주시립교향악단(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말러 교향곡 1번 ‘거인‘),

4월 15일 토요일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드보르작 첼로협주곡, 브람스 교향곡 4번),

4월 16일 홍콩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바르톡 바이올린 협주곡, 브람스 교향곡 1번),

4월 20일 서울시립 교향악단(윤이상 서곡; 국내 초연, 드보르작 바이올린 협주곡,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4월 21일 제주 특별자치 도립 제주교향악단(최정훈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위한 ‘다랑쉬‘ 레드 아일랜드 2(2017); 세계초연, 쿠세비츠키 더블 베이스 협주곡, 말러 교향곡 1번‘거인‘),

4월 22일 공주시 충남교향악단(라벨 라 발스, 브람스 더블 콘체르토,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등이다.

일부 곡들이 중복 편성되었지만 비교하며 들을 수 있는 기회이다.

‘다랑쉬‘란 곡이 특별히 관심을 끈다. 제주도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 오름을 작품화한 곡으로 보인다.

절경(絶景)과 제주 4.3 사태의 학살이라는 아픈 기억과 두루 관련된 곡이 아닐지?

추정이 맞다면 역사적 아픔을 더 뚜렷하게 드러내는 절경에 주목한 곡이라 할 수 있다.

어서 4월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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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없다면 동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며칠 사이에 두 번이나 했다.

한 번은 내게 동무가 되어달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고, 한 번은 동무가 있음을 안도함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물론 니체의 저 의미심장한 말을 며칠 사이에 두 번이나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동무라는 말은 김영민 교수 특유의 어법이다.

그런데 니체의 저 말이 인용된 ‘보행’에는 원문도 출처도 명기되지 않았다. 궁금하다. 출처보다 원문이 더.

절실한 당위의 차원에서 한 앞의 말과 달리 동무가 있음을 안도했다는 뒤의 말은 우리 문화해설사 동기들의 톡방에서 한 말이다.

그렇게 앞의 말은 개인에게 한 말이었고 뒤의 말은 무리에게 한 말이었으니 의미와 무게감이 크게 다르다.

요 며칠 우울이 深했다.

그런데 넘치는 유머 감각을 知性으로 다스려 유쾌하게 표현들을 해준 동기들 덕에 오랜만에 웃었다.

적어도 오늘 같아서는 읽을 때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서민적 글쓰기’ 같은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웃음은 대체로 가벼운 재미와 관련된다. 그런데 웃음은 한때 죄악으로 여겨졌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웃음은 죄악이다. 인간이 웃음을 알게 되면 두려움을 잃어버린다. 두려움을 잃게 되면 더 이상 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서양 중세의 경직성보다 웃음의 크나큰 위력에 더 생각이 머문다.

내가 오랜만에 웃음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동기들의 유머 하나 하나가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란 말이 있듯 비극은 관객을 끌어들여 가슴으로 느끼는 무엇인가를 만나게 하는 반면 웃음은 대상을 가볍게 보게 한다.
그간 내가 심각했던 것은, 그리고 웃지 않았던 것은 현실로부터 몇 걸음 물러나 외부의 시선으로 사태를 객관화해 대하는 능력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니체는 삶이란 고난을 겪는 것이고, 살아남는 것은 고난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란 말을 했다.

심오한 말이다. 그리고 그 만큼 무거운 말이다. 웃음과 거리가 멀다.

이처럼 무게 있는 말을 듣고 웃는 사람은 없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 아닐지?

웃음 짓게 하는 것을 보고 웃는 것은 쉽다.

하지만 슬픔이나 괴로움을 승화시켜 웃음 지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여기서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슬픔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한 페친 작가의 말을 음미해본다.

웃음 지을 수 있는 하루 하루를 고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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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stay in an unhealthy relationship because you think it‘s will get better eventually. Know your worth and move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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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彈劾) 축하의 의미가 있는 광화문 집회 현장 사진을 보고 40여년 전 책(원서)인 장 뒤비뇨의 ‘축제와 문명’을 들춰본다.

“정말 축제“라는 말에 영감을 받아서인데 유의할 것이 있다.

뒤비뇨의 논지는 축제는 다시 태어나야 할 죽음과 삶, 그리고 꿈 사이의 대화라는 것이고, 흥분이 아닌 전복(顚覆)이며 문화의 표상이 아닌 문화의 파괴라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광화문 주말 집회는 촛불 승리를 자축하는 성숙하고 건강한 모임이다.

뒤비뇨는 축제 속에서 파괴적인 긴장을 발견할 수 있음을 언급한다.

뒤비뇨는 사람들이 놀이와 축제를 혼동한다고 말하며 그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놀이는 규칙의 수용을 이야기하며 과격한 근육행위에 기호를 부여하고 자연적인 행위로부터 분리되어 스펙터클로 통합되는 것이고 축제는 규칙을 위반하는 것을 넘어 파괴하기까지 한다고.
뒤비뇨가 이야기하는 주요 사건 가운데 1968년 5월이 있다.

뒤비뇨에 의하면 1968년 5월은 언어적 탄압을 고발하였고, 언어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뒤비뇨는 축제는 차이점들을 없애버리려는 욕구를 갖는다고 즉 단일성을 파괴한다고 말한다.

68 운동은 1960년대 지구촌 곳곳에서 펼쳐진 청년들의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의 정점이다.(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총학생회 지음 ‘비참한 대학 생활’ 93 페이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된 삶을 극복하기 위해 축제와 같은 저항을 촉구한 조직으로 ‘스펙터클의 사회’의 저자인 기 드보르가 주도했다.

상황주의자들은 상품 논리를 극복하지 못한 이전 전위 예술 운동을 비판하며 대안으로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무는 예술의 초월을 실현하고자 했다.(‘비참한 대학 생활’ 106 페이지)

경계를 허무는 이 같은 방식은 구축된 상황을 창출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파괴적 긴장이 있는 축제를 말하는 뒤비뇨의 논의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드보르가 말한 스펙터클은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이자 상품이 인간의 사회적 삶을 총체적으로 점령하게 된 계기를 말한다.

사실 저항이든 운동이든 집회든 잘못된 가치 더 나아가 적폐(積弊: 오랫동안 쌓여 온 폐단弊端)를 깨부수려는 목표를 가지는 것이 아닌지?

우석훈은 푸코나 데리다 등이 쓴 책도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책은 현실과 부딪히고 싸워 이긴 사람들의 책이 아닐까?란 말을 한다.(‘나와 너의 사회과학’ 92 페이지)

그가 예로 든 책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레베카 솔닛의 ‘어둠 속의 희망’이다. 원제도 ‘Hope in the Dark’이다.

싸움이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이번 촛불 집회에 한 번도 참가하지 못한 채 기회를 다 보내고 말아 부끄러운 마음 그지 없다.

일정을 조정해 참가할 수도 있었지만 늘 그렇듯 심야 교통편과 관련한 귀환 걱정에 마음으로만 응원하는 데 그쳤다.

강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참여해 오늘의 승리를 이끌어낸 분들에게 감사함과 미안함을 함께 전한다.

촛불 집회를 할 일이 없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다음 기회에 필요해 열린다면 기꺼이 참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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