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없다면 동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며칠 사이에 두 번이나 했다.

한 번은 내게 동무가 되어달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고, 한 번은 동무가 있음을 안도함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물론 니체의 저 의미심장한 말을 며칠 사이에 두 번이나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동무라는 말은 김영민 교수 특유의 어법이다.

그런데 니체의 저 말이 인용된 ‘보행’에는 원문도 출처도 명기되지 않았다. 궁금하다. 출처보다 원문이 더.

절실한 당위의 차원에서 한 앞의 말과 달리 동무가 있음을 안도했다는 뒤의 말은 우리 문화해설사 동기들의 톡방에서 한 말이다.

그렇게 앞의 말은 개인에게 한 말이었고 뒤의 말은 무리에게 한 말이었으니 의미와 무게감이 크게 다르다.

요 며칠 우울이 深했다.

그런데 넘치는 유머 감각을 知性으로 다스려 유쾌하게 표현들을 해준 동기들 덕에 오랜만에 웃었다.

적어도 오늘 같아서는 읽을 때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서민적 글쓰기’ 같은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웃음은 대체로 가벼운 재미와 관련된다. 그런데 웃음은 한때 죄악으로 여겨졌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웃음은 죄악이다. 인간이 웃음을 알게 되면 두려움을 잃어버린다. 두려움을 잃게 되면 더 이상 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서양 중세의 경직성보다 웃음의 크나큰 위력에 더 생각이 머문다.

내가 오랜만에 웃음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동기들의 유머 하나 하나가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란 말이 있듯 비극은 관객을 끌어들여 가슴으로 느끼는 무엇인가를 만나게 하는 반면 웃음은 대상을 가볍게 보게 한다.
그간 내가 심각했던 것은, 그리고 웃지 않았던 것은 현실로부터 몇 걸음 물러나 외부의 시선으로 사태를 객관화해 대하는 능력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니체는 삶이란 고난을 겪는 것이고, 살아남는 것은 고난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란 말을 했다.

심오한 말이다. 그리고 그 만큼 무거운 말이다. 웃음과 거리가 멀다.

이처럼 무게 있는 말을 듣고 웃는 사람은 없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 아닐지?

웃음 짓게 하는 것을 보고 웃는 것은 쉽다.

하지만 슬픔이나 괴로움을 승화시켜 웃음 지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여기서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슬픔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한 페친 작가의 말을 음미해본다.

웃음 지을 수 있는 하루 하루를 고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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