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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와 조선 - 이상국가 주나라를 꿈꾼 조선의 혁명
장인용 지음 / 창해 / 2016년 11월
평점 :
주(周)나라, 하면 주역(周易)을 생각하는 것이 정해진 코스인 듯 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문화해설을 공부하며 알게 된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 등의 도시 건설 원리가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근원을 두고 있다. ‘주례(周禮)’는 주(周) 왕실의 관직 제도와 전국 시대(戰國時代) 각 국의 제도를 기록한 책이다.
사실 주나라는 우리와 꽤 밀접한 연관을 갖는 나라이다. 우리와 주나라는 노(魯)나라의 공자(孔子)와 남송(南宋)의 주자(周子)로 인해 연결되었다. 장인용의 ‘주나라와 조선’을 통해 우리는 주나라의 종법(宗法)제도(制度)를 편의대로 받아들인 조선이 자초한 갖가지 폐해를 알게 된다. 종법 제도란 장자를 우선시하는 제도이다. 공자가 받아들여야 할 이상(理想)으로 생각한 나라가 주나라이다.
저자는 우리가 유학과 성리학에서 전범(典範)으로 내세우는 이상향으로서의 주나라에 대해 어렴풋이 알 뿐 역사적 실체로서의 주나라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한다.(24, 25 페이지) 특기할 것은 하(夏), 은상(殷商), 주(周)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고 또 다른 나라가 그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존한 것이다.(29 페이지)
춘추시대의 공자가 다시 돌아가자고 한 주나라의 기초를 만들고 대표하는 인물이 문왕(文王)이다. 공자가 편찬했다는 ‘시경(詩經)’에는 문왕을 칭송하는 시들이 한 부분을 차지한다. 문왕은 은상(殷商)을 쳤는데 이는 주나라가 자신들보다 10배 이상인 세력을 가진 큰 나라를 치는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 문왕(文王)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은나라를 친 후 은상의 조상을 모시는 묘당(廟堂)에 가서 제사를 올렸다. 무왕은 은상의 조상들에게 주왕(紂王)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고 자신은 폭군 주왕(紂王)을 벌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무력을 동원했다고 밝혔다.(50 페이지) 어찌어찌 해서 주왕의 군사를 이기기는 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아직 은상 사람들 전체를 대적하기에 중과부적인 주와 무왕이 취한 절묘한 방편이었다.
주나라는 중원의 서쪽에 자리 잡은 나라였다. 동쪽의 은상에게 억눌린 채 설움을 겪고 신하의 예를 다하는 종속된 처지였다가 은상을 극복하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했지만 삼감과 주왕의 아들 무경의 반란에 맞닥뜨렸고 동이족들에 시달렸다. 동이족은 고구려를 떠올리겠지만 굉장히 다양한 부족들의 통칭이다. 주나라가 은상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은 동이족들이 은상 주왕의 힘을 뺀 덕분이라 할 수 있다.(96, 97 페이지)
주나라 혼자 드넓고 이민족들이 무수한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취한 특단의 조치는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은상의 유민들을 안정시키고 그들에게 다시 자치권을 주어 제후국(諸侯國)으로 주나라 질서 안에 편입시키는 것(98 페이지)이고 다른 하나는 주나라가 동쪽으로 이사가는 것이다.(100 페이지)
주나라는 서쪽에서 중원(中原)만을 바라볼 때는 중원을 전부로 알았지만 막상 들어서자 사방에 위협적인 많은 민족이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 중원의 안정화를 위해 주나라가 견지한 정책은 봉건(封建)과 종법(宗法)이었다.(101 페이지)
종법의 종(宗)은 상에 위패를 놓고 제사 지내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이다.(102 페이지)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자 통치권의 상징이었다. 은상 사람들은 낙읍의 동쪽에 거주했기에 그들의 묘당은 동쪽에 있었고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에 살았기에 후직을 비롯한 주나라의 묘당은 서쪽에 있었다. 이것이 예법으로 전해져 지금의 서울에도 왕궁의 동쪽에 종묘가, 서쪽에 사직단이 있는 것이다.(105 페이지)
주나라가 은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종법이 주나라 특유의 장자 상속과 결합하고 다시 이것이 봉건과 결합하여 주나라 특유의 정치체계와 예법이 만들어졌다.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이민족들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종법과 봉건을 합친 주나라 고유의 통치제도가 탄생한 것이다.(106 페이지)
은(殷)나라는 좌묘우궁(左廟右宮)이었다.(248 페이지) 궁 하나와 묘 하나(궁 옆에 묘)인 것이었다. 주나라는 좌묘우사였다.(249 페이지) 주나라는 궁궐의 동쪽에 은상의 조상을 모시는 묘당을 짓고 서쪽에는 자신의 조상을 모시는 묘당을 따로 지어 두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이어갔다.(51 페이지) (우리가 보기에) 경복궁 왼쪽에 사직단, 오른쪽에 종묘가 있는 조선의 궁(宮)과 묘(廟)의 배치는 주나라의 궁여지책 또는 방편을 따른 것이다.
중요하고 흥미로운 말은 천명(天命)이란 말이다. 주의 무왕은 은상의 조상들을 향해 제사를 올리며 주왕(紂王)을 친 것은 천명(天命)이라 읍소했다.(55 페이지) 왕이 된 것이 천명인지에 대해 반신반의했던 태조의 머리에 천명 사상을 심어주고 세상을 바꾸고자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도전이다.(60 페이지)
정도전은 유학자이자 상리학자로서 당시 손에 꼽을 정도로 학식이 깊은 사람이었다.(67 페이지)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맹자’와 ‘주례’이다. ‘맹자’는 그의 천명 사상을 공고히 해주었고 ‘주례’를 통해서는 천명을 실천하기 위해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기본 설계도를 배웠다. 맹자는 천(天) 개념에 민(民)을 더했다.
이성계가 정권을 접수하고 정도전이 처음 받은 관직은 밀직부사(密直副使)였다. 왕의 비서실장 격이었다. 이 자리에서 정도전이 처음으로 획책(劃策)한 일은 전제개혁(田制改革)이었다. 이로 인해 정도전은 모든 기득권층과 반목하는 사이가 되었다.(75 페이지) 구세력의 반격으로 정도전은 삭탈관직당하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정몽주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반대했다.
정도전은 단순한 개혁자나 유학자가 아니라 이 땅에 주나라와 같은 이상적인 국가를 세우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도덕성이 높은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고 대신 유학으로 철저히 무장한 사대부들이 유교의 전범적인 국가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82 페이지) 정도전에게 혁명은 궁극의 목표를 위한 방편이었다.(83 페이지)
정도전은 왕위 계승에 대해 장자가 계승하되 장자가 어질지 못하면 동생이라도 상관 없다는 원칙을 가졌었다.(83 페이지) 정도전을 죽음에 빠뜨린 것은 장자 혹은 연장자 계승이라는 종법제도였다.
우리가 지금은 종가(宗家)니 종손이니 장남이니 제사니 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 이것이 마치 수천년을 이어온 전통이라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는 서주의 제도가 유가들에 의해 규격화되는 과정을 거친 뒤 다시 사대부들에 의해 강제로 이식된, 우리에게는 너무도 낯선 문화였다.(115 페이지)
세종은 선대에서 무시되었던 종법적 질서를 자신부터 정상으로 되돌려놓으려 했다. 재기발랄한 수양대군보다 문약한 장남 향(후에 문종이 됨)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사실 그의 마음 속에서는 향보다 씩씩하고 능력 있는 수양이 더 좋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종은 주나라를 흠모한 유가의 성군답게 장자인 문종에게 왕위를 잇게 했다. 그러나 병약한 문종이 오래 살지 못했고 어린 장남 단종이 왕이 됨으로써 숙부 수양이 섭정하는 구실이 마련되었다.
단종에게서 왕위를 뺏은 세조는 단종 복위를 꿈꾸던 도전세력을 눌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커다란 전란을 거친 뒤 조선은 왕권보다 은근히 사대부들의 실권이 좀 더 센 유교사회로 변한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세우거나 광해군을 내치고 인조를 옹립한 것은 모두 사대부들이 중심이 된 반란이었다. 태종과 세조처럼 왕족에 의한 반란이 아닌 것이다.(141 페이지)
'주자가례' 자체가 임금과 같은 일가가 아닌 사대부들의 조상 받드는 법이었기에 존존의 의미는 퇴색하고 친친의 의미만 강조될 수 밖에 없긴 했지만 반정 그리고 전란(왕과 국가가 자신과 집안을 언제나 온전하게 지켜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을 겪으면서 오직 가문의 친친만이 남게 되었다.(142 페이지)
이로써 당파 싸움이 극심해지게 되었고(143 페이지) 가부장적 사회가 되었다.(147 페이지) 문중의 대종이 되는 집안에는 가묘(家廟)가 필수가 되었다. 종가에 가묘가 설치되었다는 것은 문중의 대를 이은 대종에게만 제사권이 있다는 이야기이다.(146 페이지)
공자가 주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본 것은 이 나라에 이성적인 예악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란 말은 질서와 법률이라는 의미이다.(167 페이지) 어떤 문명, 어떤 나라에서도 예절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그러나 주나라처럼 예와 악을 하나로 만든 곳은 없다.(171 페이지)
정도전이 꿈꾸었던, 주나라와 같은 이상적 국가 조선은 한낱 꿈으로 끝날 듯 보였다. 이방원은 신흥 사대부들과 협력했지만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왕권이 살아있는 주나라이면서 그 왕권은 자기 혈족으로 이어지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주나라에 대한 꿈은 이방원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세종을 통해 더욱 공고하게 다져진다.(187 페이지)
저자는 정도전, 세종, 세조가 꿈꾸었던 주나라의 현현(顯現)으로서의 조선은 결코 중국에 대한 사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말한다. 주나라의 이상을 따르고자 했지만 이는 조선의 천명이고 조선 방식대로 종법과 예악을 이 땅에 실천한 것이라는 의미이다.(206 페이지)
'주례' '고공기'가 묘사하는 도성 건축의 원칙이나 '주례'와 '맹자'가 이야기하는 정전제가 주나라에서 실제로 실행된 것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한참 후대에 주나라를 신성시하던 유가들의 기록이다.(230 페이지) 지금이야 '주례'나 전국시대나 서한 시기의 저작물로 보지만 정도전은 이것이 주대(周代)의 저작임을 의심치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고공기'도 주나라 때의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247 페이지)
고려 말에 혁명을 꿈꾸었던 성리학자들은 조선 중기 이후 예만 따지던 유학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리학의 표상인 예가 아니라 실질적인 경제정의였다.(246 페이지)
한양은 유학자가 설계한 계획도시이자 유교적 이념을 집약한 도읍이다.(251 페이지) 참 인상적인 말이다. 건축가 임석재 교수가 경복궁을 설명한 것 만큼 인상적이다. 임석재 교수는 '예로 지은 경복궁'에서 경복궁을 '주례(周禮)', '논어', '맹자', '순자', '춘추좌전', '국어', '시경', '서경', '주역', '관자', '한비자', '문심조룡' 등 동아시아의 거의 모든 고전이 총망라되어 반영된 궁궐로 보았다.
임석재 교수는 경복궁을 다섯 가지 의미로 정의한다. 1) 조선의 통치 이상을 실어낸 건국 선언문이자 소통의 통로, 2) 동아시아 궁궐 건축의 흐름 속에서 예(禮)로 지은 궁궐이자 예절 교과서, 3) 국가의 운영 방향과 통치 이상을 건축으로 담아낸 건국 기획안이자 사상서, 4) 주례(周禮)의 궁궐 지침을 모범으로 삼되 수반되는 논쟁거리를 잘 피해 오묘한 변화의 모양을 담아낸 창의적인 예술작품이자 건축 명작, 5) 조선의 헌법이자 정치학 교과서이자 하나의 작은 이상 국가...
흥미로운 것은 태종 이방원이 절대로 비유교적인 왕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불교와 도참에 빠진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비교할 수조차 없는 순수한 유학자이다.(253 페이지)
유가가 역사에 있어서 그 이념으로 실제 혁명에 성공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유교 국가인 송나라에서 왕안석의 신법조차 실패했다. 그 만큼 보수기득권의 반혁명 공작이 치열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오로지 단 한 번의 성공사례가 태동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정도전과 이성계의 조선 건국이다 .(267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