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 세계문화유산 종묘에 숨겨진 역사의 재발견
이상주 지음, 이규대 사진 / 다음생각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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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국가 사당인 종묘의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 나로서는 종묘를 일반인들을 배제한 채 몇몇 동행들과만 보겠다고 해 문화재청의 허가를 얻어낸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구겐하임 빌바오를 설계한...), 우리의 목조 건물들 중 가장 긴 101미터(정전)의 위용 등에 초점을 두었는데 이상주는 조선의 화재대책은 종묘의 화재대책이라는 말로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를 시작해 신선함을 준다. 한양 도성에 불이 나면 가장 먼저 진화해야 하는 곳이 종묘인 것이다.

 

저자가 말했듯 종묘는 아직 문헌적으로 보강되고 이론적으로 설득력을 키워야 하는 곳이다. 흥미로운 것은 다음의 의문들이다. 초헌관인 임금은 신()이 된 조상들에게 값싼 예제(단술)를 올리는데 신하인 영의정은 비싼 청주를 바치는가, 생전에 진수성찬, 산해진미를 드셨을 신()이 된 임금께 왜 생고기를 올리는가..

 

제사(祭祀)란 교제한다는 의미의 , 같다()는 의미의 가 합쳐진 말로 사람과 귀신의 교제를 의미한다.(20 페이지) 종묘는 최고지존인 왕조차 최고가 아닌 구역, 신을 위한 공간이다. 왕은 선왕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함은 물론 스스로도 걸을 수 없는 길이 있다. 신이 걷는 길인 중앙의 신향로(神香路)가 그것이다.

 

신향로의 오른쪽 길은 어로(御路), 왼쪽 길은 세자로(世子路)이다. 경복궁에도 세 길이 있는데 중앙의 길은 어로, 좌우는 문무관의 길이다.(24 페이지) 종묘는 정치적 역학관계가 반영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27 명의 임금 중 2(연산군, 광해군)이 종묘에 모셔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모두 35명의 임금이 모셔졌는데 그것은 추존왕이 있기 때문이다.

 

공덕에 따라 정전에 계속 모셔지는 임금도 있고 별묘인 영녕전으로 옮겨진 임금도 있다. 단종, 현덕왕후, 단경왕후 등은 사후 수백년이 지나서 부묘되었다. 종묘에 모셔진 신주(神主)4대가 되면 영녕전으로 옮기는데 특히 공덕이 많은 임금은 영원히 옮기지 않는다. 태조, 태종, 세종 등의 임금이다. 그렇게 공덕이 특히 많은 임금들이 계속 머무는 곳을 세실(世室)이라 한다.

 

그런데 4대가 되기 전에 영원히 모시는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선언된 임금이 있다. 효종과 영조이다. 영조는 정쟁과 판단착오로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다. 영조는 손자(정조), 일찍 죽은 큰아들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아 종통을 잇게 했다. 영조를 불천지위로 결정한 임금은 정조이다. 정조는 영조를 불천지위로 선언하는 교문(敎文)을 반포했다.

 

임금과 세자는 권력 관계로 엮인 사이이다. 임금과 세자는 항상 같이 움직여야 했다. 세자는 항상 임금의 가시권에 있어야 했다. 사적으로는 부자관계이지만 임금과, 임금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인 사이이기에 은근한 긴장이 있었다. 임금은 세자를 가까이 두어야 안심했다. 임금이 친향례(임금이 직접 참여하여 제사지내는 것)를 하지 못할 경우 세자에게 제사를 모시게 하는 것은 권력의 속성상 본능적으로 피했다.(86 페이지)

 

어머니에 대한 정을 보이는 것을 넘어 왕권강화와 정통성 확보를 위해 생모의 추숭(追崇)에 크게 신경을 썼던 광해군을 통해 우리는 예의 그 권력관계에 대해 음미하게 된다.(107 페이지) 임금과 왕후의 종묘 부묘 때 세 가지 용어가 쓰인다. 부알(祔謁), 묘알(廟謁), 승부(陞祔)가 그것이다.(121 페이지) 정상적일 때는 부알을 쓰지만 때로는 묘알과 승부를 쓴다.

 

승하(昇遐) 27개월이 지나 종묘에 부묘되는 임금이 선대왕과 선왕후에게 신고하는 말로 하는 멘트가 부알이요이다. 임금을 알현한 뒤 자신의 자리에 들어가겠다는 의미이다. 태종에 의해 왕비 지위가 박탈되고 종묘에 부묘되지 못하게 된 태조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경우 사후 300년이 거의 다 되어 왕비의 지위를 회복하고 남편인 태조의 곁으로 오게 되었는데 이때 종묘의 숱한 임금과 왕후는 태조를 제외하면 모두 아랫 사람이기에 스스로 올라가 자리에 앉겠다는 의미의 승부라는 용어가 쓰인다.

 

묘알의 예는 단종에게서 찾을 수 있다. 단종은 정전에서 4년 간 머물다 영녕전으로 가는 일반 관례와 달리 영녕전으로 직행했다. 비운의 단종은 영녕전으로 가기 전에 정전의 선대왕들에게 인사를 드려야 했다. 이때 묘알이란 말이 쓰인 것이다.(122 페이지)

 

조선 관료들의 사후 최고 영광은 종묘에 배향되는 것이다.(129 페이지) 임금에게 특히 큰 충성을 했거나 나라에 공로가 큰 경우이다. 종묘의 배향 공신은 애초 아흔 다섯 명이었다. 정치적 변고로 추가되거나 삭제되었고 영녕전으로 조천될 때 매안(埋安; 신주를 무덤 앞에 묻음)되기도 해 현재는 여든 세 명이다.(129 페이지)

 

조선이 망한 이후인 요즘에는 부묘 의식은 없고 종묘제례가 있다.(137 페이지) 종묘에 떼도둑이 든 적이 있었다. 선조때의 일로 선조의 도덕적 실종이 조직적인 종묘 도적질을 부른 것이다. 도적들은 삼성추국(三省推鞫)되었다. 삼성추국은 의정부, 사헌부, 의금부의 관원이 합석하여 심문하는 것이다.(184 페이지)

 

친일파 이완용이 종묘에 배향된 적이 있다. 순종 승하로 배향된 것이다. 이완용은 1945년 광복과 함께 종묘에서 제거되었다. 최소 5년은 종묘의 공신당에 배향되었던 것이다.(189 페이지) 종묘제례는 경건해야 한다. 혼령이 식음하는 음식은 온갖 정성을 다해 마련한다.

 

희생물도 고통을 받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희생물을 편안하게 보내는 비밀은 음악에 있다. 음악을 들려주고 한 순간에 죽이는 것이다.(220 페이지) 종묘대제에서는 신이 된 임금들에게 세 차례 술을 올린다.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이 각각 술을 올리면서 왕실과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한다.

 

이익, 정약용 등은 가끔 제자들로부터 임금이 가장 귀한 명주가 아닌 거친 술을 올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는 질문을 받았다. 제사는 우리의 민간 전통에서나 유교에서나 정성을 가장 우선시했고 정성은 가장 오래된 것을 으뜸으로 쳤다.(223 페이지) 종묘제례는 향기제례라고도 불린다. 신이 향기를 음미하는 제례라는 의미이다. 물론 제사는 향기제례이면서 식신제례이다.

 

종묘제례에는 익힌 고기가 아닌 생고기를 쓴다. 희생(羲牲)이란 말을 보면 그 배경을 알 수 있다. 에 들어 있는 날 생()이란 말은 제물이 살아 있음을 뜻한다. 종묘에는 세 개의 연못(지당池塘)이 있다. 정전 앞에서 시작하여 정문으로 가는 위치에 따라 상지, 중지, 하지라 한다.

 

세종 25년에 지금 농사철인데 비가 때맞춰 내리지 않으니 종묘에 못을 파는 일과 간의대에 해시계를 설치하는 일 외에는 여러 사업을 모두 중지하라는 기록이 있다.(251 페이지) 종묘의 상징목은 향나무이다. 사직은 소나무, 종묘는 향나무이다. 창덕궁의 우봉지나 경복궁 경회루의 망지에는 소나무가 있다.

 

향나무는 귀신을 부른다는 속설이 있다. 저자는 향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255 페이지) 종묘에는 지당의 섬에 향나무를 심어 신궁의 상징성과 함께 향의 재료를 즉시 구할 수 있게 했다. 종묘에는 25명의 임금, 9명의 추존왕, 의민황태자 등이 모셔져 있다.

 

종묘 정전에서 어숙실로 가는 길에 주목(朱木)이 심어져 있다. 껍질과 속살이 유난히 붉어 주목이라 불린다. 주목은 나무 중에서 수명이 가장 길 뿐 아니라 목재로서의 수명도 길어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고 한다. 조선이 영원토록 지속되고 종묘에 모셔진 영혼이 영원하도록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270 페이지)

 

전사청 앞에는 작은 오얏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오얏은 조선황실의 상징이다. 오얏나무는 4월에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271 페이지) 임금들의 영혼이 숨쉬는 국가 사당을 사람이 많이 모이는 중심가에 세운 것은 좌묘우사 원칙에 따른 것이다. 임금이 궁궐을 중심으로 남쪽을 향했을 때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세운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종묘의 정문은 외대문 또는 창엽문이라 한다. 종묘 건물에는 현판이 없다. 종묘는 오는 이가 한정되었기에 현판이 없는 것이다. 종묘는 본래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서의 의미를 가진 곳이니 제관 등 제례에 관련된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굳이 이름표를 붙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273 페이지)

 

사랑한다, 아름답다 등 두뇌로만 감지되는 추상적인 정신은 혼(), 꼬집으면 아프고 먹지 않으면 배고파 하는 등 육체적인 정신은 백()이라 한다. 혼은 자유로워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죽으면 땅에 같이 묻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종묘는 무덤이 있는 곳이 아니다. 무덤 묘()가 아닌 사당 묘()를 쓰는 이유이다.

 

종묘는 세계 4개국에만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이다. 그 중 우리나라 것만 세계유산이 되었다. 종묘의 기능 수행, 독특한 제도, 건축물의 우수성 때문이다. 앞선 왕조의 신주를 모시는 점, 불천위제도, 사당 건축물로서 세계에서 가장 긴 건축물이라는 점 등이 작용했다. 종묘 정전의 기둥은 20개로 안정감을 주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엔타시스 공법을 썼다.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불탔을 때 왕궁보다 먼저 복원되었다. 종묘 정전의 문은 일부러 어긋나게 만들었다. 목재인 나무의 뒤틀림을 방지하고 신실에 통풍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혼령이 자유롭게 다닌다는 상징성도 있다. 일본의 종묘인 이세신궁은 식년천궁이라 해서20년마다 건물을 새로 짓고 옛 건물은 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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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보다 질문을 찾는 읽기는 대책 없는 읽기를 하는 것과 다르다. 질문을 찾는 것은 결국 스스로 설정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책문(策問)이 반드시 책문(策文)을 요구하는 것처럼. 책문(策問)이란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적게 한 조선시대 등의 문과 시험이고 책문(策文)은 책문(策問)에 대한 답이다.

처음과 중간이 어떻든 젊은 남녀에게 결국 연애를 하라고 등 떠미는 무례한 세태에 대한 불편감을 기승전연애란 말로 표현한 한 홀로(솔로)이스트의 글에서 파스타비우스란 말을 만났다.

파스타는 미팅이나 소개팅을 하는 남녀가 잘 먹는 메뉴이고 비우스는 뫼비우스의 띠의 그 뫼비우스에서 온 말일 터이다.

그러니 파스타비우스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소개팅이나 미팅이란 어설프고 어색한 만남에서 발을 뺐다는 의미이다.

이 파스타비우스란 말을 보며 나는 내 읽기(뿐만이 아니겠지만)가 뫼비우스의 띠를 맴도는 것 같은 읽기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미로와 미궁의 차이를 설명하는 사람이 있지만 뫼비우스의 띠를 맴도는 것 같은 읽기와 삶은 미로 또는 미궁 속을 헤매는 읽기 및 삶과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궁금함이 고개를 든다.

‘정조 책문(策問), 새로운 국가를 묻다‘란 책이 나왔다. 조선의 개혁 군주 정조가 신하와 유생들에게 나라의 정책들에 대해 물은 내용을 풀이한 책이다.

단지 한 권의 신간일 뿐이지만 정조의 책문(策問)에 대해 제시된 책문(策文)들과 다른 나만의 답을 생각해보고 싶다. 무엇에서든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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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심이지만 조선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음을 실감합니다. ‘경복궁 vs 창덕궁‘의 구도를 공부하며 알게 된 태종의 안티테제인 정도전을 통해 성리학 - 관념적 지식에 매몰되었던 조선 중기 이후의 성리학과는 다른 고려말과 조선 초기의 개혁적인 성리학- 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다행입니다.

지난 해부터 이어진 조선에 대한 관심이 왕들과 관계된 궁궐과 박물관 순례로 이어졌습니다.

능도 궁궐보다 못하지만 어느 정도 가고 있고 신위를 모신 종묘에서는 이제 곧 모일 것이고 조선왕조실록도 공부하게 될 터인데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 그리고 그곳의 경기전에 소장된 어진 등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스스로 분발을 다짐하게 됩니다.

왕이 유배생활했던 - 가령 단종이 유배되었던 영월 청령포 같은 - 곳에도 언젠가는 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주 어진박물관에 대해 알고 싶어 인터넷 사이트를 찾았는데 슬라이드 방식으로 옆으로 움직이는 전시물들이 너무도 리얼해 마치 현장에서 태조의 어진을 직접 보는 듯 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두 개의 자아란 개념입니다. 하나는 물리적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가 없는 곳에서도 존재하는 온라인 자아입니다.

‘감각의 박물학‘의 저자인 다이앤 애커먼은 최근 작인 ‘휴먼 에이지‘에서 온라인 자아는 우리가 가다듬고 유지해야 하는 것이라 말하며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없을 때조차도 우리의 온라인 자아를 향해 반응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애커먼이 말하는 것은 온라인에 존재하는 우리의 자아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의미하고 제가 말하는 것은 온라인을 통해 자료를 봄으로써 생기는 우리의 자아 감각이니 차이가 분명합니다.

서울을 수식하는 많은 말들 가운데 제게 가장 어필하는 것은 ˝한양은 유학자가 설계한 계획도시이며 유교적 이념을 집약한 도읍˝(장인용 지음 ‘주나라와 조선‘ 251 페이지)이라는 말입니다.

숭례문(崇禮門), 흥인문(興仁門), 보신각(普信閣), 회현(會賢), 적선(積善), 안국(安國), 가회(嘉會)등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신 등의 이념이 깃든 서울, 그것도 문화도시 종로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게 되어 기쁘고 행복합니다.

연구원 지원서를 쓸 때 변변하게 쓸 이력이 없어 우울해 하자 조선 시대에 관료 진출을 하지 않고 공부만 한 선비들이 얼마나 많느냐는 말로 제게 최고의 격려를 해준 동기 이** 선생님께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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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禮)와 종(宗), 이 두 글자에도 시(示)라는 글자가 들어 있다. 禮는 조상의 위패<示>, 갖가지 음식을 뜻하는 곡(曲), 제단(祭壇)을 의미하는 두(豆) 등으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禮는 제단에 차린 음식을 고루 나누는 것과 연결된다. 벼를 뜻하는 화(禾)와 그것이 입<口>에 고르게<평平등하게> 들어감을 의미하는 평화(平和)도 나눔과 관련된 말이다.

정의로움을 의미하는 의(義)도 희생양(羊)을 칼(아我는 칼을 뜻함)로 고루 나누어야 정의롭다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종교(宗敎)라는 글자에 쓰이는 으뜸 종(宗)자는 상에 위패<시示>를 놓고 제사 지내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이다.(장인용 지음 ‘周나라와 조선’ 102 페이지) 장인용은 삼국시대 이전 삼한시대부터 있었던 데릴 사위 제도를 언급하며 그것은 시집간 여자도 재산을 상속받았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장인용에 의하면 따라서 여자들도 재산을 지니고 있었으며 오히려 그 재산을 바탕으로 남편을 선별했다.(122 페이지) 장인용은 제사와 상속은 별도의 문제 같지만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140 페이지) 제사를 지내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든다. 고대 사회에서 그것은 모두 토지의 수확물로부터 나왔다. 그렇기에 누군가 제사를 맡는다는 것은 그 만큼의 상속을 더 받아야 가능한 일이다.

조선 초기는 형제자매가 재산을 균분상속을 받았다. 이런 제도는 후에 종법宗法 제도 시행으로 인해 와해된다. 이 부분에서 정도전이 죽임당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시대상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궁금하다.

전제개혁(田制改革)을 펼침으로써 고려 말의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뻔했던 정도전,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도덕성이 높은 왕과 유학으로 철저히 무장한 사대부들의 유교 이상향인 국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던 정도전...그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개혁을 완성했다면, 하는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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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와 조선 - 이상국가 주나라를 꿈꾼 조선의 혁명
장인용 지음 / 창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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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하면 주역(周易)을 생각하는 것이 정해진 코스인 듯 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문화해설을 공부하며 알게 된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 등의 도시 건설 원리가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근원을 두고 있다. ‘주례(周禮)’는 주() 왕실의 관직 제도와 전국 시대(戰國時代) 각 국의 제도를 기록한 책이다.

 

사실 주나라는 우리와 꽤 밀접한 연관을 갖는 나라이다. 우리와 주나라는 노()나라의 공자(孔子)와 남송(南宋)의 주자(周子)로 인해 연결되었다. 장인용의 주나라와 조선을 통해 우리는 주나라의 종법(宗法)제도(制度)를 편의대로 받아들인 조선이 자초한 갖가지 폐해를 알게 된다. 종법 제도란 장자를 우선시하는 제도이다. 공자가 받아들여야 할 이상(理想)으로 생각한 나라가 주나라이다.

 

저자는 우리가 유학과 성리학에서 전범(典範)으로 내세우는 이상향으로서의 주나라에 대해 어렴풋이 알 뿐 역사적 실체로서의 주나라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한다.(24, 25 페이지) 특기할 것은 하(), 은상(殷商), ()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고 또 다른 나라가 그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존한 것이다.(29 페이지)

 

춘추시대의 공자가 다시 돌아가자고 한 주나라의 기초를 만들고 대표하는 인물이 문왕(文王)이다. 공자가 편찬했다는 시경(詩經)’에는 문왕을 칭송하는 시들이 한 부분을 차지한다. 문왕은 은상(殷商)을 쳤는데 이는 주나라가 자신들보다 10배 이상인 세력을 가진 큰 나라를 치는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 문왕(文王)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은나라를 친 후 은상의 조상을 모시는 묘당(廟堂)에 가서 제사를 올렸다. 무왕은 은상의 조상들에게 주왕(紂王)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고 자신은 폭군 주왕(紂王)을 벌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무력을 동원했다고 밝혔다.(50 페이지) 어찌어찌 해서 주왕의 군사를 이기기는 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아직 은상 사람들 전체를 대적하기에 중과부적인 주와 무왕이 취한 절묘한 방편이었다.

 

주나라는 중원의 서쪽에 자리 잡은 나라였다. 동쪽의 은상에게 억눌린 채 설움을 겪고 신하의 예를 다하는 종속된 처지였다가 은상을 극복하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했지만 삼감과 주왕의 아들 무경의 반란에 맞닥뜨렸고 동이족들에 시달렸다. 동이족은 고구려를 떠올리겠지만 굉장히 다양한 부족들의 통칭이다. 주나라가 은상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은 동이족들이 은상 주왕의 힘을 뺀 덕분이라 할 수 있다.(96, 97 페이지)

 

주나라 혼자 드넓고 이민족들이 무수한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취한 특단의 조치는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은상의 유민들을 안정시키고 그들에게 다시 자치권을 주어 제후국(諸侯國)으로 주나라 질서 안에 편입시키는 것(98 페이지)이고 다른 하나는 주나라가 동쪽으로 이사가는 것이다.(100 페이지)

 

주나라는 서쪽에서 중원(中原)만을 바라볼 때는 중원을 전부로 알았지만 막상 들어서자 사방에 위협적인 많은 민족이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 중원의 안정화를 위해 주나라가 견지한 정책은 봉건(封建)과 종법(宗法)이었다.(101 페이지)

 

종법의 종()은 상에 위패를 놓고 제사 지내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이다.(102 페이지)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자 통치권의 상징이었다. 은상 사람들은 낙읍의 동쪽에 거주했기에 그들의 묘당은 동쪽에 있었고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에 살았기에 후직을 비롯한 주나라의 묘당은 서쪽에 있었다. 이것이 예법으로 전해져 지금의 서울에도 왕궁의 동쪽에 종묘가, 서쪽에 사직단이 있는 것이다.(105 페이지)

 

주나라가 은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종법이 주나라 특유의 장자 상속과 결합하고 다시 이것이 봉건과 결합하여 주나라 특유의 정치체계와 예법이 만들어졌다.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이민족들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종법과 봉건을 합친 주나라 고유의 통치제도가 탄생한 것이다.(106 페이지)

 

()나라는 좌묘우궁(左廟右宮)이었다.(248 페이지) 궁 하나와 묘 하나(궁 옆에 묘)인 것이었다. 주나라는 좌묘우사였다.(249 페이지) 주나라는 궁궐의 동쪽에 은상의 조상을 모시는 묘당을 짓고 서쪽에는 자신의 조상을 모시는 묘당을 따로 지어 두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이어갔다.(51 페이지) (우리가 보기에) 경복궁 왼쪽에 사직단, 오른쪽에 종묘가 있는 조선의 궁()과 묘()의 배치는 주나라의 궁여지책 또는 방편을 따른 것이다.

 

중요하고 흥미로운 말은 천명(天命)이란 말이다. 주의 무왕은 은상의 조상들을 향해 제사를 올리며 주왕(紂王)을 친 것은 천명(天命)이라 읍소했다.(55 페이지) 왕이 된 것이 천명인지에 대해 반신반의했던 태조의 머리에 천명 사상을 심어주고 세상을 바꾸고자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도전이다.(60 페이지)

 

정도전은 유학자이자 상리학자로서 당시 손에 꼽을 정도로 학식이 깊은 사람이었다.(67 페이지)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맹자주례이다. ‘맹자는 그의 천명 사상을 공고히 해주었고 주례를 통해서는 천명을 실천하기 위해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기본 설계도를 배웠다. 맹자는 천() 개념에 민()을 더했다.

 

이성계가 정권을 접수하고 정도전이 처음 받은 관직은 밀직부사(密直副使)였다. 왕의 비서실장 격이었다. 이 자리에서 정도전이 처음으로 획책(劃策)한 일은 전제개혁(田制改革)이었다. 이로 인해 정도전은 모든 기득권층과 반목하는 사이가 되었다.(75 페이지) 구세력의 반격으로 정도전은 삭탈관직당하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정몽주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반대했다.

 

정도전은 단순한 개혁자나 유학자가 아니라 이 땅에 주나라와 같은 이상적인 국가를 세우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도덕성이 높은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고 대신 유학으로 철저히 무장한 사대부들이 유교의 전범적인 국가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82 페이지) 정도전에게 혁명은 궁극의 목표를 위한 방편이었다.(83 페이지)

 

정도전은 왕위 계승에 대해 장자가 계승하되 장자가 어질지 못하면 동생이라도 상관 없다는 원칙을 가졌었다.(83 페이지) 정도전을 죽음에 빠뜨린 것은 장자 혹은 연장자 계승이라는 종법제도였다.

 

우리가 지금은 종가(宗家)니 종손이니 장남이니 제사니 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 이것이 마치 수천년을 이어온 전통이라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는 서주의 제도가 유가들에 의해 규격화되는 과정을 거친 뒤 다시 사대부들에 의해 강제로 이식된, 우리에게는 너무도 낯선 문화였다.(115 페이지)

 

세종은 선대에서 무시되었던 종법적 질서를 자신부터 정상으로 되돌려놓으려 했다. 재기발랄한 수양대군보다 문약한 장남 향(후에 문종이 됨)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사실 그의 마음 속에서는 향보다 씩씩하고 능력 있는 수양이 더 좋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종은 주나라를 흠모한 유가의 성군답게 장자인 문종에게 왕위를 잇게 했다. 그러나 병약한 문종이 오래 살지 못했고 어린 장남 단종이 왕이 됨으로써 숙부 수양이 섭정하는 구실이 마련되었다.

 

단종에게서 왕위를 뺏은 세조는 단종 복위를 꿈꾸던 도전세력을 눌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커다란 전란을 거친 뒤 조선은 왕권보다 은근히 사대부들의 실권이 좀 더 센 유교사회로 변한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세우거나 광해군을 내치고 인조를 옹립한 것은 모두 사대부들이 중심이 된 반란이었다. 태종과 세조처럼 왕족에 의한 반란이 아닌 것이다.(141 페이지)

 

'주자가례' 자체가 임금과 같은 일가가 아닌 사대부들의 조상 받드는 법이었기에 존존의 의미는 퇴색하고 친친의 의미만 강조될 수 밖에 없긴 했지만 반정 그리고 전란(왕과 국가가 자신과 집안을 언제나 온전하게 지켜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을 겪으면서 오직 가문의 친친만이 남게 되었다.(142 페이지)

 

이로써 당파 싸움이 극심해지게 되었고(143 페이지) 가부장적 사회가 되었다.(147 페이지) 문중의 대종이 되는 집안에는 가묘(家廟)가 필수가 되었다. 종가에 가묘가 설치되었다는 것은 문중의 대를 이은 대종에게만 제사권이 있다는 이야기이다.(146 페이지)

 

공자가 주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본 것은 이 나라에 이성적인 예악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란 말은 질서와 법률이라는 의미이다.(167 페이지) 어떤 문명, 어떤 나라에서도 예절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그러나 주나라처럼 예와 악을 하나로 만든 곳은 없다.(171 페이지)

 

정도전이 꿈꾸었던, 주나라와 같은 이상적 국가 조선은 한낱 꿈으로 끝날 듯 보였다. 이방원은 신흥 사대부들과 협력했지만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왕권이 살아있는 주나라이면서 그 왕권은 자기 혈족으로 이어지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주나라에 대한 꿈은 이방원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세종을 통해 더욱 공고하게 다져진다.(187 페이지)

 

저자는 정도전, 세종, 세조가 꿈꾸었던 주나라의 현현(顯現)으로서의 조선은 결코 중국에 대한 사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말한다. 주나라의 이상을 따르고자 했지만 이는 조선의 천명이고 조선 방식대로 종법과 예악을 이 땅에 실천한 것이라는 의미이다.(206 페이지)

 

'주례' '고공기'가 묘사하는 도성 건축의 원칙이나 '주례''맹자'가 이야기하는 정전제가 주나라에서 실제로 실행된 것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한참 후대에 주나라를 신성시하던 유가들의 기록이다.(230 페이지) 지금이야 '주례'나 전국시대나 서한 시기의 저작물로 보지만 정도전은 이것이 주대(周代)의 저작임을 의심치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고공기'도 주나라 때의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247 페이지)

 

고려 말에 혁명을 꿈꾸었던 성리학자들은 조선 중기 이후 예만 따지던 유학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리학의 표상인 예가 아니라 실질적인 경제정의였다.(246 페이지)

 

한양은 유학자가 설계한 계획도시이자 유교적 이념을 집약한 도읍이다.(251 페이지) 참 인상적인 말이다. 건축가 임석재 교수가 경복궁을 설명한 것 만큼 인상적이다. 임석재 교수는 '예로 지은 경복궁'에서 경복궁을 '주례(周禮)', '논어', '맹자', '순자', '춘추좌전', '국어', '시경', '서경', '주역', '관자', '한비자', '문심조룡' 등 동아시아의 거의 모든 고전이 총망라되어 반영된 궁궐로 보았다.

 

임석재 교수는 경복궁을 다섯 가지 의미로 정의한다. 1) 조선의 통치 이상을 실어낸 건국 선언문이자 소통의 통로, 2) 동아시아 궁궐 건축의 흐름 속에서 예()로 지은 궁궐이자 예절 교과서, 3) 국가의 운영 방향과 통치 이상을 건축으로 담아낸 건국 기획안이자 사상서, 4) 주례(周禮)의 궁궐 지침을 모범으로 삼되 수반되는 논쟁거리를 잘 피해 오묘한 변화의 모양을 담아낸 창의적인 예술작품이자 건축 명작, 5) 조선의 헌법이자 정치학 교과서이자 하나의 작은 이상 국가...

 

흥미로운 것은 태종 이방원이 절대로 비유교적인 왕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불교와 도참에 빠진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비교할 수조차 없는 순수한 유학자이다.(253 페이지)

 

유가가 역사에 있어서 그 이념으로 실제 혁명에 성공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유교 국가인 송나라에서 왕안석의 신법조차 실패했다. 그 만큼 보수기득권의 반혁명 공작이 치열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오로지 단 한 번의 성공사례가 태동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정도전과 이성계의 조선 건국이다 .(26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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