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보다 질문을 찾는 읽기는 대책 없는 읽기를 하는 것과 다르다. 질문을 찾는 것은 결국 스스로 설정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책문(策問)이 반드시 책문(策文)을 요구하는 것처럼. 책문(策問)이란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적게 한 조선시대 등의 문과 시험이고 책문(策文)은 책문(策問)에 대한 답이다.
처음과 중간이 어떻든 젊은 남녀에게 결국 연애를 하라고 등 떠미는 무례한 세태에 대한 불편감을 기승전연애란 말로 표현한 한 홀로(솔로)이스트의 글에서 파스타비우스란 말을 만났다.
파스타는 미팅이나 소개팅을 하는 남녀가 잘 먹는 메뉴이고 비우스는 뫼비우스의 띠의 그 뫼비우스에서 온 말일 터이다.
그러니 파스타비우스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소개팅이나 미팅이란 어설프고 어색한 만남에서 발을 뺐다는 의미이다.
이 파스타비우스란 말을 보며 나는 내 읽기(뿐만이 아니겠지만)가 뫼비우스의 띠를 맴도는 것 같은 읽기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미로와 미궁의 차이를 설명하는 사람이 있지만 뫼비우스의 띠를 맴도는 것 같은 읽기와 삶은 미로 또는 미궁 속을 헤매는 읽기 및 삶과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궁금함이 고개를 든다.
‘정조 책문(策問), 새로운 국가를 묻다‘란 책이 나왔다. 조선의 개혁 군주 정조가 신하와 유생들에게 나라의 정책들에 대해 물은 내용을 풀이한 책이다.
단지 한 권의 신간일 뿐이지만 정조의 책문(策問)에 대해 제시된 책문(策文)들과 다른 나만의 답을 생각해보고 싶다. 무엇에서든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