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꽃의 비밀
김환희 지음 / 새움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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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은행나무 출판사가 미당 서정주 전집(20)을 완간했다. 미당 문학상 심사위원인 황현산 평론가는 미당은 명백하게 친일시를 썼고 광복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친 정치적 과오를 저질렀지만 미당이 한국어를 아름답게 일으켜 세운 공로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라는 말을 했다.

 

미당이 한국어가 말살될 위기에 처했던 1930년대와 40년대에 한국어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깊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미당은 찬반이 분명하게 나뉘는 시인이다. 유종호, 이남호 등의 평론가가 미당 마니아라 할 수 있고 반대 진영에서는 미당의 시가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볼 수 없으며 그렇다 해도 그의 친일, 친독재를 도외시하고 시만을 푱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인다.

 

함돈균 교수는 최근 황현산 평론가가 미당의 시를 인정한다고 해서 그가 친일을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을 했다. 미당의 시가 윤동주, 소월, 백석, 김수영, 김춘수 등의 시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를 정교하게 분석할 여력이 없다. 다만 지금보다 많은 시를 읽을 필요가 있고 거장 시인들의 시를 본격적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환희의 국화꽃의 비밀(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비롯 서정주 시세계 전반을 분석한 책. 2001년 출간)을 지난 20138월 읽은 이래 4년여만에 다시 읽고 내용을 정리한다.

1.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황국(黃菊)은 일본 왕실과 태양 상징.(국화 옆에서)

2. 시인들은 그냥 꽃이라 말하지 한 송이의 꽃이라 말하지 않음.(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는 예외적.) 한 송이 꽃: 일왕.

3. 일제 강점기에 경성부의 남산에 세워졌던 신사(神社)인 조선신궁(朝鮮神宮)에 청동 거울이 있었음. 청동 거울, 청동검, 곡옥(曲玉)은 삼종신기(三種神器)라 불림.(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4. 일왕의 인간 선언 시점은 194611. 국화 옆에서의 창작 시기는 19471. 인간선언으로 현인신(現人神)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히로히토왕의 이미지와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이란 구절의 이미지 비슷. 술술술술 시를 쓰는 서정주도 엄청난 상징과 비밀이 깃든 시를 쓰는데 1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는...

5. 아마테라스(일본 신화의 태양의 여신) 신화에 최초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신() 이자나기의 아내 이자나미는 불의 신 카쿠쓰치를 낳다가 너무 뜨거워 타 죽고 만다. 이자나기는 죽은 신들이 사는 황천으로 간 아내 이자나미를 따라 간다. 이자나미는 저승의 음식을 먹은 탓에 돌아갈 수 없자 남편인 이자나기에게 저승의 신들과 의논할 테니 그때까지는 자기 모습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자 이자나기는 참지 못하고 머리에 꽂았던 빗을 뽑아 불을 붙여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불빛에 비친 이자나미의 온몸에는 온갖 구더기들이 들끓는다. 이자나미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이자나기는 도망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함께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는 이를 번개의 신(뇌신: 雷神)으로 표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6. 사별한 아내가 그리워 황천국으로 여행하는 남편, 몸의 부패, 천둥신 등의 시상은 미당 시의 소쩍새와 천둥이 형성하는 모티브와 상응, 고사기에 등장하는 동굴 칩거, 누님의 귀환, 거울 앞에 선 여인 등의 여러 모티브들은 국화 옆에서의 천둥, 거울, 무서리 등의 시어들과 맞물림.

7. 고사기에는 아마테라스가 남동생인 스사노오의 잘못으로 베틀을 짜는 자신의 하녀가 죽자 동생을 피해 동굴로 숨는 장면이 나온다. 천상계와 지상계가 암흑에 빠지고 각종 재앙이 생겨난다. 신들이 지혜를 모아 거울로 아마테라스의 호기심을 자극해 아마테라스를 동굴 밖으로 나오게 한다.(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누님의 귀환) 아마테라스는 손자 니니기에게 자신을 동굴 밖으로 나오게 한 거울을 징표로 주며 그것을 자신의 혼으로 여기고 자신을 모시는 것처럼 우러러 모시라고 말한다.

8. 일본 신화 속의 대모들(이자나미, 목화(木花), 토요타마비메)은 하나 같이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을 연출한다. 서정주의 시집 귀촉도에 수록된 시 목화는 목화(木花) 즉 코노하나노사쿠야비메이다.

9. 야마토 민족과 한민족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아마테라스의 남동생 스사노오를 단군 내지 신라인으로 간주. 국화 옆에서, 누님, 목화등 서정주의 시들에 나오는 누님은 일본 또는 아마테라스로, 남동생은 우리나라 또는 서정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

10. 아마테라스 신화를 구성하는 사별한 님을 향한 통곡, 수를 놓거나 베를 짜는 지고지선한 누나, 여인의 고독한 은둔, 천상계에서 추방되어 세상을 떠도는 탕아 등은 서정주의 시세계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이미지들이다.

4년 전에 비해 열의가 더한 느낌이다. 당시에는 나만을 위해 불친절하게 정리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친절하게 정리했다. 나는 김환희의 입장에 적극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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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정동 프란치스코(작은 형제회) 교육회관을 설명하는 해설사로부터 연락(連絡)의 락(絡)이 맥락 락과 함께 헌 솜 락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들었다.

적(籍)이 문서는 물론 왕이 친히 경작하는 농지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처럼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해설사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절제와 소박의 삶을 상징하는 단어로 그 단어를 든 것이다. 수긍할 만하다.

한 나무 아래에서 이틀 연속으로 머물지 말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소유욕이 일 것을 경계하는 차원이다.

絡의 숨은 의미를 드러낸 것은 참 신선한 시도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제 그 해설사는 장점도 많았지만 단점도 드러냈다. 해설사가 絡이 무슨 자인지 물었을 때 나는 맥락 락이라 답했다.

그러자 해설사는 원하는 답이 아니어서인지 아무 말도 안 하다가 絡은 헌 솜 락자라는 답을 했다. 나라면 맥락 락자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헌 솜 락자이기도 하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 해설사가 정동의 칠엽수 즉 마로니에를 설명할 때 내가 칠엽수가 불교와 관련이 있는지 묻자 그는 불교와 관련 있는 나무는 보리수라고 답했다.

칠엽수가 불교와 관련 없다 해도 불교와 관련 있는 나무는 하나가 아닐 텐데 보리수 하나인 것처럼 답하는 것은 문제이다.

이는 나무나 불교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논리) 차원의 문제이다. 불교의 1차 결집이 칠엽굴에서 이루어졌다.

굴 주변에 칠엽수가 많아서 칠엽굴이라 불린 것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칠엽수는 불교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결집이 이루어진 칠엽굴 주변에 많은 나무였을 뿐이다.

이렇듯 어제는 느낀 점이 많은 하루였다. 나 역시 아직은 부족하고 어설프다.

잘 하는 사람을 보면 나와 비교하게 되고 못하는 사람을 보면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란 생각을 한다. 내 고유의 논리와 양식을 빨리 만들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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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연천의 한 작은산에 조각가 유영호 님의 ‘그리팅맨’이라는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북한 사람들도 보라는 의미로 크게 만든 조각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 작다. 이 작품 이후 ‘고궁박물관에서 서촌’ 가는 길에 연천 것의 1/3 정도인 작은 그리팅맨을 보았다. 같은 작가가 만든 작품이다.

 

15도 각도로 인사하는 공손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마포구 상암동 DMC 광장에 설치된 동(同) 작가의 미러맨이란 작품도 거대 조각이다. 이 작품은 지난 해 출판 편집 강의를 들으러 가는 길에 만났다.

 

지난 2월 모임 장소였던 시네큐브 가는 길의 흥국생명 빌딩 앞에서 완전히 다른 느낌의 거대 조각을 보았다.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해머링맨’이란 이름의 작품이다. 노동의 신성함과 보편적 인간상에 대한 사유를 담은 작품이라고 한다.

 

지난 해 문화 해설 수업 시간에 인간의 손을 조각한 작품을 설명하라는 과제를 받고 ‘손은 정신의 칼날’(야콥 브로노프스키), ‘손은 밖으로 드러난 뇌’(칸트) 등의 말을 인용하며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한 위대한 손을 찬양하는 의미로 만든 조각이라는 설명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밖에 우리나라에 여러 공공 미술이 있어(1만 5천 점) 내가 못 본 작품들에 비하면 내가 본 것은 너무 하찮은 수이지만 일상에서 참 많은 미술 작품을 본 듯한 느낌마저 든다. 지난 금요일 정동(貞洞) 공원에서 본 몇몇 작은 청동 조각상도 내가 거리에서 본 미술품으로 계산해야 하리라.

 

명당(明堂)을 찾은 조선의 풍수(風水)와 달리 인체의 혈(穴)에 침을 놓듯 주요 지점에 절을 창건하고 나무를 심어 지기(地氣)를 북돋고 그 자리를 명당으로 만들려 한 고려 풍수가 생각난다. 조각상들로 인해 도시가 조금이나마 아름다워지는 것에서 현대판 풍수라는 말을 떠올려도 될지? 차이가 있다면 현대의 조각상들은 사유를 유도한다는 부가의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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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정동(貞洞)길을 걸었다. 정동 극장에서 경운궁 중명전(重明殿)을 거쳐 예원학교, 이화여고, 옛 신아일보사 별관,

정동 공원, 구 러시아 공사관, 캐나다 대사관 등을 보고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체코 대사관, 일조각, 책세상 등의 출판사와 성곡 미술관 등을 지나는 짧은 걷기 일정이었다.

볕이 좋은 가을을 실감나게 만끽한 시간이었다. 오는 길에 조선시대 과거제(科擧制) 재현 행사(2017년 9월 23일 9시 – 17시. 경희궁 숭정전) 소식도 확인했다.

축 평창동계오륜대회(祝 平昌冬季五輪大會)를 시제(試題)로 해 칠언율시를 쓰는 행사이다.(장원에게는 250만원의 상금이 수여된다. 내공이 전혀 없는 나는 어느 세월에?)

미학자 이나라 교수와 프랑스 상원의회 입법사무관인 그의 남편 티에리 베제쿠르는 ‘풍경의 감각’이란 책에서 자신들을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걷는 산책자인 플라뇌르(flâneur)로 설명하며 플라뇌르에 대한 일반적 이해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즉 플라뇌르의 산책은 안내책자를 절대로 보지 않거나 자신만의 환상을 쫓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택한 것은 충분한 사전 독서였다.

목적 도시에 대한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도시와의 충분한 교감이다. 나는 이를 보며 맥락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정중동(靜中動)이란 말을 생각한다.

사실 어슬렁 거리며 걷는 것은 좀 더 느끼고 생각하기 위한 선택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느리게 걷는 의미는 없다.

어제 나는 산책자이되 목적의식을 가지고 걸은, 우연한 산책자가 아닌 필연의 산책자인 플라뇌르였다. 사전 준비로 독서를 한 뒤 도심 거리의 낭만을 만나고 사후 조치로 후기를 남기며 나는 벌써 다시 정동길을 걸을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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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감각 - 파리 서울 두 도시 이야기
이나라.티에리 베제쿠르 지음, 류은소라 옮김 / 제3의공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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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감각'은 프랑스인 남편이 본 서울과 한국인 아내가 본 파리 이야기를 1, 2부로 배치한 플라뇌르(flaneur) 에세이이다. 플라뇌르는 어슬렁거리는 눈으로 도시를 걷는 만보객(漫步客)을 의미한다. 책의 1부는 프랑스인 남편의 이야기인 파리의 눈으로 본 서울이고 2부는 한국인 아내의 이야기인 도시라는 공동체이다.

두 저자는 서문격의 글인 '들어가며'에서 플라뇌르를 언급한다. 자신들은 천천히 걸어다니는 산보객인 플라뇌르일 것이지만 플라뇌르의 산책이 꼭 우연한 산책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은 호시우행(虎視牛行)이란 말을 생각하게 한다. 호시우행이란 호랑이처럼 관찰하고 소처럼 끈기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두 단어는 맥락이나 의미면에서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다만 느슨하게 걷고 즐기듯 다소 흐트러지게 움직이는 걸음 속에 예리한 시각을 갖춘 것은 두 저자를 생각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어떻게 보면 정중동(靜中動)이라고도 할 여지도 있다.

'풍경의 감각'은 두 저자가 취한 그런 남다름의 산물이다. 사실 프랑스인 남편이 서울에 대해 논하고, 한국인 아내가 파리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은 포석이다. 표지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그림인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인 표지는 우산 쓴 두 저자 중 한 사람은 지구의 북반구 같은 곳에서 아래로 머리를 두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남반구 같은 곳에서 바로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현대는 글로벌한 시대이다. 여행 자체가 일상화되었고 그런 흐름에 따라 해외 여행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럼에도 프랑스인 남편은 서울에 대해 이방인이고 한국인 아내 역시 파리에 대해 이방인이다. 그렇기에 두 저자는 낯선 곳을 알기 위해 독서로 철저 준비를 했다. 그 가운데는 풍수 책도 있다.

파리의 눈으로 본 서울이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프랑스인 남편(티에리 베제쿠르)은 우리의 풍경들과 다른 파리의 풍경들을 이야기한다. 서울의 일상이 파리의 일상보다 우월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다. 우월한 것은 우리의 카페에서는 노트북을 펼쳐 검색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파리의 카페는 테이블이 너무 작아서 노트북을 올려놓을 수 없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을 낳은 것은 자유로운 생각들이 만나고 부딪히고 강화되고 확산된 파리의 카페들이었다.(34 페이지) 병렬적 나열이겠지만 파리의 카페들에서 생각을 나눈 지식인들이 멋지게 보인다. 베제쿠르는 우리의 공동묘지, 장례의식과 파리의 공동묘지, 장례의식이 가진 뚜렷한 차이를 언급한다.

도시가 변하는 속도도 주요 비교 사안이다.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도시들은 완전히 바뀌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세대들이 그 뒤를 잇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한 세대 안에서조차 도시가 여러 번 다시 태어난다. 한국에서 고궁들이, 서울이 오래된 도시임을 환기하는 장치가 된다.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다. 한국에서 주택은 우리가 거주하는 삶의 공간 이상으로 사고 다시 파는 재화나 주택 임대업의 아이템이다.(105 페이지)

베제쿠르는 한국의 것도 분류를 한다. 절과 교회가 그것이다. 베제쿠르는 절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한다.(풍수 책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인 아내 이나라는 대학생 시절 홀로 떠났던 유럽 여행에서 순전히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밤기차를 탔다는 이야기로 서두를 장식한 뒤 기차의 의미를 짚는다. 기차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근대적 운송수단이라는 것이다.(187 페이지) 기차에 얽힌 인간과 사회의 이야기가 풍성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한국인 아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속도의 차이가 낳은 정서의 차이, 세상의 변화이다.

이나라도 파리와 서울을 나란히 놓는다. 한국에서는 꽃이 너무 공식적인 반면 프랑스에서는 꽃도 자유분방하다.(206 페이지) 이나라가 파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곳이 유학(留學)지이기 때문이다. 이나라는 랜드마크 건축물은 무용하지 않지만 어떤 랜드마크가 도시의 정체성을 대단하게 창조하거나 상징할 것이라는 기대는 호들갑이라 지적한다.(243 페이지)

베제쿠르가 문이 그렇듯 다리도 인간을 연결하고 분리시키는 능력의 기호(29 페이지)라고 말했다면 이나라는 다리는 한편으로는 나누는 장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연결하는 장소라 말한다.(247 페이지) 다리는 두 사람, 두 세계를 연결짓기도 하지만 적대적인 사람, 적대적인 세계를 분리한다.

이나라가 한국에서는 꽃이 너무 공식적이라는 말을 했다면 베제쿠르는 서울의 풍경은 과히 준법의 풍경에 가깝다는 말을 했다.(262 페이지) 이나라는 시민의 최우선 윤리는 무조건적인 준법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265 페이지) 준법정신은 경직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나라는 서울 이야기도 많이 한다. 프랑스 이야기를 하려면 당연하다.

비교 없는 이야기는 무의미하다. 비교는 우리 것들 사이에서도 프랑스의 것들 사이에서도 행해진다. 우리가 은밀한 별실을 좋아한다면 서유럽의 유명 식당들은 대체로 전망을 제안한다.(291 페이지) 베제쿠르가 절이 개신교 교회보다 더 한국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했다면(73 페이지) 이나라는 은밀함의 공간이 무조건적인 배제나 궁극적인 차별의 공간은 아니고 보여주기의 공간이 무조건 자유의 생산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295 페이지)

플라뇌르를 목적을 갖는 것으로 보는 두 사람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이다. 자신만의 독특하고 예리한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말해주는 시각이다. 깊게 보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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