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알고 ‘어둠 속의 작업‘이라는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장편 소설을 읽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 교수의 소개 글을 읽고 접하게 되었거나 문학평론가 김화영 교수의 책을 통해 알고 읽게 되었거나 두 가지 중 하나이다.

김현 교수의 책에서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를 알게 되어 읽은 기억은 확실하다.

김화영 교수의 책을 통해서는 파트릭 모디아노에 대한 소개 글을 읽은 것이 확실하다.

유르스나르의 소설 중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이란 작품이 있다. 이 소설은 뛰어난 장군 출신으로 로마의 평화를 이룬 비범한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죽음을 앞에 두고 편지 형식으로 쓴 작품이다.

병고에 시달리던 황제가 이올라스라는 젊은 의사에게 독약을 조제해 줄 것을 호소한다. 이올라스는 황제를 동정하지만 히포크라테스 선서 때문에 거절한다.

황제가 거듭 호소하자 이올라스는 설복된다. 하지만 이올라스는 실험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황제의 제의를 거절하지 않으면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도 지킬 수 있는 방법으로 이올라스가 택한 죽음이었다.

이올라스의 이야기는 소설 전체의 주제부는 아니지만 딜레마적인 삶을 알게 하는 의미 있는 부분이다.

강석경 작가의 ‘숲 속의 방‘이란 소설에 하드리아누스의 제의에 자살로 대응한 젊은 의사 이올라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숲 속의 방‘은 우울증 관련 자료를 찾다가 20년 정도만에 다시 읽게 된 소설인데 이 소설에서 이올라스는 혜양이라는 학생으로 하여금 의대를 선택하게 한 인물로 나온다.

이것도 할 수 없고 저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살이라는 제3의 길을 택한 것에 불편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올라스가 자기희생의 숭고한 인물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절대 죽음이 장려되어서는 안 된다. 상황도, 개인의 실존도 절대적이지는 않고 그때 그때의 선택이 중요하리라.

삶은 그 둘이 만나 변증법적으로 생성되는 무엇이다.

이올라스가 1안(案)도 아니고 2안도 아닌 제3의 안을 택했듯 우리에게는 그런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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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곱시 클래식 FM으로 드뷔시의 ‘아마빛 머리의 소녀‘를 들었다. 오랜만에 들어서인지 상쾌한 바람 같았다.

곡을 들으며 저녁과 어울리는 음악을 아침에 들으니 생소하기도 하고 신선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소함은 듣는 시간대로 인해 갖게 되는 느낌이다. 작곡가의 작품 경향에 비추어볼 때 생소함을 느끼게 하는 경우도 있다.

드뷔시의 첼로 소나타가 그런 경우이리라 생각한다. 이는 피아노 작품 위주의 레퍼토리를 갖는 그의 성향 때문에 느껴지는 경우이다.

스트라빈스키가 흥겨운 재즈 스타일의 장르인 부기우기 스타일의 곡이라 말한 베토벤의 마지막(32번) 피아노 소나타도 새롭고 파격적이다.

술의 향연이라 통칭되는 베토벤 7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그런가 하면 아침 음악회를 뜻하는 마티네 세션에 청중으로 참석하면 곡 대부분이 색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나는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는데 음악이 아닌 수업 또는 강연 듣기는 어떨까? 아침 시간이 정상적이지만 학생이 아닌 직장인의 경우 그 시간대에는 참여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의 성인 대상 인문학 강의는 늦은 밤에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까닭에 여건이 안되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다.

아침 시간에 좋은 인문학 프로그램이 많이 마련된다면 좋겠다. 낯설게 하기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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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박태웅입니다. 최근 선생님 페북에서 알게 된 장영훈 선생님의 책 가운데 왕릉 풍수와 조선의 역사를 읽고 있습니다. 풍수 초보자인 제게는 배울 점이 많은 흥미로운 책입니다. 체계가 산만한 것이 아쉽지만 대가에게서 그런 점까지 기대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세산(勢山), 형산(形山), ()의 의미 자체가 새로운데다가 그 세 체계로 경복궁, 창덕궁, 동구릉을 하나의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이 제게는 희유(稀有)의 매력으로 느껴집니다.

 

명당이나 혈(정기가 모인 곳)은 지세가 강한 세산이 아닌 부드럽고 온화한 산인 형산에 자리한다는 설명과 함께 경복궁은 북악산이라는 형산이 풍수상으로는 적격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 것, 창덕궁은 세산인 북한산(경복궁의 세산도 북한산이지요.)과 형산인 응봉(鷹峯)이 교과서적이라는 점을 알게 된 것도 흥미롭습니다.

 

동구릉의 세산은 불암산, 형산은 검암산이라고 하지요?

 

즉 경복궁/ 창덕궁/ 동구릉이라는 혈이 들어선 형산인 백악산 / 응봉/ 검암산, 형산과 달리 거친 세산인 북한산/ 북한산/ 불암산이란 말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런데 체계가 아니라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비문(非文)이라고 하기에도 적당하지 않은 문장들은 문의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가령 ˝임수(臨水)에 해당하는 왕릉 앞쪽의 물줄기는 생동하는 기운의 방위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장 금기시했다...˝는 문장이 그렇습니다.

 

풍수 자체가 어려운데 문장이 간결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더욱 어렵다 생각합니다. 풀어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검색하다가 씁쓸한 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출처도 표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책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 자신들의 카페나 블로그 등에 게시한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제가 최근 구산 선문 계보도를 댓가 없이 공개하시고 풍수관련 지식을 정리, 게시하시며 이 모든 것은 고 장영훈 언생님의 저서에 기반을 하고 있으며 이 모든 지식을 남겨주신 고 장영훈 선생님을 꼭 기억해 주시길 바란다는 글을 올리신 선생님께 밀교(密敎)가 아닌 현교(顯敎) 종단을 보는 듯 하다는 댓글을 단 것은 이런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외람되지만 내용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문체이고 주술(主述) 호응이고 전달력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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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뉴턴이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뉴턴의 말이 아니라 인용된 말이다. 이 말은 진리를 겸손하게 인정한 말인가 하면 뉴턴이 동시대의 자연철학자인 로버트 훅을 조롱하기 위해 한 잔인한 말이라는 말도 있다.

뉴턴이 자신에게 끊임 없이 표절 혐의를 씌운 작고 구부정한 훅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이라는 점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용과 관련한 흥미로운 사례가 불교계에도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란 게송(偈頌)이 인용된 내력으로 이는 성철 스님이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스님의 원작(原作)이 아니라 스님이 중국 12세기 송(宋)나라의 청원유신(靑源惟信) 선사의 말을 변형, 인용한 것이다.

물론 청원유신 스님도 9세기의 운문문언(雲門文偃) 선사로부터 영향을 받아 한 말이다.(세 스님은 진리 또는 깨달음을 다소 다른 각도로 보았다.)

출처를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불명확한 부분이 있음을 감안하되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누구나 하게 되는 생각이다.

지식의 대양에서 표류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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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 재미가 없지만 직접 연주하면 뜻 밖의 감동으로 다가오는 곡이 슈만의 곡이라는 말을 했다.

나는 피아노를 들을 줄만 아는 입장이기에 바르트가 한 말의 깊은 의미를 헤아리기 어렵다.

롤랑 바르트는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는 파격적인 글을 쓴 바 있다. 슈만의 곡에 대한 말도 파격이란 생각이 든다.

케노시스란 자기 버림을 뜻한다.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자기 포기 즉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온 것을 의미한다.

불교라면 석가모니의 위대한 포기(great renunciation)에 비유될 수 있다. 애나 골즈워디의 ‘피아노 레슨‘이란 소설을 보자.

‘시반 선생님과 함께 한 피아노 레슨의
추억‘이라는 부제의 이 작품에서 시반 선생님은 ˝많은 교사들이 자신의 연주 방식대로 따라 하라고 가르치는데 그것은 단지 오늘을 위해 가르치는 거야. 그렇게 배운 것이 나중에는 걸림돌이 되거든. 학생들의 미래를 보고 준비를 시켜야 해.˝라는 말을 한다.

이렇게 학생들의 미래를 보고 준비를 시키는 피아노 교사들의 가르침도 케노시스라 할 수 있겠다.

롤랑 바르트처럼 참신하고 독창적인 생각과 표현을 하는 것도 화석화한 옛 것을 버릴 때에라야 가능한 것이기에 케노시스라 할 수 있다.

케노시스란 말을 너무 세속적으로, 쉽게 쓰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용어는 새롭게 의미 규정되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하고 속화의 운명에 노출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직 낯선 단어에 대해 너무 오버하는지도 모르겠다. 큰 의미의 불멸과 작은 의미의 불멸을 이야기한 밀란 쿤데라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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