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는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 재미가 없지만 직접 연주하면 뜻 밖의 감동으로 다가오는 곡이 슈만의 곡이라는 말을 했다.

나는 피아노를 들을 줄만 아는 입장이기에 바르트가 한 말의 깊은 의미를 헤아리기 어렵다.

롤랑 바르트는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는 파격적인 글을 쓴 바 있다. 슈만의 곡에 대한 말도 파격이란 생각이 든다.

케노시스란 자기 버림을 뜻한다.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자기 포기 즉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온 것을 의미한다.

불교라면 석가모니의 위대한 포기(great renunciation)에 비유될 수 있다. 애나 골즈워디의 ‘피아노 레슨‘이란 소설을 보자.

‘시반 선생님과 함께 한 피아노 레슨의
추억‘이라는 부제의 이 작품에서 시반 선생님은 ˝많은 교사들이 자신의 연주 방식대로 따라 하라고 가르치는데 그것은 단지 오늘을 위해 가르치는 거야. 그렇게 배운 것이 나중에는 걸림돌이 되거든. 학생들의 미래를 보고 준비를 시켜야 해.˝라는 말을 한다.

이렇게 학생들의 미래를 보고 준비를 시키는 피아노 교사들의 가르침도 케노시스라 할 수 있겠다.

롤랑 바르트처럼 참신하고 독창적인 생각과 표현을 하는 것도 화석화한 옛 것을 버릴 때에라야 가능한 것이기에 케노시스라 할 수 있다.

케노시스란 말을 너무 세속적으로, 쉽게 쓰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용어는 새롭게 의미 규정되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하고 속화의 운명에 노출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직 낯선 단어에 대해 너무 오버하는지도 모르겠다. 큰 의미의 불멸과 작은 의미의 불멸을 이야기한 밀란 쿤데라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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