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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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 평론가의 은유의 힘은 은유(隱喩)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시에 대한 책이다. 국내외 다양한 시인들의 시를 부지런히 많이 읽는 저자는 좋은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집들을 구해 죽을 만큼 많이 읽으라고 조언한다.

 

시에서 중요한 것은 모호한 그대로의 이미지이지 의미의 맥락이 아니다.(21 페이지) 저자는 몸으로 쓰는 시와 머리로 쓰는 시를 구분한다. 머리로 쓰는 시는 가공된 기억들을 가져다가 쓰는 시들, 그렇기에 외침, 주장, 선동인 시들이고 몸으로 쓰는 시는 욕망과 무의식의 시다.(23 페이지)

 

은유는 사유를 무한 확장하는 힘을 가졌다.(8 페이지) 시만 은유를 독점적으로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은유 없는 시를 상상하기는 어렵다.(30 페이지) 대상과 은유 사이에는 틈이 있다. 틈이 클수록 은유의 효과는 크다.(30 페이지) 틈은 의미가 깃드는 장소이다.(31 페이지) 은유는 맥락(脈絡)이 아니라 끊김이고 그냥 끊김이 아니라 맥락의 찰나적 출현이다.(36 페이지)

 

은유의 힘에는 방향에 관한 말들이 많다. 꽃은 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궁극의 무엇이다.(55 페이지), 은유는 실재에서 나왔으되 그것의 속박에서 벗어난다.(39 페이지), 윤동주 시인의 '구리 거울'은 얼굴 - 표면을 비추는 도구를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윤리성을 점검하는 사회장으로 작동한다.(63 페이지),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어야 그리움이 생겨난다. 말은 그것에게 건너가는 다리이다.(101 페이지), 시를 쓸 때는 대상에서 가장 먼 이미지들을 데려와야 한다. 대상과 먼 이미지들 사이의 모호함을 타고 나가라는 뜻이다.(110 페이지.. 30 페이지 참고), 사람의 목에서 나온 낭랑한 소리들은 음성학적 파장 현상을 넘어서서 말이 되고자 애쓴다(203 페이지) .

 

은유의 힘'에는 은유들이 넘친다. 두 가지이다. 저자가 설명하는 시인들의 시에 나오는 것과 저자 자신의 것. 가령 세상의 모든 펄럭이는 것들을 혀라 생각하는 임승유의 '수화(手話)'란 시가 그것이다.(30 페이지)

 

반면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이고 신체의 현전이 아니라 언어의 현전이다.(31 페이지)란 구절은 은유에 대한 (저자의) 은유이다. 시인은 자기 세계의 한복판에서 산다는 점에서 농부다.(85 페이지)는 구절은 시인에 대한 은유이다. 물은 죽음이고 부활이란 말(111 페이지) 역시 은유이다.

 

저자에 의하면 시는 모호함 속에서 윤곽을 만들며 떠오른다.(109 페이지) 우리는 저마다 시간이라는 우주적 규모의 도서관에 꽂힐 책을 쓰고 있다는 말(144 페이지)도 참신하게 읽히는 은유이다. 나쁜 은유, 해로운 은유는 없다. 오직 명석한 은유와 덜 명석한 은유가 있다.(39 페이지)

 

저자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속 사회는 가장 먼저 효율성이 없는 것들 즉 시와 철학을 제거한다고 말한다.(160 페이지) 일리있는 말이다. 하지만 대중이 스스로 재미 없는 것들 즉 시와 철학을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은유의 힘'은 수사(修辭)가 현란(絢爛)한 책이다. 들뢰즈, 아감벤, 바슐라르, 보르헤스 등의 이론들이 수시로 등장하지만 주의하면 크게 어렵지 않다. 시인은 욕망하는 자이고 시는 욕망 그 자체이다.(166 페이지) 직유는 아무리 좋더라도 은유의 나쁜 친척이다.

 

좋은 시인들은 이것과 저것은 같다고 쓰지 않고 이것은 저것이라고 쓴다.(169 페이지) 저자의 단언, 은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나쁜 시들은 사실보다 더 큰 진실을 담으려는 시, 큰 목소리로 외치는 시, 옳은 소리만 해대는 시들이다.(173 페이지)

 

저자는 악서가 있듯 악시도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악시 비판자는 없다는 것이다.(17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언제부터인가 주변에 악시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176 페이지) 거짓과 과도함에 오염된 시들, 인간 본성을 왜곡하는 시, 도덕적 상투성에 빠져 화석화된 진실들을 파렴치하게 담는 시들, 이기주의와 진부한 인지들로 가득찬 시들이 나쁜 시들이다.

 

시는 삶의 찰나들, 모호한 무의식적 꿈의 신호들, 구체적 경험의 국면들, 아침이 오고 다시 저녁이 오는 일 따위에 대해 쓴다.(177 페이지) 시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와 맞물린다.(183 페이지) 시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뚫고 우리에게 온다. 좋은 시들은 예외 없이 해석할 수 없는 심연을 갖고 있다. 시는 해석의 불가능성을 품고 있을 때 지속성을 얻는다. 이는 시가 말할 수 없는 것의 말함이기 때문이다.(183, 184 페이지)

 

시는 결코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전부를 감추지 않는다. 그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다. 위태로운 곡예다... 그런 시를 읽는 일이란 내게 끝없는 조갈이고 더 없는 해갈 그 자체이다.(정끝별 지음 '오룩의 노래' 7 페이지) 저자의 시론을 읽고 이 구절을 떠올렸다.

 

나는 시란 무의식의 바다를 맴도는 비정형의 이미지들을 언어화하는 것이라 말한다. 물론 죽은 비유일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시란 무엇인가란 물음과 의심 속에서 시를 사십 년이나 쓴 뒤 비로소 시의 수사학적 기교들, 은유와 상징과 이미지들, 시의 리듬과 소리의 파장들, 혹은 음역(音域), 의미와 무의미의 분별과 경계들, 그리고 시의 통사적 흐름들에 대해 가까스로 몇 자 끼적일 수 있었다고 말한다.(189 페이지)

 

이 창의성의 총체, 의외의 발상, 관성적 익숙함의 전복! 시가 종이에 쓰이고 종이에 인쇄되는 것이라면 모든 시는 피와 종이의 전쟁이다. 누가 시가 전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가? 시는 때로 거울이다. 거울은 온전하거나 깨져 있거나 상관 없이 무언가를 통찰하고 살피는 장치이다.(190 페이지)

 

좋은 철학이 그렇듯 좋은 시 역시 낡은 규범들을 깨고 그 경계를 넘는 반시대적 유전자를 갖는다.(233 페이지) 좋은 시는 기억이 아니라 반() 기억 혹은 망각에 더 기댄다. 기억에 기댄 시들은 평범하다... 비범한 시인들은 가증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삶의 파편들이 뒤죽박죽 섞인 채 방치된 망각과 무의식에서 시를 길어낸다.

 

시는 의미화에의 의지가 아니라 존재에의 의지에 더 강한 탄력을 얻는다.(247 페이지) 시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태도와 시선의 영역이다.(247, 248 페이지) 시는 살아있다는 것의 기미를 언어로 포획하는 일이다.(249 페이지) 좋은 시들은 시가 말의 무덤이거나 수사(修辭)이기 이전에 리듬이고 속도라는 걸 일러준다.(271 페이지)

 

좋은 시구를 읽을 때 앎 이전에 몸이 먼저 시의 리듬에 반응한다. 리듬이란 정신의 율동이고 세상을 가로질러가는 마음의 속도다.(271 페이지) (보는 것)은 대상에의 본성적 이끌림이고 주체의 의지가 그것을 향해 막무가내로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272 페이지) 시인은 시의 창조자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즐비한 것들의 발견자다. 직관은 말로써가 아닌 빛으로 온다. 시인은 이 빛, 이미지로 온 것에 언어를 덧입힐 뿐이다.(272 페이지)

 

은유의 힘은 이전보다 조금 더 자신 있게 시를 대할 수 있으리란 예감을 갖게 한다. 정독(精讀) 아니 고투하는 수가 내게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늘 최후의 은 나의 것이다. 읽는 방식을 배웠으니 읽는 수 밖에.

 

읽기에 좌절과 혼돈이 수반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리라, 특정 시를 읽으며 그것이 왜 좋은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 시는 직관적으로 읽히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설명하지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어떤 시가 나쁜 이유를 말하는 것은 별개의 차원이리라.

 

많이도 읽고 깊이도 읽자. 읽다가 막히면 은유의 힘으로 돌아가 보자. 그리고 시를, 닮은 듯 다르게 설명하는 다른 논자들의 글도 만나도록 하자. 삶은 살기 어려운데 시가 쉽게 쓰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말한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인용하며 문 밖에서 문 안을 비판하지 말고 참여하는 지혜, 아니 용기를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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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만물의 구석구석을 비춘다. 그 비춤에 불편부당이나 부정의가 틈입할 여지가 없다.˝

이 문장은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아 비롯된 잘못된 문장이다. 필자는 불편부당이란 말과 부정의란 말을 병렬 구성(같은 차원의 낱말로 취급)했다.

불편부당(不偏不黨)을 부정의와 유사한 단어로 안 것이다. 하지만 불편부당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짐 없이 공정한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옳게 고치려면 ˝햇빛은 만물의 구석구석을 비춘다. 그 비춤은 불편부당하고 정의롭다(공정하다)˝라 해야 한다.

무엇 무엇이 없다는 식의 부정 형식으로 쓰려면 ˝햇빛은 만물의 구석구석을 비춘다. 그 비춤에 편파나 부정의가 틈입할 여지가 없다.˝고 하면 된다.

사소한 것일망정 실수는 현란한 수사와 놀라운 박식마저 무색케 할 수 있다.(나는 현란하다는 말을 단정적이라는 의미로 썼다.)

˝( )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시˝란 문장에서 답은 몇 가지가 있겠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은유이다. 은유는 사유를 확장시키는 유용한 수단이다.

필자의 실수는 은유를 설명한 놀랍도록 민첩하고 재기바른 책에서 펼쳐졌다. 물론 전체를 보아야 옳다.

책 제목은 ‘은유의 힘‘. 시를 이해하는데 꽤 유용할 뛰어난 책이다. 멋지다. 물론 나는 아직도 환유에 더 관심이 간다. 이런 어긋남이 재미 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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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도 - 동시성과 자기(self) AKS 번역총서 9
진 시노다 볼렌 지음, 이창일.차마리 옮김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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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우리 속에 있는 지헤의 여신들의 저자 진 시노다 볼린의 심리학의 도()’. 부제는 동시성과 자기(self)’이다. 저자는 융 학파의 심리학자이다. 부제를 통해 알 수 있듯 이 책은 융이 제안한 동시성이란 개념을 상세히 설명한 책이다.

 

융은 동시성을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여주는 무인과적(無因果的) 연결 원리로 기술(記述)했다.(21 페이지) 동시성은 융의 매우 비전(秘傳)적인 이론들 가운데 하나이다.(32 페이지) 융은 그러나 이 이론을 70대 중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썼다.

 

동시성은 인간이라는 참여자를 필요로 한다.(34 페이지) 그것은 참여자가 우연의 일치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융은 세 가지 유형의 동시성을 설명했다.(35 페이지) 정신적 내용과 외부 사건의 우연한 일치, 개인이 꾼 꿈이나 본 무엇인가가 멀리 떨어진 것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과 부합하는 경우, 일어날 사건에 대한 이미지(, 영상, 예감 등)를 가지고 있고 후에 그것이 발생하는 경우 등이다.

 

동시성 사건은 깨어 있을 때 꾸는 꿈 같은 것이다.(65 페이지) 꿈이 그렇듯 동시성은 사람마다 엄청나게 다양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꿈 횟수, 꿈의 컬러 여부, 회상 여부, 강렬함 등에서. 저자는 겉보기에 우연한 만남들로 인해 융의 사상을 접한 경험을 회상한다.(31 페이지) 그리고 좌뇌와 우뇌의 통합 필요성을 역설하고(23 25 페이지) 원자 단위의 수준에서 시간과 공간이 연속체가 된다는 사실, 물질과 에너지는 상호변환된다는 사실, 관찰자와 관찰 대상은 상호 작용한다는 사실 등을 언급한다.(20 페이지)

 

저자는 스웨던보르크의 대화재(大火災) 환영(幻影)은 물론 융 자신의 동시성 사건 체험 등을 예시한다. 저자에 의하면 동시성은 유일무이하고 인과율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고 일반적으로 반복될 수 있는 사건들의 연속적 계기이다.(37 페이지)

 

저자는 신화에서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르스(반인반수의 괴물)를 대적하기 위해 라비린토스(미궁)로 들어갈 때 그 안에서 나올 수 있는 아리아드네 공주의 황금실의 도움을 받은 것을 예시하며 심리적 미궁의 새로운 왜곡과 굴곡에 어떤 행위나 해석의 신탁이 필요하기에 직관이 우리를 그 속에서 탈출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87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의 남신들과 여신들은 이제 올림푸스가 아닌 우리의 집단 무의식 속에 잘 살고 있다.(88 페이지) 특정 여성에 대한 강렬한 숭배의 감정도 믿는 자의 원형 안에 있다.(89 페이지)

 

전체 9장 중 6동시성과 주역의 지혜가 가장 흥미를 끈다. 해석의 대상인 주역은 중국 철학의 유가(儒家)와 도가(道家)가 모두 근원을 가지고 있다. ‘주역은 도()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를 부여하는 우주의 모체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원리를 가르친다.(100 페이지) 주역은 하나의 은유이다.(100 페이지) 주역은 해석해야 할 신탁이다.(은유 스토리텔링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동시성이나 배후에 놓인 도의 존재는 주역의 조언이 작동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다.(102 페이지) ()라는 생각과 공감하는 철학적 견해는 물론 의미를 직관하고 은유와 상징을 음미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104 페이지) ‘주역은 신탁을 묻는 사람이 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이해할 수 있는 답을 얻지 못할 것이라 경고한다.

 

저자는 좌절된 마음에서도 자신들 자체나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그들의 이미 기울어져 있는 관점은 변할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가 가능하게 있다고 말한다.(117 페이지) 이 말을 듣고 나는 김인환 교수가 한 말을 찾아보았다. “비록 출구가 없는 상황 속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그 상황을 존재의 영원한 질서로 단정할 권한이 없다. 우리의 욕망이 그것의 너머를 투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거부인 동시에 개방이고 부정인 동시에 사랑이다...”(‘상상력과 원근법’ 253 페이지)

 

낮에 부암동에서 한 시인과 식사하고 차 마시며 평론가, 시인들을 이야기했다. 나는 김인환 교수에 대해 말했다. 김 교수가 문학평론집인 상상력과 원근법에서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1898 1983)를 이야기하며 마르크스의 자본에 나오는 수식 등을 이야기했다는 말을 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고 서점에 들러 내가 산 책이 바로 주역이야기가 있는 심리학의 도‘(중고 서점이기에 어떤 책을 염두에 두고 가게 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심리학의 도도 우연히 보게 되었다.)이다.

 

어떻든 나는 심리학의 도에 나오는 좌절된 마음에서도 자신들 자체나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그들의 이미 기울어져 있는 관점은 변할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가 가능하게 있다.”는 말을 접하고 비록 출구가 없는 상황 속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그 상황을 존재의 영원한 질서로 단정할 권한이 없다.”는 김인환 교수의 말을 인용하게 되었는데 해당 구절이 있는 챕터가 바로 스라파에 대한 챕터인 도식과 욕망이란 챕터이다.

 

각설하고 꿈과 동시성 사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얻는 또 다른 방식이다. 주의를 기울이든 그렇지 않든 꿈과 동시성 사건은 계속 일어난다. 주의를 기울이고 기억해내려 시도하지 않는다면 알아채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146 페이지)

 

도 경험은 우리가 다른 모든 존재와 저 우주에 연결되어 있다는 직접적 지식,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통해서 모든 것의 배후가 되며 누군가는 신이라 부르기도 하는 참다운 사실을 알게 해준다. 동시성 사건들은 이런 근원적 하나됨에 대한 순간적인 깨달음이며 어떤 이상야릇한 우연의 일치를 통해 전달되는 의미이다.(146 페이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기독교의 비전, 도에 대한 동아시아의 비전, 자기와 동시성이라는 융의 생각, 전체성을 지각하고 대립물을 포함하는 오른쪽 뇌반구의 직관적 방식, 뇌나 육체와 분리된 의식에 대한 초상심리학적 증거, 양자물리학에서 바라본 새로운 실재관, 이 모든 것들은 말할 수 없고 볼 수 없으며 의미를 부여하는 동일한 어떤 것의 모든 부분들이다.(15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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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은 융학파의 심리학자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책이다. 신화적 요소와 페미니즘이 만난 영성 넘치는 이야기 책이다.(이 책의 원제는 ‘Women who run with the wolves‘이다.)

이 책에서 에스테스는 창의력은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깊어서 창조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는 경우에도 나타난다고 말한다.(283 페이지)

독문학자 정은경 교수도 글과 말은 반드시 해박한 지식과 전문적인 식견이 아니라 글을 쓰고 말을 하고 싶다는 어떤 욕망과 정념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맥락이 같은 말을 했다.(‘밖으로부터의 고백 디아스포라로 읽는 세계문학‘ 6 페이지)

중요한 사실은 욕망과 정념이 글과 말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도록 한다는 점이지만 욕망과 정념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여성 본연의 본능적 힘을 여걸(女傑)이라 말한다. 에스테스에 의하면 건강한 여성은 늑대와 아주 비슷해서 활력이 있고 힘과 생기가 넘치며 자기 영역을 잘 지킬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북돋우며 창의적이고 충직하다.(20 페이지)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이라는 표현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나는 창의력(에스테스의 용어), 욕망과 정념(정은경 교수의 용어), 그리고 따스한 늑대의 창조적 에너지(추천사를 쓴 김승희 교수의 표현)에 관심을 갖는다.

나는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이라는 빛나는 은유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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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연이어 두 분의 타계 소식을 접했다. 어제는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 선생님, 오늘은 혈기도 사범 우혈(宇穴) 허장수 선생님. 모두 1936년생으로 내 어머니와 같은 연세시다. 황병기 선생님은 지난 해 12월 한무숙 문학관에 들렀을 때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었고 허장수 선생님은 지난 해 여름 갑자기 타계하신 것을 오늘 확인한 것이다.

 

잘 아시듯 황병기 선생님의 아내 한말숙 선생님이 한무숙 선생님의 동생이다. 지난 해 3월경 창덕궁 앞의 혈기도장을 방문해 선생님을 뵙고 일이 끝나는 5월 이후 등록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었다.

 

그리고 4월경에는 그 분의 신간 몸이 나의 주인이다를 샀다. 82세의 연세에도 다리를 찢고 찍으신 사진이 인상적인 책이다. 물론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거리가 너무 멀어서 슬그머니 생각을 접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제 문학을 좋아하는 분들 앞에서 나희덕 시인의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란 시를 외우고 그 의미를 설명한 것이 기억난다.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는 목련 그늘이 좋으니 꽃 지기 전에 놀러오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친구에게 끝내 놀러가지 못하고 그가 타계한 뒤인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놀러간다는 시이다.

 

우혈 선생님은 20대 후반 설악산에서 만난 천우(天宇) 선생님이란 분으로부터 17년간의 산중 수련을 받고 하산해 오늘에 이른 분이시다. 어제는 타계 사실도 모르고 지인에게 그 분 이야기를 했었다. 책에서 무엇보다 흥미를 끄는 부분은 스승인 천우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생님과 함께 설악산에서 산 지 17년이 지난 어느 날 선생님의 영()이 암굴을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한다. 우혈 선생님은 이를 천우 선생님이 뼈와 가죽만 암굴에 남겨두고 정좌한 채 세수(歲數) 107세로 시해등선(尸解登仙)하신 것이라고 풀었다.

 

우혈 선생님은 세수 82세로 타계하셨다. 건강하신 분이 왜 갑자기 타계하셨을까? 타계 소식을 알린 한 네이버 블로거에 의하면 혈기도는 행공 하나하나가 고되고 통증이 큰 수련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달은 고사하고 한 두 번만에 중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자세조차 잡기 힘들고 무엇보다 호흡이 아예 되지 않는다고 한다.

 

초심자는 익숙한 분들의 동작을 흉내내는 것도 어렵고 보통의 경우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해 수련하는 두 시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꽤 힘들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몇 달을 버티다 보면 큰 고비는 넘기게 되지만 그럼에도 은은한 통증은 계속 되는 이 수련을 왜 하냐고 묻는다면 몸의 변화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그 블로거는 말한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고 고통 속에서도 몸이 시원해지고 가뿐하다는 것이다. 압권(壓卷)이라 할 것은 권하지는 못하지만 인연이 있는 분이라면 꾸준히 하셔서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그 블로거의 말이다.

 

나는 선생님의 타계가 믿어지지 않아 도장에 전화를 하고 말았다. 사고사(事故死)가 아니라면 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매력과 몸이라는 소우주의 질서는 별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뿐이다.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의 한 구절을 생각하게 된다.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陳設)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 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치병(治病)과 환후(患候)가 따로인 경우가 있는 것처럼 세상사는 제 길이 있는 것 같다. 선생님의 타계는 요즘 암()이란 몸의 정상적인 질서를 벗어난 세포가 무한 분열이라는 자기 길을 가는 것이라 생각하는 나에게 하나의 숙제로 다가온다. 나는 지금 선생님의 유품인 '몸이 나의 주인이다'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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