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3/4이 지났다. 바쁘게 보낸 시간들이었지만 많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바쁘게 보냈다는 사실이 시간을 잘 활용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인문학 중심의 읽기를 하는 나는 예년만 못 하지만 여전히 자연과학으로부터도 실마리를 얻으려 애쓰고 있다.

작년 이즈음에 비해 올해는 책을 읽은 양이 반 정도에 불과하다. 머리가 아파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읽기와 쓰기에 변화를 주려한 결과이다.

나이가 들면 관심 영역을 좁히게 된다는 말이 실감난다. 인문학 공부는 글쓰기로 마무리되어야 의미가 있기에 글쓰기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최근 한 천문학자가 이론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그는 이론을 세계에 관한 검증 가능하고 예측 능력이 있는 모형들을 기술하는 대체로 수학적인 구성물로 정의했다.(데이비드 헬펀드 지음 ‘생각한다면 과학자처럼’ 282 페이지)

나는 이 말을 이론이 현실을 완전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읽었다. 유연한 눈으로 학문과 세상의 관계를 볼 필요가 있다.

한 사회학자의 생자공(生自共)이라는 표현을 흥미 있게 읽었다.

필자는 마르크스를 ‘생존’(생산 양식) 전문가, 베버를 ‘자존’(특히 종교사회학) 전문가, 뒤르케임을 ‘공존’(유기적 연대-기계적 연대 등) 전문가로 정의했다.

물론 세 사상가 모두 각각의 전공 영역에서는 탁월한 업적을 남겼지만 어느 누구도 세 영역의 유기적 - 체계적 상호작용과 연계상황을 충분히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교수신문 2017년 9월 13일)

이런 글은 학문간 또는 사상가간 관계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하지만 공부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도 한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뜻의 소년이로학난성(少年而老學難成)이라는 주희의 말이 와닿는 시간들이다.

물론 주희는 짧은 시간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라는 말을 처방으로 제시했고 자극도 되고 격려도 되는 말도 했다.

섬돌 앞 오동나무 잎 가을 소리를 낸다는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이란 낭만적인 구절이 그것이다. 여전히 ‘지금‘은 공부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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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히지 않는 쉬운 책도 있고,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어려운 책도 있다.

내게는 잘 읽히지 않는 쉬운 책 중 하나가 2015년 겨울(12월) 월동 준비라도 하듯 사 서가(書架)에 꽂아둔 뒤 이듬해 봄(5월) 박물관 나들이시 손에 들고 다닌 ‘꽃으로 세상을 보는 법’이었다.

이 책은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가 하나의 주제를 각자의 설명 방식으로 풀어낸 책이다.

가령 자연과학자는 연리목은 몸의 공유를 택한 경우로, 혼인목은 공간의 공유를 택한 경우로 설명하고 인문학자는 배려의 최고봉은 뿌리도 둘이고 몸도 둘이지만 두 나무가 하나처럼 사는 혼인목이라 풀어낸다.

어떻든 나는 250여 페이지 정도에 시집만한 크기를 가진 ‘꽃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다 읽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최근 나무에 대해 다시 생긴 관심으로 그 책을 펴보게 되었다. 분명 같은 책이지만 이전과 다른 분위기, 다른 뉘앙스를 가진 책으로 느껴지는 것이 신기하다.

이 뿐 아니라 나는 그 낯선 새로움에 편승해 시인들이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한 나무 시들을 찾아 읽었다.

리기다 소나무의 제법 굵은 삭정이가 자신의 걸음 앞에 툭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무가 썩어가는 제 팔 하나를 스스로 잘라내가면서 말을 건넨 것으로 표현하는 시(엄원태 시인의 ‘나무가 말을 건네다‘).

꽃피는 열기에 봄비가 휘어져 내리는 목련 부근을 이야기하는 시(고옥주 시인의 ‘다시 목련’).

엄원태 시인의 시는 오래도록 병을 앓고 있는 시인의 감정이 이입된 시로, 고옥주 시인의 시는 공간을 휘게 하는 중력장(重力場)을 연상하게 하는 시로 나는 읽었다.

이 두 생각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천문학자는 진정한 과학자들의 한 가지 공통점으로 호기심을 들었다.

그에 의하면 절대적 진리는 인간의 큰 관심사가 아니다. 그리고 진리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발명품이다.(데이비드 헬펀드 지음 ‘생각한다면 과학자처럼’ 36 페이지)

물론 헬펀드가 말한 진리 구성의 주체는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지성이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없이 집단지성은 있을 수 없다.

호기심과 진리 구성(構成), 이것이 가장 중요한 기본이리라. 당연히 나무를 보는 데에도 적용될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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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야 할 것들이 많은데 감상을 위한 소설을 읽는다. 김경해의 소설집 ‘드므‘란 책. 이런 의도로 소설을 읽는 것은 작년 7월 한강의 ‘흰‘ 이후 15개월만이다.

드므는 궁궐의 전각 한쪽에 불을 끄기 위해 설치한 가마솥 모양의 물동이이다. 하지만 그릇을 직접 보면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이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주술을 위한 그릇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옛날 사람들은 화마(火魔)가 건물을 향해 날아들다가 드므 속 물에 비친 제 흉악한 얼굴을 보고 놀라 달아날 것이라 믿었다.

이런 정서는 월대란 말에도 나타난다. 궁궐의 주요 전각들을 떠받치는 섬돌인 월대는 월대(越臺)가 아닌 월대(月臺)이다. 달을 좀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대라는 뜻이다. 물론 얼마 높지 않은 월대에 올라선들 달과의 거리에는 별 차이가 없다.

‘드므‘는 전 수록작들이 궁궐 또는 박물관, 능 등의 소품들을 매개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독특한 작품집이다. 책을 어느 정도 읽고 보니 해설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순수 감상을 위한 책과 자료 차원의 책이 따로 있지는 않다. 궁궐이나 박물관, 능의 소품들을 작중 주인공들이 어떻게 오브제들로 삼을까, 하는 궁금증이 책을 계속 읽게 하는 힘이 된다.

감상을 위해 읽는 책에서 자료를 건질 수 있고 자료를 위해 읽는 책에서 즐길 거리를 얻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드므‘로부터 얻은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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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해 11월 4일 오전 우리가 성철스님이라고 불렀던 수도자는 세수(歲首), 82세 법랍(法臘) 59세의 삶을 마치고 그분이 늘 응시하던 불생불멸의 풍광(風光) 속으로 고요히 걸어들어가셨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 시월의 해인사 뜰녘에 선 나는 그분이 ”머지않아 곧 가시겠구나”라는 선명한 예감을 기(氣)로 느꼈다....“

93년 10월 13일 월간 ‘해인(海印)’지(誌)에 실린 일지(一指) 스님의 글이다. 외우는 글인데 오늘 오랜만에 그 글을 보고 머지않아 곧 가시겠구나라는 부분에 인용 부호가 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스님의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에도 실린 저 글을 읽은 지 20년 정도가 되었는데 이제야 발견하다니.. 추정되는 이유라면 인용 부호 정도를 분별할 겨를이 없을 만큼 글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아 곧바로 외운 뒤 그 내용이 있는 부분은 다시 들춰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분의 말씀일까?

올해는 해인(海印) 총림(叢林)이 설립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총림은 수행승들이 한곳에 머물며 수행하는 것을 나무가 우거져 숲을 이루는 모양에 비유한 이름이다.(해인사는 신라의 승려였던 순응과 이정에 의해 802년 세워졌다.)

고려 대장경(大藏經)을 보관하고 있기에 법보 사찰인 해인사의 총림 설립 50년은 우리나라사찰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창덕궁(昌德宮)과 종묘(宗廟) 외의 다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대해서는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는데 해인사에 보관된 고려 대장경과,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장경각(藏經閣)도 세계문화유산이다.(장경각이 지어진 것은 조선시대인 15세기이다.)

오는 10월 10일 오후 1시 해인사 보경당에서 해인 총림 개설 50주년 기념 및 유네스코 등재유산 활용과 가치 학술세미나가 개최된다고 한다.

일지 스님의 산문집인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에 나는 그 후 스님이 쓴 이론서인 ‘중관(中觀) 불교와 유식(唯識) 불교’, ‘붓다 해석 실천’ 등을 읽었다.

이해를 위해 지금도 고투(苦鬪)의 길을 걷고 있지만 탄탄한 논리와 정연함에 흡족하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나는 불교 이론 공부도 해야겠지만 문화유산 공부를 위해서라면 불교 미술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사학자 강우방 박사의 글이 눈길을 끈다. ‘젊은 날 낭만·방황의 진원지’(2002년 6월 17일 중앙일보 강남통신 수록)라는 필자의 글에는 플라타너스, 낙산(駱山)자락, 동숭동 학림(鶴林)다방 등의 단어들이 등장한다.(나무, 사람, 건축물의 유기적 결합!)

앞의 두 단어가 문화 해설과 관련해 내가 최근 들은 것들이라면 지금은 학림(學林) 다방으로 변한 학림(鶴林) 다방의 학림(鶴林)은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곳인 쿠시나가라 사라쌍수(娑羅雙樹)의 숲을 지칭하는 말이다.

최근 정동(貞洞) 유람(遊覽) 중 마로니에가 칠엽수(七葉樹)의 별칭이라는 사실, 불교 1차 결집이 이루어진 칠엽굴(七葉窟)이 주위에 칠엽수가 많아서 불리게 된 이름이라는 사실 등을 알았다.

여태동 기자의 ‘점심 시간엔 산사에 간다’ 등을 참고해 틈나는 대로 사찰에 들르고 싶다. 해설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있을지?

내게 불교 미술서들은 중관, 유식, 아비달마 등의 이론서와 불교 신앙서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게 하는 방편(方便), 궁궐 문화를 더 잘 알게 하는 촉매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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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명절이다. 힘들게 귀성길에 오르는 사람들의 고난의 행군은 올해라고 예외는 아니다. 추석 연휴이지만 나는 올해 설 연휴 시작일인 1월 26일 창덕궁에 갔다 온 생각이 난다.

명절에 궁궐에 다녀온 것은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이 특별해서는 아니다. 정조의 능인 건능이 있는 화성에까지 갈 수 없어 정조와 깊은 연관이 있는 창덕궁, 특히 후원에 들러 인사라도 할 생각에서 다녀온 것일 뿐이다.

정조에게 인사를 하게 된 것은 별다른 사연이 있어서는 아니다. 정조 이야기를 설정한 것이 잘된 선택이었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다.

아들 문효세자를 곁에 두기 위해 중희당을 지은 이야기, 상조회(賞釣會; 상화조어회賞花釣魚會)를 만들어 규장각 신하들과 창덕궁 후원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꽃구경을 하고 낚시를 하며 시를 지은 이야기 등 정조의 사연을 택해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명절을 즈음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호칭 불평등 또는 호칭 비대칭이다. 아내는 남편의 남자 동생을 도련님이라 부르는 데 비해 남편은 아내의 남자 동생을 처남이라 부르는 것이 대표적이다. 처남 대신 남편이 아내의 남자 동생을 부르는 존칭이 있는지 모르겠다.

조선 왕실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열에 관심이 간다. 창경궁 공부를 할 때도 그런 점이 대두된다. 창경궁은 성종이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할머니), 예종의 비인 안순왕후 한씨(작은 어머니), 추존왕인 덕종 비인 소혜왕후 한씨(어머니) 등 세 분의 대왕대비를 위해 수강궁 터에 지은 궁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안순왕후와 소혜왕후는 서열을 놓고 갈등했다. 안순왕후는 소혜왕후의 손아래이지만 남편이 왕이 된 경우이고 소혜왕후는 손위이지만 남편이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뒤 아들(성종)에 의해 추존 왕이 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손위, 손아래 여부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 남편이 왕이 되었는지 아닌지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가 문제이다. 창경궁은 정치를 위해 지은 궁이 아니다. 성종이 세 대왕대비를 위해 지은 여성을 위한 궁궐이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비교하는 마음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비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창덕궁과 경희궁을 비교하는 것이 더 실용적이리라.

조선 전기에 경복궁이 정궁이고 창덕궁은 이궁(離宮; 별궁)이었다. 후기에는 창덕궁이 정궁이고 이궁은 경희궁이었다.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은 없을 수 없다. 그렇지만 아니 그렇기에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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