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심이지만 조선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음을 실감합니다. ‘경복궁 vs 창덕궁‘의 구도를 공부하며 알게 된 태종의 안티테제인 정도전을 통해 성리학 - 관념적 지식에 매몰되었던 조선 중기 이후의 성리학과는 다른 고려말과 조선 초기의 개혁적인 성리학- 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다행입니다.

지난 해부터 이어진 조선에 대한 관심이 왕들과 관계된 궁궐과 박물관 순례로 이어졌습니다.

능도 궁궐보다 못하지만 어느 정도 가고 있고 신위를 모신 종묘에서는 이제 곧 모일 것이고 조선왕조실록도 공부하게 될 터인데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 그리고 그곳의 경기전에 소장된 어진 등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스스로 분발을 다짐하게 됩니다.

왕이 유배생활했던 - 가령 단종이 유배되었던 영월 청령포 같은 - 곳에도 언젠가는 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주 어진박물관에 대해 알고 싶어 인터넷 사이트를 찾았는데 슬라이드 방식으로 옆으로 움직이는 전시물들이 너무도 리얼해 마치 현장에서 태조의 어진을 직접 보는 듯 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두 개의 자아란 개념입니다. 하나는 물리적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가 없는 곳에서도 존재하는 온라인 자아입니다.

‘감각의 박물학‘의 저자인 다이앤 애커먼은 최근 작인 ‘휴먼 에이지‘에서 온라인 자아는 우리가 가다듬고 유지해야 하는 것이라 말하며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없을 때조차도 우리의 온라인 자아를 향해 반응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애커먼이 말하는 것은 온라인에 존재하는 우리의 자아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의미하고 제가 말하는 것은 온라인을 통해 자료를 봄으로써 생기는 우리의 자아 감각이니 차이가 분명합니다.

서울을 수식하는 많은 말들 가운데 제게 가장 어필하는 것은 ˝한양은 유학자가 설계한 계획도시이며 유교적 이념을 집약한 도읍˝(장인용 지음 ‘주나라와 조선‘ 251 페이지)이라는 말입니다.

숭례문(崇禮門), 흥인문(興仁門), 보신각(普信閣), 회현(會賢), 적선(積善), 안국(安國), 가회(嘉會)등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신 등의 이념이 깃든 서울, 그것도 문화도시 종로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게 되어 기쁘고 행복합니다.

연구원 지원서를 쓸 때 변변하게 쓸 이력이 없어 우울해 하자 조선 시대에 관료 진출을 하지 않고 공부만 한 선비들이 얼마나 많느냐는 말로 제게 최고의 격려를 해준 동기 이** 선생님께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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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禮)와 종(宗), 이 두 글자에도 시(示)라는 글자가 들어 있다. 禮는 조상의 위패<示>, 갖가지 음식을 뜻하는 곡(曲), 제단(祭壇)을 의미하는 두(豆) 등으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禮는 제단에 차린 음식을 고루 나누는 것과 연결된다. 벼를 뜻하는 화(禾)와 그것이 입<口>에 고르게<평平등하게> 들어감을 의미하는 평화(平和)도 나눔과 관련된 말이다.

정의로움을 의미하는 의(義)도 희생양(羊)을 칼(아我는 칼을 뜻함)로 고루 나누어야 정의롭다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종교(宗敎)라는 글자에 쓰이는 으뜸 종(宗)자는 상에 위패<시示>를 놓고 제사 지내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이다.(장인용 지음 ‘周나라와 조선’ 102 페이지) 장인용은 삼국시대 이전 삼한시대부터 있었던 데릴 사위 제도를 언급하며 그것은 시집간 여자도 재산을 상속받았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장인용에 의하면 따라서 여자들도 재산을 지니고 있었으며 오히려 그 재산을 바탕으로 남편을 선별했다.(122 페이지) 장인용은 제사와 상속은 별도의 문제 같지만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140 페이지) 제사를 지내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든다. 고대 사회에서 그것은 모두 토지의 수확물로부터 나왔다. 그렇기에 누군가 제사를 맡는다는 것은 그 만큼의 상속을 더 받아야 가능한 일이다.

조선 초기는 형제자매가 재산을 균분상속을 받았다. 이런 제도는 후에 종법宗法 제도 시행으로 인해 와해된다. 이 부분에서 정도전이 죽임당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시대상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궁금하다.

전제개혁(田制改革)을 펼침으로써 고려 말의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뻔했던 정도전,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도덕성이 높은 왕과 유학으로 철저히 무장한 사대부들의 유교 이상향인 국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던 정도전...그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개혁을 완성했다면, 하는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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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와 조선 - 이상국가 주나라를 꿈꾼 조선의 혁명
장인용 지음 / 창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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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하면 주역(周易)을 생각하는 것이 정해진 코스인 듯 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문화해설을 공부하며 알게 된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 등의 도시 건설 원리가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근원을 두고 있다. ‘주례(周禮)’는 주() 왕실의 관직 제도와 전국 시대(戰國時代) 각 국의 제도를 기록한 책이다.

 

사실 주나라는 우리와 꽤 밀접한 연관을 갖는 나라이다. 우리와 주나라는 노()나라의 공자(孔子)와 남송(南宋)의 주자(周子)로 인해 연결되었다. 장인용의 주나라와 조선을 통해 우리는 주나라의 종법(宗法)제도(制度)를 편의대로 받아들인 조선이 자초한 갖가지 폐해를 알게 된다. 종법 제도란 장자를 우선시하는 제도이다. 공자가 받아들여야 할 이상(理想)으로 생각한 나라가 주나라이다.

 

저자는 우리가 유학과 성리학에서 전범(典範)으로 내세우는 이상향으로서의 주나라에 대해 어렴풋이 알 뿐 역사적 실체로서의 주나라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한다.(24, 25 페이지) 특기할 것은 하(), 은상(殷商), ()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고 또 다른 나라가 그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존한 것이다.(29 페이지)

 

춘추시대의 공자가 다시 돌아가자고 한 주나라의 기초를 만들고 대표하는 인물이 문왕(文王)이다. 공자가 편찬했다는 시경(詩經)’에는 문왕을 칭송하는 시들이 한 부분을 차지한다. 문왕은 은상(殷商)을 쳤는데 이는 주나라가 자신들보다 10배 이상인 세력을 가진 큰 나라를 치는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 문왕(文王)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은나라를 친 후 은상의 조상을 모시는 묘당(廟堂)에 가서 제사를 올렸다. 무왕은 은상의 조상들에게 주왕(紂王)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고 자신은 폭군 주왕(紂王)을 벌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무력을 동원했다고 밝혔다.(50 페이지) 어찌어찌 해서 주왕의 군사를 이기기는 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아직 은상 사람들 전체를 대적하기에 중과부적인 주와 무왕이 취한 절묘한 방편이었다.

 

주나라는 중원의 서쪽에 자리 잡은 나라였다. 동쪽의 은상에게 억눌린 채 설움을 겪고 신하의 예를 다하는 종속된 처지였다가 은상을 극복하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했지만 삼감과 주왕의 아들 무경의 반란에 맞닥뜨렸고 동이족들에 시달렸다. 동이족은 고구려를 떠올리겠지만 굉장히 다양한 부족들의 통칭이다. 주나라가 은상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은 동이족들이 은상 주왕의 힘을 뺀 덕분이라 할 수 있다.(96, 97 페이지)

 

주나라 혼자 드넓고 이민족들이 무수한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취한 특단의 조치는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은상의 유민들을 안정시키고 그들에게 다시 자치권을 주어 제후국(諸侯國)으로 주나라 질서 안에 편입시키는 것(98 페이지)이고 다른 하나는 주나라가 동쪽으로 이사가는 것이다.(100 페이지)

 

주나라는 서쪽에서 중원(中原)만을 바라볼 때는 중원을 전부로 알았지만 막상 들어서자 사방에 위협적인 많은 민족이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 중원의 안정화를 위해 주나라가 견지한 정책은 봉건(封建)과 종법(宗法)이었다.(101 페이지)

 

종법의 종()은 상에 위패를 놓고 제사 지내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이다.(102 페이지)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자 통치권의 상징이었다. 은상 사람들은 낙읍의 동쪽에 거주했기에 그들의 묘당은 동쪽에 있었고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에 살았기에 후직을 비롯한 주나라의 묘당은 서쪽에 있었다. 이것이 예법으로 전해져 지금의 서울에도 왕궁의 동쪽에 종묘가, 서쪽에 사직단이 있는 것이다.(105 페이지)

 

주나라가 은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종법이 주나라 특유의 장자 상속과 결합하고 다시 이것이 봉건과 결합하여 주나라 특유의 정치체계와 예법이 만들어졌다.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이민족들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종법과 봉건을 합친 주나라 고유의 통치제도가 탄생한 것이다.(106 페이지)

 

()나라는 좌묘우궁(左廟右宮)이었다.(248 페이지) 궁 하나와 묘 하나(궁 옆에 묘)인 것이었다. 주나라는 좌묘우사였다.(249 페이지) 주나라는 궁궐의 동쪽에 은상의 조상을 모시는 묘당을 짓고 서쪽에는 자신의 조상을 모시는 묘당을 따로 지어 두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이어갔다.(51 페이지) (우리가 보기에) 경복궁 왼쪽에 사직단, 오른쪽에 종묘가 있는 조선의 궁()과 묘()의 배치는 주나라의 궁여지책 또는 방편을 따른 것이다.

 

중요하고 흥미로운 말은 천명(天命)이란 말이다. 주의 무왕은 은상의 조상들을 향해 제사를 올리며 주왕(紂王)을 친 것은 천명(天命)이라 읍소했다.(55 페이지) 왕이 된 것이 천명인지에 대해 반신반의했던 태조의 머리에 천명 사상을 심어주고 세상을 바꾸고자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도전이다.(60 페이지)

 

정도전은 유학자이자 상리학자로서 당시 손에 꼽을 정도로 학식이 깊은 사람이었다.(67 페이지)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맹자주례이다. ‘맹자는 그의 천명 사상을 공고히 해주었고 주례를 통해서는 천명을 실천하기 위해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기본 설계도를 배웠다. 맹자는 천() 개념에 민()을 더했다.

 

이성계가 정권을 접수하고 정도전이 처음 받은 관직은 밀직부사(密直副使)였다. 왕의 비서실장 격이었다. 이 자리에서 정도전이 처음으로 획책(劃策)한 일은 전제개혁(田制改革)이었다. 이로 인해 정도전은 모든 기득권층과 반목하는 사이가 되었다.(75 페이지) 구세력의 반격으로 정도전은 삭탈관직당하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정몽주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반대했다.

 

정도전은 단순한 개혁자나 유학자가 아니라 이 땅에 주나라와 같은 이상적인 국가를 세우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도덕성이 높은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고 대신 유학으로 철저히 무장한 사대부들이 유교의 전범적인 국가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82 페이지) 정도전에게 혁명은 궁극의 목표를 위한 방편이었다.(83 페이지)

 

정도전은 왕위 계승에 대해 장자가 계승하되 장자가 어질지 못하면 동생이라도 상관 없다는 원칙을 가졌었다.(83 페이지) 정도전을 죽음에 빠뜨린 것은 장자 혹은 연장자 계승이라는 종법제도였다.

 

우리가 지금은 종가(宗家)니 종손이니 장남이니 제사니 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 이것이 마치 수천년을 이어온 전통이라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는 서주의 제도가 유가들에 의해 규격화되는 과정을 거친 뒤 다시 사대부들에 의해 강제로 이식된, 우리에게는 너무도 낯선 문화였다.(115 페이지)

 

세종은 선대에서 무시되었던 종법적 질서를 자신부터 정상으로 되돌려놓으려 했다. 재기발랄한 수양대군보다 문약한 장남 향(후에 문종이 됨)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사실 그의 마음 속에서는 향보다 씩씩하고 능력 있는 수양이 더 좋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종은 주나라를 흠모한 유가의 성군답게 장자인 문종에게 왕위를 잇게 했다. 그러나 병약한 문종이 오래 살지 못했고 어린 장남 단종이 왕이 됨으로써 숙부 수양이 섭정하는 구실이 마련되었다.

 

단종에게서 왕위를 뺏은 세조는 단종 복위를 꿈꾸던 도전세력을 눌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커다란 전란을 거친 뒤 조선은 왕권보다 은근히 사대부들의 실권이 좀 더 센 유교사회로 변한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세우거나 광해군을 내치고 인조를 옹립한 것은 모두 사대부들이 중심이 된 반란이었다. 태종과 세조처럼 왕족에 의한 반란이 아닌 것이다.(141 페이지)

 

'주자가례' 자체가 임금과 같은 일가가 아닌 사대부들의 조상 받드는 법이었기에 존존의 의미는 퇴색하고 친친의 의미만 강조될 수 밖에 없긴 했지만 반정 그리고 전란(왕과 국가가 자신과 집안을 언제나 온전하게 지켜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을 겪으면서 오직 가문의 친친만이 남게 되었다.(142 페이지)

 

이로써 당파 싸움이 극심해지게 되었고(143 페이지) 가부장적 사회가 되었다.(147 페이지) 문중의 대종이 되는 집안에는 가묘(家廟)가 필수가 되었다. 종가에 가묘가 설치되었다는 것은 문중의 대를 이은 대종에게만 제사권이 있다는 이야기이다.(146 페이지)

 

공자가 주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본 것은 이 나라에 이성적인 예악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란 말은 질서와 법률이라는 의미이다.(167 페이지) 어떤 문명, 어떤 나라에서도 예절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그러나 주나라처럼 예와 악을 하나로 만든 곳은 없다.(171 페이지)

 

정도전이 꿈꾸었던, 주나라와 같은 이상적 국가 조선은 한낱 꿈으로 끝날 듯 보였다. 이방원은 신흥 사대부들과 협력했지만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왕권이 살아있는 주나라이면서 그 왕권은 자기 혈족으로 이어지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주나라에 대한 꿈은 이방원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세종을 통해 더욱 공고하게 다져진다.(187 페이지)

 

저자는 정도전, 세종, 세조가 꿈꾸었던 주나라의 현현(顯現)으로서의 조선은 결코 중국에 대한 사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말한다. 주나라의 이상을 따르고자 했지만 이는 조선의 천명이고 조선 방식대로 종법과 예악을 이 땅에 실천한 것이라는 의미이다.(206 페이지)

 

'주례' '고공기'가 묘사하는 도성 건축의 원칙이나 '주례''맹자'가 이야기하는 정전제가 주나라에서 실제로 실행된 것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한참 후대에 주나라를 신성시하던 유가들의 기록이다.(230 페이지) 지금이야 '주례'나 전국시대나 서한 시기의 저작물로 보지만 정도전은 이것이 주대(周代)의 저작임을 의심치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고공기'도 주나라 때의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247 페이지)

 

고려 말에 혁명을 꿈꾸었던 성리학자들은 조선 중기 이후 예만 따지던 유학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리학의 표상인 예가 아니라 실질적인 경제정의였다.(246 페이지)

 

한양은 유학자가 설계한 계획도시이자 유교적 이념을 집약한 도읍이다.(251 페이지) 참 인상적인 말이다. 건축가 임석재 교수가 경복궁을 설명한 것 만큼 인상적이다. 임석재 교수는 '예로 지은 경복궁'에서 경복궁을 '주례(周禮)', '논어', '맹자', '순자', '춘추좌전', '국어', '시경', '서경', '주역', '관자', '한비자', '문심조룡' 등 동아시아의 거의 모든 고전이 총망라되어 반영된 궁궐로 보았다.

 

임석재 교수는 경복궁을 다섯 가지 의미로 정의한다. 1) 조선의 통치 이상을 실어낸 건국 선언문이자 소통의 통로, 2) 동아시아 궁궐 건축의 흐름 속에서 예()로 지은 궁궐이자 예절 교과서, 3) 국가의 운영 방향과 통치 이상을 건축으로 담아낸 건국 기획안이자 사상서, 4) 주례(周禮)의 궁궐 지침을 모범으로 삼되 수반되는 논쟁거리를 잘 피해 오묘한 변화의 모양을 담아낸 창의적인 예술작품이자 건축 명작, 5) 조선의 헌법이자 정치학 교과서이자 하나의 작은 이상 국가...

 

흥미로운 것은 태종 이방원이 절대로 비유교적인 왕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불교와 도참에 빠진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비교할 수조차 없는 순수한 유학자이다.(253 페이지)

 

유가가 역사에 있어서 그 이념으로 실제 혁명에 성공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유교 국가인 송나라에서 왕안석의 신법조차 실패했다. 그 만큼 보수기득권의 반혁명 공작이 치열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오로지 단 한 번의 성공사례가 태동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정도전과 이성계의 조선 건국이다 .(26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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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선생님을 생각할 때면 축제(祝祭)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선생님은 이 말을 일본의 이상한 정신 세계가 반영된 말이니 쓰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축(祝)은 빌 축, 저주할 축이다. 이 역시 이상하다. 빌기도 하고 저주하기도 하니.(구체적으로 축이란 글자가 저주의 의미로 쓰인 경우를 찾지는 못했다.)

크리스테바를 인용하며 누군가를 해석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누군가를 살해하는 행위로 구성된다는 말을 한 정신과 의사 김종주 교수 생각이 난다.(‘이청준과 라깡’ 510 페이지)

어떻든 축하의 제사라니...축(祝)이란 글자가 문제인가?

축(祝)은 신에 봉사하는 종교인을 말한다. 공자는 어릴 때 제상 위의 술잔 등을 가지고 원유(原儒)의 기도나 제사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았다. 공자는 유자(儒子)를 종교성을 중심으로 하는 소인유(小人儒)와 예교성을 중시하는 군자유(君子儒)로 나누었다.

원유 또는 소인유는 무축(巫祝)이고 군자유 또는 대인유는 합리주의에 입각한 사상유(思想儒)이다.(가지 노부유끼 지음 ‘유교란 무엇인가’ 참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예(禮)를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 등으로 나누었다.

이 책에 의하면 삼년상을 지나 종묘(宗廟)에 부묘(祔廟: 신주를 종묘에 모심.)되기까지는 흉례, 그 이후 제사의식은 조상을 다시 만난다는 의미에서 길례이다.

축하의 제사라는 말과 연결지을 법하다. 그런데 정녕 조상을 다시 만나는 것이 길한 일이고 기쁜 일이라면 헤어질 때는 어떤가. 슬프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제(祭)와 (천도재, 예수재預修齋 등의) 재(齋)를 구분하며 제는 와서 흠향(歆饗)하라는 의미이고 재는 가라는 의미(구천을 떠도는 원혼이 저승으로 잘 가기를 바라는)라 한다.

하지만 제(祭)의 대상인 혼(魂)도 결국 돌아간다. 이듬해에 다시 오겠지만. 그나저나 신(神), 제(祭), 예(禮), 축(祝), 조(祧: 불천不遷의 반대인 조천祧遷의 조), 기(祈), 도(禱), 사(祀: 사당), 조(祖), 사(社), 화(禍), 복(福), 지(祗),

지(祉: 복), 조(祚: 복), 요(祅: 재앙), 비(秘: 비밀), 상(祥: 상서로움).. 보일 시(示)변의 글자가 너무 많다. 시(示)는 귀신을 뜻한다. 오호 귀신으로 가득한 세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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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로 떠나는 힐링여행 인문여행 시리즈 11
이향우 글.그림, 황은열 사진 / 인문산책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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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宗廟)는 조선의 왕들과 왕비들의 신위(神位)를 모신 국가 사당이다. 1995년 해인사 장경판전, 석굴암 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는 국보 227호이다. 종묘 일대를 훈정동(薰井洞)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종묘로 가는 길 오른 편의 어정(御井; 서울시 유형문화재 56. 임금에게 올릴 물을 긷던 우물) 때문이다.(: 향풀 훈)

 

종묘는 궁궐 전각들이 대부분 화려한 팔작지붕인 것과 대조적으로 맞배지붕이다. 원래 창덕궁, 창경궁, 종묘는 담장으로만 구분된 하나의 영역이었다. 일제에 의해 창덕궁과 종묘 사이에 관통도로가 세워졌다. 현재 창경궁과 종묘를 연결시키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종묘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신이 다시는 길인 신로(神路)가 있다는 점이다. 궁궐의 삼도(三道)는 가운데에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가 있다면 종묘의 삼도는 가운데에 신이 다니는 길인 신로가 있다. 신로의 오른쪽은 어로(御路), 왼쪽은 세자로(世子路)이다. 신로는 신향로(神香路)라고도 불리는데 대제를 지낼 때 조상과 관련된 신주(神主), (), (; 축문)을 옮길 때 밟는 길이다.

 

혼비백산(魂飛魄散)이란 말이 있다. 혼백이 사방으로 흩어진다는 말로 매우 놀라거나 혼이 나서 넋이 나간 상태를 뜻한다. 옛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가고 몸을 지탱하던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는 혼을 위한 구조물이고 무덤은 백을 위한 공간이다.

 

종묘는 경복궁보다 먼저 지어졌다. 중요한 것은 경복궁과 종묘 및 사직단 창건 공사가 동시에 진행되었다(47 페이지)는 점이다.(동시에 짓기 시작했지만 종묘는 규모가 작아 경복궁보다 먼저 지어졌다.) 조선왕조는 주례 고공기의 법식을 따라 좌묘우사를 선택했다. 경복궁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을 지은 것이다.(좌묘우사...우리가 보기에 경복궁 오른쪽에 종묘, 왼쪽에 사직단이 있다.)

 

현재 종묘에는 세 개의 지당(池塘; 연못)이 있다. 외대문 안쪽 왼편에 하지(下池)가 있고 삼도 오른쪽으로 망묘루 가는 길에 중지(中池)가 있고 그 위쪽으로 상지(上池)가 있다.(59 페이지) 중지는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 사각형의 못으로 천원지방의 원리를 따랐다. 종묘라는 제례 공간의 특성에 따라 지당에 연꽃 등을 심지 않았고 물고기도 기르지 않는다.

 

겨울 눈 덮인 중지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궁궐의 지당 섬에 소나무를 심은 것과 달리 종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에 향나무를 심었다.(61 페이지) 중지를 지나면 종묘 건물 중 유일한 팔작지붕인 망묘루가 있다. 왕이 종묘를 바라보며 선왕의 은덕과 나라의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망묘루 북쪽에 서향의 향대청(香大廳)이 있다. 향축과 예물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대기하는 등 제사를 준비하는 곳이다. 종묘 신실 중앙에 신주가 모셔졌는데 신주는 잣나무로 만든 궤에 넣어 보관했다. 신실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종묘제례 때만 공개된다. 향대청에서 북쪽으로 긴 숲을 지나면 재궁(齋宮)이 나온다.

 

재궁은 제례를 앞둔 왕과 세자가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정제하는 등 제사 준비를 하던 곳이다.(81 페이지) 남문을 들어서면 이어지는 어로와 맞닿은 북쪽에 임금이 머물던 어재실(御齋室)이 있다. 동쪽으로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 서쪽에는 목욕을 하던 어목욕청이 있다. 재궁 동쪽은 전사청(典祀廳) 가는 길로 이어진다.

 

전사청은 종묘에서 제수를 준비하던 곳이다. 재궁의 서문을 나와 삼도를 따라가면 정전의 동문으로 이어진다.(90 페이지) 동문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네모반듯한 정사각형 모양의 단이 두 개 보인다. 돌로 가장자리를 누르고 그 위에 검은 전돌을 깔았는데 이를 판위(版位)라 한다.

 

판위는 왕과 세자가 정전에 들어가기 전에 멈춰 서는 자리이다. 왕은 제향 하루 전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도착하면 먼저 종묘에 인사드리는 망묘례(望廟禮)를 행했다. 망묘례는 왕이 정전과 영녕전(조종과 자손이 영원히 안녕하라는 의미의 영녕전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은 세종 3년의 일로 당시 상왕인 태종에 의해서였다.)의 조상들께 인사를 드린 후 신실을 돌아보는 예를 행하는 일이다.

 

정전 동북쪽에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전사청이 영녕전에도 있었으나 현재는 정전 전사청만 있다. 부엌 역할을 했기에 부엌 주를 써서 신주(神廚)라 했다. 전사청 동쪽에 제정(祭井)이 있다. 제례 때 사용하는 명수(明水)와 전사청에서 제수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물을 긷던 우물이다.(106 페이지)

 

정전 동문의 담에 잇대어 북쪽에 지어진 네칸짜리 맞배 지붕 건물인 수복방(守僕房)은 제사를 준비하는 관원들과 종묘를 지키고 청소하며 제사를 준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108 페이지) 정전의 정문은 신을 위한 문으로서 신문(神門)이라 하고 남문 또는 남신문으로 불린다.(113 페이지)

 

제향의 절차에 따라 제례를 행하는 사람 외에는 왕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가운데 신문으로 출입할 수 없었다. 동문, 서문과 달리 신문의 위는 홍살로 되어 있다. 동문은 왕을 비롯한 헌관, 제관 및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출입하는 문으로 재궁에서부터 어로가 연결되어 있다.

 

종묘 건축은 불필요한 장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단순한 단청이나 절제된 문양으로 종묘를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만든다.(121 페이지) 정전 앞의 월대는 상월대와 하월대로 구성되어 있고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가장 큰 월대이다.(122 페이지)

 

월대(月臺)는 궁궐 앞의 섬돌이다. 섬돌은 집채와 뜰을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든 돌층계이다.(122 페이지) 정전 동북쪽 계단 밑에는 소차(小次; 예전에 왕이 거동할 때 쉬기 위해 임시로 친 막) 설치를 위한 방형의 단이 조성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쌓은 넓은 월대의 윗면은 박석(薄石; 얇고 넓적한 돌)을 깔았고 곳곳에 차일(遮日) 고리가 박혀 있다.

 

종묘 월대의 박석은 궁궐의 박석보다 조금 더 거친 느낌을 준다.(123 페이지) 종묘 정전은 처음 7칸의 태묘로 창건되었다. 태조 49월에 동당이실(同堂異室)로 태실 7칸 안에 신실(神室) 5칸을 만들고 동서에 협실(夾室) 2칸의 종묘를 영건(營建; 집이나 건물을 지음)하고 태묘(太廟)라 했다.

 

신실 5칸은 석실(石室)로 만들어 시조와 4대조를 모시는 5묘로 사용하고 2칸의 협실을 둔 것이다. 동당이실은 한 건물 내의 기둥 사이에 발을 내려 칸을 막아 여러 개의 사당을 두는 것이다. 역대 왕의 신위는 정전(태묘)에 부묘(祔廟; 삼년상이 지난 뒤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것)되었다가 친진(親盡; 제사를 모시는 대수가 끝남)되면서 영녕전으로 조천(祧遷)했다.(132 페이지)

 

그러나 공덕이 있는 왕은 불천위(不遷位; 世室)로 정하여 영녕전으로 조천하지 않았다. 5대가 지난 왕은 원칙적으로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신위를 옮겨 봉안했지만 태종이나 세종과 같이 공덕이 뛰어난 선왕의 신주는 옮기지 않고 영구히 정전에 봉안하고 덕종이나 장조와 같이 보위에는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세자들도 추존하여 왕으로 봉안하고 정전 내 가장 서쪽에서부터 선왕의 순으로 신위를 모신다 등의 원칙에 따라 종묘의 건물들은 몇 차례의 증축을 거쳤다.(133 페이지)

 

임진왜란때 정전과 영녕전이 전소되었지만 선조가 피난중에도 종묘의 신주를 수습해 왕실의 신주가 보존될 수 있었다.(133 페이지) 정전은 제례가 행해지는 공간이다. 신실 내부는 신을 위한 어둠의 공간으로 만들어 엄숙하고 장중한 침묵을 연출해냈다.(138 페이지) 종묘 정전에는 열아홉 분의 왕과 서른 분 왕후의 신주를 모셨다.

 

넓은 월대 위에 세워진 정전은 신주를 모신 19칸의 신실이 있고 양쪽 끝에는 각각 2칸의 협실이 있다. 예전에는 협실에도 신위를 모셨지만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협실 앞으로는 동서 월랑이 각각 5칸으로 구성되어 있다.(138 페이지) 종묘의 신실은 동당이실 제도를 적용한 건물에 서쪽을 상위로 하여 신주를 모시는 서상(西上) 제도로 배치했다.

 

서상 제도에 따라 첫번째 신실에 태조의 신위를 모시고 3대 태종, 4대 세종, 7대 세조, 9대 성종, 11대 중종, 14대 선조, 16대 인조, 17대 효종, 18대 현종, 19대 숙종, 21대 영조, 22대 정조, 23대 순조, 추존왕 문조(익종; 효명세자), 24대 헌종, 25대 철종, 26대 고종, 27대 순종의 순으로 모셔졌다.(142 페이지)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오례는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 등을 말한다.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삼년상을 지나 종묘에 부묘되기까지는 흉례, 그 이후 제사의식은 조상을 다시 만난다는 의미에서 길례이다.(146 페이지) 묘호는 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의 왕의 이름이고 능호는 왕릉의 호칭이다.

 

시호(諡號)는 임금 사후 공덕을 칭송해 부여한 이름이다. 돌아가신 왕은 부묘를 통해 종묘에 신주가 모셔진 이후에야 각종 제사의 대상이 된다.(152 페이지) 공이 많으면 조(), 덕이 많으면 종()이라는 묘호를 부여했다지만 그 구분은 뚜렷하지 않다.(157 페이지)

 

원래 태조를 제외하고 모두 종으로 묘호를 정하는 것이 순리이지만 세조나 인조는 정난이나 반정을 통해 등극해 왕통(王統)을 다시 세웠다고 하여 조로 칭했고 선조는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이유로 조를 부여받았다.

 

왕의 부모로서 왕위에 오른 적이 없는 생부와 생모는 당연히 종묘에 모실 수 없었지만 성종이 생부 의경세자(세조의 장자)를 왕으로 추존해 덕종이라는 묘호까지 마련하여 숙부인 예종의 신실 위 칸에 봉안함으로써 이후 추존의 전례를 남겼다.(158 페이지) 왕이 서쪽에 모셔지고 왕비는 동쪽에 모셔졌다.

 

왕비가 여럿일 경우 책봉 받은 순서로 위차를 두고 신주를 모신다.(161 페이지) 왕비가 먼저 승하할 경우 임시 거처라 할 혼전(魂殿)에 모셨다가 왕이 부묘된 이후 부묘했다. 종묘의 모든 의례는 철저히 남성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제사 음식 장만에서 진설(陳設), 그리고 제례가 진행되는 동안 제관, 집사, 악공, 일무요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성들이 역할을 담당했던 의례공간이었다.

 

묘현례(廟現禮)는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여성이 종묘에 들어와 치른 의식이었다. 묘현례는 세자빈 또는 왕비가 가례를 올린 뒤 종묘의 선대왕과 왕후에게 인사를 올리는 의식이다.(187 페이지) 중종대에 몇 차례 묘현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숙종의 세자 경종이 단의빈 심씨와 가례를 올린 뒤 종묘에 알현하기 위해 온 것이 묘현례의 시초이다.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열 살에 동갑 나이로 가례를 마친 뒤 종묘에 알현했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어 묘현례를 행했다.(189 페이지) 정전 월대 아래 동쪽의 공신당(功臣堂)은 남신문의 남쪽 담장에 바짝 붙어 있는 긴 집으로 역대 국왕 공신들의 위판을 모신 곳이다. 그렇게 모셔진 공신들을 배향 공신(配享功臣)이라 한다.

 

왕의 신위가 영녕전으로 조천(祧遷)이 되면 영녕전에는 공신당이 없으므로 그 왕대의 배향공신의 위판은 다시 사가로 전해져 땅에 묻혔다.(191 페이지) 현재 공신당에는 역대 왕의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이념을 반영한 결과이다. 오늘날은 정전과 영녕전을 포함하는 일대를 모두 종묘라 하지만 조선시대 초에는 지금의 정전만을 종묘(태묘)로 인식하고 영녕전은 별묘(別廟)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201 페이지)

 

영녕전 가운데 건물의 지붕은 높고 양쪽 협실은 지붕이 낮고 월대의 높이도 정전 만큼 장대하지 않다. 조선 왕조의 시조인 태조를 비롯해 선왕 중에서 큰 공적이 있는 왕의 신위는 불천위라 하여 4대가 지나도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계속 정전에 모셨다. 영녕전은 4대가 지난 왕과 왕후의 신위를 정전으로부터 옮겨 모시는 또 다른 사당이라 하여 조묘(祖廟) 또는 별묘로 불렀다.

 

세종때 처음 건립될 당시에는 모두 6칸의 건물이었으나 점차 증축해 16칸이 되었다. 현재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조천된 왕과 왕후, 추존 왕과 왕후의 신위 등 총 34위가 모셔져 있다.(203 페이지) 영녕전 신실은 가운데에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가 모셔졌고 서상 원칙에 따라 서쪽 협실에 2대 정종, 5대 문종, 6대 단종, 추존왕 덕종, 8대 예종, 12대 인종, 동쪽 협실에 13대 명종, 추존왕 원종, 20대 경종, 추존왕 진종, 추존왕 장조(사도세자), 의민황태자(영친왕) 등이 모셔졌다.

 

영녕전 바깥 서쪽에 종묘제례때 악공들이 머물던 건물인 악공청이 두 군데 있다. 국가 사당으로 태묘(종묘)가 있다면 왕실 사당으로는 궁궐 안에 선원전(璿源殿)이 있다. 선원전은 왕의 어진을 봉안한 사당으로 사묘(私廟)의 성격이 강하다.(220 페이지) 종묘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고 2001년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뒤를 이었다.

 

현재 5월에 봉행되는 종묘제향의 화려하고 장엄한 장면은 경복궁에서 출발하는 어가행렬로 시작한다. 경복궁을 출발하여 세종로 사거리를 거쳐 종로를 거쳐 종묘에 드는 어가행렬은 1년에 한 차례 볼 수 있는 장엄의 극치이다.(233 페이지)

 

공자는 예()의 완성은 악()이라 했다. 종묘제례의 완성은 종묘제례악으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279 페이지) 종묘제례악은 기악()과 노래(), 무용()으로 구성된다. 종묘제례에서 추는 춤인 일무(佾舞)의 기원은 세조때이다.

 

6일무(6×6; 36)였으나 고종이 황제가 된 이후 8일무(8×8; 64)를 추었다.(292 페이지)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있다. 문무는 약(피리)과 적을 들고 춘다. 무무는 칼과 창을 들고 춘다.(293 페이지) 종묘제례는 의례(儀禮), (), (), ()가 함께 어우러지는 최상의 무대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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