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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구석 박물관 -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박찬희 지음, 장경혜 그림 / 빨간소금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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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희 학예사의 '구석구석 박물관'은 38만점에 이르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을 선사 및 고대관, 중근세관 등으로 나누어 설명한 책이다. 지식을 전하는 것 이상으로 박물관의 문화유산을 보고 생각하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주안점을 둔 책이다. 관심 있는 관계자는 물론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들까지 두루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할 만한 자료이다.

선사 및 고대관, 중근세관을 알아보기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의 개괄적 정보가 제시되었는데 우리나라 박물관의 역사 및 설계자의 의도, 영향을 받은 건축물들에 대한 이야기, 박물관을 활용하는 방법, 주의 사항, 유물이 박물관에 오게 된 사정, 그리고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을 제한적 범위 안에서 최적의 조합으로 설명한 방식이 돋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유물의 비밀을 푸는 방법’이란 글이다. 옛날 글씨를 쓰던 재료인 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적외선을 쏘아 눈에 보이지 않던 글자를 알아보는 것도 그렇고 엑스레이를 조사(照射)하자 그림 속에서 또 다른 그림이 나온 것도 그렇다.

삼국시대의 책이나 종이 문서는 앞으로도 발견될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금석문은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는 부분도 의미 있게 들어야 할 부분이다. 저자는 유물들은 원래 박물관에 전시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상상력으로 그들이 박물관에 오게 된 배경이나 역사적 상황을 헤아려보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박물관을 유물을 조사, 보존, 연구 전시하는 공간으로 설명한다. 선사 및 고대관에서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 주먹도끼, 농경문 청동기, 고조선, 가야 및 부여 등에 대해 친절하고도 쉬운 설명이 제시된다. 이 부분에서 흥미로운 내용은 우리가 미역을 먹게 된 것은 새끼를 낳은 어미 고래가 미역을 먹는 모습을 보고 따라 먹기 시작하면서부터라는 설명이다.

가야가 철이 풍부했었던 것은 쇠의 바다라는 뜻의 김해(金海)라는 지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가야도 고대 역사에서 중요했었으니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아닌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봉황의 머리를 닮은 유리병인 신라의 봉수형(鳳首形) 유리병을 설명하며 저자는 삼국시대의 문화는 먼 지역까지 오고 갔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풍성해졌다고 덧붙인다. 봉수형 유리병은 우리나라의 일반적 양식과 차이가 크고 지중해 및 인근의 것들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조령(鳥靈) 신앙이 있었는데 이는 새가 죽은 이들의 영혼을 하늘이나 다른 세상으로 옮겨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은 것을 말한다. 후에 그 역할은 말이 잇는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의미부여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저자는 최고의 걸작으로 소문난 석굴암을 예로 들며 사실 과장된 측면이 있으니 자기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 솔직하게 어떤 느낌이 드는지 헤아려 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유물을 공부하는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다.

고려 청자, 앙부일구, 임진왜란, 대동여지도 등을 설명한 중근세관에서 저자가 말했듯 청자를 볼 때 나아가 다른 유물을 볼 때도 그것을 사용한 사람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람, 만든 장소도 함께 떠올려야 유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구석 구석 박물관'의 장점은 디테일에 있다. 고려 개성의 관문이었던 벽란도(碧瀾渡)의 도(渡)가 섬이 아닌 나루터를 의미한다고 지적하는 것이 그렇다. 향을 피우는 그릇이 향완(香碗)임을 환기시키는 것도 그렇다. 목판을 새기는 사람을 각수(刻手)라 부른다고 말하는 부분도 새롭다.

저자는 청자에 따라다니는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기분 좋은 말 뒤에 숨은 시대의 속사정을 헤아려볼 때 유물을 다양하게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점이 바로 유물을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이고 공부를 하는 좋은 방식일 것이다. 저자는 국보든 보물이든 지정되지 않은 유물이든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말했듯 '구석 구석 박물관'은 공부하는 자세, 유물을 대하는 방법, 나아가 생각하고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내는 방식을 깨닫게 하는 책이다. 관련된 많은 책을 읽고 답사도 부지런히 하며 진정으로 공부하고 유물을 사랑하는 문화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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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 어디서 오는가 밝은 사람들 총서 8
정준영 외 지음 / 운주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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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선종(禪宗), 서양철학, 진화심리학, 심리학 전공자 등이 괴로움을 논했다. 괴로움 없는 행복한 세상을 위해. '괴로움, 어디서 오는가'는 그 결과물이다. 초기불교의 정준영은 사성제를 토대로 범부의 괴로움과 원인, 아라한의 경험에 한정해 괴로움을 논한다. 필자에 의하면 초기 경전 안에서 괴로움을 의미하는 두카는 고성제(苦聖諦)의 것, 삼법인의 것, 느낌의 괴로움 등으로 나뉜다. 필자는 두카를 단순히 고(苦), suffering, 괴로움 등으로 번역하여 모든 것이 괴롭다고 설명한다면 잘못이라 말한다.(49 페이지)

월폴리 라훌라는 많은 사람들이 두카의 의미를 잘못 번역하여 사용함으로 인해 불교를 염세주의라고 오해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물론 두카는 고통을 의미하지만 불완전성, 무상함, 비어 있음, 실체 없음 등의 의미도 포함한다. 두카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는 것이 의미있다. 붓다는 괴로움을 설명했지만 삶의 행복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붓다는 재가와 출가에 대한 구분 없이 여러 형태의 육체적, 정신적 즐거움에 대해 설했다.

초기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재가의 즐거움, 출가의 즐거움, 애착의 즐거움, 정신적인 즐거움, 육체적인 즐거움 모두 두카이다. 수행을 통해 얻는 선정의 상태, 높은 수행 단계 역시 두카이다.(50 페이지) 두카는 일상적인 의미의 괴로움이 아니라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즐거움이나 행복도 무상한 것이라면 불만족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어 두카이다.

아라한은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아라한은 깨달음을 이룬 초기 불교의 최고 성자이다.) 경전에 따르면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은 육체적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아라한은 육근(六根)을 통해 들어오는 대상에 마음을 사로잡히지 않고 혼란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다.(74 페이지) 아라한의 경우 필요에 의해 대상과 선택적인 접촉을 이룰 수 있으며 이런 접촉은 범부와 다른 환경에서 일어난다.

범부는 시각, 시각 의식, 형상이 있을 때 접촉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느낌이 일어난다. 자동반사적이다. 같은 대상이라도 대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다른 것이다. 여실지견하는 지혜로운 주의를 가지고 있는 아라한에게는 접촉이 일어나지 않는다.(76 페이지) 아라한이 육체적인 괴로움을 경험한다고 해도 그 괴로움은 범부의 괴로움과 다르다. 일반 범부는 육체적인 괴로움이 일어나면 괴로움을 괴로운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근심을 섞어 괴로움을 크고 강하게 확장시킨다.

아라한에게는 오온을 통한 육체적인 느낌들만이 있을 뿐 이에 정신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다.(81 페이지) 결국 두카는 마음의 문제이다.(82 페이지) 초기불교의 괴로움은 단지 통증이나 슬픔의 문제가 아니라 무상함 및 자아 관념 등의 번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87 페이지) 초기 불교의 핵심은 두카와, 두카로부터 벗어나는 길에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89 페이지) 선종 역시 번뇌 즉 보리라는 깨달음에 주안점을 두기에 번뇌 그 자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92 페이지) 달마는 수행하는 사람이 고통이 따를 때 다겁생래의 무수겁 동안 근본인 진여본성을 버리고 지말인 번뇌망념을 따라 사생육도에 윤회하면서 원한과 미움을 일으켜 다른 이를 괴롭힘이 한량없었음을 성찰하라고 가르쳤다.(95 페이지)

서양 철학의 입장에서 박승찬은 고통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라 말한다.(141 페이지) 니체는 인간은 고통 자체보다 고통의 무의미함 때문에 더 고통받는다는 말을 했다.(142 페이지) 빅터 프랭클은 의미 있는 고통은 이미 고통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143 페이지) 박승찬은 고통을 보다 폭 넓은 지평에서 바라보며 모든 이들과 함께 성찰하기 위해서 서양철학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새로운 방식으로 고통의 의미를 찾는다. 필자에 의하면 이런 작업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라도 위로나 도움이 될 수 있다.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의 주요 관심사는 고통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가였다.(147 페이지) 스토아학파는 고통에 대한 무관심,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태도, 부동심(apatheia)을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148 페이지)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을 영혼의 평정심(ataraxia)과 육체의 건강으로 규정했다. 물론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직접적인 감각의 쾌락에서 찾지 않았다. 에피쿠로스학파에 따르면 고통은 악이지만 나중에 다가올 더 큰 쾌락을 위해 받아들여야 할 것이기에 항상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148 페이지)

고대 그리스의 경우 철학보다 신화, 서사시, 비극 등에서 고통을 깊이 있게 논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중세철학이 발생하면서 고통에 대한 완전히 다른 표상과 문제의식이 서구사상에 들어왔다.(150 페이지) 고통은 죄에 대한 벌로 여겨졌다. 개인의 죄와 벌 사이의 관계는 점차 공동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선조들의 잘못으로 후손들이 형벌을 받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원죄설도 이로부터 기인한 것이다.(152 페이지)

이는 명백한 개인적 잘못을 발견하기 힘듦에도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경우를 해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응보의 논리의 문제점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죄없는 희생자가 아닌 범죄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고통이 가중되는 것이다. 초기의 순교 체험에서 강한 영감을 받은 그리스도교는 악과 고통을 악신의 탓으로 돌려 무조건 피하려는 영지주의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을 강조하는 스토아학파에 대항해서 고통을 더욱 긍정적으로 보려는 해석을 발전시켰다.

이 해석에 따르면 고통은 구원의 필수적인 사전 단계처럼 보이고 이로써 그리스도의 제자임이 확인되는 것으로 간주된다.(156 페이지) 라이프니츠의 이론 안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은 신이 절대적으로가 아니라 단지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해 부차적으로 욕구하는 것일 뿐이다.(170 페이지) 영지주의와 스토아학파에 대항해 고통을 긍정적인 것으로 본 그리스도교의 지향점과 구조적으로 같음을 알 수 있다.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은 칸트에 의해 강하게 비판받는다. 칸트는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을 비판은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고통에 합목적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라이프니츠 등이 주장하는 철학적 변신론이나 칸트식의 비판이 지닌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전체의 이름으로 개인의 고통을 정당화함으로써 고통당하는 이를 근본적으로 소외시킨다는 것이다.(172 페이지)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은 윤리적인 악조차도 궁극적으로 형이상학적 악으로 설명해 버리므로 신의 윤리적 책임에 대해서만 변명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서도 그 책임을 회피할 이론적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모든 악과 그에 대한 고통은 존재론적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아무도 그에 대해서 도덕적 책임을 필요 없게 만든 것이다.(172, 173 페이지) 이성의 간지(list der vernunft)에 따라 발전하는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긍정적인 것에 대한 부정 즉 부차적인 것으로 본 헤겔의 이론은 라이프니츠 변신론의 역사철학적 버전이다.(174 페이지) 니체에게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 없음이 저주로 받아들여졌다. 삶에 무의미한 고통 역시 본래 무의미한 것이지만 니체는 그런 고통의 극단적 무의미성으로서 운명마저 긍정하고 사랑하라고 말한다.(amor fati) 이런 고통의 무의미성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니체가 제안하는 것은 광기이다.

아도르노는 고통은 하나의 질적 계기 즉 개념과 동일시하여 일치될 수도 없고 보편성 아래에 포섭될 수도 없는 사유의 계기를 제공한다고 보았다.(183 페이지) 고통의 문제와 관련해 현대 철학자들 중 가장 주목을 받는 학자는 엠마누엘 레비나스(1906 - 1995)이다. 그는 칸트보다 더 철저하게, 더 드러내놓고 변신론의 종말을 주장한다. 레비나스는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도, 어떤 형이상학적 목적론도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고 부조리할 뿐인 고통의 실재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레비나스는 자신의 철학을 통해 신과 도덕성의 이념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인간의 고통을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했는데 그것은 고통 받는 타인의 얼굴을 직면했을 때 얻게 되는 책임과 관련된다.(185 페이지)

레비나스는 자주 나의 고통이나 타자의 고통 자체는 쓸모 없고 무의미하며 타자의 고통을 위한 나의 고통 즉 대속적인 고통만이 의미있다고 주장했다.(186 페이지) 모든 고상한 사랑에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 전제되어 모든 희생은 크고 작은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에 고통은 사랑을 실천하는 중요한 방식이다.(189 페이지) 제이미 메이어펠트(Jamie Mayerfeld)가 말했듯 고통이 우리를 개선시켜 주기 때문에 도구적으로 좋다고 해서 고통 그 자체가 좋은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191 페이지) 필자는 고통의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하여 이것을 무조건 없애버리려 해서도 안 되고 고통의 유용성만을 강조하여 이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고 타인에게 강요해서는 절대 안 되며(191 페이지) 미래의 행복을 근거로 인간의 모든 고통을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191 페이지)

인간의 이기심, 무관심, 악의로 인해 빚어지는 고통은 지양될 수 있고 지양되어야 한다.(192 페이지)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갈 아무런 희망이 없었을 때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한다.는 니체의 말을 되새기며 위기를 견뎌냈다고 한다.(193 페이지) 필자는 인간은 자신이나 타인이 겪는 고통과의 싸움 속에서 자신의 정신적인 위대함과 영적인 성숙을 드러내라는 초대를 받는다고 말한다.

필자는 인간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초래하는 것과 끝까지 싸워나갈 때에야 비로소 고통의 의미에 관한 깊은 깨달음으로서 인간의 진정한 성숙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194 페이지) 진화심리학의 입장에서 전중환은 자연은 본질적으로 악하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고 무관심하다고 말한다.(197 페이지) 자연은 냉담하고 맹목적이다. 필자는 인간이 삶에서 겪는 괴로움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불행만이 아닌 행복도 설계해낸 자연 선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필자에 의하면 진화심리학은 마음의 한 측면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닌 심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이다. 필자에 의하면 진화심리학자들은 마음이 변천해온 과정 그 자체보다 마음이 진화의 산물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한다.(199 페이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일어나려면 다음의 세 가지 선결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개체군 내의 개체들 사이에 선결 조건이 필요하다, 둘째) 그 변이가 부모에서 자식으로 유전된다, 셋째) 이러한 유전적 형질들이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영향을 미친다. 즉 세대가 지남에 따라 여러 형질들 가운데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주는 형질이 개체군 내에 더 흔해진다.

다윈주의는 크고 건강하고 힘센 개체가 항상 선택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어떤 형질이든지 개체군이 처한 특정한 생태적 환경하에서 번식 가능성을 높여주는 형질이라면 무조건 선택된다. 우리의 머릿 속에는 무엇이든 잘 해결해내는 만능 공구 하나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기능에 전문화된 연장들이 빼곡히 담겨 있다.(영역 특수적; domain - specific: 204 페이지)

약 11,000년 전 시작된 농경 사회나 200년도 채 되지 않는 현대 산업 사회는 우리의 신경계에 유의미한 진화적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요컨대 현대인의 두개골에는 여전히 석기 시대의 마음이 들어 있다.(206 페이지) 부정적 정서는 우리를 괴롭히지만 우리 유전자에는 유용했기에 인간 본성의 일부가 되었다. 열이나 기침, 통증처럼 몇몇 불쾌한 신체 증상들이 우리 몸을 지켜주듯 분노, 질투, 불안,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정서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는 유용한 방어로서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되었다.

최근 연구는 우울증도 특정 기능을 잘 수행하도록 설계된 심리적 적응이라는 관점을 지지한다. 우울증은 다른 외부 사건들에 흐트러지지 않으면서 여러 정신적, 신체적 변화를 조정하고 이끄는 기능을 한다.(217 페이지) 자연선택은 우리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설계하지 않았다. 자연선택은 서로 경쟁하는 대립유전자들 가운데 후대에 복제본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남기는 유전자를 맹목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이다. 인간에게 행복은 목표인지 몰라도 자연선택에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232 페이지)

권석만은 심리학의 입장에서 삶이 괴롭고 고달픈 이유를 논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괴로움은 매우 보편적인 경험이다.(251 페이지) 인간은 행복감보다 불행감에 더 민감하다. 인간은 부정 편향성으로 인해 행복감을 느끼기보다 불행감을 느끼기 쉬운 존재이다.(255 페이지) 필자는 한국 사회를 삼독(三毒)에 물든 사회로 본다. 탐진치(貪嗔癡) 즉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물든 사회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흠뻑 젖어 있다. 이로부터 숱한 문제점들이 생긴다.

모든 인간이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라고 모두 괴롭고 고달픈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 생활 사건에 대한 부정적 의미 부여, 생활 사건의 의미를 왜곡하는 인지적 오류 등이 문제이다. 인지 오류의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흑백논리, 과잉일반화, 정신적 여과, 개인화, 잘못된 명명 등이다. 필자는 심리학의 입장에서 우리 삶이 괴롭고 고달픈 이유를 두 개의 공업(公業)과 하나의 사업(私業)으로 설명한다.

엔트로피 증대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이 세상에서 그런 법칙에 역행하여 살아야 하는 인류의 공업, 물질에 집착함으로써 지나치게 경쟁적인 삶에 매몰된 한국인의 공업, 성장 과정에서 겪은 나름의 고통스러운 경험과 상처 즉 개인의 사업 등이다. 자신의 고통을 여의고 안락을 얻으려는 이고득락(離苦得樂),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주는 발고여락(拔苦與樂)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심리학(특히 임상심리학, 상담심리학)은 공통적이다.

특히 고통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물질적인 경제적 여건이나 신과 같은 외부적 요인에서 찾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서 찾는 내향적 접근을 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심리학은 유사하다.(280 페이지) 나는 개인적으로 불교 수행에 많은 신뢰를 보낸다. 위빠사나에 참여했었지만 선 수행은 어렵다는 생각에 선뜻 참여하지 못하겠다. 유식 불교에 이론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실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은유와 마음 수행에도 관심이 있다. 카렌 호나이의 책들을 읽어야겠다. '괴로움, 어디서 오는가'는 주목할 책이다. 시리즈의 세번 째 책인 '마음,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아울러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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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읽는 심리학 - 그리스부터 북유럽 신화까지
리스 그린.줄리엔 샤만버크 지음, 서경의 옮김 / 유아이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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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심리학의 대가인 두 저자(리즈 그린, 줄리엣 샤만버크)가 쓴 ‘신화로 읽은 심리학’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의 시작은 가족이며 오이디푸스는 정신분석 상담실에만 갇혀 있지 않으며 삼각관계는 인류의 기록 문화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책은 1부 모든 것의 시작은 가족이다, 2부 홀로 선다는 것, 3부 사랑에 관하여, 4부 지위와 권력, 5부 인생의 통과의례 등으로 구성되었다.

저자들은 가족의 원형은 쉽사리 변하지 않겠지만 치유와 회복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외부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적어도 우리의 내면을 바꿀 수는 있다고 말한다. 두 저자는 결혼 생활이 불행하여 그 속에서 아무런 기쁨도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운명적인 만남을 갈구하는 아버지가 있다면 그 운명을 딸에게서 찾으려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25 페이지)

심리학 책들을 읽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가족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말을 한 한스 요아힘 마즈의 말(‘릴리스 콤플렉스’ 참고)을 들을 만하다.

두 저자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딸의 첫사랑이다. 아버지는 어린 딸의 모습에서 자신이 꿈꿔 왔던 최고의 아름다움과 젊음을 본다. 이는 결코 추한 일이 아니며 자연스럽고도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결혼 생활이 불행하여 그 속에서 아무런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운명적인 만남을 갈구하는 아버지가 있다면 그 운명을 딸에게서 찾으려 할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술과 희열의 신인 디오니소스의 아들 오이노피온이 딸 메로페를 사랑하는 오리온이란 사냥꾼에게 도저히 이루기 어려운 목표를 과제로 제시하는 신화 이야기와 함께 제시된 부분이다. 딸이 최상의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고집하는 아버지의 소망 이면에는 딸에 대한 은밀한 소유욕이 감춰져 있다고 두 저자는 말한다.

마즈의 말을 이야기했지만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병리적인 현상은 일반적인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테세우스와 히폴리투스 편에서는 아이에 대한 부모의 적개심이란 말이 나온다. “아들이 자기보다 뛰어나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세월의 무상함과 젊음만을 추구하는 세태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일 수 있다. 또한 너무도 친한 아내와 아들 사이를 시샘하지 않고 오히려 격려와 지지는 보내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들을 신뢰하고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해야 한다.”(31 페이지)

저자들은 구약 성경의 카인 아벨 이야기를 종교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연약한 아이와 강력한 그리고 불공정한/ 편애하는 부모 관계로 카인 아벨 이야기를 설명한다.

잘 알려졌듯 라이오스는 오랫 동안 자식이 없자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신탁을 받는다. 아내 이오카스테에게서 태어난 아들에 의해 죽음을 당할 운명이라는 말을 들은 라이오스는 아내 이오카스테를 멀리 떠나보내려 한다. 분노한 이오카스테는 남편을 취(醉)하게 한 뒤 품에 안아 아이를 갖게 된다.

라이오스가 아이를 유모에게서 빼앗아 산에 데려간 뒤 아이의 발등에 못을 박고 죽게 내버려둔다. 오이디푸스는 부어오른 발이라는 의미이다. 라이오스 가문은 죄 많은 가문이다. 저자들은 우리가 라이오스 가문과 같은 잔인하고 끔찍한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가족끼리 심리적으로 타격을 주는 경우가 흔하다고 말한다. 소통 거부의 독단으로 인한 결과이다.

라이오스가 신탁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듯 아들 오이디푸스도 신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경고를 듣고 신의 예언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코린트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버려졌으나 코린트 목동의 눈에 띄어 목숨을 건진 뒤 코린트 왕의 양자가 되어 왕위 상속자로 지내던 시절이었다.

2부 홀로 선다는 것에서 저자들은 에덴 동산 신화를 논한다. 아담이란 땅을 뜻하고 하와는 생명을 뜻한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 유한한 삶을 살아간다. 살기 위해 일을 하고 부모가 된다.(97 페이지) 아담, 하와의 실낙원은 상실과 독립 등의 키워드로 해석할 수 있는 우리 삶의 은유이다.

저자들은 부처의 출가도 논한다. 싯다르타(출가 전 왕자 시절의 이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운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부모는 적절한 시기에 아이를 떠나보내야 한다.(106 페이지)

저자들은 켈트 신화의 성배 전설인 페레두르(Petedur) 이야기를 논하며 어린 페레두르가 세상 속으로 나가 성인이 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통과의례의 관점으로 페레두르는 설명이 가능하다. 성배(聖杯) 이야기는 신화적인 요소는 물론 켈트, 게르만, 중세 프랑스의 문화가 녹아 있다. 또 모험, 상실, 다툼, 동정, 구원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성배는 다산의 상징에서부터 구원의 상징까지 다양하게 해석된다.(144 페이지)

저자들은 우리는 때가 되면 아이들이 세상 속으로 나가서 우리가 줄 수 없는 것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113 페이지) 신화에서 영웅은 편안한 곳을 떠나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123 페이지) 이상을 위해서 우리는 선과 미를 원하지만 이상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이룰 수 없는 것이다.

환상의 세계에 너무 오래 머문다면 바깥 세상에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상과 현실 감각을 모두 유지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며 우리의 본모습은 현실 속의 나에게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129 페이지) 저자들은 4000년 전의 바빌로니아의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를 세상의 역경에 맞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 같은 작품으로 설명한다.(130 페이지)

자기의 잠재력을 깨닫고 세상의 도전에 맞서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삶의 한계를 인정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이다.(135 페이지)

핀란드 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의 영웅 베이네뫼이넨(Vainamounen)은 신비로운 존재이지만 인간으로서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느낀다. 그는 부적의 힘을 통해 원하는 여인을 손에 넣으려 한다. 종국에는 여인이 아니라 부적 자체가 더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베이네뫼이넨의 이야기를 통해 무언가를 좇다가 곧 다른 것에 끌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139 페이지)

3부 '사랑에 관하여'에서는 사랑을 거부하는 이야기, 치명적인 삼각관계, 결혼의 실체 등이 이야기된다. 실패한 사랑의 주인공은 에코와 나르키소스이다. 나르시시즘의 기원인 미소년 나르키소스는 상대방을 보지 못하고 이제껏 사랑받아 온 과거에만 도취되었다. 상대방이 아무리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줘도 마음의 공허가 물밀듯 몰려오면 상대방을 잔인하게 몰아치기 마련이다.

나의 참모습을 상대방에게 들킬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에코는 자기가 꿈꾸는 이상과 사랑에 빠졌다. 건강한 자존감을 갖지 못하면 큰 상처를 받기 쉽다. 에코의 복수는 더 큰 슬픔을 불러왔을 뿐이다. 그녀는 이루지 못한 사랑과 분노에 갇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스러졌다.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모든 실패한 연인들의 이야기나 마찬가지다.(166 페이지)

저자들은 북유럽 신화의 게르다와 프레이르 이야기를 통해 상대방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장벽은 허물어지고 진정한 사랑이 싹틀 수 있다고 말한다.(201 페이지) 프레이르가 게르다의 마음을 얻은 것은 마법 무기도 황금사과도 아름다운 반지도 아니었다. 외로움에 대한 그녀의 두려움을 공략해 성공한 것이다.

4부 지위와 권력에서는 미노스 왕과 황소가 주목할 만하다. 미노스 왕의 이야기는 오이디푸스 이야기 만큼이나 드라마틱하고 교훈적이다. 제우스와 에우로페 사이에서 세 아들이 태어난다. 에우로페에게 연정을 품은 크레타의 왕 아스테리오스가 에우로페와 결혼하고 세 아들을 양자로 맞는다.

아스테리오스가 죽자 왕위를 두고 형제간 다툼이 벌어진다. 장자인 미노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계시를 보여달라고 기도한다. 포세이돈은 미노스가 왕위를 잇는 것이 신의 뜻임을 증명하기 위해 바다에서 황소를 보내겠다고 약속한다. 미노스는 왕권이 포세이돈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증표로 황소를 다시 신에게 바치겠다고 한 뒤 지키지 않았다.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를 바다에서 올라온 황소에게 정신 없이 빠져들게 했다. 파시파에는 장인 다이달로스의 도움으로 불타는 욕정을 해소했다. 다이달로스는 나무로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암소를 만들었고 파시파에는 이 나무 암소에 몸을 숨겼다. 황소는 가짜 암소에 속아 파시파에와 정을 통했다.

이 비정상적인 결합으로 태어난 인물이 미노타우로스이다. 미노스는 이 수치스러운 괴물을 숨기기 위해 다이달로스에게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거대한 미로를 만들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매년 아테네에서 아홉 명의 소년과 소녀를 잡아와 미노타우르스의 먹이로 주었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아 미노타우르스를 죽이고 끔찍한 저주로부터 크레타를 해방시킨다. 이 이야기에서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유명하다. 또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낙소스의 아리아드네란 오페라가 나왔다.

5부 인생의 통과제의에서는 욥 이야기와 파우스트 이야기, 부처의 깨달음 이야기가 주목할 만하다. 저자들은 구약의 신이 욥을 사탄에 넘겨준 이유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음을 지적한다. 고통에는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저자들은 그렇기에 세상의 불가사의 앞에 겸손해져야 하며 살면서 겪는 아픔과 상실, 그리고 의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결론짓는다.(291 페이지)

지적 허영심이 넘쳤던 파우스트는 흑마법과 연금술로 세상의 비밀을 풀려 했다. 이 계획이 어긋나자 절망에 빠진 파우스트는 지옥의 혼령을 부른다. 그의 소환을 듣고 서재에 홀연히 검은 개가 등장해 악령으로 변신하더니 스스로 메피스토펠레스라 칭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끊임 없이 파우스트의 영혼을 어둠의 세계로 끌고 가려 했고 파우스트는 세상의 비밀에 대한 메피스토펠레스의 지식을 얻고자 했다.

그들은 계약을 맺고 서명했다 피로 서명했다. 이 땅에서는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섬기고 다음 세상에서는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를 섬기기로 한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가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았지만 파우스트는 자신이 치를 대가가 영혼을 영원히 포기하는 것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308 페이지)

저자들은 파우스트 박사의 이야기는 도덕에 관한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면으로의 여정에 관한 것으로 파우스트 속 등장 인물은 모두 우리 안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는 동전의 양면처럼 인간의 양면성을 반영한다. 남을 무시하고 삶을 무가치하게 여길 때 우리는 자신 안의 악령을 보게 된다. 삶에 환면을 느낄 때마다 메피스토펠레스를 소환하는 셈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단순한 악마가 아니다. 괴테의 희곡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영원히 악을 원하지만 선을 행한다." 우리는 내면의 악을 통해서 선으로 향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311 페이지) 저자들은 부처의 깨달음에 관해 그는 평범한 인간이기보다 하나의 모범이라 말한다.(317 페이지)

저자들의 설득력 있는 설명을 통해 신화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고 의미로 충만한 모습으로 다가온 것은 특기할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이야기, 미노스와 아리아드네, 테세우스 이야기를 확실히 알게 되어 좋았다. 더구나 그리스 신화 뿐이 아니라 북유럽 신화, 성경 등 다양한 소스를 제시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가 막힐 때, 의미를 찾고 싶을 때 펼쳐볼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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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용환의 역사 토크 - 시시비비 역사 논쟁에서 절대 지지 않는 법
심용환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이다. 또한 정치적 이해관계와 맞물린 첨예한 이슈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들을 논리적으로 꿰어내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그릇되거나 편향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는 데도 노하우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심용환의 역사토크'는 대화체로 역사 왜곡 세력들을 상대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저자가 다룬 이슈들은 여섯 가지이다. 위안부, 친일파, 식민지근대화론, 이승만, 박정희, 고대사(古代史) 등이다. 위안부 항목을 통해서는 위안부가 자발적 매춘부라는 주장에 대항할 수 있는 논리를 갖추게 될 것이다.

 

친일파 항목을 통해서는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 나라가 제대로 서지 못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 항목에서는 뉴라이트 역사관의 이치에 닿지 않는 논리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이승만 항목에서는 이승만이 우리나라가 잘못 끼운 첫 단추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박정희 항목에서는 박정희가 독재자란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고대사 항목을 통해서는 우리의 고대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정신대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에 발표된 여자 정신대 근로령에 따라 동원된 여자들이기에 일제치하에서 고난당한 우리나라 여성들의 실상을 정확히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위안부는 144년보다 이른 1937년 중일전쟁부터 동원되었다.)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우리나라와 일본이 각각 민주화가 된 때문이다.(위안부 문제를 인정한 고노담화, 무라야마담화 등은 일본의 민주화 결과이다.) 위안부 문제는 민족주의적 관점과 더불어 인권과 여성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1930년대 일본은 군부 쿠데타가 많이 일어나 정부와 군부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31 페이지)

 

일본 극우 단체들은 자꾸 기록이 없고 증언은 효력이 없다고 말하지만 기록은 분명히 있고 국적을 달리하는 수많은 여성이 유사한 이야기를, 그것도 극히 모욕적인 경험을 공개적으로 했다는 것은 위안부가 일본 정부 차원에서 강제 동원되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일제가 주도해 조직적 강제 동원을 했지만 철저하게 현장에서 민간업자들을 시켰다.

 

군인에 의해 납치된 것은 예외적이고 대놓고 강제 동원한 것은 전쟁 막바지였다.(37 페이지) 징용이나 징병이 그랬듯 위안부 역시 대부분 속여서 데리고 간 것이다. 수년간 계속된 전쟁이라는 극단적 현실, 고립된 공간에서 위안부와 일본군 몇몇이 연애를 하고 친하게 지냈다고 해서 문제의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42 페이지)

 

친일파가 생존한 조건에 국제 정치적 여건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58 페이지) 김구는 초기에는 이승만과 밀착해 극우의 선봉대 노릇을 했고 친일파 처단에 대해서도 소극적이었다. 그랬던 김구가 극적인 입장 전환을 한 것은 1948년이다. 저자는 이완용을 예로 들며 친일파란 기회주의자들이라 설명한다.(71 페이지)

 

우리는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탓에 고통스럽고 통탄 할 현실을 살고 있다. 친일 문제 해결은 이 땅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이슈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다룬 장에서 저자는 수탈과 개발의 이분법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제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데 이는 일제 시대를 미화하고 친일파를 비호하는 데로 이어진다는 데에 있다. 저자는 역사학은 상당히 포괄적인 견지에서 인간과 시간의 과정을 이해하는 인문학이라면 경제학은 사회과학적인 입장에서 역사의 특정 부문에 접근하고 특정 결론을 도출하는 데 유용하다고 말한다. (103 페이지)

 

저자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수탈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수량과 통계를 들이대며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든지 임금이 올라가고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만을 강조하면서 결국 근대화의 좋은 측면만 부각하고 있다고 말한다.(107 페이지) 저자의 대화 상대로 나온 경제학자는 경제를 보는 시각이 너무 단순함을 지적한다.

 

가령 조선 상인들이 근대적 상회사를 세운 것은 일차적으로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것인데 거기에 민족적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은 편협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경제는 민족운동이 아니라 말하는 경제학자는 보안회 같은 애국 계몽 단체의 활동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며 모든 것을 민족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왜곡과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덧붇인다.(112 페이지)

 

저자는 기존의 역사학계가 조선 후기 경제가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고만 강조했다면 비판론자들은 19세기 조선 후기는 경제가 붕괴 직전이었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고 비판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쟁점은 세 가지이다. 토지조사사업, 기업가 정신, 19세기 조선경제 붕괴론 등이다.

 

모든 학문은 논리적 정합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저자는 적절한 근거와 적합한 이론이 결합된다는 점에서는 역사학 또한 예외가 아니지만 아무리 탁월한 주장이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 새 연구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변화는 피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의하면 다만 몇몇 신선한 연구 결과를 쉽게 일반화하는 태도는 학문 발전보다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뉴라이트의 문제는 정치적인 힘에 의지해 학문적 성과를 강요하거나 한계나 문제점을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인 주장을 하는 데 있다. 이승만론에서 저자는 이승만이 초기에 대단히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음을 인정하면서 그렇다고 부정적인 측면을 부정한다든지 개인의 인격에 대해 칭찬했다고 그의 역사적 책무 전체에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138, 139 페이지)

 

이승만이 독립협회를 이끈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독립협회를 기획한 것은 서재필이었고 만민공동회를 이끌면서 정말 제대로 된 시민단체의 면모를 드러내는 데 일조한 사람은 윤치호이다.(139 페이지) 이승만 편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슈들도 찬성하든 반대하든 단편적인 지식에 바탕을 두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느낌이 든다.

 

저자는 역사는 객관적으로 그 시대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당대의 여러 모습을 최대한 포괄적으로 담아내야 한다고 말한다.(151 페이지) 이승만과 이승만 신드롬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이승만에 대한 최근의 긍정적인 평가는 논의할 가치도 없는 팬덤 수준에 불과하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론은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기 위한 거대 장치이다.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 아니다. 이승만 본인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데 매진했으며 대한민국은 이승만 혼자 세운 나라가 아니다.(173 페이지) 박정희론에서 저자는 박정희 시대를 직접 겪은 큰아버지가 자신에게 공부보다 중요한 것이 인생이라 말하자 그러면 왜 조선왕조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느냐 말한다.(178 페이지)

 

또한 자신이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았았기에 더 객관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179 페이지) 저자는 5.16을 박정희의 쿠데타로 규정하며 혁명(4.19)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그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혼란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184 페이지) 또한 혼란은 이승만 독재 정권의 유산이지 4.19 혁명 자체 때문은 아니라 덧붙인다.(185 페이지)

 

또한 유신(197210)의 목적은 장기집권이었지 중화학공업 발전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187 페이지) 저자는 모두가 잘 살면 민주주의가 저절로 되느냐?고 묻는다. 그런 논리라면 중국이나 일본은 왜 저럴까요?라고도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서구 국가들의 경우 민주화와 산업화는 전혀 별개였다.

 

영국에서 시민혁명은 17세기에 있었고 산업혁명은 18세기 후반에 있었다. 미국이나 프랑스는 18세기에 시민혁명이 있었고 산업혁명은 19세기에 이루어졌다. 전혀 다른 이유로 시민혁명이 먼저 있었고 후에 별도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냉정히 따지면 시민혁명을 통해 새로운 형태로 나아갔기 때문에 산업혁명을 비롯해 혁신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저자는 박정희의 리더십은 인정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어떤 리더십을 보여주었는지 냉정히 평가해야지 무작정 성과를 냈다, 카리스마가 있다, 잘 살게 했다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고 말한다.(192, 193 페이지) 저자는 박정희에 따라다니는 친일파라는 수식어가 싫으면 기회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어떨까?라고 말한다.

 

저자는 박정희가 만주 군관학교에 있던 시절 만주는 중국공산당의 주도로 항일투쟁을 하던 지역이었기에 자연스럽게 한인들의 독립운동도 사회주의 성격을 띨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했듯 민족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 항일투쟁은 항일투쟁이다. 저자는 만일 박정희가 만주가 아니라 중국 남부나 충칭 인근 전투 부대에 배속되었다면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싸웠을 것이라 말한다.(197 페이지)

 

박정희가 펼친 재벌의 경영권만을 보전한 노동 배제 정책 때문에 사회구조가 극도로 양극화되었다. 박정희 정권 때문에 소유는 사유화되고 손실은 사회화되는 독특한 한국식 경제구조가 만들어졌다.(218 페이지) 흥미로운 것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적 성과가 오히려 1960년대 즉 박정희가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그나마 민주적인 시대에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중화학 공업을 최고의 업적인 양 강조하지만 1970년대 내내 낮은 생산성 문제로 시달렸고 1978년 전경련 자료에 의하면 246개 산업 부문 중 국제경쟁력을 갖추었던 산업은 고작 28개 부문에 그쳤다. 정부의 보조가 없었다면 수출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218, 219 페이지)

 

박정희 정권 기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91 퍼센트로 대단하다. 이 기간에 국내총생산의 경상가격이 131조인데 지가 상승으로 인한 불로소득은 326조였다. 의도적으로 토대를 파괴했다고 할 상황이었다. 저자는 진정 박정희 시대와 멀어질 때 박정희의 망령이 없는 세상을 꿈꿀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225 페이지)

 

고대사론에서 저자는 단군신화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시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몽골이 침입했을 때이다. 단군신화가 국가적 차원에서 체계화된 것은 조선시대이다.(235 페이지) 저자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사고하면서 우리 고대 문화를 현대에 잘 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동이족이나 예맥족에 대한 그럴싸한 환상(우리 민족이 옛날에는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 중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는)은 걷어내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또한 활동 영역이 곧 영토라는 식의 단순한 생각도 고쳐야 한다고 말한다.(237 페이지) 저자는 우리 역사학계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라 말한다.(242 페이지) 저자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일원론적으로 민족의 발전사만 설명하고 우리가 한때 대단했고 잘 나갔다는 식에 머문다면 심각한 학문적 정체라고 말한다.(243 페이지)

 

저자는 왜 항상 자부심만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여러 사건에 대한 세밀한 검토,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하는 것이 자신을 비하하고 식민사관에 물든 태도인가라 묻는다.(246 페이지) 저자는 견해가 다르다고 고대사 파동의 문제를 신채호 대 이병도, 민족주의 사학 대 식민주의 사학, 애국 대 매국의 대립 구도로 선을 긋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26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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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으로 하여금 결혼과 사랑을 분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책이었다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작가 벨 훅스의 말은 다소 의외이다.(‘사랑은 사치일까?’ 참고) 책은 체험보다 더 소중한 것일까?

훅스는 타인을 향한 사랑을 통해 기꺼이 과거의 정체성을 떨쳐내고 영혼의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 우리 존재의 거대한 신비로움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는 경험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말을 강조한다.(책과 체험을 우열을 가려야 할 대상으로 나누지 말 것.)

어떻든 그런 분리의 결과 훅스가 포기한 것은 결혼이고 떨칠 수 없었던 것은 전능한 사랑에 대한 믿음이었다고 한다.

약 2년 만에 ‘사랑은 사치일까?’를 다시 읽는 내 눈에 새롭게 들어오는 것은 사랑은 우리가 내면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을 때에만 찾아오며, 사랑의 여정은 자기인식을 감수(甘受)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다.

훅스는 미국의 정신분석가 존 웰우드의 말을 인용하는데 그에 의하면 타인과의 관계는 그저 내면의 삶의 확장에 불과하며 자기 자신과 열려 있는 관계를 맺을 때에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럴 수 있다.

이런 유의 사유를 우리는 유식(唯識) 불교의 저서인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붓다는 실로 어떤 진리도 설파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내면에서 진리를 깨달아야 함을 통찰하셨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문제는 “당신이나 나나”(허수경 시인의 표현) ‘내면의 사랑’을 발견하고 ‘자기인식’을 감수하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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