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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주제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 실록 기사로 조선을 만나다
송영심 지음 / 팜파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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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층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의 행간에 민초, 여성, 하층민들의 다양한 기록이 숨어 있다는 송영심. 그는 자신의 책('청소년을 위한 주제로 보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고리타분한 조선사가 가슴 떨리는 조선사가 된다고 말한다.

 

'조선을 담다, 조선왕조실록'(1), '조선의 왕들을 만나다'(2), '주제로 실록 속 조선을 보다'(3) 등으로 구성된 책에서 저자는 춘추관에 속한 여덟 명의 사관으로 구성된 사관들을 한림이라 부른다는 말에서부터 실록의 원고인 사초(史草)는 국왕 옆에서 기록한 입시사초(入侍史草)와 퇴청한 사관이 집에서 내용을 정리해 생각과 사론을 정리하는 가장사초(家葬史草)로 나뉜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들을 열거한다.

 

세검정(洗劍亭)이 세검정이라 불리는 것은 실록 편찬에 쓰인 종이 내용을 이곳에서 씻었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사건들"이 소개된다. 저자는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할 때 의연하게 대처한 드라마 장면은 픽션이라 말하며 픽션과 사실을 제대로 구분할 것을 주문한다. 정도전은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안타까운 점은 단종이 복위운동을 알고 친히 큰칼까지 내리며 격려했다는 사실이다. 조광조가 중종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유는 뭘까? 조광조가 중종의 공부를 독촉하고 꾸짖었기 때문이라 생각할 만하다.(79 페이지) 조광조는 죽음 앞에서도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마음도 따뜻했다.

 

죽는 순간에도 자신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집의 주인을 불러 미안해 하는 마음을 전했다. 조광조는 자신이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라 부탁했다. 먼 길 가기 쉽도록. 이 책의 특징은 새로운 이야기들이 많다는 점이다. 왕비 침전에 용마루가 없는 것을, 왕과 왕비가 사랑을 나누어 아기를 만들 때 용마루가 있으면 아기가 탄생하는 상서로운 기운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기 때문이라 설명한 것도 그 중 하나이다.

 

물론 저자는 왕비의 처소가 아닌데도 용마루가 없는 건물도 있어 그 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한다. 세종 이전에는 왕의 후궁이나 대군의 부인들도 옹주라 불렀다. 그러다가 세종때 공주와 옹주가 구별되었고 성종때 왕비의 딸을 공주, 후궁의 딸을 옹주라 부르기 시작했다.

 

세자빈의 딸은 군주(君主), 세자 후궁의 딸은 현주(縣主)라 했다. 동뢰(同牢)라는 말도 있다. 공주와 부마가 치르는 첫날밤이다.(147 페이지) 첫날밤이 아니라 부부가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영조의 부마)이 죽자 아내 화순옹주가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다. 열녀문을 세워주자는 신하들의 간언을 영조가 거절했다. 정절은 지켰으나 밥을 먹으라는 아비의 청을 듣지 않아서 불효녀이기 때문이고 아비가 자식의 열녀문을 세워주는 법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54 페이지)

 

노비 출신인 장녹수는 여러 남자에게 몸을 팔아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156 페이지) 조선에는 궁녀에서 출발해 왕비까지 된 두 여성이 있었다.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이다.(170 페이지) 궁녀들은 고생이 막심했다. 왕족 외에는 궁에서 죽을 수 없다는 궁궐법도 때문에 늙고 병들면 요금문이라는 쪽문을 통해 나가 사가에서 돌보는 이 없이 생을 마쳤다.

 

저자는 조선의 궁녀는 조선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역사의 그림자이자 증인이라 말한다.(174 페이지) 세종 대에 국가 차원에서 무당들을 모아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사실(세종실록 참고)도 흥미롭다.(191 페이지) 유에프오 목격담이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실록 내용도 있어 흥미를 끈다.

 

"강릉부에서는 825일 사시에 해가 환하고 밝았는데 갑자기 어떤 물건이 하늘에 나타나 작은 소리를 냈습니다. 형체는 큰 호리병과 같은데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컸으며 하늘 한 가운데서부터 북방을 향하면서 마치 땅에 추락할 듯 하였습니다. 아래로 떨어질 때 그 형상이 점점 커져 3, 4 장 정도였는데 그 색은 매우 붉었고 지나간 곳에는 연이어 흰 기운이 생겼다가 한참 만에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사라진 뒤에는 천둥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습니다.“(광해 20. 192353번째 기사 1609: 225 페이지)

 

흥미롭다. 유에프오 관련 실록도 그렇고 전체적 구성도 그렇다. 다만 몇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정명공주(1603-1685)를 중종반정(1506) 이후 공주로 복권될 수 있었다고 쓴 부분(150 페이지), 익종(효명세자) 비를 신원왕후로 기록한 부분(143 페이지),

 

단종의 유배지를 청룡포로 기록한 부분(39 페이지), 나쁜 일을 많이 벌인 화완옹주를 정치력이 탁월했다고 표현한 부분(152 페이지) 등은 아쉽다. 세검정(洗劍亭)이 실록 편찬에 쓰인 종이 내용을 이곳에서 씻었기 때문이란 내용은 일반론과 다른데 그 부부분에 대해 구체적 설명이 없어 의아하다.(2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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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추리 조선사 -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서 사도세자의 뒤주까지, 가정과 추론으로 재구성한 조선 이야기
김종성 지음 / 인문서원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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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推理)란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미루어 생각하는 것으로 어떤 판단을 근거로 다른 판단을 이끌어내는 것을 의미하는 추론(推論)과 같은 말이다.(물론 추리는 추리소설이란 장르 때문인지 추론에 비해 격이 떨어져 보인다.)

 

김종성의 '역사 추리 조선사'를 읽으며 내가 한 생각이다. 김종성의 책을 읽게 된 것은 김준혁 교수의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의 서평에 달린 댓글 때문이다. "어차피 그래봤자 조선은 이미 패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와 일본의 경제력과 외교력을 따라가기엔 조선은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칠순의 해인 1804년을 맞아 임오년 원수들을 사면하는 대화합의 정치, 그리고 상왕인 자신의 후원하에 순조가 이끌어가는 새 시대를 계획했었다. 정조가 4년만 더 살았다면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고 설령 패한다 해도 적들 역시 적잖은 피해를 입고 더 일찍 문제점을 발견해 19세기 말의 위기에 더 효과적으로 대처했을 것이란 게 저자의 진단이다.

 

사도세자는 정조 사망 99년 후인 1899년 고종에 의해 장조로 추존되었다. 그러니 앞의 말은 정조 재세시 복권되었을 것이라는 말로 정조가 4년만 더 살았다면 정순왕후와 그 추종세력들이 조선을 반개혁의 수렁에 빠지지 못하게 했으리라는 말과 이어진다.

 

일본의 경우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개혁에 착수해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 뒤 청나라를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 추론대로 정조가 4년만 더 살았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앞서 말한 댓글의 문제점은 결정론적 사고라는 데 있다. 어차피라는 말을 보라.

 

'역사 추리 조선사'에는 정조에 대한 논의 외에 위화도 회군이 없었다면? - 고려가 임진왜란을 당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대비의 수렴청정이 없었다면? - 조선 왕조는 76년만에 망했을 것이다’, ‘폐비 윤씨가 사약을 마시지 않았다면? - 그래도 연산군은 폭군이 됐을 것이다’, ‘효종이 일찍 죽지 않았다면 북벌에 성공했을까? - 현실적으로 북벌 가능성은 낮았다’, ‘장희빈이 끝까지 중전 자리를 지켰다면? - 정약용 가문의 멸문지화와 엄청난 고난도 없었을 것이다’, ‘조대비가 안동 김씨를 미워하지 않았다면? - 조선은 망국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종이 문호개방을 서두르지 않았다면? -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지 았았을 것이다등 민감한 이슈들이 많다.

 

'정몽주가 살았다면? - 정도전은 조선을 세우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에서 드러난 정몽주는 오로지 한 임금을 섬긴 신하가 아니라 지극히 권력지향적인 정치인이다. 저자는 만일 정몽주가 위화도 회군, 우왕 폐위, 창왕 옹립 및 폐위, 스승인 이색(李穡) 제거, 공양왕 옹립 등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그가 진심으로 역성혁명을 반대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43 페이지) 정몽주는 군사부일체라는 유교적 가치보다 권력 획득이라는 정치적 가치를 우선시한 사람이다.

 

정도전은 이성계와의 술자리에서 한고조(유방)가 장자방(장량)을 쓴 게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쓴 것이란 말을 많이 했다. 조선 건국의 실질적 주역이 이성계가 아니라 자신임을 은근히 과시하는 말이었다.(53 페이지)

 

수양대군이 좋은 숙부였다면?이란 글에서 저자는 그렇다 해도 단종은 죽을 운명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안평대군을 거론한다. 안평은 수양의 동생이고 단종의 작은 아버지이다. 저자는 안평이 수양과 다를 바 없었다고 말한다.(74 페이지) 저자는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난 문종 탓을 한다. 물론 나는 장자를 고집해 병약한 아들 문종을 왕이 되게 한 세종 탓을 하고 싶다.

 

저자는 주군 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보다 세상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 주군의 왕권 강화를 위해 희생한 사람보다 세상의 권리 보장을 위해 희생한 사람에게 후한 점수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77 페이지) 저자는 그런 인물(후한 점수를 받아야 할 사람)로 신숙주를 든다.

 

그는 조선의 태평성대에 공헌한 사람이다. 신숙주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자 왜구가 골칫거리가 되었다. 저자는 신숙주가 변절자가 된 것이 백성들에게는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상술하지 않겠지만) 신숙주는 임진왜란 발발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83 페이지)

 

저자는 통치권의 바탕에 경제력과 군사력이 있었다며 연산군이 반정으로 물러난 것은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아서가 아니라 국고를 탕진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어머니가 사약을 받지 않았어도 물러났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연산군 이전(성종)부터 국고는 악화되었다. 지주들이 납세를 기피하기 위해 흉년 피해를 과장해 보고한 까닭이다. 연산군이 일으킨 사화는 경제력이 없어 생긴 사태였다. 사림의 정치적 주장에 가진 게 없었던 연산은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중종때 조광조가 등장(1515)하지 않았다면 임진왜란때 더 힘들었을 것이라 말한다. 조광조가 사림파를 위한 개혁을 펼쳤고 사림파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큰 몫을 한 의병의 구성원들이었다는 논리이다. 중종이 조광조를 기용한 것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조광조는 개혁의 기틀을 마련하고 중종에 의해 제거되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였지만 사림파는 정권을 잡았다. 물론 임진왜란 극복에 국민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이 책에서 자주 거론된 사건이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은 명나라와의 관계(무역) 복원을 위해 일본이 택한 전쟁이었다.(134 페이지) 앞에서 결정론을 비판했는데 저자도 같은 말을 한다. 세상은 필연의 법칙으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100 퍼센트 정해져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설사 어느 정도 예정되었다 해도 예정된 것과 실제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134 페이지)

 

임진왜란의 최대 수혜자는 여진족이었다. 그들은 임진왜란 후 급성장해 동아시아 패권국이 되었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청나라가 두 차례 호란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고 중원 정복을 시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141 페이지) 일본은 임진왜란 패전으로 분발해 결과적으로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151 페이지)

 

장희빈이 끝까지 중전 자리를 지켰다면 정약용 가문이 처참한 시련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195 페이지) 저자는 영조가 누군가 아들(사도세자)를 살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고 말한다.(210 페이지)

 

이 말을 듣고 보니 영조가 세자를 곧바로 죽이지 않고 뒤주에 8일이나 가두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사도세자는 10살때부터 노론을 비판했다. 그가 집권했다면 훨씬 강도 높은 탕평정치가 펼쳐졌을 것이다. 저자는 사도세자의 탕평이 영정조의 그것에 비해 순수하고 원칙적이었다고 말한다.(212 페이지)

 

그러면 노론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을 것이다. 개혁 군주인 정조도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생각해보자. 이는 불가피한 점이었다.

 

조선은 500년간 지속된 나라이다.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세종은 누구나가 다 추앙하는 임금인데 정조는 그에 못미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지금 보니 세종 시대와 정조 시대의 차이 358- 보다 정조시대와 현대의 차이 242- 가 더 가깝네요. 새삼 조선이 얼마나 오랜 왕조였는지..."란 말을 했다.

 

두루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조선 공부이다. 조광조와 중종의 관계, 이황과 사림의 관계, 연산을 물적 토대로 분석한 시각, 안평과 수양의 관계, 정몽주에 대한 새로운 앎, 수양이 아니었어도 단종은 죽을 운명이었다는 분석,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정세, 특히 두 차례의 호란과의 연관성, 임진왜란 발발 원인 등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정조가 4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이 19세기 말의 위기에 더 효과적으로 대처했을 것이란 분석을 접하며 평소 지론을 확인해 기뻤던 한편 정조의 비극에 마음이 아픈 것을 새삼 느꼈다. 두루 공부해야 하리라. 조광조와 중종, 사림의 관계, 나아가 제자 양산보와 성수침 등의 은신 등을 함께 공부하고 싶고 김시덕 교수가 강조한 전쟁사를 공부하고 싶다. 아직도 제한적이지만 비교적 넓은 시각을 갖게 해준 저자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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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상곡(夜想曲) 2018-10-03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를 떠나서 병법적으로 주변 외세의 정치적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발상인듯 합니다 내부에서의 개혁도 중요하지만 외국의 정치적 변화에도 개혁은 쉽게 변할수 있습니다 이미 주변의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보다 열배는 더 거대한 시장과 국력 기술력을 갖고있었고 기존에 우리가 알고있는 사실처럼 러시아와 일본,청나라,프랑스의 외세에 휘둘리던 사실을 잘 알고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말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청나라 또한 영국의 화력과 서구열강의 기술력 앞에 무릎을 꿀었는데 겨우 정조때 와서 고작 몇십년 개혁한걸로 서구열강을 막는다는건 조잡하기 그지없는 농민병으로 소총부대를 상대하는거나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의 기억력은 고금에 뛰어나 한 차례 눈으로 보기만 하면 죽을 때까지 잊지 않다가 우연히 자극만 받으면 한번에 수천 백 마디를 외워 마치 술통에서 술이 쏟아지듯 유탄이 퍼부어 판때기를 뒤엎듯 하였다.

구경(九經), 사서(四書), 23사(二十三史)에서 제자백가, 시, 부, 잡문총서, 패관, 상역(象驛), 산률학(算律學), 우의마무(牛醫馬巫)의 설....

모두 정밀히 연구하고 알맹이를 파내서 한결같이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 같았다. 질문한 사람마다 깜짝 놀라서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정약용이 표현한 이가환(李家煥; 1741 -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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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김준혁 지음 / 여유당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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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수원 화성(華城: 1997년 지정)을 무엇이라 부를까? 과학성과 합리성, 실용성 등을 두루 갖춘 동양 성곽의 백미? 강한 군사력에 근거, 왕도정치에 한 몫을 한 상징 건축물? 한신대학교 정조(正租) 교양대학 김준혁 교수의 이산 정조, 꿈의 도시 수원 화성을 세우다를 통해 바로 그 수원 화성의 정신과 물질적 토대를 알아보자.

 

무엇보다 먼저 말할 것은 1796년 축성(築城)된 수원 화성은 18세기 개혁 군주인 정조 자신을 가리키는 건축물이었다는 말이다.(340 페이지) 정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은 수원 화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적 힘이었고 정조는 바로 그 힘을 반대세력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중요한 점은 화성이 성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화성은 도시 전체를 의미한다.(175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정조는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세우고 그 중심에 화성(華城)을 축조(築造)했다. 개혁을 주도할 선진적 인물과 도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화성 축조의 배경은 무엇일까?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개인 차원의 죽음이 아니라 노론이라는 반대 세력의 정치적 행보가 작용한 결과다. 사도세자는 소론의 지지를 받았던 경종 궁녀들의 보필(輔弼)을 받으며 자랐다. 영조의 탕평책의 일환이었지만 이로 인해 사도 세자는 열 살이란 어린 나이에 노론 신하들의 잘잘못을 거론하는 등 소론의 시각으로 정세를 보았다.

 

자연히 이는 영조 및 노론 세력과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이런 지적이 이 책의 주요 성과이다. 물론 영조의 과오는 정치적 성향의 차이로 환원할 수 없다. 개인적인 과오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화성 성역은 1804년 정조의 양위 이후를 대비한 터전(303 페이지)이었다.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화성은 주인을 잃었다. 정조는 개혁과 호학(好學)의 군주였고 애민(愛民)과 위민(爲民)의 군주였다.

 

또한 만기친람(萬機親覽: 온갖 정사를 임금이 친히 보살핌)의 군주였고 남다른 효심을 가진 군주였다. 정조는 서얼 허통과 자휼전칙을 시행했고 노비제도 혁파안을 통과시키려 했고 신분에 관계 없이 열심히 일하는 자가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어 나갔다.

 

정치색이 달라도 쓸모가 있으면 적재적소에 등용했다.(350 페이지) 둔전(屯田)을 운영하도록 했고 대규모 국영 농장을 만들었다.(144 페이지) 더욱 그는 수원을 국제 무역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147 페이지) 이렇듯 정조의 개혁은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185 페이지)

 

정조는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은 물론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만들었다. 문무(文武)를 겸한 정조의 전일성(全一性)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조는 임금과 신하가 하나가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268 페이지) 화성 행궁의 정문 이름을 신풍루(新豐樓)로 지은 데서 알 수 있듯 정조는 수원을 자신의 새로운 고향으로 선언했다. 풍이란 말은 한 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패(灃沛)에서 유래해 황제의 고향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305 페이지)

 

정조는 고도의 정치 역량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사도세자와 관련한 언급을 일정 선에서 그침으로써 노론으로 하여금 화성 축성과 관련해 더 이상 시비를 걸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212 페이지)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듯 화성은 정조의 모든 역량이 총동원된 작품이자 정조 자신을 가리키는 건축물이다.

 

정조에 대해 한 논자(백승종)는 정조가 조선 왕조의 오랜 국시(國是)인 성리학의 함양을 부르짖었다는 이유로 정조가 개혁 군주로 불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정조와 불량 선비 강이천‘ 346 페이지) 정조가 취한 물적 토대에 기반한 수많은 개혁의 시도들은 도외시하고 성리학이라는 학문만을 고려한 편중된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정조는 정신에 대해서는 성리학을, 정신 이외의 여타 분야에 대해서는 실학 정신을 인정, 적용했다. “화홍문(華虹門)은 실학 정신을 실현한 평등 정신의 산물”(260 페이지)이란 말을 새기자. 정세에 대처하고 백성들에 대해 보인 정조의 태도에 실학 정신이 깃들지 않은 것이 있는가, 묻게 된다 .

 

화성 완공 1년 전 어머니 회갑을 치르기 위하기 위해 나선 행차를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 완공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를 자세히 보아야 하겠고 정조의 철학적 면모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다. 내가 정조를 좋아하는 것은 전기한 여러 면모들 외에 정조가 주역과 풍수 등에 능통해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다양하게, 자세히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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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상곡(夜想曲) 2018-10-0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그래봤자 조선은 이미 패망의 길로 갈수빢에는 없었습니다. 청나라와 일본의 경제력과 외교력을 따라가기엔 조선은 이미 늦어도 한참을 늦었다(임진왜란때 조선은 그냥 패망했어야 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8-10-03 19:03   좋아요 0 | URL
역사 추리 조선사 리뷰를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야상곡(夜想曲) 2018-10-03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저는 조선의 두얼굴을 추천합니다.
 

요즘 정조에 대한 책을 연이어 읽고 있다. 이정우 교수의 ‘인간의 얼굴‘에서 정조와 정약용의 문답 부분을 읽은 이래 이십 년 가까이 읽자고 다짐만 해온 정조 본격 읽기를 이제 시작한 셈이다.

박상하의 장편 소설 ‘왕의 노래‘를 완독하고 서평을 작성했고 백승종의 ‘정조와 불량 선비 강이천‘을 필요한 부분만을 읽었다.

지금 읽고 있는 김준혁 교수의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와 김도환 교수의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도 반드시 서평을 쓸 것이다.

정조에 대한 책을 읽다 보면 다산 정약용을 만나게 된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에서 정조가 성균관 유생들을 강도 높게 교육시키며 주제를 줘 그것을 논문화하게 했음을 언급한 부분에서 정약용 이야기가 나온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내준 과제는 중용에 대해 논문을 쓰는 것으로 정조는 다른 유생들의 답변은 모두 황잡(荒雜; 거칠고 조잡)하지만 정약용이 한 답은 특이하기에 반드시 식견 있는 선비가 될 것이라 말했다.

정조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중용에 대해서는 퇴계와 율곡의 학설을 모두 공부했지만 정약용이 율곡의 학설이 더 옳다는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글을 썼기 때문이다.

남인은 대대로 퇴계의 학설을 옳다고 따르는 사람들인데 남인인 정약용이 퇴계가 아닌 율곡의 학설을 옳다고 한 것은 학문적인 자기 견해가 확실했다는 의미이다.

중용은 나도 관심이 많다. 아직 체계화하지 못했지만 신정근 교수의 논의를 따라 말하자면 중용은 어떤 원칙을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조절하는 것이다.

사뭇 비경제적이고 산만해지더라도 꼭 읽고 싶은 책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래서 힘들지만 그래서 행복하기도 하다.

인문서이면서 소설만큼 흥미로운 김준혁 교수의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를 읽고 어떤 책으로 옮겨가게 될지 모르지만 어떤 책이 되었든 즐겁게 읽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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