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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주제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 실록 기사로 조선을 만나다
송영심 지음 / 팜파스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지배층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의 행간에 민초, 여성, 하층민들의 다양한 기록이 숨어 있다는 송영심. 그는 자신의 책('청소년을 위한 주제로 보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고리타분한 조선사가 가슴 떨리는 조선사가 된다고 말한다.
'조선을 담다, 조선왕조실록'(1장), '조선의 왕들을 만나다'(2장), '주제로 실록 속 조선을 보다'(3장) 등으로 구성된 책에서 저자는 춘추관에 속한 여덟 명의 사관으로 구성된 사관들을 한림이라 부른다는 말에서부터 실록의 원고인 사초(史草)는 국왕 옆에서 기록한 입시사초(入侍史草)와 퇴청한 사관이 집에서 내용을 정리해 생각과 사론을 정리하는 가장사초(家葬史草)로 나뉜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들을 열거한다.
세검정(洗劍亭)이 세검정이라 불리는 것은 실록 편찬에 쓰인 종이 내용을 이곳에서 씻었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사건들"이 소개된다. 저자는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할 때 의연하게 대처한 드라마 장면은 픽션이라 말하며 픽션과 사실을 제대로 구분할 것을 주문한다. 정도전은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안타까운 점은 단종이 복위운동을 알고 친히 큰칼까지 내리며 격려했다는 사실이다. 조광조가 중종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유는 뭘까? 조광조가 중종의 공부를 독촉하고 꾸짖었기 때문이라 생각할 만하다.(79 페이지) 조광조는 죽음 앞에서도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마음도 따뜻했다.
죽는 순간에도 자신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집의 주인을 불러 미안해 하는 마음을 전했다. 조광조는 자신이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라 부탁했다. 먼 길 가기 쉽도록. 이 책의 특징은 새로운 이야기들이 많다는 점이다. 왕비 침전에 용마루가 없는 것을, 왕과 왕비가 사랑을 나누어 아기를 만들 때 용마루가 있으면 아기가 탄생하는 상서로운 기운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기 때문이라 설명한 것도 그 중 하나이다.
물론 저자는 왕비의 처소가 아닌데도 용마루가 없는 건물도 있어 그 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한다. 세종 이전에는 왕의 후궁이나 대군의 부인들도 옹주라 불렀다. 그러다가 세종때 공주와 옹주가 구별되었고 성종때 왕비의 딸을 공주, 후궁의 딸을 옹주라 부르기 시작했다.
세자빈의 딸은 군주(君主), 세자 후궁의 딸은 현주(縣主)라 했다. 동뢰(同牢)라는 말도 있다. 공주와 부마가 치르는 첫날밤이다.(147 페이지) 첫날밤이 아니라 부부가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영조의 부마)이 죽자 아내 화순옹주가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다. 열녀문을 세워주자는 신하들의 간언을 영조가 거절했다. 정절은 지켰으나 밥을 먹으라는 아비의 청을 듣지 않아서 불효녀이기 때문이고 아비가 자식의 열녀문을 세워주는 법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54 페이지)
노비 출신인 장녹수는 여러 남자에게 몸을 팔아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156 페이지) 조선에는 궁녀에서 출발해 왕비까지 된 두 여성이 있었다.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이다.(170 페이지) 궁녀들은 고생이 막심했다. 왕족 외에는 궁에서 죽을 수 없다는 궁궐법도 때문에 늙고 병들면 요금문이라는 쪽문을 통해 나가 사가에서 돌보는 이 없이 생을 마쳤다.
저자는 조선의 궁녀는 조선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역사의 그림자이자 증인이라 말한다.(174 페이지) 세종 대에 국가 차원에서 무당들을 모아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사실(세종실록 참고)도 흥미롭다.(191 페이지) 유에프오 목격담이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실록 내용도 있어 흥미를 끈다.
"강릉부에서는 8월 25일 사시에 해가 환하고 밝았는데 갑자기 어떤 물건이 하늘에 나타나 작은 소리를 냈습니다. 형체는 큰 호리병과 같은데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컸으며 하늘 한 가운데서부터 북방을 향하면서 마치 땅에 추락할 듯 하였습니다. 아래로 떨어질 때 그 형상이 점점 커져 3, 4 장 정도였는데 그 색은 매우 붉었고 지나간 곳에는 연이어 흰 기운이 생겼다가 한참 만에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사라진 뒤에는 천둥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습니다.“(광해 20권. 1년 9월 235일 3번째 기사 1609년: 225 페이지)
흥미롭다. 유에프오 관련 실록도 그렇고 전체적 구성도 그렇다. 다만 몇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정명공주(1603-1685)를 중종반정(1506년) 이후 공주로 복권될 수 있었다고 쓴 부분(150 페이지), 익종(효명세자) 비를 신원왕후로 기록한 부분(143 페이지),
단종의 유배지를 청룡포로 기록한 부분(39 페이지), 나쁜 일을 많이 벌인 화완옹주를 정치력이 탁월했다고 표현한 부분(152 페이지) 등은 아쉽다. 세검정(洗劍亭)이 실록 편찬에 쓰인 종이 내용을 이곳에서 씻었기 때문이란 내용은 일반론과 다른데 그 부부분에 대해 구체적 설명이 없어 의아하다.(2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