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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끈 - 서사적 사고 내러티브 총서 1
김상환 외 지음 / 이학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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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무엇인가? 패러다임과 내러티브의 관계는 어떤가? 등을 알 수 있는 상당히 매력적인 책이다. "인간은 안식처가 있는 덕분에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된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주고 받는 능력 덕분에 적절한 안식 공간을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구절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내러티브 패러다임 연구단을 대신해 쓴 김상환 철학자의 글이다.

 

내러티브 패러다임이란 말은 흥미롭다. 이 두 항목은 심리학자 제롬 브루너가 두 가지로 분류한 사고의 양식을 이르는 말이다. 패러다임 양식은 논리적 추론과 과학적 검증을 바탕으로 하는 추상적이고 탈맥락적인 사고로서 지식을 주체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로서 간주한다.

 

내러티브 양식은 경험의 구체성과 개별성을 존중하는 맥락 의존적인 사고로서 경험을 조직하고 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지식을 생성하는 마음의 작용에 주목한다.(45, 46 페이지) 내러티브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모든 매체와 형식을 의미하는 서사(敍事)를 지칭한다. 서사는 시간성을 기본으로 한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건과 변화가 일어나야 스토리라 할 수 있다.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이질적인 것들을 종합하여 통일성과 연속성을 창안하는 일이다. 모든 인간은 그러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어 서사적 존재라 불린다. 인간은 날마다 조각난 경험들의 전후 맥락을 찾아내어 그것들 사이의 관련성을 부여하고 개별적인 상황과 사건들을 결합하여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부단히 이야기를 만드는 인간의 서사화 행위는 혼돈스러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안정감과 안도감을 얻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과도 맞닿아 있다. 서사 이전의 사실 그 자체라는 것은 아무런 형태도, 특성도, 의미도 없다.(71 페이지) 타인의 삶에 대한 우리의 서사적 이해는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어딘가 틀렸을지 모르고 혹시라도 그렇다면 그의 이야기는 언제든 다시 쓰일 수 있어야 한다.(51 페이지) 이 구절을 접하니 한 심리상담가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된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타인은 결국 나를 오해하기 마련입니다. 저 또한 타인을 제 방식으로 오해할 것이고요. 각자 방식으로 제멋대로 생각합니다. 딱 그 사람 마음 크기만한 관대함으로 나를 보려 할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난이 두려워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게 아니라 기꺼이 이상한 사람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괜찮고 멀쩡한 사람인지 타인에게 해명할 게 아니라 자기만의 세계를 잘 구축해서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을 때 타인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단단하게 지켜낼 수 있습니다.”(김혜령 지음 ‘내 마음을 돌보는 시간’ 참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폴 리쾨르는 서사적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정되고 균열 없는 실체인 자기 동일적 정체성이 아닌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정체성을 말한다. 리쾨르는 이야기를 시간 속에서 이질성을 띠며 파편화된 것들을 하나로 묶는 끈으로 보았다.(70 페이지)

 

중요한 점은 나의 이야기는 온전히 나만의 것일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 각자의 이야기는 매순간 타인들의 이야기와 얽혀 있고 내 삶의 여러 단면은 내 가족, 친구들, 동료들의 이야기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족 치료사 및 정신보건 사회복지사인 마이클 화이트와 데이비드 엡스턴이란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이야기 치료의 창시자다.

 

이들은 이야기의 은유를 통해 인간의 심리 구조와 발달 과정을 이해하는 서사 심리학의 관점을 가족 치료에 도입했다. 한 사회의 지배적 담론을 그대로 내면화한 상태에서 자기 이야기를 그 틀에 끼워 맞추게 되면 자신의 삶을 병적이거나 결핍된 이야기나 부정적 정체성을 서술하는 이야기로 구성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내담자는 자기 삶의 이야기에 대한 전문가임을 인정하고 치료자 자신은 전문가가 아닌 협력자의 위치에 서고자 한다. 마이클 화이트는 인생에 대한 우리의 서술은 살아가는 그대로의 인생을 나타내거나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직접적으로 구성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관점을 구성주의라 한다. 이야기하는 행위가 실재를 창조한다는 의미다.

 

인간은 식욕, 성욕에 버금가는 서사적 충동의 지배를 받는다. 김상환의 글이 인상적이다. 김상환은 서론에 이어 '서사의 힘과 한계', '글쓰기의 단계와 창의적 사고의 논리' 등의 글을 썼다. 서사를 배우고 실행하는 능력이 없다면 정서라는 것도 없다. 라캉은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말을 했다. 이는 욕망이 언어의 세계 속에서 학습되는 것이란 의미다.

 

이야기는 감정을 유발하는 장치일뿐 아니라 감정을 학습하고 해석하는 장치다. 우리는 아이 시절부터 이야기를 통해 감정과 그에 관련된 가치를 배우고 믿는다는 의미다. 특정한 가치 질서나 도식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희로애락의 감정이 일어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석할 때는 로고스가 리듬, 도식 등과 가까워진다. 이때 로고스는 요소들을 특정한 관계 속에 분절하는 것, 존재자 일반에 특정한 무늬나 결 혹은 질서를 가져오는 것에 해당한다.(82 페이지)

 

로고스의 동사 레게인(legein)은 원래 모으기, 수집하기, 수확하기 등을 의미했다. 하나로 모으되 부분들의 차이와 그 관계가 모두 드러나도록 펼쳐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손으로 하는 행위이지만 동시에 말로 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서사는 주관적이고 편향적인 특성 덕분에 사물의 주관적 본질을 드러내는 데 있어 무한한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다.

 

고유한 장점은 극복된 단점인 경우가 많다. 루터에 의하면 일신교냐 다신교냐는 것은 종교의 본질이고 신앙은 주관적 본질이다. 애덤 스미스가 가시적 재화라는 경제의 본질에 대해 설정한 상품 생산에 투입된 노동시간은 경제의 주관적 본질이다. 공자는 유가 윤리의 객관적 본질인 예(禮)에 상대되는 인(仁)이라는 주관적 본질을 가르쳤다.

 

서사적 언어의 탁월성은 사물의 주관적 본질을 얼마나 순화된 형태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88 페이지) 주관적 본질은 그것과 관계하는 주체의 체험을 전제한다. 좋은 이야기일수록 이야기하는 사람의 존재감이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벤야민에 의하면 이야기꾼이란 그의 삶의 심지를, 조용히 타오르는 그의 이야기의 불꽃에 의해 완전히 연소시키는 사람이다.(‘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참고)

 

논리적 언어는 일반화를 꾀한다. 개체에서 특수성을 제거하고 공통의 요소를 추출하여 보편적인 규칙을 찾는다. 서사적 언어는 개체의 특수성을 보존하면서 보편성에 이른다. 논리적 언어는 무시간적이고 상황 독립적인 사태를 그린다. 서사적 언어는 진리의 시간성과 상황성, 정상적 질서의 위기와 곤경의 통과, 주체의 주관적 체험과 상승적 변형을 그린다.

 

신정아와 최용호는 ‘인류세 스토리텔링‘을 이야기한다. 인류세란 인간종이 너무나 강력해진 나머지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지구 전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갖게 된 시대를 말한다. 인류세 스토리텔링은 그간 배경에 있던 존재적 파국이라는 설정을 전경화한다.

 

윤성우는 인간은 생각이나 사유를 통해 나의 존재를 확증하는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나를, 자아를, 자기를, 주체를 찾아간다는 논의를 소개한다. 이 논의는 한나 아렌트, 폴 리쾨르, 앨러스터 매킨타이어, 찰스 테일러의 대동소이한 주지(主旨)다.

 

아렌트에 의하면 인간의 실존적 특성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멸성이지만 동물과 달리 오직 생식(生殖)을 통해서만 자신의 불멸적 삶을 보장받지 않고 자신의 각자성을 드러내는 말과 행위를 함으로써 생물학적으로 사라진 후에도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긴다.(135 페이지) 알랭 바디우는 사건에 사로잡힌 주체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상의 질서, 그 핵심을 진리라 부른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참과는 다르지만 진리 개념의 일상적인 용법과 통하는 데가 있다. 진리는 우리에게 사물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물의 참모습은 수많은 ’맞지만 무의미한‘ 말들을 뚫고 나와 우리를 관통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때로 그 한마디를 위해 수많은 잡담의 늪을 건넌다.(163 페이지)

 

벤야민은 이야기를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달되며 전달자에 의해 조금씩 변하는 것으로, 소설을 완결되고 닫힌 텍스트로 보았다.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할 때 그는 자기 안에서 거르고 다듬고 키운 이야기를 전한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자신의 것이 아닐지라도 그의 삶이 녹아 있다.(166 페이지)

 

이야기는 반복되면서 전달된다. 반복은 변화를 부른다. 이야기는 반복의 예술이다. 이재환이 언급한 ’과학적 사고와 서사적 주체; 데넷을 중심으로‘는 흥미롭다. 데넷은 대니얼 데넷이다. 그는 데카르트가 말한 변하지 않는 정신을 데카르트 극장이라 부른다. 그는 우리는 뇌에 기능적 최고봉이나 중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생각은 무해하고 손쉬운 길이 아니라 나쁜 습관이다.(180 페이지)

 

그가 제시한 개념은 무게중심이다. 무게중심이라는 이론가의 허구가 물리적 대상의 행동을 더 잘 이해하는 데 유용한 허구인 것처럼 무게중심으로서의 자아 개념도 유용하다. 원자 또는 그보다 작은 입자나 세계 속에 존재하는 어떤 물리적 요소가 아닌 무게중심은 질량도 없고 색깔도 없다. 시간 - 공간적인 위치를 제외하고는 물리적 성질이 전혀 없다.

 

무게중심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한다. 무게중심이 변하는 것처럼 자아도 변한다. 데넷은 우리 의식으로 들어오는 외부 세계 정보들은 우리 뇌의 여러 곳에서 병렬적으로 처리되기에 인간의 의식은 파편적이고 비연속적이다. 그러면 정보들이 병렬적으로 처리되는데 뇌의 각 부분에 전달되는 정보들은 어떻게 하나의 의식처럼 만들어지는 것일까?

 

데넷은 이 부분에서 스토리텔링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뇌는 많은 정보를 가공하여 원고/ 초고를 쓰고 이것들을 편집해 매끄러운(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의식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소설가다. 데넷은 하나의 의식의 흐름이 되도록 편집하는 그런 단 한 명의 나는 없고 동시에 다중의 원고가 편집되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나 즉 자아라는 말을 했다.

 

나를 만드는 이야기가 항상 편집되는 것처럼 우리 삶의 이야기 역시 항상 다시 쓰이고 편집된다. 자아를 구성하는 의식이 편집된 이야기인 것처럼 우리 삶의 이야기도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재해석하여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로 구성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수정하는 과정을 통해 모순적이고 불연속적인 개별 사건들,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편집함으로써 인생 이야기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만들어낸다.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능력이 있고 비버가 댐을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 이재환은 무게중심이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사물을 넘어지지 않게 하는 장소를 일컫는 말이라면 자아 역시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넘어지지 않게 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188 페이지)

 

장태순은 자기에 대한 앎은 하나의 해석이며 이야기를 하나의 특권적 매개체로 삼는다고 말한다. 매개체가 되는 이야기에는 역사적 이야기뿐 아니라 허구의 이야기도 해당된다. 이를 통해 자기에 대한 해석은 위인전처럼 역사적 허구 또는 허구적 역사의 지위를 갖는다.(197 페이지) 브라이언 보이드는 인간은 고유한 메타 표현 즉 이야기 능력을 타고 났다고 주장한다. ’

 

이야기의 탄생‘의 저자 윌 스토어에 따르면 영화와 소설 같은 허구적 이야기가 인간에게 재미를 주는 것은 이야기의 기원이 원시시대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227 페이지) 최소한의 이탈 원칙이란 것이 있다. 현실에 대한 지식이 소설에 대한 사실의 평가에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고 무조건 하늘 아래 없던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이 창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231 페이지)

 

인간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유한하며 불완전한 세계다. 그렇기에 이야기의 적극적 수용자는 주어진 이야기를 소비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서 빈칸을 찾아내고 재해석과 재구성의 과정을 거쳐 제3의 이야기를 창작할 수 있는 창의성을 함양하게 된다. 이야기는 어떤 예술 장르보다 개인 및 사회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기에 창의성 역시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 집단의 심연에 대한 고민을 전제로 삼아야 한다.

 

김상환의 '글쓰기의 단계와 창의적 사고의 논리'는 현란한 글이다. 창의성은 천부적 재능일 수 있지만 평범한 인간에게 그것은 학습을 통해 획득해야 할 어떤 것이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다 보면 머릿속의 내용이 저절로 넘쳐 좋은 글이 된다고 믿는 사람은 평생 조야한 문장밖에 쓸 수 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용에 걸맞은 표현의 형식을 찾는 것이다. 주어진 내용을 정확하게 표현할 뿐 아니라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극적으로, 때로는 내면적 울림의 효과를 가져오도록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진부함에 대한 반감이다. 진부함에 대한 반감은 새로움에 대한 동경과 짝을 이룬다. 새로운 것은 기괴하거나 일탈적인 것이 아니다. 이전의 것과 다르되 모범이 될 만한 것이 새로운 것이다. 익히고 배워서 자기 것으로 하고 싶은 욕망을 불려일으키는 것이다.(236, 237 페이지)

 

김상환은 지층, 습곡과 변동, 용암의 분출 등의 말을 한다. "습관은 일정한 시기의 문화적 생태를 떠받치는 두꺼운 지층으로 굳어지기도 한다. 위대한 창조는 그 묵직한 습관의 지층에 습곡과 변동을 일으키는 용암의 분출과 같다." 김상환이 용암 폭발이라 하지 않고 분출이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새로운 것을 기괴하거나 일탈적이라 하지 않은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바다.

 

폭발은 마그마가 급격하게 치솟는 것이고 (열하) 분출은 갈라진 틈을 비집고 천천히 나오는 것이다. 글쓰기는 습관이되 습관의 왕국을 다시 상징의 왕국으로 만들어가는 습관이다.(238 페이지) 글을 쓴다는 것은 가장 알맞은 표현을 찾기 위해 이미 쓴 글을 다시 고쳐 쓰는 것이다.(239 페이지)

 

'성숙의 세 단계와 창의적 사고'에서 김상환은 정신분석에 대해 논한다. 정신분석은 주체 생산의 조건인 예속화를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통과로 설명한다. 이 콤플렉스를 통과하기 전의 어린아이는 백지상태가 아니라 무정부상태에 놓여있다. 생각은 창의적이기 이전에 합리적이어야 한다. 합리적일 수 있기 위해 생각은 먼저 특정한 체계의 규칙에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성숙의 첫째 단계는 체계 내적 사고의 단계다. 두번째 단계는 체계 간 사고의 단계다. 체계 간 사유는 변증법적 사유를 요구한다. 변증법적 사유는 논증적이기보다 서사적이다. 김상환은 공자의 아는 자, 좋아하는 자, 즐기는 자를 언급한다. 아는 자와 좋아하는 자는 체계 내적 사유의 주체에 해당한다. 즐기는 자는 특정 체계를 조직하는 이항 대립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면서도 무질서로 전락하지 않는다.

 

과학이든 예술이든 새 시대를 여는 위대한 창조의 배후에는 배타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유형의 사고가 함께 한다. 김상환은 니체의 낙태, 사자, 어린아이와 라캉의 소외, 분리, 환상을 이야기한다. 라캉이 말한 분리는 체계 간 사고와 유사하다. 진정한 의미의 즐기는 자는 어떤 형이상학적 통찰 속에 환상을 통과하는 주체, 환상의 한계를 알면서 자기의 고유한 욕망의 대상을 향유하는 주체다.(265 페이지)

 

라캉이 말하는 소외는 체계 내적 사고에 해당한다. 아이가 특정한 체계의 규칙에 편입되어 일관성을 띤 주체(공자의 아는 자, 니체가 말한 낙타)로 태어나는 과정이다.(259 페이지) 라캉이 말한 분리의 주체는 자신이 속한 체계(대타자)의 불완전성을 발견할 때 시작된다. 모든 문제에는 복수의 답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때, 나아가 답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그때 체계는 어떤 결여나 틈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사는 시간을 거치며 일어난 사건의 기술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지속적이다.(292 페이지) 해석(학)적이라는 말은 텍스트 또는 텍스트와 유사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누군가가 어떤 의미를 표현하려고 했고 그것으로부터 누군가가 의미를 읽어내려고 한다는 뜻이다. 이는 텍스트가 표현하는 것과 의미하는 것이 같지 않음을 함축하며 어떤 표현의 의미를 하나로 결정할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294 페이지)

 

이재환은 근대적 자아와 탈근대적 자아 사이에 서사적 자아를 설정한 철학자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를 소개한다. 근대적 자아는 인간의 정체성이 사회, 역사, 문화에 의해 영향을 받고 구성되기에 다원적이고 유동적이라 생각한다. 탈근대적 자아는 비합리적이고 파편화된 자아다. 서사적 자아는 자신의 삶에서 일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합리적 존재다. 서사적 자아는 이야기, 서사를 통해 태어난다.

 

서사적 사고 능력은 문학, 역사, 과학에서 활용되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고 그 이야기를 자신의 삶에 통합시켜 삶을 하나의 일관적이고 통일성 있는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357 페이지) 매킨타이어는 이야기를 통해 가치의 충돌로 인한 분열 속에서도 통일성 있는 자아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358 페이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이해 가능하고 설명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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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21-09-20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매력적인 책이네요. 좋은 책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벤투의스케치북 2021-09-20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합니다 다헁입니다
 
인문학으로 읽는 건축 이야기 - 인류와 건축의 역사에 관한 흥미로운 탐색
후지모리 데루노부 지음, 한은미 옮김 / 이순(웅진)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후지모리 데루노보(藤三照信)는 건축가다. 그런 그가 건축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책(‘인문학으로 읽는 건축 이야기’)의 시작이 특별하다. 인류 이야기가 길게 나열되어 있다. 구석기, 신석기 이야기가 그것이다. 인류는 농경 생활 이전에 사냥 생활을 했다. 만일 사냥 생활만 했다면 집이나 건축물은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냥 생활에서 이동은 필수다. 토기와 간석기(마제석기)는 중요 발명품이다. 점토를 구운 토기를 발명함으로써 식생활에 큰 변화가 생겼다. 굽기, 밥 짓기 등이 가능해졌다. 250만년전에 인류가 처음으로 손에 넣은 뗀석기(타제석기)는 흑요석처럼 상당히 딱딱하면서도 잘 쪼개지는 유리질의 화강암 석재로 진화했으나 그것으로는 나무의 표면 등을 깎아낼 수 있었던 반면 벌목용으로는 한계가 있었다.(일부 흑요석은 오늘날의 수술용 칼인 메스보다 잘 들었다.)

 

그래서 간석기가 발명되었다. 간석기로 큰 나무를 벨 수 있을까 의심스럽지 않은가? 실험 고고학에 의하면 간석기는 철제 도끼의 1/ 4의 성능을 가졌다.(철도끼로 15분 걸리는 것을 간석기로는 60분이 걸린다는 의미.) 부드러운 돌도끼는 딱딱한 돌 이상으로 빨리 나무를 벨 수 있다는 의미다. 간석기를 사용한 시기는 뗀석기를 사용한 구석기 시대와 대비되어 신석기 시대로 불린다.

 

간석기는 농경 및 목축과 밀접하다.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 지 2천년이 지나 농경시대가 열렸다. 식량 확보면에서 농경은 수렵을 압도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발명품인 농업은 평소 감자를 캐거나 열매를 주워오던 여자들이 발명했다. 나무를 베기 위해 발명한 간석기가 농업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농업으로 인해 큰 변화가 도래했다. 이동하지 않아도 되었고 식량을 장기적으로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간석기에 힘입어 인류는 숲을 개발하고 농업 발달을 가속화했다. 임시 거처인 움막 대신 움집을 만들었다. 농경이 시작되었어도 수렵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저자는 신석기 시대 집의 출현함으로써 인간의 자기 확인 작업이 강화되었다고 말한다.(43 페이지)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를 원시시대라 한다. 당시 신(神)은 필수적이었다.

 

구석기 시대에 지모신이 있었다. 구석기 시대 대지를 의식한 지모신앙과는 정반대로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강하게 의식한 신앙이 신석기 시대에 출현했다. 농경이 핵심이다. 농경은 씨를 제때 뿌려야 수확이 가능한 방식이다. 우물쭈물하면 한 해를 망치는 것이다. 태양도 중요했다. 천수답(天水沓)이란 말이 있다. 이때 천(天)은 기후를 말하고 특히 가장 중요한 태양을 의미했다.

 

생명 현상의 에너지는 모두 태양으로부터 온다. 태양이라는 남성적인 절대신을 농업을 통해 발견한 것은 지모신적인 여성들이었다. 신석기 시대에 출현하는 거식 건축물과 늘어선 돌기둥은 태양을 향해서 만들어졌다. 절대성과 유일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거대하게, 또 태양에 다가갈 만큼 높게 만든 것이다.

 

농경과 수렵이 병행되었듯 태양신앙과 지모신앙이 병행되었다. 지모신앙이 건물의 내부를 만들었다면(장식했다면) 태양신앙은 외관(外觀)을 만들었다. 이 두 신앙이 만나 (주거가 아닌 또는 주거와 구별되는) 건축이 탄생했다. 신석기 시대에 인간의 집이 태어났고 신의 거처가 생겨났다. 주거는 개인의 것이지만 건축은 신과 사회의 것이다. 건축은 만들어짐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의식을 조직화했다.

 

주거는 그 곳에 사는 사람이 자신을 확인하는 도구였고 건축은 사회 구성원들이 우리를 확인하는 도구였다. 신석기 시대에 탄생한 신전이라는 이름의 건축 외관의 특성을 가장 순도 높게 나타내는 것이 입석(立石)이다. 건축 외관은 입석에서 시작되었다. 입석이 천문대로 사용된 건축물이라는 말이 있긴 하다.

 

저자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의 장례 예식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 없다고 말한다.(69 페이지) 다만 신석기 시대에 시작해 청동기시대로 진행하면서 태양을 향해 왕의 혼을 발사하던 당초 목적이 잊히고 태양을 숭배하는 장소로 바뀌었을 가능성은 있다. 입주(立柱)는 태양의 움직임을 강력하게 의식해서 세워진다.

 

신석기 시대가 끝나고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면서 세계 각지에는 크고 작은 여러 국가가 성립하게 되고 그중에서도 나일강,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황하 등 네 개의 큰 강 유역에는 청동기라는 신기술과 문자, 관개(灌漑)에 의한 대규모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거대한 국가가 출현한다.

 

4대 문명의 건물에는 이렇다 할 공통점이 눈에 띠지 않는다, 청동기, 문자, 대규모 농업은 공통되지만 그런 힘에 의해 얻어진 부를 투자해서 건물이 만들어질 때는 정치와 종교, 나라마다 구할 수 있는 재료가 각기 달라서 건물이 다르게 지어졌다. 저자는 자신의 책이 전례 없는 책이라고 말한다. 한쪽으로 치우친 책이라는 의미다.

 

저자는 인류 건축의 역사는 시발점인 원시시대와 종점인 현대에는 다양성이 없고 지구 어디를 가도 같은 풍경인데 반해 시발점과 종점 사이의 건축물은 각 나라, 각 지역만의 특성과 다양성으로 넘쳐나서 부풀어올라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은 데에는 사연이 있다. 김광현의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에 나오는 “인류는 수렵 시대에 지모신을 섬겼으나 청동기 시대에는 태양신을 섬겼다. 지모신에게는 공물을 바쳤으나 태양에게는 의미가 없어 하늘을 향해 기둥을 세웠다.”는 구절로 인해서다. ‘인문학으로 읽는 건축 이야기’에 관련 이야기가 있지만 일부에 한한다. 물론 ‘인문학으로 읽는 건축 이야기’가 먼저이고 김광현의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가 나중이다. 다른 곳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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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여성주의는 내 관심권 안의 이슈들이다. 물론 나는 기독교인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기독교와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적 현실에 불편감을 강하게 느끼는 상식인일뿐이다. 그렇기에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적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만난 강호숙의 ‘여성이 만난 하나님’은 여성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이 주는 참신함이 돋보이는 책이다.

 

제목을 뒷받침할 구절로 들 수 있는 것은 남성이 보는 하나님과 여성이 보는 하나님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 남성의 하나님을 여성의 하나님으로 강요하지 말라는 말(57 페이지)이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맹종과 추종의 신앙보다 하나님께 끊임없이 질문하며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신앙을 더 기뻐하시는 하나님(21 페이지)이라 말하는 저자는 하나님께 받은 자신의 사명을 여성의 하나님을 알리라는 것이라 말한다.(17 페이지)

 

저자는 교회에서 남성과 여성이 평등해지려면 여성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며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96 페이지) 책의 주요 특징은 참신(斬新)하고 무게감 있는 해석 또는 지식들을 꽤 많이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본래 의도에 대한 고찰(19 페이지), 믿음의 근거는 지식이라는 칼빈의 메시지(25 페이지), 자기애가 인간의 본성이지만 자기 자신만으로는 인간됨의 정체성이 온전하지 않다는 주장(29 페이지), 주님의 복음은 우선 나를 위한 것이란 말(31 페이지), 여성의 직관과 감정을 신앙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본다는 점(34 페이지) 등이다.

 

여성의 직관과 감정을 강조한 차원에서 저자는 기독교 신앙은 교리나 조직이 아니라 인간과 이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라 말한다. 소명과 은사가 직분보다 중요하다는 주장(41 페이지)도 그렇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다음의 부분이다. 신약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 강림으로 탄생한 모임으로 그 후 성령께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복음전파 사명을 위해 방언과 예언 등의 은사를 나누어주셨다는 내용(42 페이지)이다.

 

다음의 글을 보자. “여성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과 은사를 교회가 환영하고 여성의 고유한 정신세계와 전문성과 공감능력과 돌봄의 리더십을 활용할 때 교회와 사회와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확장되게 될 것이라 믿는다.”(46 페이지) 이 부분이 전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한국교회의 여성은 제도적인 차원의 지원 없이는 권력구조의 가장자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는 문제제기(85 페이지)도 중요하다.

 

당연히 저자는 남녀 모두 평등한 친교적 공동체를 기대한다.(51 페이지) 전체 7부 중 2부인 ‘신학의 렌즈로 성(性)을 보다‘를 통해서도 숙고할 것들은 상당하다. 앞 부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본래 의도에 대한 고찰을 이야기했거니와 저자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남성성을 강조한 것이 아님을 언급한다.(5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사고를 묘사한 친근한 표현이다.

 

저자는 총신대학교에서 현대사회와 여성이란 제목의 여성학을 가르친 분이다. 그럼 여성학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진정한 여성됨을 여성 스스로 규정하려는 학문이다.(59 페이지) 나는 이 규정이 마음에 든다. 저자는 여성의 법적 지위가 크게 신장(伸長)되었지만 여성을 열등하게 보는 통념이 여전히 사회나 교회에 깊숙이 뿌리 박혀 있다고 말한다.(8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페미니즘은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와 고통이 계속되는 현실을 문제삼는다.(92, 93 페이지)

 

페미니즘이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을 하는 데 비해 페미니즘 신학은 여성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주장을 한다.(93 페이지) 성의 기능을 출산에 한정한 중세 신학자들과 달리 현대 신학자는 출산, 쾌락, 낭만, 대화로 본다는 점도 기억할 부분이다. 저자는 서로 갈망하고 친밀해지고 싶어하는 에로스적 사랑이야말로 부모의 사랑, 친구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방편이 아닌가 말한다.(60, 61 페이지)

 

저자는 하와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게 한 탓에 여성이 죄의 근원으로 여겨졌지만 예수께서 오신 이후에는 구원과 연관지어 보아야 할 것이라 말한다. 이런 전환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와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성들로 인한 것이다. 전도사 시절 목사가 칼을 들이대는 사건,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받은 구박과 차별, 딸만 낳았다는 이유로 시부모의 눈총을 받아 겪은 심한 우울증 등 개인사도 책의 중요한 부문을 차지한다.

 

물론 이 부분은 이론적인 내용이 아니어서 비교적 쉽게 읽히지만 감정이입하지 않을 수 없어 우울하게 읽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제는 “핍박을 견디며 예수를 믿었다는 사람이 무슨 우울증이냐?“, ”하나님이 기뻐하라고 했는데 왜 우울하냐?“ 등의 말이다. 공감하고 위로해주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는 것이기에 문제다. 그것도 성경 구절을 근거로.

 

여성안수 반대에 부딪혀 공황장애까지 앓은 저자는 실천신학을 공부하는 남성 틈에 낀 유일한 여성으로서 꿋꿋하게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런 그가 하는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보수교단의 집단적 해석이라고 해서 다 성경적인 것은 아니고 남성 다수의 생각이라고 진리는 아닐 것이다.“(72 페이지) 전문적인 부분이기에 상술할 수 없지만 성경 구절의 한 부분만을 취해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해석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저자는 성경을 해석할 때는 문법적, 문예적, 신학적, 정경적인 접근도 중요하지만 기록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도 잘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십자가를 진 분 예수의 '나를 따르라'란 말을 강조한다. 섬김의 리더십인 것이다. 저자는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성경의 원래 뜻을 배우면서 많이 황당했다고 말한다. 그간 알고 있던 의미와 달랐기 때문이다.(25 페이지)

 

저자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나타나는 남녀 파트너십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남성과 여성이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구속사(救贖史)적 관점으로만 성경을 읽는 보수교단의 문자주의자들을 비판한다. 저자에 의하면 여성의 하나님은 낮은 자의 하나님, 죄인과 여성의 친구인 하나님 즉 예수그리스도다.

 

저자의 성경 읽기는 참신하고 흥미롭다. 상술할 수 없지만 아브라함, 사라, 이삭, 하갈 등이 나오는 부분에 대해 내린 해석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인 동시에 정(情) 때문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기를 주저했던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했던 아내 사라의 편에도 계시는 분이고 억울하게 쫓겨난 여종 하갈에게 직접 나타나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해석(116 페이지)이 그렇다.

 

저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뿐 아니라 사라, 리브가, 라헬과 레아, 하갈이 만난 하나님도 고루 잘 살펴야 구속사뿐 아니라 인간관계의 갈등과 삶의 애환 가운데 찾아오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더 넓고 깊이 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제사장이 없었던 이유에 대해 여제사장을 두어 매춘행위를 한 고대 근동아시아의 종교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였으며 생리와 출산을 부정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본 해석을 소개한다.(128 페이지)

 

저자는 시대가 아무리 여성에게 닫혀 있다 해도 하나님은 영적으로 신실하게 준비하고 도전하는 여성을 통해서 뜻을 이루시는 분임을 믿는다고 말한다.(134 페이지) ”성경의 여성을 해석할 때 왜 하나님과 관련하여 보려고 하지 않을까?“(137 페이지) 저자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취한 남성성이 구원에 효력을 미치는 것과 무관함을 강조한다.(142 페이지) 저자는 남성이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만나 그 분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준 최초의 전달자인 여성들도 중요하다고 말한다.(145 페이지)

 

당시 유대사회에서 여성은 증인이 될 수 없었다.(162 페이지)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남성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은 협소한 시각에 매몰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의 책을 읽으며 좋은 책은 기록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아 제(除)하고 기록하는 결단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령 성범죄를 저지른 목사를 방어하기 위해 예수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고 궁지에서 건져내기 위해 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를 모르는 아전인수 해석이라는 말은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다.

 

저 말은 죄가 하나도 없으신 주님만이 할 수 있는 말이고 약자와 피해자를 가해자와 가해자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다.(153 페이지) 유대 전통에서는 여성을 사악하다고 여겨 순진한 남성이 그 꼬임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여성을 만날 기회를 제한했고 집 밖에서는 아예 대화하지 못하도록 가르쳤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유대인이 개 취급하는 사마리아인이자 남편을 다섯 번 이상 바꿀 정도로 기구한 여인과 신학적 대화를 나누었음은 놀랄 만한 일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는 당시 통념과 고정관념을 깬 하나님의 현현(顯現) 사건이다.(153 페이지) 예수는 여성에 대한 시대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초월하여 여성을 자유롭고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157 페이지) 저자는 부활의 첫 증인이 여성임은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남성 제자만이 증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판단에 근거해 여자 목사 안수 반대는 설득력이 없다고 말한다.(166 페이지)

 

예수는 십자가의 증인이 되지 못한 자를 부활의 증인으로 세울 수 없었다. 저자가 말했듯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은 그 소식을 여성에게서 들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공익 제보를 두고 내용의 진위를 헤아려 인정할 것은 인정하지 않고 메신저를 문제삼는 것은 오늘 우리 정치판에서 목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바울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한 후 여성 제자, 여성 집사, 여성 선지자 등 여성 동역자들을 세웠다. 저자는 바울이 그런 말을 한 것은 당시 예배드릴 때 여성이 예언도 하고 방언도 했음을 입증한다고 말한다.(169 페이지) 중요한 점은 바울이 그 말을 한 당시는 목사 직분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말을 근거로 목사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현대의 해석이다. 바울은 여성에게 설교하지 말라, 목사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 바울이 한 말의 의도가 떠들지 말라는 의미인지, 예언하지 말라는 의미인지, 어떤 말도 하지 말라는 의미인지 문맥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170 페이지)

 

저자는 여성의 생리가 없다면 인류는 번성할 수 없었을 것이라 말하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여성이 동역자임을 말한다.(190, 191 페이지) 공감한다.

 

요즘 의미 있게 쓰이는 말 가운데 틈새라는 말이 있다. niche의 번역어로 생태적 지위, 벽감(壁龕) 등의 의미도 있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틈새 목회다. 여성 목사가 있는 교회에서 이혼녀가 겪는 정신적, 신체적, 영적인 문제를 다루는 치유목회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성경에서 이혼을 금하고 있다는 피상적이고 율법적인 논리로 이혼녀를 정죄하거나 외면하는 무정하고 상투적인 행동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한다.

 

저자의 말을 들으면 남성들이 참 못나고 고집 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저자에게는 사역을 잘하면 대놓고 묵살하고 윽박질렀다는 신학대학원 후배 남성 사역자가 있었다고 한다. 참 못난 사람이다. 잘 하는 여성을 소신껏 축하해주고 그로부터 배울 수는 없는 것일까? 여성이 잘 하면 견디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여성 사역자에 대한 편견과 무시와 차별을 성경이 승인하는 것인 양 확신하는 교회가 문제다.

 

모두(冒頭)에서 말했듯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과거 기독교인으로 살았고 교회를 떠난 후에도 꾸준히 기독교 책들을 읽었다. 자연히 관련 지식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나를 보며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하나님을 지식으로만 이해하고 영접하지 않아 문제라는 말을 한다. 문제는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여성차별적이고 개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성령으로 영접하는 분들이 왜 그런 모습을 보이는지 의문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그들의 획일적 사유와 언어다.

 

올해 나는 부일(附日) 반역자들의 행동을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이라 말하는 남성 목회자(1), 강호숙 박사의 본문에도 나오는 아무개 목사의 여성 폄하 및 희롱 발언은 모른 체 하고 그런 목사 하에서라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강변하는 여성 신자(2)를 보고 말문이 막힌 적이 있다. (1)이든 (2)이든 성경과 기독교 외에 문화 및 철학, 과학, 역사 등 다양한 인접 학문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다 보니 상투적 신앙에 매몰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본문에 소개된 당시 유대 여성들의 행위는 사회적이고 정치적 차원의 행위였다. ”로마군병에 둘러싸인 무시무시한 골고다 언덕으로 예수님을 따라간 일,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낳은 마리아. 예수님 앞에 나아가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한 이방여인, 제자들이 꾸짖는 상황에서도 귀한 옥합을 깨뜨려 주의 발에 부은 마리아, 오순절 성령강림 자리에 남성 제자와 동참한 일 등은 유대사회의 가부장적 편견과 통념을 깬 도전적이며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235 페이지)

 

예수께서는 그런 여성들을 내치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하셨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예수의 그런 모습을 얼마나 본받으려 하는가? 힘센 목회와 부(富), 그리고 성공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약자들을 소홀히 여기거나 고려하지 않는 구조적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인다.

 

저자가 보는 교회란 어떤 것일까? 교회는 건물이 아니(18 페이지)라는 말을 한 저자에 의하면 교회는 신랑 되신 주님을 기다리는 ’순결과 기다림의 영성‘을 가진 신부 공동체로서 독특하고 고유한 여성 이미지가 반영되어야 하기에 남성 리더십만으로는 불가능하다.(242 페이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모임이라는 말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어떤 정체성과 지향점을 가지고 모여야(또는 목회해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말은 조금 방향이 다른 말이기는 하지만 향후 한국 교회는 일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목회와 사역으로 급선회해 수많은 예배와 구역예배의 틀에서 벗어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방식의 섬김 목회 또는 틈새 목회로 전환해야 한다(261, 262 페이지)는 말과도 공명하는 말이다. 저자는 남성성으로 취급되는 독립성, 합리성, 용기 그리고 여성성으로 취급되는 공감능력, 부드러움, 보살핌 등은 남녀 모두에게 바람직한 덕목이라고 말한다.(245 페이지) 


가장 인상적인 말은 목회란 영혼을 돌보는 일로서 여성의 모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247 페이지)는 말이다. 짧고 핵심적인 말이다. ”여성이 건강해야 가정이 건강하며, 여성이 존중받을 때 교회는 하나가 되고, 여성이 행동할 때 교회와 사회가 밝아지리라 믿는다.“(248 페이지)

 

’여성이 만난 하나님‘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저자의 실존과 이론적 지향성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역작이다. 그렇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을 이기고 오늘에 이른 저자가 제시하는 조언은 울림이 남다르다. 가령 ”여성이 남성에게 진심이 우러나서 고개를 숙일 수는 있어도 무엇을 부탁하려고 남성한테 함부로 머리 숙이지 않았으면 한다. 아닌 건 아니라고 소신 있고 당당하게 할 말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274 페이지) 같은 말은 깊이 새길 말이다.

 

여성이 행복해야 남성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서로 교제하면서 함께 손을 잡고 기쁘게 나아가고 서로의 얼굴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꾼다고 말한다.(275 페이지)

 

여기서 중요한 말은 함께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총체성은 다(多)를 하나로 통일하는 총체성이 아니라 여러 부분들을 비교하고 그들 사이에서 소통의 다리를 놓고 이들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는 작업, 그런 바탕 위에서 부분들이 어떻게 하나의 총체로서 공존할 수 있는가를 모색하는 총체성“(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331 페이지)이라는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내 사유의 폭을 넓히고 정교하게 해준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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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 - 건축 너머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질문과 성찰 서가명강 시리즈 17
김광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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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 박사 김광현 교수의 책이다. 저자는 건축을 “공동체에 질서를 주기 위해 짓는 공간”으로 정의한다. 저자에 의하면 건축은 태생적으로 배제하는 것(이기적인 것)이다. 건축은 우월함을 자랑하는 수단이라는 의미다. 사회적 산물이라던 건축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 되고, 건축주는 권력자가 되어 자칫 그릇된 생각과 욕망의 산물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욕망은 실재적 대상의 결여, 결여한 뭔가를 메우려는 충동이 아니라 흐름이라는 실재를 생산하는 것이라 말한다.(50 페이지) 건축은 정주(定住) 사회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한곳에 정주하지 않고 소나 양이 물과 목초를 찾아 이동하며 살 듯 여러 장소를 옮겨가며 살게 되었다. 한정된 커뮤니티에 귀속되던 정체성, 지역성에 근거한 공동체의 감각은 크게 사라져버렸다.

 

저자는 앞서가는 누군가가 새로운 것을 원하고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의 필요를 낳는다고 말한다. 건축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강한 욕망을 형상화한다, 닫힌 구조로 내향적이 되는 것은 건축의 숙명이다.(65, 66 페이지) 도시는 교통하는 정주이자 불완전한 정주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한 말을 들려준다. “사람들이 살 집이 되는 인간의 공작물이 없다면 인간사는 유목민의 방랑과 똑같이 부초와 같은 공허하고 무익한 것이 될 것이다.” 유목민에게 집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머물 집이 없는 이동은 방랑이 된다는 의미다. 정주 사회는 땅을 기반으로 경제가 돌아가는 곳이다. 이웃 관계도 땅에 귀속된다.(73 페이지)

 

도시는 땅 위에 정주하는 동시에 특정 지역에 귀속하지 않고 사람들과 재화가 횡단, 교차하는 곳이다. 도시는 탈공동체적인 정주 사회다, 물질, 정보도 특정 장(場)에 집약될 때 다수의 신체, 재화, 정보가 안정되고 효율적으로 꾸준히 이동할 수 있다. 신체, 재화, 정보 교환은 일시적이지만 지속적으로 교환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건축물이다.

 

막스 베버는 농촌사회에서는 땅이 중요하지만 도시에서는 집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 이동하고 교환하는 도시이기 때문에 그 중계점에 건축물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74 페이지) 근대 건축이 근대 도시를 만든 것도 아니며 근대 도시 때문에 근대 사회가 성립된 것도 아니다. 사회가 변화하고 이에 따라 도시가 변화했다. 근대 사회가 시작되고 한 세기가 지난 20세기 초 도시의 악화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근대 건축이 나타났다.(102 페이지)

 

건축하는 사람은 공간을 어떻게 만들까에 관심을 기울인다,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의 재현, 재현의 공간, 공간의 실천이라는 삼중 개념을 제시했다. 세 가지라 하지 않고 삼중이라고 한 것은 그 셋이 서로 변증법적으로 맞물리기 때문이다.(110 페이지) 공간의 재현은 도시 계획가, 기술 관료 등 계획자가 주체가 되어 도면이나 모형으로 공간을 편성해 파악하고 계획한 공간을 말한다.

 

재현의 공간은 주민이나 사용자가 실제로 살고 사용하면서 시간이 흘러 숙성되는 공간이다. 상황 구축이나 축제 또는 혁명처럼 규범화된 공간 재현과 충돌하는 공간의 실천이 이뤄진다. 공간의 실천이란 어떤 공간이 나타나 유지되는 과정을 말한다. 우리는 사람 수명보다 오래 견디는 무수한 건축물에 둘러싸여 산다. 건축 안에서 태어나고 죽는다.(135 페이지)

 

노예는 노동만 한다. 그러나 공작인은 작업을 한다.(140 페이지) 산업 혁명 이후 기계가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었다. 평등은 균일을 만들고 균일은 모방을, 모방은 대중을 만들었다. 대중 사회는 결국 소비 사회와 같은 말이다.(150 페이지) 현대 사회는 정보 조작으로 수요를 무한히 창출하는 소비화, 정보화 사회다.(152, 153 페이지) 권력은 건축으로 애국 이미지를 구축할 뿐만 아니라 공간 구조물로 사회적 관계를 분류하기도 한다.

 

지금도 구조물은 차별적인 사회를 만드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미국의 로버트 모제스(Robert Moses)는 서던 스테이트 파크웨이의 다리들을 2.6미터 높이로 낮춰 지으라고 명령했다. 그가 설계한 존스 비치 공원에 소수 인종이나 저소득층이 들어갈 수 없도록, 가난한 이들이 탄 버스가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이다.(155 페이지)

 

권력은 저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다. 고대에는 한 사람이 지배했으나 오늘날에는 크고 작은 사회가 많은 사람을 지배한다. 플라톤은 알고 있으나 활동하지 않는 사람과 활동은 하지만 모르는 사람을 처음으로 구별했다. 플라톤식의 지식과 행위 분리는 모든 지배 이론의 뿌리가 되었다.(158 페이지) 기술이 계속 진보하고 이에 따라 기능도 계속 달라지는,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고안한 것이 균질 공간이다.(179 페이지)

 

균질 공간에서는 사용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묻지 않는다. 균질 공간은 화폐 같은 공간이며 모든 기능과 용도에 대응하려는 자본주의의 공간 원리였다. 르페브르는 기능과 형태가 다른 공간을 이역(異域) 즉 헤테로토피아라 불렀다.(185 페이지) 정신병원, 감옥 등의 격리 시설, 홍등가, 묘지, 박물관, 도서관, 영화관, 전원 입사체 기숙사, 양로원, 병사(兵舍), 피난소, 유대인 거주 지구나 흑인 거주 지구 등이 근대의 헤테로토피아다.

 

양로원의 경우 노동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노인들이 지내는 공간이기에 헤테로토피아다. 근대 사회는 노동력이 발휘되어야 기능하는 사회다. 저자는 아파트가 획일적인 이유를 분양받을 대상을 정하지 않은 채 생산하기 때문이라 말한다.(234 페이지)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용(用), 강(强), 미(美)라고 표현했다. 유용해야 하고, 내구력이 있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의미다.(285 페이지)

 

인류는 수렵 시대에 지모신을 섬겼으나 청동기 시대에는 태양신을 섬겼다. 지모신에게는 공물을 바쳤으나 태양에게는 의미가 없어 하늘을 향해 기둥을 세웠다. 높고 질 좋은 나무를 고르고, 아주 멀리서 큰 돌을 가져왔다. 기둥을 여러 개 세움으로써 가을에는 낮이 짧아져 어둠으로 들어가고 봄이 되면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 태양의 움직임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기둥을 세우기는 힘들었지만 함께 세운 기둥에는 공동체의 염원과 기쁨이 차고 넘쳤다.(288 페이지)

 

땅을 딛고 빛을 받아 빛나는 수직 기둥은 땅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모두의 바람을 담아 땅에 누운 돌을 일으켜 세우니 돌은 그야말로 존재감을 뽐내는 큰 기쁨이요 아름다움이었다. 더욱이 그것이 놓인 땅과 하늘과 자연이 이미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움은 눈에만 아름다운 것을 넘어 공동체 사회 모두의 기쁨이었다. 그들은 뭔가를 구축함으로써 모두의 큰 기쁨과 진정한 아름다움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자는 건축은 나무처럼 자란다고 말한다. 건축은 우리 몸처럼 키우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295 페이지) 한 번 지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한 번 쳐다보고 마는 물체가 아니다.(296 페이지)

 

건축주는 건축가든 사용자든 건축물이 잘 자라 미래로 잘 전해지도록 공감과 공유의 기억이 풍성한 공간을 만들 책임이 있다. 저자는 건축이 존재하는 원천은 모든 이의 기쁨에 있다고 말한다. 아렌트의 말대로 모든 이의 기쁨은 자기 의지로 공적인 장소, 모두가 경험하는 집에 나타나는 것이지 아름답고 화려한 공간에 매료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33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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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의 ‘내 곁에서 내 삶을 받쳐 주는 것들’은 저자가 읽은 고전에서 길어올린 사색의 편린들을 다듬어 교훈의 형식으로 제시한 책이다. 저자는 한 달에 50권 이상의 책을 읽는 분이다. 책은 6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 2장 우리는 사랑으로 산다. 3장 단 한 번뿐인 삶, 욕망하라. 4장 살아 있음이 곧 기적이다. 5장 내 삶의 의미를 묻다. 6장 행복해지고 싶을 땐 등이다.

 

각 장에는 세부 주제가 있다. 1장에는 자아, 여행, 독서 등이 있고 2장에는 사랑, 타자, 슬픔 등이 있는 방식이다. 자아에 해당하는 작품은 헤세의 ‘데미안’이고 여행에 해당하는 작품은 라이언 프랭크 바움의 ‘오즈의 마법사’다. 모두 28편의 고전이 망라되었다.

 

첫 작품으로 호명된 헤세의 ‘데미안’에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초인(超人)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1장의 제목인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은 우리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는 ’데미안‘의 구절에서 유래했다. 이런 방식의 유기적인 구성이 이 책의 특징이다.

 

책에는 은유가 풍성하다. 은유 없이 사유는 가능하지 않다. 삶은 아름다운 여행이라는 말, 고전은 혼란스럽고 답답한 정신을 위한 영양제라는 말,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말, 인생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는 말, 인생은 누군가가 헝클어놓은 실타래(페르난도 페소아)라는 말 등이 모두 훌륭한 은유다.

 

물론 이런 말은 계속 쓰면 진부해진다. 새로운 은유를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책에 나오는 작품 중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는 비가 온다는 말을 하늘이 운다고 표현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에 시인은 우편배달부에게 그것이 메타포(은유)라고 말한다.

 

저자는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다룬 슬픔이라는 장의 제목을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로 설정했다.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는 말은 롤랑 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에서 한 말이다. 사랑이라 했거니와 스피노자는 사랑은 외부 원인의 관념에 동반하는 기쁨’이라는 말을 했다. 스피노자는 사랑에 의해 완전히 극복된 증오는 사랑으로 바뀌는데 그것은 증오가 선행되지 않은 사랑보다 한층 더 크다는 말도 했다.

 

사랑에 의해 완전히 극복된 증오는 용서일까? 어떻든 스피노자는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한 철학자다. 그가 말한 욕망이란 갖지 못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나타난 장애, 덫, 기회 등을 가로지르며 역량을 증대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왜 위대할까? 그것은 그가 역량 자체를 가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가난과 장애물들을 뛰어넘으며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키려 노력했다. 인간은 어느 만큼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한 것처럼 평생 지속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고 하루 아침에 봄이 오지 않듯 사람도 하루 아침이나 단기간에 행복해지지 않으니 평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력은 기다림이기도 하다.

 

앙드레 지드는 기다림이란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준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 말했다. 괴테는 노력하는 사람만이 방황한다는 말을 했다. 인간의 생애는 희망에 의해 끊임없이 기만당하면서 죽음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도 있음을 기억하자.

 

저자는 절망 속에도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이는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를 다룬 장에서 한 말이다. 안네는 글을 쓰는 순간에는 어떤 슬픔도 잊을 수 있었고 새롭게 용기가 솟아났다고 말했다. ‘안네의 일기’는 안네가 2차대전 당시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은신처에 숨어 살기 시작한 열세 살 때부터 2년 뒤 나치에 발각되어 끌려가기까지 써내려간 일기다. 저자는 자신이 소개한 고전 문학들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관건은 입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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