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예술 -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삶의 불길 속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심보선 지음 / 민음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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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아서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막연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먼저 제목의 의미를 챙겨 읽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그을린 예술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나는 삶 속에서 꾸는 꿈으로서의 예술을 ‘그을린 예술’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때의 예술은 순수한 예술, 자율적 예술, 천재라 불리는 예외적 개인의 예술, 지상에 떨어진 타락한 천사의 예술, 진리를 선포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선지자적 예술이 아니다. 단언컨대 그런 예술은 죽었다. (…) 그을린 예술은 타들어 가고 부스러지는 현대인의 삶, 자본주의의 격렬하고 성마른 불길에 사로잡힌 우리네 삶 가운데서 꿈틀거리는 꿈, 긍정성의 몸짓, 유토피아적 충동이다. 그러므로 그을린 예술은 언제나 위기에 직면해 있다(14쪽).”

 

저자는 순수예술을 스노비즘의 표상으로 길가름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소노비즘이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서 인터넷을 뒤져보았더니, ‘출신이나 학식을 공개적으로 자랑하며 고상한 체하는 성질. 금전이나 영예 등 눈앞의 이익에만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유의로 안내하고 있는 속물근성이라는 단어가 오히려 피부에 와닿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속물근성이라고 적었더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시인이자 사회학자인 작가는 ‘조금 더 잘 살기 위해서, 조금 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조금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삶을 재창조하려 하는 예술의 모습들’을 담고자 하였다고 했습니다만, 여기 담은 글들은 미리 기획하고 쓴 글이 아니라 저자가 그동안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발표한 글들을 모아 편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인용하는 에피소드가 중복되는 경우도 눈에 띄었고, 다섯 부로 나누어진 글들은 독립적으로 읽어도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을 듯합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서 말한다면, 나는 이 책이 하나의 선언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 선언은 다음과 같다.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삶 속에서, 삶의 불길에 그을린 채.(15쪽)”라고 적은 것처럼, 대중과 괴리를 보이는 순수예술을 지양하고 민중과 같이 숨쉬는 예술이 제대로 대접받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고 읽었습니다.

 

역시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사회학자가 지켜야 할 금도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자는 세계와 인간과 거리를 둔다. 사회학자는 자신을 구속하는 구조에 맞서는 인간들의 눈물, 탄식, 분노, 기쁨, 경탄, 동경, 희망에 참여하지 않는다. 사회학자는 인간이 꾸는 꿈, 오류와 과장이 가득한 그 유토피아적 충동을 해석할지언정 그것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려 한다.(11쪽)” 그리고 자신은 그러한 사회학적 계보에 충실했다고 말씀하고는 계시지만, 글 내용으로 보면 과연 그러한가 싶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6.9 작가선언’은 이명박 정권하의 한국 사회를 ‘민족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로 명명하면서, ‘지금 바로 여기’가 전쟁 상태이며 적의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81쪽)”고 했는데, 이어서 “‘6.9 작가선언’이 한국 사회를 아우슈비츠로 명명한 것이 현실과 부합하는가, 혹은 적절한 문학적 비유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우슈비츠라는 용어의 의미, 혹은 무의미성은 그것이 가지는 효율성이나 호소력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83쪽)”라고 적고 있어 과연 논리적인가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책의 제목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짐작되는 용산참사에 관한 글에서 “일반적인 유가족들이 으레 있어야 할 곳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 그들은 실은 어떤 유가족들보다도 더한 슬픔에 처한 상태로 살아간다.(94쪽)”고 적었지만, 같이 한 사진은 저자의 간절한 마음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느낌입니다. 사실 사고가 있기 오래 전에 집을 구하려 그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재개발을 반대하는 시위를 바라보면서 걸음을 돌린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곳에서 살게 된다는 것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저자는 일상적 삶에서 예술이라는 무엇을 창조해내는 사람들이야 말로 삶의 주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하고, 누구나 생각보다는 조금은 위대해질 수 있는 구체적 계기를 발견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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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논리 들뢰즈의 창 6
질 들뢰즈 지음, 하태환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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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괴물이 된 그림; http://blog.yes24.com/document/7277164>을 쓴 이연식님은 집필동기를 ‘괴물과 견주어 보았을 때 비로소 인간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에 두고 미술작품에 등장하는 비정상적인 모습을 분석하였습니다. 저자가 괴물이라고 지칭한 것들은 ‘저자는 괴물을 기괴한 형상, 뒤틀린 형상, 타락한 형상, 합쳐진 형상, 한없이 작은 형상, 한없이 커다란 형상, 인간을 닮은 형상, 손끝에서 나오는 형상 등이 있는데, 모두 95의 작품을 인용하여 나름대로의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에 프랜시스 베이컨의 <십자가 아래 인물들을 위한 세 습작> 가운데 오른편 작품을 인용하고 있어 내심 반가웠던 것은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담은 <감각의 논리>를 읽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용한 베이컨의 작품에 대하여 이연식작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0세기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에도 목이 길쭉한 괴물이 등장한다. 눈과 코가 있어야 할 자리를 날카로운 이빨이 들어찬 입이 몽땅 차지하고 있다. 얼굴 양편에는 큼지막한 귀가 있어서 이 형상이 인간과 관련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이연식 지음, 괴물이 된 그림, 15쪽)” 저자는 <감각의 논리>를 인용하지 않고, 베이컨이 그린 인물에 대하여 ‘내면에서 나온 무언가에 먹히는 얼굴’이라는 영화감독 베르톨루치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에 등장하는 추한 인물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외양은 구상에만 해당될 따름이다. 벌써 형상은 죽지 않고 아직 살아남아 있는 구상의 관점에서만 괴물처럼 보인다. 우리가 이것을 ‘형상적으로’ 보자마자 괴물적이 되기를 멈춘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형상들은 그들이 채우고 있는 일상적인 업무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직면한 순간적인 힘의 기능에 따라 가장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173쪽)” 들뢰즈는 누구나 기괴하다고 볼 수 있는 베이컨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을 괴물이 아닌 무언가의 의미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읽은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53217>의 리뷰를 정리하면서 확인한 것입니다만 들뢰즈에게서는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흄, 칸트, 니체 등을 재해석하는 철학사가로서의 모습 뿐 아니라 감각, 사건, 정신분열, 영화, 철학 등과 같은 다방면의 개념들에 대하여 철학적 해석을 하는 생성의 철학자의 모습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처음 책을 열었을 때는, 영국경험론의 비조로 인식되고 있고, 데카르트와 함께 근세 철학를 개척한 것으로 알려진 16세기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철학에 대하여 재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읽어가면서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들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책읽기가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배다른 형 니콜라스 베이컨의 후손으로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아일랜드 태생의 화가로, 대담성과 소박함, 강렬함과 원초적인 감정을 담은 화풍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추상적인 형상이 특징 없는 단색의 배경 위에 유리나 기하학적인 철창에 갇혀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들뢰즈는 베이컨을 ‘반 고흐와 고갱 이래 가장 훌륭한 색채주의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베이컨은 이집트의 예술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본 들뢰즈는 구조 혹은 골격, 형상 그리고 윤곽이라고 하는 세가지 요소들이 색채 속에서 효과적으로 수렴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화가 베이컨이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44년 삼단제단화, 십작책형을 기초로 한 형상의 세 가지 습작을 통해서 돌파구를 찾으면서라고 합니다. <감각의 논리>에서도 베이컨의 삼단화 작품들을 도판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들에서는 구조에서 형상으로, 그리고 형상에서 구조로 향하는 이중의 움직임이 있었다. 고립과 변화 그리고 흩뜨림의 힘들. 그러나 두 번째로는 형상들 자체 내에 움직임이 있다. 자기들의 층리에서 고립과 변형 그리고 흩뜨림 현상을 또 취하는 짝짓기의 힘, 마지막으로 세 번째 유형의 움직임과 힘이 있다. 바로 거기서 삼면화가 개입한다.(98쪽)”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들뢰즈의 베이컨의 회화작품 해석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베이컨의 작품에서 표현되어 있는 기괴한 형상을 한 사람의 모습에서 괴물이 아닌 무엇을 찾아가는 방법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지 다시 읽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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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서둘러 찾아오고 용기는 더디게 힘을 낸다 - 더 행복한 삶을 만드는 용기에 관한 진실 31
고든 리빙스턴 지음, 노혜숙 옮김 / 리더스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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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글로벌 경제도 혼미 속에 언제쯤 좋아질지 모르고,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날씨마저도 예측하지 어려운 상황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사람들은 불확실하고 막연하기만 미래에 대하여 불안한 생각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불안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책을 만났습니다.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을 졸업한 정신과의사 고든 리빙스턴의 <두려움은 서둘러 찾아오고 용기는 더디게 힘을 낸다>입니다.

 

저자는 한국독자를 위한 글에서 이 책에 담은 메시지를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인류는 거대한 위협에 직면할 때마다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투지를 발휘하여 생존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위협들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이 굴복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이 시대의 위협들을 인간으로서 자유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용감하게 마주해야 할 기회로 바라보는 것입니다.(7쪽)” 인류에 대한 저자의 특별한 사랑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두려움이나 절망의 종류는 많습니다. 육친 특히 자녀의 죽음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까마득하게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그런 아픔을 어떻게 건널 수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만, 저자는 그런 절망도 당당하게 마주하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저자 자신이 두 아들의 죽음을 감당하면서 체득한 것이기에 실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상실을 겪은 뒤에 종교에서 위안을 받으려 하는 것을 봅니다만, 저자는 그의 죽음이 신의 계획의 일부라는 믿음으로 상실의 아픔을 피하려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사랑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작은 아들이 백혈병으로 죽은 뒤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자의 독특한 경력이 이런 삶의 철학으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를 졸업한 다음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베트남전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전쟁의 불합리한 면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 세대에 일어난 베트남 전쟁은 대중에게서 외면받았고 그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은 엄청나게 값비싼 국가적 실수를 상기시켜주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상대와 전쟁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120쪽)”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그는 9.11사태에 이은 아프카니스탄과 이란에서의 전쟁을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유머가 슬픔을 극복하는 가장 강력한 처방이라고 믿는답니다. 그래서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전쟁터에서도 ‘전쟁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라는 유머를 볼 수 있고, 미국인이라면 언급조차 피하지 않을까 싶은 9.11에 관한 유머도 있다고 합니다. 쌍둥이빌딩 구조에 나섰던 소방관이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하자 그 아내가 ‘이야기 끝나려면 아직 멀었어요?’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자주 이야기한다는 유머를 새겨보시겠습니까? “친구들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면 그들이 우리의 장례식에 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127쪽)”

 

이 책을 읽은 독자는 아마도 두려움에 마주하는 용기를 배우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용기는 타고나는 재주가 아니라 배울 수 있는 덕목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신과 의사로서 나는 환자들에게 희망을 처방합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기본적인 믿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어떤 부분에서 행복하고 어떤 부분에서 불행하다고 느끼는지 확인하여 변화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합니다.(170쪽)” 리빙스턴박사가 처방하는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받아보시면 힘든 삶을 헤쳐나가는데 도움이 되실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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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책을 읽는가 -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독서를 위하여
샤를 단치 지음, 임명주 옮김 / 이루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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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올 봄에 있었던 부서 워크숍에서 “책은 왜 읽는가”라는 제목으로 책을 왜 읽는지, 어떻게 읽는지 등에 관한 저의 경험을 설명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3094946). 발표를 준비할 기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저의 독서경험 중심으로 진행하다보니 깊이가 없고 너무 제 자랑만 늘어놓은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혹시 이런 기회가 생겼을 때 더 나은 발표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독서에 관한 좋은 책을 찾아 읽고 있기도 합니다.

 

프랑스 작가 샤를 린치의 <왜 책을 읽는가>를 읽게 된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느낌은, ‘독서는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위험한 능력이다’, ‘독서는 우리를 위로하지 않는다’, ‘독서는 뇌리에 새기는 문신이다’, 등등의 제목에서 보는 것처럼, “독서는 □□다”라는 질문에 대하여 다양한 답을 내놓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독서를 정의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책은 독자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증오의 거품을 무는 천박한 독서’ 등과 같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독서에 관하여 전방위적 정의를 내리고 있기도 합니다. “책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책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독자를 위해 만든 책은 독자를 소비자로 간주하고 무언가 의도를 품는다. (…) 문제는 책이 도구로 전락하면서 질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30쪽)”라는 구절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사실 이 구절은 ‘만들어진다’가 아니라 ‘만들어져야 한다’로 적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독자들이 작가보다 순수하지 못하다는 작가의 일갈에 뜨끔했습니다. 작가가 지적한대로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편견을 굳히려는 생각에서 하는 이기적 독서를 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혐오스러운 독서에 대한 씁쓸한 추억도 있다는 저자의 지적도 틀림없이 맞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책을 읽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년기에 광적으로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은 필경 작가가 될 운명이다. 만일 그 꿈이 실현되지 dskgdkT다면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 위대한 독자가 작가의 꿈을 접은 것이다.(217쪽)‘라고 적은 구절에서는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광적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책을 가까이 했던 것, 그리고 읽은 책에 대한 느낌을 기록하던 버릇이 지금 작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글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별로 느끼지 않게 만든 것 같습니다. 언젠가 글쓰기교실에서 만난 김용택시인님께서 많은 독서와 글쓰기가 시인에 이르게 만들더라면서 재능보다는 후천적 노력이 작가가 되는 길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14013).

 

옮긴이께서는 “저자는 ‘왜 책을 읽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서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독서는 그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가 위대한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독서가 우리를 구출해줄 구세주’가 될 자격을 갖추었는지도 모른다.(263쪽)”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책읽기는 역시 위대한 노력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널리즘과 문학 사이의 줄타기에 대한 글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9.11사건 당시 저널리즘이 보여준 행보가 커다란 불행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논지는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입니다. 테러소식에 즐거워하는 팔레스타인사람들의 모습이나 불길을 피해서 창밖으로 뛰어내리거나 추락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방송하지 못하도록 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 작가답게 마르셀 프루스트를 곳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점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의 할머니가 세비네 부인과 도스토엡스키의 닮은 점을 밝혀낸 점이라거나, 노르푸아를 통해서 ‘빅토리아-니안자 호수의 서안에서 무한성과 관련된 작품’에 관한 말을 했다는 점은 라비슈의 영향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등등입니다.

 

또 한 가지, 작가가 적성에 맞지 않는 자신의 법대 시절을 회고하면서, “법대는 내게 최고의 학과였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수 있었으므로.”라고 했다는 말을 읽고, 오르한 파묵이 <소설과 소설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5937>에서 차별화 의식을 설명하면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자랑스럽게 꺼내들어 읽었다는 이스탄블 공과대학의 신입생 이야기를 예로 들었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을 때는 그런 느낌이 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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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와 기호들 들뢰즈의 창 4
질 들뢰즈 지음, 서동욱.이충민 옮김 / 민음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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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6월 초순 ‘스완네집 쪽으로’편을 읽기 시작해서 10월 중순 ‘되찾은 시간’편까지 한 여름의 더위와 더불어 자신의 인내심과 겨뤄본다는 느낌으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대했던 것 같습니다. 출발은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02521>였습니다. 그가 “머나먼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이 죽고 사물들이 부서지고 흩어진 후에도 맛과 냄새만이, 연약하지만 끈질기게, 실체가 없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충실하게, 오랫동안 남아 떠돈다.(조나 레러 지음,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148쪽)”는 부분을 인용하고, 미각과 후각이 인간의 기억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끌렸던 것입니다. 오감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얻은 자극이 잊고 지내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경우는 없으신가요? 제 경우는 프랑스의 기타리스트인 클로드 키아리(Claude Ciari)가 연주하는 <안나를 위한 노래(Song for Anna)>를 들을 때마다 대학 시절 친구를 생각합니다. 물론 그 친구도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첫째 편, ‘스완네집 쪽으로’에서 등장했던 기억을 되살리는 촉매제 프티트 마들렌을 마지막 편 ‘되찾은 시간’에서 다시 인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들렌을 맛보던 순간에 그랬듯이, 미래에 대한 온갖 불안, 온 지적인 의혹이 운산무소(雲散霧消)되었다. 아까 나의 문학적 재능의 실재와 문학 자체의 실재에 대해 나를 괴롭히던 의혹은 마법에 걸린 듯 없어지고 말았다.(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되찾은 시간, 250쪽)”고 적어 프루스트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써야겠다는 강한 동기를 얻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념, 우리의 생활,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서서히 기억에 의하여 보존된 일련의 부정확한 인상의 사슬인바, 거기엔 우리가 실제로 겪은 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른바 ‘체험’의 예술이란, 이와 같은 허위를 재현시킬 뿐이다.(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되찾은 시간, 289쪽)”라고 적어 기억이 더 멀어져 가고 불확실해지기 전에 기억의 실재를 재발견, 재파악하여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잠시 리뷰 읽기를 멈추고 시계바늘을 옛날로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건의 전체 내용을 상세하게 기억하실 수 있으신가요? 그래서 평소에 겪은 일들을 메모해두거나 소상하게 기록하는 습관을 들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다시 저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북소리]에서도 소개드렸던 알랭 드 보통이 쓴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86857>을 읽으면서입니다. 자기계발서로 분류되고 있는 이 책에서 보통은 프루스트의 작품과 편지 그리고 대화 등을 통하여 우리가 삶을 현명하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방법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보통은 “어떻게 하면 시간낭비를 중지하고 음미할 수 있는 삶을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알랭 드 보통 지음,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15쪽)”라고 요약하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대로 읽는 방법을 더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448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국일미디어판을 다 읽고 난 뒤에 새롭게 번역한 민음사판을 읽을 기회가 생긴 것도 계기가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열 갈래 길’이라는 부제가 달린 유예진교수님의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11784>을 통해서 당시 프루스트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작가들의 작품과 작품세계를 이해함으로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새로운 시각에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 <프루스트의 화가들>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질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같은 맥락에서 읽게 된 책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이자 작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초부터 철학, 문학, 영화, 예술 분야에서 영향력있는 저작들을 썼다고 합니다. 들뢰즈에게서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흄, 칸트, 니체 등을 재해석하는 철학사가로서의 모습과 감각, 사건, 정신분열, 영화, 철학 등과 같은 다방면의 개념들에 대하여 철학적 해석을 하는 생성의 철학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두 가지 모습이 들뢰즈의 ‘실체’와 ‘양태’로 서로 어긋남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철학적 분석과 해석의 시각으로 읽어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의 1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타나는 기호들의 방출과 해석에 관한 것을, (…) 2부에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하는 측면에서 기호들 자체의 생산과 증식을 다루고 있다.”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옮긴이들은 역자서문에서 ‘들뢰즈의 프루스트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내놓고, 먼저 들뢰즈의 대표적 작업을 생의 전반기에 집중했던 사유의 문제와 생의 후반기에 집중했던 욕망의 문제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루스트와 기호들>을 통하여 임의적 사유의 공리로부터 출발한 그리스시대 이래의 서양철학과는 다른 방식의 사유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음과 같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구절을 인용한 들뢰즈는 (서양의) 철학자들은 개념을 창안하고 개념을 사유하는 반면, 동방의 현자 - 즉, 유대출신의 프루스트는 아마도 형상(figure)을 통하여 사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포크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나 마들렌의 맛 같은 것 속에 감싸여 있는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들’ 혹은 내가 머리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쓰던 형상들의 도움으로 씌어진 진리들이다. 내 머리 속에서는 종탑, 무성한 잡초 등의 형상이, 복잡하게 잔뜩 엉킨 판독할 수 없는 글씨를 조판하고 있었다(…)(되찾은 시간, III, 878-880)”[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텍스트는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이아드판(1954년, 전3권)이라서 국내에 번역 소개된 텍스트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들뢰즈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의 본질은 마들렌과자나 포석(鋪石)을 매개로 하여 콩브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마들렌과자나 어머니와 함께 갔던 베니스의 생 마르탱 성당의 추억을 떠올리는 기억의 탐색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즉 무의식적 기억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작가가 배움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과거지향적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와 관련되기 마련인데, 프루스트는 살롱으로 대표되는 사교계를 중심으로 문학, 음악, 미술 등과 같은 예술적 기호들 뿐 아니라, 외교, 정치, 사회, 전술, 의학 등 다양한 사회학적 기호들을 이끌어 촘촘히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목이기도 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작업은 진리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오데트와 스완, 그리고 화자와 알베르틴과의 사랑이야기는 단순히 쾌락과 질투와 같은 고통스러운 면 이외에도 그 안에서 사랑의 기쁨이라는 참된 진실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상황에서 드러나는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고, 해독하고, 번역하고 그리고 설명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이 ‘진실 찾기’인데, 이 과정은 기호 자체의 전개와 뒤섞이기 때문에 시간이 관계되며, 진실은 시간의 진실이 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은 존재를 변화시키고, 존재했던 것들을 없애버리는, 지나가는 시간일 뿐 아니라 우리가 낭비하는 잃어버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는 의미는 잃어버린 시간이 영원성을 갖도록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헛되어 보냈다고 생각하는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곧 배움의 본질입니다.

 

들뢰즈는 기호가 사유를 강요한다고 보았습니다. “감각적 기호는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것은 기억력을 동원하고 영혼을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영혼이 사유를 움직이게 하고 사유에다 감성이 당하는 압박을 전해준다. 그리고는 마치 본질이 사유되어야 하는 유일한 것인 듯이 사유에게 본질에 대해 사유하도록 강요한다. 이때 능력들은 초재적인 실행을 하게 된다. 이 실행 속에서 각각의 능력(기호를 포착하는 감성, 기호를 해석하는 영혼과 기억력, 본질에 대해 생각하도록 강요된 사유)은 자신의 고유한 한계에 직면하고 거기에 도달한다.(151쪽)”고 설명하였습니다.

 

2부에서 만나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의 구성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서야 깨닫게 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통일성입니다.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부분 간의 부조화, 불균형, 조각남으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통일성의 개념을 창조하고 있다고 읽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스완네집 쪽으로’에서 설명하고 있는 산책길의 두 방향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시간상의 이유 때문에 한 번의 오후에 한쪽 길밖에 이용할 수 없는 제한점을 가지고 있어 두 길이 서로 만날 수 없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두 개의 산책길은 프루스트가 탐구해온 부르주아 계급과 귀족 계급의 방향을 상징하는 기호라고 할 수 있는데, 메제글리즈 쪽 사람인 질베르트(스완의 딸)과 게르망 쪽 사람인 생 루(게르망트공작의 조카)가 결혼하여 딸 생루를 낳는 것으로 합쳐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구분되어 있는 공간들은 시간이라고 하는 횡단선으로 연결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스토리를 세 개의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영역은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과 본질들로 정의됩니다. 가장 특정한 것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추억과 본질들에] 해당하는 시간인 되찾은 시간의 생산에 의해, 생산 조건과 생산자(자연적 기호들과 예술적 기호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영역은 예술 및 예술 작품에 관여하는데, 불완전한 두 번째 영역이 다른 것에 의존하는 즐거움과 고통이 들어있습니다. 그 다른 것은 사교계의 기호 혹은 사랑의 기호로서 잃어버린 시간의 생산에 개입하는 모든 것입니다. 세 번째 영역은 역시 언제나 예술에 간여하는데 <보편적인> 변질, 죽음과 죽음의 관념, 대재앙의 생산(노쇠, 병, 죽음의 기호들)을 통해 정의된다고 합니다. 모든 문제는 이 세 영역의 본성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프루스트는 사교계의 가치들을 사교계에서 얻을 수 있는 보잘것없는 즐거움과 한 종류로 묶고, 사랑의 가치들을 사랑으로 인한 고통과 종류로 묶으며, 잠의 가치들조차 수면 중의 꿈들과 한 종류로 묶어 버린다. 소설의 주인공은 <천직>이 문인(文人)이기에 이 모든 가치들을 통해서 어떤 <배움>을 얻는다.(235쪽)”라고 보았습니다. 세 가지 영역을 연결하는 것은 <부분적 대상들의 기계(충동)>, <공명기계(에로스)>, <강요된 운동의 기계(죽음)>의 세 가지 기계로 각각의 진리를 생산한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은 부분적 대상들의 분할을 통해서, 되찾은 시간은 공명을 통해서 생산된다. 또한 잃어버린 시간은 이와는 다른 방법, 즉 강요된 운동의 폭을 통해서 생산된다. 이때 이 상실, 이 잃어버리는 일은 바로 다름 아닌 작품이 되며, 또 작품이 형태를 갖추기 위한 조건이 된다.(249쪽)”

 

어느 독자는 김용규님의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를 읽고 ‘꿈(문학)보다 해몽(철학, 해석)이 더 재미있다’고 적었습니다만, 들뢰즈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해석은 재미보다는 날카롭다는 느낌을 남기는 책읽기였습니다. 쉽지는 않습니다만, 들뢰즈의 철학적 분석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을 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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